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thmetical Artist : M.C. Escher
POSTECH Dept. of PHYSICS 20001324 김한섭
= 차례 = 1. Who is M.C. Escher? 2. 규칙적인 공간분할(tessellations)과 변형(metamorphoses) 3. 거울에 비친 상 4. 2차원과 3차원의 공존 5. 공간의 형태탐구 6. 공간의 논리 (불가능한 그림) 7. 인간의 조건
1. Who is M.C. Escher?
Maurits Cornellius Escher, 1898~1972
에셔는 1898년 네덜란드의 레우바르덴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묘한 수학적 개념을 시각화하는 특이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1950년대 까지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가 1956년 처음 개인전시회를 열고 그것이 타임지에 소개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그의 그림은 특히 수학자들을 매료시켰는데 수학의 원리들을 매우 독창적인 방식으로 시각화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1937년 이전의 초기판화는 주제면에서 통일성, 일관성을 갖추지 못하고, 단지 관찰한 사실을 평범하게 묘사하는데 그치고 있는 평범한 판화가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차츰(대략 40代쯤 부터) 수학적 개념들로부터 많은 영감을 끌여들어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시켜 갔다. 그는 특히 "불가능한" 형태들이 공간에 만들어내는 역설(paradox), 뫼비우스의 띠에 관심이 많아 그 분야에 대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다.
2. 규칙적인 공간분할(tessellations)과 변형(metamorphoses)
규칙적인 공간분할이란 평면을 일정한 형태의 타일을 사용해서 겹치지도 않고 틈을 남기 지도 않으면서 바닥을 완전하게 덮는 배열방식을 의미한다. 평면의 규칙적 분할은 이미 수학에서 계속 다루어진 주제이다. 수학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단지 정삼각형,정사각형,그리고 정육각형 만이 규칙적 공간분할에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에셔는 수학적 도형 뿐만 아니라 다양한 일상적 형태들의 공간분할에 더 관심을 가졌다. 에셔는 반사(reflection), 미끄럼반사(glide reflection), 평행이동(translation), 회전(rotation)의 기법을 이용해서 규칙적 공간분할에 사용될 수 있는 이 세 정다각형들의 변형들을 탐색했다. 그는 정다각형들을 동물,새,기타 여러 형태로 변형시켰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기본적으로 평면분할은 정삼각형, 정사각형, 정육각형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양한 변형을 거쳐서 새(bird), 도마뱀(reptile) 등의 반복되는 모양을 만들어 공간을 규칙적으로 분할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다음은 에셔의 "천마도"(pegasus)이다.
우선은 말의 모양으로 평면을 규칙적으로 분할하고 있지만, 잘 살펴보면 기본형인사각형이 되풀이 되는 것임을알 수 있다. 그 사각형 밖으로 튀어나온 부분은 다른 부분에서 빼고 들어간 부분은 다른 부분에 덧붙이는 방식으로 변형된 기본형인 천마를 만드는 것이다. 다음 그림은 평행사변형에서 만드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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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규칙적인 평면분할에 더해서 "변형"(metamorphoses)--형태가 다른 형태와 얽혀 서서히 변해가는(심지어는 2차원 평면을 벗어나는) 2차원 형태들--라는 주제를 다루는데 특별한 기쁨을 느꼈다. 이러한 흥미는 에셔가 1936년 스페인 여행 중에 알함브라(Alhambra)라는 이슬람 궁전을 방문하면서 시작되었다. 무어인들은 알함브라의 벽과 바닥을 다색 합동의 도자기로 빈틈없이 장식했었다. 이슬람인들에겐 종교적인 이유에서 구체적 이미지의 사용은 금지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은 항상 추상적, 기하학적 문양만을 사용해야했다. 에셔는 그러한 문양에 크게 감명을 받았으며 하루종일 스케치하면서 알함브라 궁전을 돌아다녔다고 전해진다. |
말씀, 1942, 석판, 330x385mm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가장 가운데 '빛'이 위치한다. '빛'은 즉 '말씀'을 뜻한다. 평면상의 배열은 시간상의 배열을 의미한다. 태초의 말씀은 만물을 낳았으니, 개구리나 새들이 계속되는 변형끝에 창조되는 것을 공간적으로 볼 수 있다.
삼각형의 속박을 벗어나 새가 자유로이 훨훨 날아가고 있지 않은가? Liberation!
물고기와 새는 알고보면 사촌지간??
