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삶의등대▲

느림예찬

영원한 울트라 2011. 9. 22. 17:55

행복으로 가는 작은 오솔길,

생태적 자각(自覺)과 귀농(歸農)이야기


이정호(인드라망 운영위원, 불교생협연합회 운영위원장)




1. 들어가기


어느 조용한 어촌 마을의 아침, 햇볕이 내리쬐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한 노인이 단잠을 자고 있었다. 한 관광객이 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노인이 너무나 인상적이어서 이 젊은이는 사진을 찰칵, 찰칵 찍어댔다. 그 소리에 노인이 잠을 깨고 말았다.


"그 뉘시오?"

"아이쿠, 죄송합니다. 할아버지 모습이 너무나 보기 좋아서 그만..., 죄송합니다."

"........"

"그런데 할아버지는 왜 고기를 잡으러 나가지 않으세요? 벌써 해가 저만치..."

"이미 새벽에 다녀왔구먼."

"아, 그러세요?... 그러면 또 한번 더 다녀오셔도 되겠네요?"

"그렇게 고기를 많이 잡아서 뭐하게?"

"...참, 할아버지두. 그러면 저 낡은 거룻배를 새 걸로 바꾸실 수 있잖아요?"

"그래, 가지고선?"

"그 다음에는 새 거룻배로 고기를 잡으시면 훨씬 빨리, 한결 많이..."

"음... 그 다음에는?"

"크고 좋은 배를 더 사시고, 사람도 부리고... 그러면 뭉칫돈을 벌지 않겠어요?"

"옳거니, 그래서는?"

"그 다음에야... 이 마을에 생선 가공 공장도 세워, 싱싱한 통조림도..."

"흠... 그리고 나서는?"

"그때는 별 일도 않고 가만히 누워 그저 편안히 지내실 수 있지요."


이 말에 고기잡이 노인은 대답했다.

"지금 내가 바로 그렇게 지내고 있네."

"......."


고려대 강수돌 교수《작은 풍요》에서 재인용, 하인리히 뵐 "느림 예찬" 


인간은 오랜 동안 행복을 추구하여왔다. 행복한 생활은 현재도 대부분 사람들에게소중한 목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생활에서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수많은 경쟁과 갈등으로 크고 작은 고통을 맞고 있는 것이 세상살이지 싶다. 나아가 최근에는 경쟁과 갈등이 개인의 고통에서 그치지 않고, 인간의 생존환경조차도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세상살이를 여러 학문적, 실천적 흐름으로 다루어가고 있다. 지금까지 여러 학문과 실천은 대부분 인간의 행복을 물질적 소유여부를 중심으로 이해하여 왔다. 여기서의 전제는 인간의 욕구는 ‘선(善)’이고 이를 채우기 위해 물질적 재화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는 둘 다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자본을 위주로 한 상품공급체계를 지향했다면 사회주의는 인간을 위주로 한 상품공급체계를 지향했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경쟁은 ‘생산력향상’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생태계교란위기, 식량위기, 에너지위기라는 새로운 고민 앞에 서야 했다.

이 고민은 의문을 낳았다.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이 욕구를 선으로 보는 것에서 출발해도 되는 것인가?’ 이것은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이 인류의 끊임없는 욕구앞에서 지탱가능한가?라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이것은 인류에게 있어 매우 강력한 의문이 되고 있다. 이제 인류의 행복을 위해서도 인간의 욕구 그 중에서도 물질적 욕구는 무한대로 자극되어서는 ‘유한한 지구’가 버텨낼까?라는 회의가 생겨난 것이다.

이와 같은 21세기의 의문과 회의, 즉 인류의 총체적 생명위기에 대한 강력한 의문은 지난 1991년 브라질의 리우회의1) 이후 인류의 공식적인 고민이 되었다.

21세기를 살고 있는 인류에게는 이러한 새로운 21세기의 과제만을 앞에 두고 있지 않다. 여전히 20세기의 못다 푼 문제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인간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 혹은 자연물에 대하여 경쟁의 방법론으로 문제를 다루어가야 하는가?라는 의문이다.

