Jean-Michel Basquiat (1960-1988)
Bad Painting은 1970년대 말 미국에서 등장해서 1980년대에 미술시장에 쏟아져 들어온 화풍이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로는 장-미셸 바스끼아Jean-Michel Basquiat, 닐 제니Neil Jenney, 케니 슈어프Kenny Scharf, 줄리앙 슈나벨Julian Schnabel, 말콤 몰리Malcolm Morley, 데이빗 셀David Salle, 조나단 보로프스키Jonathan Borofsky 그리고 도날드 설튼Donald Sultan 등이 있다.
그들은 사회의 변두리와 팝 문화에서 영감을 끌어냈으며 작품 속에서 다양한 재료를 거리낌 없이 사용하는 한편 터무니 없이 두터운 물감과 부조화를 이루는 색채를 사용하는 고약한 취향을 자신들의 작품 속에서 당당히 드러냈다.
이렇게 회화에 있어서 표현주의로의 회귀선언은 당대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절제된 표현주의나 개념주의 예술의 정 반대편에 그들만의 영역 표시를 확실히 해두게 되었던 것이다. ‘Bad painting’이라는 용어는 1978년 닐 제니Neil Jenney의 전시회 홍보에서 처음 사용되었다.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는 미국 주류 화단 최초의 흑인 화가였다.
길거리 낙서를 주로 하던 그가 화단의 눈에 띄어 주목받는 신인으로 부상하게 된 것은 19세 때인 1981년이다.
이후 그는 80년대 미국 화단의 새로운 가능성이요,
웬디워홀의 절친한 친구로서 세인과 언론의 관심 속에 살다가
1988년 27세에 세상을 떠났다.
Acrylic and marker on football helmet 22.8x20.3x33 cm
'Lye', 1983, Acrylic and
1985 Acrylic and xerox collage(사진꼴라쥬) on wood box 28x21.5x21.5 cm *1979년 가을 시각 예술 학교(School of Visual Arts)를 방문하던 중 바스키아는 동료화가이자 다운타운의 무대제작자- 키이스 해링(Keith Haring)과 케니 샤프(Kenny Scharf)를 만났다. 바스키아와 해링은 평생 비정상적인 우정을 나누었지만 바스키아는 해링 작품의 다듬어지지 않은 낙서적 성격에 감탄하였고, 자신과는 다르게 해링이 낙서문화의 진정한 한 부분을 차지한다고 생각했다.
1981년 2월 바스키아는 디에고 코테즈가 기획, 롱 아일랜드 시티에 있는 예술 및 도시자원 연구소(Institute for Art and Urban Resources)의 P.S.1, 대형 갤러리 공간에서 열린 '뉴욕/뉴 웨이브(New York/New Wave)展'에 포함되었다. 이 전시회는 20명 이상의 미술가로 구성되었다. 바스키아는 한 벽면에 설치한 20여점의 드로잉과 회화작품으로 이 전시에서 부각되었다. 이 작품들을 에밀리오 마졸리(Emilio Mazzoli), 브루노 비숍버거(Bruno Bishofberger), 애니나 노제이(Annina Nosei)와 같은 화 상들의 주목을 끌었다. P.S.1 전시가 끝나자마자 해링은 바스키아를 코함하는 70여명의 화가를 선정, 머드 클럽에서 '로워 맨하탄 드로잉 전시회(Lower Manhattan Drawing Show)'를 기획하였다.
바스키아에 대한 최초의 긴 논평은 1981년 12월호 아트포름(Artforum)지에 실린 르네 리카르(Ren Ricard)의 글이었다. 그는 바스키아에 대해 '같은 주제(낙서)에서 비롯하는 톰블리의 우아함이 있으며 젊은 뒤뷔페의 느낌 또한 있다.'고 적었다. 만났다. 둘은 뗄 수 없는 친구 사이가 되어, 바스키아의 많은 친구들과 동료 미술가에게는 흥미있는 주제가 아닌 아프리카 사상과 아프리카인의 이주에 대해 미술가로서의 관심을 함께 나누었다. 4월 바스키아는 가고시언과 애니나 노제이가 함께 준비한 래리 가고시언 화랑(Larry Gagosian Gallery) 개인전을 위해 로스 앤젤레스로 갔다. 그는 헐리우드의 샤토 마몽 호텔과 친구 집에서 6개월간을 머물렀다. 9월에는 취리히의 브루노 비숍버거 화랑에서의 첫번째 개인전을 가졌으며 비숍버거는 그의 독점 화상이 되었다. 이 전시회에는 가장자리의 가로대가 노출된 작품이 최초로 전시되었다. 이 무렵 바스키아는 '해부학(Anatomy)'라는 제목의 최초의 판화집을 완성, 애니나 노제이 화랑에서 발간하였다.(그러나 1982년 봄, 바스키아와 노제이는 개인적 차이로 인해 결별하게 된다. 8월 15일 바스키아는 그레이트 존스 스트리트 57번지로 이사했다. 바스키아는 인터뷰 지의 편집자이자 그의 열광적인 팬인 페이지 파웰(Paige Powell)과 데이트를 시작하였다. 파웰을 통해 바스키아는 앤디 워홀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둘은 함께 운동하였으며 서로의 초상화를 그렸고 미술행사에 함께 참여하였으며, 바스키아의 가족경험뿐 아니라 인생과 미술에 대한 철학을 정기적으로 토론했다. 9월 최리히의 비숍버거 화랑에서 두번째 전시회를 가졌다. 10월에 바스키아와 워홀은 뉴욕에서 밀라노로 함께 여행하였다. 바스키아는 마드리드와 취리히에서 시간을 보냈을 뿐 아니라 아키라 이케다 화랑(Akira Ikeda Gallery)에서 계획된 11월 전시회에 참석하기 위해 브루노 비숍버거와 도쿄에서 일주일간 머물렀다. 비숍버거의 노력어린 커미션을 받아 그와 워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는 뉴욕에서 공동으로 작품을 제작하였다. 