3. 거울에 비친 상
거울은 보이는 세상을 그대로 또는 종종 왜곡을 동반하며 비춘다는 점에서 옛날부터 많은 예술가들의 중요한 영감의 원천이 되어왔다. 거울 이편의 '현실', 그리고 거울 저편의 '가상'은 종종 날카롭게 구분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구분되지 않고 혼란스러울 때가 있다. 거울 이미지는 미술이나 철학, 또는 문학에서 고전적인 주제 중에 하나이지만 에셔의 몇몇 작품은 현실과 가상을 절묘하게 뒤섞여버림으로써 과연 '현실'은 무엇이고 '가상'이란 무엇인가라는 고전적인 문제제기를 충실히 표현하고 있다.
(유리구를 든 손),석판, 1935, 32*21.5cm
(유리구에 비친 정지된 삶), 석판, 1934, 28.5*32.5cm
위의 두 그림은 평면유리가 아니라 볼록한 유리이기 때문에 관찰자는 물론이고 주변 풍경이 압축적으로 이미지로 드러나고 있다. 더구나 배경은 단색으로 처리되었기 때문에 거울 이미지만 덜렁 눈앞에 주어지면서 묘한 느낌이 드는 그림이다.
(눈) , 메조틴트, 1946, 15*20cm
에셔는 자신의 눈을 거울을 통해 (눈을 이용하여) 보고 있다. 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눈. 그런데 자신의 눈동자에 비치는 것은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해골(skull)이다!! 난데없이 왜 해골인가 하겠지만, 서양 회화에서 바로크 시대 이후로 초상화, 풍경화 혹은 정물들의 다양한 형태로 해골이 나타나곤 하는데 그러한 그림을 바니타스(vanitas)라고 부른다. 이러한 그림에서 해골이라는 무시무시한(?) 아이콘(icon)이 상징하는 것은 물론 '죽음' 내지는 '삶의 덧없음', '삶의 무상함'이다. 이 작품도 고전적 제제인 vanitas를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왠지 모르게 섬뜩함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세가지 세계, 석판, 1955, 36*25cm
물 속에 비치는 물고기 + 수면에 흩어져 있는 낙엽 + 수면에 반사되는 나무 세 그루. 하지만 이렇게 우리가 세가지 세계를 구분하는 가장 근본적인 근거란 무엇일가? 그러한 구분은 어쩌면 관습적인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에셔는 수면 '밖'과 수면 '속'의 세계를 동시에 비춤으로써 수면과 물 속과 바깥의 '세가지 세계'를 '하나'의 이미지로 만들어 버린다.
진중권의 『미학 오디세이』는 에셔의 그림을 책의 흐름에 맞게 곳곳에서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데, 저자는 이 그림은 프로이드의 이드(Id), 자아(ego), 초자아(super-ego) 삼겹살 인간 의식구조를 소개하는데 사용하고 있다. [재판, 2권 pp.195-199]
이슬 방울 , 메조틴트, 1948, 18*24.5cm
이슬방울은 잎맥의 구조를 확대하는 동시에 바깥의 풍경(창문)을 반사하는 역할을 동시에 한다. 여기서 이슬 내부의 잎맥과 이슬 바깥은 이슬방울 이미지 내부에서 엄격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Still Life with Mirror>, 1937, Lithograph, 394x287mm
거울안에 '있는것처럼 보이는' 길거리의 이미지는 다만 바깥을 비춘 것에 불과할까? 아니면 거울 안에 실재(實在)하는 것일까?
4. 2차원과 3차원의 공존
Reptile(파충류), 1943, 석판, 335x385mm
종이 '안'과 '밖'을 자유로히 넘나드는 파충류로인해 '안'과 '밖'의 경계가 희미해진다.앞서 거울 이미지처럼 '가상'과 '현실'의 구별을 무색케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Neo)가 매트릭스와 매트리스 바깥을 드나드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그림에서는 어디가 매트릭스안이고 어디가 매트릭스 바깥일까?
encounter(만남), 1944, 석판, 340x465mm
지금은 비록 다르지만 예전에 같은 곳에서 유래한 우리는 악수하며 새롭게 만나야만 한다...
cycle(순환), 1938, 석판, 475x280mm
역시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묘한 그림이다. 일단 시선은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사람의 진행방향을 따라간다. 그리고 그러한 2차원인 사람모형은 다시 에셔의 주특기인 변형(metamorphoses)을 거치면서 3차원의 정육면체가되는 부분으로 되돌아서 올라온다.(이때 시선은 시계방향으로 이동하는 것을 알수 있다.) 그때 정육면체는 다시 3차원 건축물의 구조의 한 부분임을 볼 수 있다.
5. 공간의 형태
에셔의 작품 중에서 가장 중요하고도 또한 가장 높이 평가되는 것은 공간에 대한 탐구이다.