그동안 인류가 고안한 경제와 정치를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론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류나 혹은 ‘계급갈등’류의 것들이었다.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근간을 형성하였다.

이를 철학적으로 뒷받침한 것이 자연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사회에 그대로 투영하는 세계관이었다. 이는 자연계에서는 화합과 상생의 현상보다는 ‘대립과 투쟁의 현상이 더욱 지배적이다’는, 근대과학의 세계관이 그대로 사회에 투영되어 나타나게 된 결과였다.

그러나 현대세계가 배태한 ‘총체적 생명위기’ 현상은 질적으로 전혀 다른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이제 인류의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해서라도 세상을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연물과 사회는 대립과 갈등의 방법론으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관계성과 상생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버릇이 필요하다는 문제제기가 서서히 공론의 장으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 하고자하는 생태생명운동2)은 단순히 죽어가는 산을 살리고, 강을 살리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가 아니다. 인류의 새로운 문명을 형성하자는 차원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이를 위해 세상을 지금까지 보아왔던 대립과 투쟁의 세계관에서 관계성과 균형의 세계관으로 바꾸어가자는 새로운 깨달음운동, 대안문명운동으로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이 중에서 특히 이 글은 새로운 문명(文明)을 향한 작은 오솔길을 제안하고자 한다. 오솔길은 그야말로 작은 길이며, 목적지로 향해 가는 수많은 길 중에 하나이다. 

필자는 불교사상에 근거하여 ‘귀농운동과 지역공동체운동’을 풀어나가는 사람이다. 이 글을 통해 산업화, 도시화가 유일한 ‘삶의 방향’임을 역설하는 사회에서, 저의 이야기를 작은 산책길을 걷는 기분으로 살펴주었으면 한다. 


2. 행복을 향한 두 가지 계획에 대한 비판적 검토


1) 물질적 생산을 통한 행복추구의 길


(1)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통한 생산경쟁

나는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이 말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적어도 지난 150여년 동안 우리를 포함한 대부분의 인류가 이 말에 동의했다. 실제로 지난 150여년 동안 인류는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대단한 실험을 하였다.

현대사회는 소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체제를 통해 경쟁했다. 순전히 이 체제 경쟁은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경쟁이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이러한 경쟁은 꾸준히 있었다. 그러나 유독 지난 150년간의 경쟁은 치열했다. 자본주의는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인간의 ‘합리적 이기심’에 기대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사회주의는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인간의 ‘합리적 연대’에 기대야 한다고 했다.

이 결과로 인류의 ‘생산력’은 높아졌다. 인류는 풍요로운 ‘물질적 부’를 이미 획득하게 되었다. 이러한 ‘물질적 부’가 행복의 원천임을 믿었다. 그리고 이제 인류는 이 물질적 부를 손에 거머쥐고 있다. 그래서 인류는 행복한가? 아니 적어도 100배의 물질적 부를 갖게 되면 100배의 행복을 더 느끼게 되었는가?

현대학문인 경제학에서는 행복을 재화(물질적 부)를 통해 욕구(욕망)을 풀어주면 충족될 수 있는 것으로 믿는다. 그래서 ‘행복 = 재화/욕구’라고 표현한다. 행복을 크게 하기 위해서는 분자인 재화를 크게 늘려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욕구는 항상 커지게 마련이기에 물질적 생산이 반드시 더욱더 커져야 행복을 늘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믿음으로 현대사회(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공통으로)는 최대한의 능력을 발휘해서 물질적 재화를 생산했다. 그러나 현대인류는 물질적 재화공급을 훨씬 초월하여 욕구를 늘려왔다. 먹고살기 힘든 시기의 우리의 욕구는 ‘먹고 사는’ 문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된 시대에는 ‘좋은 차, 좋은 집, 좋은 음식, 좋은 옷, 좋은 신발 등등’으로 욕구가 확장되었다. 물질적 재화를 높게 하여 인간의 행복을 높이고자 한 첫 번째 계획은 이렇게 ‘유보’되게 되었다. 


