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국내작가소개방

박수근

영원한 울트라 2006. 12. 14. 11:33
제목 없음


 

가난 속에 피어난 불꽃같은 예술혼
                             
-가장 한국적인 화가 박수근의 삶과 예술

글/홍경한(미술평론가)

 

 

우리나라 작가들의 많은 수가 아직도 가난하다. 실제로 아이들 유치원비가 없어 등원을 못 시키는 사람들도 여럿 보았으며 비닐하우스에서 연탄난로 하나로 한겨울을 나거나 물이 안 나와 제대로 씻을수도 없는 환경에서 작업하는 작가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방송이나 잡지 등을 통해 보여지곤 하는, 넓은 작업실을 가진 대궐같은 집에서 에어컨이 냉랭하게 돌아가며 중간중간 아내나 제자가  과일이나 음료수  따위를 들고나오는 장면 등은 그야말로 일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인터뷰를 갔다가 하도 안쓰러워서 밥사주고 똘망똘망한 아이들 용돈까지 쥐어주고 와야했던 기억들이 더 많을 정도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이는 분명한 현실이다.

 

허나 요즘 세상에 가난이 곧 예술의 원천이랄 수는 없지만 창작의 동기를 부여하는 것만큼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물론 배가 고파야 예술이라는 말이 썩 달갑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가난은 저 밑바닥에서의 몸부림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데 일조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로 예술적 배경의 전부일 수는 없다.)

 

 박수근의 그림에는 그리움이 걸려 있다

 

작가들에게 싸늘하게 따라다니는 가난과 빈곤을 창작이라는 열기로 식혀가는 과정은 그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예술과 경제의 간극만큼 넓으며 불꽃같은 예술혼은 궁핍함과 비례하곤 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근대 서양화가 박수근(朴壽根1914-1965)이다. 박수근은 담배 은박지 그림으로 잘 알려진 ‘황소’의 작가 이중섭, 동화적인 서정성으로 당대에 이름을 알린 장욱진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거목(巨木)이자 독학으로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창조한, 그야말로 신념을 상징하는 작가이다. 박수근은 오늘날 삶과 예술, 빈곤과 궁핍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을 한시도 놓지 않았던, 가장 서민적이자 한국적인 작가로 인정받고 있다. 1914년 강원도 양구 산골에서 광산업을 하던 집안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난 박수근은 부농의 아들로서, 화가가 되는 것이 꿈인 소박한 소년이었다. 엄격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그는 12세 되던 해 바르비종파 화가 ‘장 프랑수와 밀레(Jean Francois Millet 1814~1875)’의 <만종>도판을 접한 이후 그를 존경하게 되면서 화가로서의 꿈을 갖게 된다. 하지만 유년시절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었으며 동시대의 화가였던 이중섭과는 달리 유학은 고사하고 초등학교(당시 보통학교)도 간신히 다녀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고만다.

 

가난은 결국 박수근의 일생을 현실과 바램사이에서 번민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장남으로서 부양해야할 가족들의 생계는 그의 삶을 어렵게 하기만 했다. 늘 곤궁했던 그는 청년이 되어서도 지인의 도움으로 약간의 교사생활을 했던 것을 제외하곤 힘겨운 나날을 보낸다. 부두노동자, 미군부대 P/X에서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 따위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며 밀가루로 연명(延命)해야 하는 살림 속에서도 유방암에 걸린 모친의 병간호까지 도맡아 해야 하는 등, 그의 삶은 고통스러울 만큼 현실 순응적이었다.하지만 가난은 곧 그의 작품의 특징인 '서민성' 을 낳는 발판이 되었음은 분명하다.  
 
소리없는 그림을 그린 가장 한국적인 화가

 

특히 그림에 대한 열정은 지울 수 없는 문신과도 같았다. 그가 정규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중섭이나 장욱진, 김환기, 그리고 이들 보다 조금 어린 천경자  등은 그래도 초기 어느 정도 경제적인 여유가 있었고  그 당시 일본 유학을 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음에도 이들은 유학길에 오를 수 있었다. 반면 아무 것도 없이 오로지 창작에 대한 열망 하나만으로 작업세계를 구축한 박수근은 참으로 독특한 인물이다.