1) 에셔는 수학자 코제트(H,S.M.Coxeter)의 저서속에 들어 있는 하나의 그림에 자극받아 에셔는 쌍곡공간(hyperbolic space;비유클릿드 공간의 하나.)에 대한 많은 아름다운 형상들을 만들어 내었다.
<Circle Limit III>, 1959, Woodcut, diameter 416mm
<Circle Limit iv (Heaven and Hell)>, Woodcut, diameter 416mm
2) 뫼비우스 띠는 위상수학(topology)에서 다루어지는 가장 기초적인 모양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3차원에서 구성되지만 안과 밖의 구별은 없게 된다. 아래 그림의 개미는 뫼비우스의 띠를 끊없이 순환하게 된다. 지금 있는 자리가 '안'인지 '바깥'인지 모른채.
<Mobius Strip II (Red Ants)>, 1963, Woodcut, 453x205mm
3) 또 하나의 흥미있는 사례는 석판화인 "화랑"(Print Gallery;아래그림)인데 이것은 공간의 논리학과 위상학을 다루고 있다.
<Print Gallery>, 1956, Lithography, 319x317mm
화랑에서 한 젊은이가 한 항구의 풍경을 보고 있는데 거기에는 부두가 있고 그곳에 상점이 늘어서 있다.그 상점 가운데 화랑이 있다.그리고 그 화랑안에서 한 젊은이가 항구의 풍경을 그린 그림을 바라보고 있다. 이 그림을 보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는 젊은이를 출발점으로 시계방향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는 방법. 둘째는 그림 오른쪽 밑을 출발점으로 삼아서 반시계방향으로 시선을 이동시키는 방법. 첫번째의 경우에는 젊은이가 그림 '바깥'에 있다는 것을 먼저 인식하고 그림 '안'이 다시 젊은이가 있는 그림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된다. 두번째의 경우는 그림 '바깥'이 그림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알게 되고 비로소 젊은이가 그림 '바깥'에 있다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그림에서 에셔는 공간을 공간속으로 밀어넣음으로 젊은이가 그림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림의 안과 밖 어디에도 존재하는 것이 아닐수도 있다.(안과 밖의 구분을 무너뜨렸으므로 딱히 안과 밖이랄것도 없긴 하지만.)
어떻게 보면 젊은이의 시선은 액자을 보는게 아니라 대척점에 위치한, 창문에 기대어 앉아있는 여성을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 여성의 공간상 위치도 참 애매모호하다. 도대체 그림 '안'인지 '밖'인지. 회랑의 지붕에 있는 건지, 항구마을의 한 건물에 있는 건지...
특히 이 트릭-한 가운데의 빈 구멍-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주목하라.수학자들은 이것을 특이성(singularity)라고 하는데 공간의 구조가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곳을 의미한다. 터진데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짜깁기할 수 있는 어떤 방법도 없다. 에셔는 어떤 방식으로 그것을 얼버무리기 보다 그 구멍안에 자신의 이니셜을 슬쩍 집어넣어 놓았다.
6. 공간의 논리 (불가능한 그림)
공간의 논리란 물리적 대상사이에 지켜야할 공간적 규칙관계를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가 깨어질 때 시각적 파라독스 통상 착시(optical illusion)가 발생한다.
"불가능한 그림"이라는 유형은 3차원 대상을 구성하기 위해서 2차원 표상에서 단서를 찾는다는 브레인의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에셔는 이러한 변칙적 유형을 보여주는 많은 작품들을 만들었다.
<Belvedere (망루)>, 1958, Lithograph, 462x295mm
이해를 돕기 위해 위의 그림의 중간을 손수 자른 그림 -_-;;
아래 그림은 1층과 2층 가운데를 잘라서 조금 떨어뜨려 놓은 것이다.. 위와 아래를 한번 비교해보라.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부분에서 시점이 바뀌는 것이 잘 보이지 않는가? 3차원을 2차원으로 우겨넣을때 교묘하게 처리함으로써 사람을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한 낯선 혼란스러움은 3차원 대상을 2차원에 표현할 때의 그 관습적으로 접해왔던 표상에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다음은 http://myhome.naver.com/supoongk/escherworld.html에서 가져온 것이다. 재미있는 해석이라고 생각된다.
"왼쪽 아래 배경에 육면체의 모서리가 그려진 종이 한 장이 놓여있다. 모서리가 교차하는 곳에 작은 원 두개가 눈에 띤다. 어떤 모서리가 앞에 있는 것이고, 어떤 모서리가 뒤에 있는 것인가?