(2) 시장과 국가를 통한 분배경쟁

인류의 생산력은 급속하게 늘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모든 인간들의 행복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새로운 문제의 원인을 찾아야 했다.

문제는 그것에 대한 정의로운 분배여부에 있다고 믿었다. 자본주의는 이를 시장을 통해 해결하고자 하였다. 사람들에게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서 분배의 과정에 참여할 것을 주문했다. 사회주의는 국가의 계획에 따른 생산적 동참을 조건으로 분배의 과정에 참여시켰다.

인간은 분명히 물질생산이 높아지면, 행복도 높아질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그것의 이유가 욕구의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했기에 생산물에 대한 ‘분배’의 문제에 관심을 가졌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소위 ‘계획경제’와 ‘복지국가모델’이었다.

이 결과로 시장은 경쟁에서 소외되는 사람들을 낳았고, 국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창조적인 동참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 정의로운 분배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되었던 이러한 모델들도 다시 한번 흔들렸다.

복지국가모델의 경우 7-80년대를 거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유럽사회의 복지국가 모델은 70년대의 석유위기와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복지정책의 축소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의 ‘국가계획경제’ 시스템은 90년대를 거치면서 급격하게 무너졌다. ‘정의로운 분배’를 통한 행복추구의 길도 여전히 지속적이지 못했다.


2) 물질적 생산의 증가와 불안한 행복


(1) 늘어난 물질적 부와 더욱 더 늘어난 인간의 물질적 욕구

인류는 생산과정에서 이미 모든 인류가 먹을 만큼의 생산량을 달성했다. 역사는 그 과정을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대결과 혹은 협력과정을 통해 인류 전체가 달성한 것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물질생산의 증가가 곧바로 ‘행복’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여전히 지금도 지구상의 어떤 곳은 ‘절대적인 식량’과 ‘적절한 의료체계’가 없어서 죽어가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한편에서는 매년 수조원의 음식쓰레기가 버려지는 나라가 있으며, 선진국에서는 다이어트 열풍이 사회적 병리현상이 되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위해 시작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간의 경쟁은 ‘물질생산’의 증가는 가져왔으나, ‘행복한 삶’을 선사하지는 못했다. 그야말로 반밖에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경제학에 있어서 행복의 방정식의 세요소중의 하나를 검토해야 할 때이다. 남은 것은 욕구이다.  

현대사회는 자본을 늘려왔고, 기술개발을 통한 생산력을 증가시켰다. 그러한 결과에 따라 물질적 재화의 공급을 급격히 늘려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 비해 인간의 욕구는 한층 증가했다. 인간의 욕구는 ‘생존의 필요’를 넘어서서, ‘생활의 풍요’를 추구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소비는 미덕’이라는 것으로 나아갔다.

행복하기 위해 시작된 물질적 부에 대한 추구가 인간의 확장된 욕구에 의해 커가는 것이 중단되었다. 분자가 조금 늘어난다고 해서 분모인 욕구가 그것보다 빠르게 증가하면 행복의 크기는 증가하지 않는다. 물질적 재화를 통한 인류의 행복실험이 위기에 봉착했다.

생산의 영역에서 물질적 재화를 늘려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던 실험이 인간 욕구의 무한팽창으로 한번 꺽였던 것과 같이 정의로운 분배를 통해 인간의 행복을 추구했던 흐름도 현대사회는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인간의 욕구는 무한대로 늘어나지만, 이제 서서히 ‘지구는 한계가 있다!’라는 강력한 사실이 우리 눈앞에 다가와 있는 것이다.


(2) ‘미래의 불안’에 저당 잡힌 현재의 행복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의지는 중요하다. 그리고 소중하기까지 하다. 따라서 이를 추구하는 것을 탓하는 것은 옳지 않다.