 

그림에 대한 갈망, 그것은 여전히 생활의 이면에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제대로 된 용지 한 장 구할 수 없던 시절 그는 인쇄용지나 쓰다 남은 한지 등에 뽕나무를 태워 만든 목탄으로 여러 번 지우고 다시 그리기를 반복했으며 습작 형식의 드로잉을 통해 그림에 대한 향수를 달래곤 했다. 일예로 <시장>과 <독장수> 등을 비롯한 몇몇의 드로잉들은 당시만 해도 너무 귀했던 연필로 제작한 작품에 속한다.  이들 그림을 보면 유화 못지 않은 단아한 필선과 간략한 구도가 드로잉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며 그가 그림을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흔적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능숙한 여운을 전달하다. 박수근의 드로잉은 유채화로 나아가는 전 단계라는 점에서 미술사적으로도 흥미를 끄는 대목이다.  다만 전란에 불에 타고 피난시절 분실한 탓에 남아 있는 작품이 50여점에 머무르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드로잉 작업도 그랬지만 박수근은 유화작업에 있어서도 각종 재료들을 아끼고 아껴야만 했다. 그는 이에 묘수를 짜냈다. 캔버스나 판넬 위에 여러 번 덧칠을 했다가 다시 헝겊으로 거둬내어 가급적 얇게 바르는 방법으로 물감을 아껴 쓰곤 했다. 현재의 작품에서 볼 수 있는 박수근 만의 마티에르가 나타나게 된 배경이 물감이 없어서 였다니, 이는 참으로 아이러니이다. 지금처럼 모든 것이 풍족한 시대에서 볼 때 그의 작품들은 최소한의 여건에서 최대의 예술성을 표현해 내었으니 대단한 화가가 아닐 수 없다.

그의 삶을 간단하게 정의하면 현실과 그림의 딜레마였다. 박수근에게 이 두 가지는 곧 생존(生存)의 문제였다. 하지만 그는 예술 앞에선 매우 강한 사내였다. 모친이 세상을 뜨고 유일한 재산이었던 집이 부채로 인해 남에게 넘어가면서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와중에도 그는 결코 그림을 놓지 않았다. 사실 그에게 있어 그림은 곧 존재의 이유였던 것이다.

일제(日帝)치하를 거쳐 1950~60년대 격동의 세월 속에 무학(無學)에 가까운 학력과 누구에게도 사사받지 않은 채 눈썰미와 불굴(不屈)의 의지가 더해진, 그의 그림에 대한 집념은 외경 속 의식을 매몰시켜가는 과정으로 드러나게 된다. 그는 내적 가난함에 시달리고 외적 식민지 시대를 관통하는 고단한 삶 속에서도 그 힘겨움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살아가고 있는 주변 서민들의 무던한 마음을 현실적인 관점아래 시적 정감으로 조형화 시키고 있다. 

 

가난의 슬픔을 뜨거운 가슴으로 녹여낸 박수근

 

일예로 그의 대표작인 <나무와 두 여인>은 1960년대 두꺼운 종이(하드보드)에 유채로 그려진 것으로써 비교적 대작에 속한다. 이 그림은 박수근의 작품성향을 분석할 수 있는 적절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시각적으로 지극히 평면에 머물고 있는 이 작품에서 원근법이라든가 심한 색조의 변주는 과감하게 생략되며 주제인 나무나 등장인물 역시 언제나 전신을 위주로 한 확연치 않은 실체를 하고 있다. 그저 여느 작품들처럼 현실성을 기반으로 향토성과 소박함, 인간적 체질에서 우러나오는 체취가 배어나오고 있을 뿐이다.

또한 작고하기 3년 전에 제작한 1962년 작품 <굴비>를 통해서도 박수근 그림의 개성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굴비>라는 작품은 3호(가로 29cm×세로 15.5cm|엽서 세장 합친 크기)크기의 작은 정물화로 소박한 구도와 단순 명쾌한 묘사, 중후한 색상 표현으로 작가의 서민적 회화감을 잘 나타낸 명작이다. 심적으론 어둡고 가난한 당시의 생활 속 그늘을 드러낸 작품이기도 하며 특유의 여러 번 겹친 마티에르의 독창적 성숙미가 상당히 두드러진다. 다만 이 당시엔 이미 한쪽 시력에 문제가 생기면서 좀 더 면이 넓어지고 선의 굵기가 얇아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점이 초기완 다소 다르다. 그러나 정물 유채가 드문 그에게 이 작품은 남다른 의미가 있다.