삼차원의 세계에서는 앞,뒤가 동시에 나타나는 것은 불가능 하고 그래서 그려질 수 없다. 그러나 물건을 위나 아래에서 봤을 때 다른 실재를 나타내는 것을 그리기는 가능하다. 이 상자는 1932년에 스위스의 수학자 A.L.Necker가 설명한 네커큐브에 원리를 두고 있다. 네커큐브는 동일크기의 입방체가 전복 가능하다는 이론으로 소실점이 동일한 입방체가 보기에 따라서는 전후관계가 바뀔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 네커큐브의 원리는 망루 2층의 안밖이 교차된 기둥과 벤치에 앉아 있는 남자가 들고있는 현실에서 불가능한 육면체에 나타나고 있다. 그는 이 이해불가능한 물건을 주의깊게 바라보고 있다. 반면 그의 뒤에 있는 건물 역시 불가능하게 지어졌다는 사실에는 관심이 없는 듯 하다. 건물의 1층 실내에는 두 명이 사다리를 바쁘게 올라가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2층에 도착하면 그들은 실외에 있게 되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어느 누구도 지하감옥에 갇혀 쇠창살로 고개를 내밀어자신의 운명을 비탄하는 죄수를 신경쓰고 있지 않다.
이 그림에 대해 필자 나름대로 내용읽기를 시도해 보았다. 네카큐브가 같은 소실점을 가진 동일한 입방체이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보이는 것처럼, 동등한 가치를 가진 인간이 어떤 선입관과 편견에 따라, 상이한 가치평가가 되어 계급으로 나눠진 사회를 에셔는 풍자하고 있는 것이라 보인다. 이 전망대는 계급의 상징이다. 이 전망대에 올라 경치를 즐길 수 있는 계층은 귀족계급이며, 1층 감옥에 감금되어있는 자는 제일 하층 계급이다. 에셔는 이 귀족계급의 부패상을 2층의 불가능하게 뒤꼬인 공간으로 상징화하고 있는 것이라 보인다. 그러나, 중간계층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분상승을 동경하고 있으며, 그들은 아무리 사다리를 타고서 더 높은 곳으로 가고 싶지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사다리의 출발점부터 뒤꼬인 사회에서 시작되어 있는 것이라, 그 도착점 또한 잘못되어 있음은 당연한 결과이다. 그러나 여기서 에셔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감옥 옆에서 네카큐브를 들고 고민하고 있는 자가 있다. 그의 모습은 수도승 같기도 한데, 그는 이 부패하고 뒤틀린 사회를 바로잡을 궁리에 빠져있다. 그가 네카큐브의 원리를 알게되면 사회의 부조리를 타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에셔가 이 그림을 제작한 1958년에 신분이나 계급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에셔는 또 다른 새로운 이상향을 꿈꾸고, 그 유토피아를 만들어 줄 인물을 예견하는지도 모르겠다. 이것은 단지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
폭포, 석판, 1961, 38*30cm
7. 인간의 조건
그림 그리는 손, 석판, 1948, 28.5*34cm
둘 중에 어느게 '그리는 손'이고 어느게 '그려지는 손'일까? 그러한 분절적인 개념적 구분이 무색해지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그리는 손'은 그려짐을 당함으로써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어쩌면 우리 존재의 모습도 이러한 그림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서로의 관계속에서 우리는 서로 그리고 그려진다. 순수하게 그리는 존재도, 일방적으로 그려짐을 당하는 존재도 없다. 그리는 행위와 그려짐을 당하는 행위들 '사이'에서 우리는 가까스로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편 이 그림은 일종의 논리적 순환구조를 표현한다고 볼 수도 있다. 마치 바흐의 무한 상승하는 카논처럼 말이다. 두 손을 넘어서는 지평에서의 절대적인 확실성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다만 자기 순환적인, 모순적인 가정만이 끊임없이 돌고 돌 뿐이다.
이 일종의 '무한 상승' 주제에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진중권의『미학 오디세이 2권』(현실과 과학,2001)이나, 더글러스 호프스태터의 『괴델,에셔,바흐』(까치,1999)를 참조하시길.
안녕안녕~!!
p.s) 물론 여기에 다루어진 그림이나 주제가 M.C. Escher의 작품 전체를 다룬 것은 아니다. 더 많은 재밌는 작품들과 이야기할 것들이 남아있다...
Specially Thanks to 이지언 교수님
References) 1. http://chaos.inje.ac.kr/Alife/escher_math&art.htm (http://www.mathacademy.com/pr/minitext/escher/index.asp#intro 번역본) 2. http://chaos.inje.ac.kr/Alife/escher_math&art_tesse.htm 3. http://myhome.naver.com/supoongk/escherworld.html 4. 진중권,『미학 오디세이 1, 2』(현실과 과학, 2001) 5.『The Magic of M.C. Escher』 (Thames & Hudson, 2000) 6. 진중권, 『춤추는 죽음 1』(세종서적,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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