현대사회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일정한 생존욕구를 해결하기 위해서, 어느 정도 행복을 유보하고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 근대사회의 수백년간 인류는 행복을 유보한 상태로 살아왔다. ‘절대적인 빈곤’을 넘어서는 것이 중요한 목표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생존욕구를 충당한 이후에도 여전히 인류는 행복을 느끼는 것을 유보하고 있다. 이것은 순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3)’이라는 요인이 현재의 행복을 저당 잡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정한 수준으로 욕구와 재화가 균형을 이루고 있다고 할지라도 어느 순간 경쟁에 뒤처지면 다시금 이 균형이 깨져야 하는 불안한 미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자본주의’나 ‘사회주의’나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분배를 ‘시장경쟁’에 맡기든지 혹은 복지국가모델에 맡기던지 마찬가지이다. 여전히 현재의 행복을 미래의 불안이 압도한다. 

이러한 불안함은 국내적으로는 각종의 계급계층간 갈등으로 표출되고 있다. 그리고 국외적으로는 국제적 남북국가간의 빈부갈등과 제3세계의 만연된 기아와 질병 등으로 여전히 불안한 상황이 유지되고 있다.

물질적 부를 ‘풍요롭게 생산하고’, ‘정의롭게 분배’하여 행복을 추구하고자 했던 길이 위기를 맡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새로운 문제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바로 행복을 결정하는 욕구의 성격 문제이다. 지금까지 인류는 ‘물질적 재화’를 갖고자 하는 것이 인류의 최대‘욕구’라고 보았으며, 이를 잘 해결하기 위해 ‘물질적 생산’을 잘 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만 행복이 증대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물질적 재화에 대한 욕구 이외에도 여러 가지 비물질적 재화에 대한 욕구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제 인류에게 있어서는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물질적 재화를 잘 배분하기 위한 지혜도 필요하며, 동시에 물질적 재화를 충족하여 행복을 추구하는 길이 아닌 또 다른 ‘인간의 욕구’를 찾아나서는 용기가 필요한 시기가 되었다.


3. 물질적 풍요와 맞바꾼 또 하나의 문제, 총체적 생명위기


1) 물질적 풍요가 만들어낸 또 다른 측면


최근 자연의 빠른 변화에 우리가 적잖이 당황해 한다. 이러한 당황한 기색은 ‘이상기후4)’, ‘생태계교란5)’등의 용어를 통해 잘 나타난다. 그러나 자연의 변화와 그리고 그러한 변화가 가지는 방향이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에 있어서 장기적으로도 단기적으로 피해가 없다면 그것은 좋은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자연속의 일부분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현재 벌어지고  있는 자연변화의 방향과 속도가 결코 장기적으로 인류에게 있어 긍정적으로 비쳐지지는 않고 있다. 그렇기에 두려움을 느낀다.

요즘 현대문명에 대한 또 다른 측면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걱정한다. 그 중에서 현대사회를 특징하는 대표적인 말들을 살펴보자. 생태계의 위기, 식량의 위기, 에너지의 위기가 가장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들이다. 이를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해 해석한다면 ‘총체적 생명위기’라고 표현할 수 있다.

생태계의 위기를 인간에게 적용해 보면, 총체적 삶의 환경이 위태롭다는 것이다. 식량의 위기라는 말은 먹을거리를 가지고 싸워야 할 상상을 유발한다. 그리고 에너지 위기라는 말은 ‘석유전쟁’이 만연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함과 같은 뜻이다.


2) 현대사회의 불안감, 총체적 생명위기


인간의 물질적 재화를 얻기 위해서는 자연물을 개발해야 했다. 그것의 결과가 생태계의 위기로 나타났다. 물질적 풍요와 편리함을 위해 대도시화와 공업화를 추진했고, 그것의 결과가 식량위기와 에너지위기를 초래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결과는 항상 우리 의도대로 움직이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몇 가지의 위기징후가 왜, 총체적 생명위기로 치닫게 되었는가? 살펴보도록 하겠다.

첫째, 생태계의 위기에 대하여 살펴보자.

현대사회는 물과 흙과 공기오염 등 자연환경의 위기를 넘어서, 이제는 물과 흙과 공기의 오염을 초래한 인류의 경제개발 중심적인 삶의 방식 전체가 위험한 상황에 처해있다는 표현인 것이다.