 

그의 작품이 빛을 발하는 것은 그가 18세 되던 해인 1932년 제 11회 「선전(鮮展:일제치하에서 실시된 전국규모의 미술공모전. 이후 국전으로 바뀐다)을 통해서다. 수채화 <봄이 오다>라는 작품으로 선전에 이름을 올린 이후 그는「선전」에서 여덟 번 동안 입상하며 작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지만 당시만 해도 성과만큼 커다란 조명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이는 그의 과묵한 성격 때문이기도 했지만 인간적인 겸손함으로 나서기를 꺼려한 탓도 컸다. 그림은 결국 작가의 분신이라 했던가. 박수근의 무던한 성격은 그림 속에도 절절하게 녹아 있다. 그의 특질인 색채는 당시의 의복이나 정감이 백색이나 회색조였던 탓에 거의 백색을 주조로 하는 모노크롬의 경향을 보인다.

 

30년대 선전 입상작들부터 60년대 중반까지 그가 표현하는 색감은 대체적으로 안개 속에 머무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로 무채감적이다. 박수근은 여기에 모든 대상을 평면화 시키는 작업으로 변화를 주는 독특한 표현기법을 창안함으로써 더욱 강렬한 호소력을 전달한다. 이어 1950년대 초기의 작품에서는 검은 윤곽선이 굵고 색조는 점에 의한 질감이 나타나지 않다가 점차 크기가 작은 점의 질감이 생긴다. 이후 점의 크기는 점점 커져갔으며 이 같은 경향은 <농악>등 몇몇 대작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다가 60년대 이르러 윤곽선이 점차 모호해지면, 점에 의한 질감은 점차 크게 면으로 처리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색의 단순화 작업은 모던 아트의 중요한 한 가지 요건으로 완성되며 이것이 사후(死後) 평가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서구 미술기법들이 밀물처럼 유입되는 시점이라는 점에 비쳐볼 때 언뜻 보면 그 역시 서구 리얼리즘이나 인상파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완전한 이해를 수반하지는 못한다. 
 


생략된 선, 부드러운 색채는 어디까지나 회화 양식으로부터 리얼리즘의 기본인 픽션적 서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생겨난 양식법이기에 서구의 그것과는 차별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격정 대신 부드럽고, 활동성 대신 정지된 상태로 받아들여지는 생명감(Movement)없는 스틸(Steel)적 이미지는 인상파가 갖고 있던 외광적 흔적과는 사뭇 다르다.


 그가 그려낸 인물들은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지만, 그의 캔버스에 등장할 때에는 어딘가 서정적이고 전설적인 인물로 분장된다. 존재론적 사실주의에 입각해서 표현되었던 그의 그림들은 눈에 흔히 보이는 대상들을 구태의연한 구체적 사실주의적 형상화로 나타내는 것을 거부하고 석물 조각에서 연유된 꺼칠한 마티에르처럼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재창조했다. 이 같은 특징들은 초기 몇몇 작품을 제외한 박수근 작품의 맥을 이루고 있다.

 

오늘, 이 새벽. 개인적으로 이중섭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오는 박수근. 헌데 요즘들어 정말 안타까운 것은 미술계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도 돈 없으면 갈수록 하기가 어려운 세상이 되어 가고 있다. 만약 박수근이 살아 있다면 그는 요즘의 이런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한편 간경화에 의한 지병으로 백내장이 발생하고 눈이 멀게 된 박수근은 한쪽 눈으로 그림을 그리다 결국 1965년 사망한다. 그의 나이 51세 였으며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멀어..멀어..."였다. 경기도 포천군 소홀면 동신교회 묘지에 세워진 묘화비(墓畵碑)에는 박수근이 즐겨 그린 아이업은 여인네의 소박한 모습이 약 15배로 확대, 음각되어있다.

 

 

작품설명(맨 위부터)

 

*박수근과 그의 둘째 딸 인애

*공기놀이 하는 소녀들-캔버스에 유채  50×80.3Cm/1950년대

*나무와 두 여인-하드보드에 유채 16.5×19Cm/1964

*춘일-하드보드에 유채 50×80cm/1950년대

*나물캐는 소녀들-11.5×24cm/1950년대

*굴비-캔버스에 유채38×45.5Cm/ 1950년대

*복숭아-종이에혼합재료30×46Cm/연도미상

*화구-종이에 수채 31×45cm/1962

*고양이-하드보드에 유채18×24Cm/1962

*책가방-종이에수채.31×45Cm/연도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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