바스키아와 워홀은 독자적으로 공동 작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1960년 12월 22일 미국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버지 제라르 바스키아와 어머니 마틸드 안드라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1974년 푸에르토리코로 이사하였고, 1978년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릴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고 영재들을 위한 시티애즈스쿨(City-as-School)에서낙서화가 알 디아즈(Al Diaz)를 만나 낙서그룹 SAMO(Same Old Shit의 약자) 를 조직하고스프레이 낙서를 시작하였다. 그 후 뉴욕현대미술관 앞에서 엽서와 티셔츠 위에 그림을 그려 팔면서 자신의 회화세계를 구축하였다. (展)>에서 20여 명의 미술가에 포함되었다. 같은해 5월 유럽을 처음으로 여행하고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열린 국제전시〈도큐멘타 7전(展)〉에 최연소의 나이로 초청받았으며11월에는 펀(Fun)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같은 해 앤디 워홀, 프란체스코 클레멘테와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1988년 8월12일 뉴욕에서 코카인 중독으로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본능이 번뜩이는 충격적이고도 충동적인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 계열의 천재적인 자유구상화가로서 지하철과 거리의 지저분한 낙서를 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네이버 백과사전 발췌>
‘무제’(1982, 나무에 아크릴과 유채, 타르와 깃털) ⓒ2006 Estate of Jean-Michel BasquiatUsed with permission
미국의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1960~88)는 요절로 인해 신화화된 작가다. 그러나 바스키아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그가 그래피티를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작가라는 점이다.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는 스프레이로 그려진 낙서 같은 문자나 그림을 뜻하는 말로 서구에서는 거리예술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1960년대만 해도 세계 문화의 첨단을 걷는 뉴욕에서도 그래피티는 낯선 것이었다. 반항적인 10대와 흑인 등이 스프레이를 이용해 벽면에 강렬하면서도 즉흥적이고 장난스러운 도안 같은 문자와 그림들을 그렸다. 바스키아 역시 10대 후반 세이모(SAMO)라는 이름으로 그 대열에 참여했다. 그는 맨해튼 도심의 건물 벽면과 지하철에 스프레이 물감으로 그림을 그리고 때론 철학적이고 기지 넘치는 경구와 선언을 벽에 써내려갔다.
10대 후반 작가의 길에 들어선 뒤 불꽃처럼 살다 스러진 바스키아의 작품이 우리나라에 왔다. 서울 사간동 국제갤러리 전시실을 가득 채운 바스키아의 작품은 50호 이상의 대형 작품들이 많다.
바스키아의 그림은 언뜻 보기엔 천진난만한 어린이의 낙서 같다.
표현법은 낙서에 기초하고 있지만 알고 보면 꽤 정치적이다. 온갖 단어와 문구, 기호가 어우러진 그림은 해독하기 힘든 암호문 같다. 캔버스 위에 묘사된 길거리 문화와 만화 캐릭터, 인물은 특히 백인 중심의 미국 사회에서 흑인의 지위와 관련된 것들이 많다. 바스키아는 재즈 음악가 찰리 파커, 야구선수 헹크 아론 등을 영웅으로 존경해 이들의 업적, 생활 등을 기호와 단어, 이미지를 사용해 작품에 표현했다.
표현 방법 역시 혁신적이었다. 1층에 설치된 ‘칸타소(Cantass)’는 정형화된 캔버스가 아니라 나무 막대와 경첩으로 연결한 틀 위에 캔버스를 붙여 제작한 작품이며, 찢어진 종이를 겹쳐 구김이 가게 붙여 그 위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바니 힐의 아들의 인생처럼’은 6개의 캔버스를 연결한 작품으로 공통점을 찾기 힘든 이미지와 단어들이 화면에 가득하다. 자신이 좋아했던 만화주인공 ‘슈퍼맨’을 뜻하는 붉은 색으로 써내려간 S자, 만화책 광고에서 따온 문구 ‘스킨 헤드 가발(Skin Head Wig)’, 백인의 얼굴임이 명백한 5센트짜리 동전의 스케치 등이 조합된 이 작품은 장난기 넘치고 자유분방하지만 실은 미국 사회내에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여전함을 지적하고 있다.
유머와 비판이 공존하는 바스키아의 회화는 “사이 톰블리의 우아함과 장 뒤뷔페의 야성이 모두 갖춰져 있다”고 평가받을 정도였다.
세계적인 현대미술제인 독일 카셀 도큐멘타(1982)와 미국 휘트니 비엔날레(1983)에 최연소 작가로 초청받던 바스키아는 마약중독으로 자신이 흠모하던 제니스 조플린, 지미 헨드릭스처럼 28세에 요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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