편리하고자 채택한 각종의 자동차와 공장의 기계들이 이산화탄소를 뿌려내고 있다. 그리고 이산화탄소는 다시금 ‘온실효과6)’의 주범이 되어, 지구온난화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인류에게 풍성한 먹을 거리와 편리한 생활을 위해 채택했던 과학기술들이 다시금 인간에게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다. 인간의 생존토양이 위험해 진다면 우리의 삶도 위험해 지는 것은 당연하다.

둘째, 식량위기 문제를 살펴보자.

식량의 문제는 이제 몇몇 아프리카나 북한 등의 국지적인 문제로 더 이상 머물지 않는다. 이미 90년대 중반을 넘기면서 세계 곡물시장에서 식량은 종종 절대량이 모자라는 시기가 연출되고 있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식량을 수출하는 나라였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에서 최대로 식량을 수입하는 국가7)가 되었다. 이는 중국이 추구한 공업화, 도시화를 위한 대규모의 인구이동(우리나라도 7-80년대에 그랬다)에 의해 초래된 것이다.

동남아의 여러국가들과 아메리카 지역의 광대한  식량생산지대도 점차 생산량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외에도 여러 가지 상황의 결과는 현재 '전세계적으로 1억 이상의 사람들이  굶어죽어가고 있으며, 인류의 거의 3분의 1인 15억명이 매일밤 허기진  상태에서 잠자리에 들고 있는  현실(제레미 리프킨<엔트로피>에서 재인용)을  연출하고 있다.

식량의 문제는 점점 더 구체적인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컴퓨터와 배와 엘시디 텔레비전보다 더욱더 중요한 것으로 ‘식량’이 전세계적으로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이제 에너지의 위기를 살펴보자.

현대문명의 주요 에너지원은 석유와 석탄 그리고 원자력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원이 지구상에는 석유의 경우 사람에 따라 차이는 있으나, 대략 3-50년의 시간을 한계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리고 석탄의 경우도 50여년 그리고 원자력의 경우라도 100년을 넘지 못하는 양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통계는 인류가 현재의 수준으로 에너지를 소비했을 때 나온 계산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이 세계의 모든 나라가 도시화, 공업화의 추세를 더해간다면 이 기간은 더욱 단축될 것이다.

이런 식의 자원고갈 가능성에 대하여는 많이 들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에너지 문제에 관련하여 이런 고갈 가능성의 문제뿐만 아니라, 점점 비싸지는 에너지가격 그로 인한 일상생활에서의 에너지 비용의 증대와 에너지를 쓰고 남은 쓰레기로 인한 각종의 오염문제 등을 더 한다면 그야말로 인류전체가 처한 중대한 생명위협 상황은 너무도 안타까운 심정이다.

현대사회에 새롭게 제기되는 문제는 하나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근현대 시기를 거치면서 풍성하고 잘 살자고 한 것에 대한 반응이라는 점이다. 원래는 우리에게 풍성한 물질적 부를 주었던 바로 그 원인이 다시금 우리에게 ‘새로운 위기’의 씨앗이 되고 있다.


4.‘불안한 행복’과‘생명위기’에 대한 불교적 진단과 대응방법


이제 우리는 ‘총체적 생명위기’를 항상적으로 안고 살아야 한다. 행복하게 살고자 한다면, 이 현상에 대하여 살펴야 한다. 현대문명에 대한 제대로 된 진단과 그것의 해결방법론을 찾는데 유용한 도구로 불교적 세계관이 주목받고 있다.

잠시 살펴보겠다.

현대문명에 대한 무엇이 연기적 세계관에 입각한 진단이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 진단인가?

첫째, 생태계의 위기 원인을 ‘인간이 자연을 지배대상으로 여기는 생활방식’에서 찾는 것이 연기적이고, 자연환경의 오염과 인간의 생활방식이 무관하다고 보는 것이 비연기적이다.

둘째, 식량위기의 문제를 ‘진정한 나의 아픔’으로 인식하는 것이 연기적이고, 식량을 통한 국제경쟁력 제고를 외치는 것은 비연기적이다.

셋째, 에너지 문제를 ‘자원고갈 가능성’을 열어놓고 접근하는 것이 연기적이고, ‘인간의 물질문명을 유지하는 지속가능한 도구’로 접근하는 것은 비연기적이다.

이제 가장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생명위기 현상이 이미 죽임의 연쇄고리를 형성하고 총체적으로 우리들 삶의 곳곳에서 건강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다.


1)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생존조건


(1)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종교적 지혜

지난 2002년 리우선언 10주년을 평가하는 세계대회가 진행되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회의는 산업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 정부기구나 비정부기구나 공유했다. 그러나 이제 지속가능성이라는 수식어에 붙는 명사는 정부기구와 비정부기구간에 새로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정부기구는 ‘개발’이고, 비정부기구들은 ‘생존’ 혹은 ‘사회’이다.

잠시 우리사회로 눈을 돌려보자. 우리나라는 어떠한가. 과연 지난 10여년동안 충분하게 이 ‘지속가능성’이라는 화두를 숙고, 성찰했을까?

지난 10여년의 기간동안 몇몇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지속가능성’에 대한 경고를 이 사회에 던져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고가 사회적 반향을 일으켜, 우리사회를 ‘지속가능한 사회’로 만들어 내지는 못한 것 같다.

여전히 정부기구는 ‘개발과 성장’을 외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지속가능한 생존의 기반인 농지(農地)가 투기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지역의 도시간의 고속도로로 산들은 구멍이 나고, 파헤쳐지고 있다. 새만금의 갯벌은 죽어가고 있으며, 천성산의 도롱뇽은 미래의 인간처럼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고에너지 소비사회’에서 날로 증가하는 에너지를 위해 산하의 어디엔가는 반드시 ‘핵발전쓰레기장’을 지어야 하는 처지로 내몰리고 있다.

앞에서도 살폈듯이 물질적 재화를 위한 근현대시기의 노력은 중요한 과정이었다. 왜냐하면 ‘절대적인 빈곤’의 선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이 우리나라와 같은 방법론을 택하고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현대문명’의 지속가능한 ‘생존’에 관한 화두를 들지 않는다면 모든 국가들은 편리함과 물질적 부를 향한 무한대의 경쟁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이미 생산력면에서는 인류의 모든 이들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양을 생산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국가간, 인종간 불균등한 배분으로 인해 지역적으로 굶주림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이러한 국가간, 인종간 불균등한 분배 형식이 그대로 이어질 경우, 조만간 식량과 에너지가 점점 더 중요한 국가간의 분쟁의 소재로 변해갈 가능성이 많은 것이 현재의 문제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종교인들의 역할은 ‘떠드는 사람, 혹은 경고하는 사람’임을 새삼스레 되새겨 본다. 역사 이래 종교의 역할이 그러했던 것 아니겠는가? 새로운 문명운동과 ‘새로운 행복찾기’를 위한 제안은 종교적, 탈세속적인 종교인들의 신념속에서 시작될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사회적 성찰을 위한 길은 고단하다. 특히 이를 먼저 떠들고 다녀야 하는 종교인들의 길은 더욱 고단할 수 밖에 없다. 이 길을 가는 신념의 근원이 지혜이고, 지속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것이 수행의 힘이지 않겠는가 싶다. 


(2)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한 최소조건

현대사회에서 ‘절대적인 식량’과 ‘에너지’를 지속가능하게 인류의 공통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몇 가지 주의할 요소가 있겠다.

먼저, 현대 산업사회에서 식량과 에너지 문제가 가지는 커다란 문제를 제대로 다루는 것이다.

식량에 관한 한 세계 농업의 현실을 보면, 점차 태양과 흙과 대기중의 공기를 통해 지탱되어진다고 믿어왔던 식량의 문제가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 점점 더 현대 농업, 어업 등에서 화석연료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의 주 원인은 자기행위에 대한  총체성을 생각지 않는 우리들 세계관에 문제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러한  전도된 세계관과 그에 입각한 생활방식을 고쳐나가는 힘은 다시금 우리들의 윤리적 선택에 달려있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지속가능한 농업과 지속가능한 농촌사회가 ‘지속가능한 생존’을 위한 필수요소임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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