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동원의 그림에 넘쳐나는 너그러움과 풍요로움은 보는 사람들의 적극적이고 탐욕적인 참여를 자극한다. 그녀의 작품들을 본다는 것은 단순히 눈을 통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몸 자체가 그에 의해 매료되어 그림에 참여한다는 의미에서, 폴 끌레의 우리의 눈이 "그림을(염소가 풀을 뜯어 먹듯이) 뜯어 먹는다"라는 표현은 이 경우에 아주 적절하다. 이러한 참여만이 메를로 퐁티가 "격렬한 광경"이라 명명한 특성에 부응한다. 이 광경의 격렬함은 그 스스로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시각적, 감각적, 청각적인 것까지의 동시적인 조화를 요구하는 의미에서이다. 들라크르와 또한 예술성이 뛰어난 그림의 음악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가? 바로, 금동원의 작품이 이러한 심오한 음악성을 띠고 있다. 1983년경까지도 뚜렷하게 구상적 성격을 드러내던 금동원의 작품은 그 구상성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으나, 이는 모사의 충실성과는 거리가 멀다. 그가 매우 신선한 색채들로 강렬히 살려내는(그의 구성 속엔 검정색은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물체들과 기호들은 피상적으로 보면 동심의 세계에 닿아 있는 듯하다. 그러나 금동원의 작가정신은 그가 탁월한 재능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단순한 원시주의를 훨씬 능가한다. 그는 허위적인 형식의 동심세계를 절제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들이며, 진정 흥미로운 영역 즉 미술에 의한, 미술을 위한, 감동의 세계로 나아간다. "종종 어린이가 예술적이지만, 어린이는 예술가가 아니다. 왜냐하면 어린이는 자신의 재능에 의해 사로잡혀 있어 자신의 재능을 소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앙드레 말로가 단언한 바 있다. 금동원의 경우, 그녀가 자신의 예술을 가장 완벽하게 소유한다는 점에서, 그녀는 진정 예술가이다. 그러므로 그녀의 작품이 보여주는 것은 인물, 꽃, 집, 연이나 엉겅퀴 꽃들이 아니라 지금 형성되고 있는 하나의 우주이다. 이 세계는 그 생성되는 순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금동원은 이 세계를 "표상"하지 않는다. 이 세계는 근원(그 태초의 기원)의 모습으로 그녀의 작품에 나타난다. 화가 스스로가 말한 바처럼, "가슴속에 되살아나는 삶의 아름다운 추억들이 붓의 움직임을 따라 생기를 얻어 움직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쎄쟌느의 그림들이 생뜨 빅트와르산의 외면을 재현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우리는 단순히 그림에서 산의 현존을 느낄 뿐이다.), 금동원의 그림은 물체의 외형을 단순히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넘어서, 그 웅변적인 표면성의 힘을 통해 우리에게 그러한 물체들의 현존을 믿게 한다. 이 두 가지 측면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그림은 "항상" 생성되는 순간의 세계, 즉 보다 명확하게 말하자면, 지금 태어나고 있는 그림의 세계를 말한다. 바로, 이 끊임없이 재현되는 탄생의 기쁨, 강렬한 전파성을 지닌 이 기쁨에 대한 초대가 화가가 의도하는 바이다. 이러한 연유로, 금동원의 그림 앞에서 감상자들이 느끼는 기쁨의 특성이 드러난다. 금동원의 작품은 그 명백한 장식적인 특성을 넘어서서 단순히 보여지는 것이 아닌 지금 생성과정에 있는 그림의 시야로 우리를 들어서게 한다. 그녀의 작품들은 완성되는 과정에 있는 잠재성이다. 그러므로 작품을 감상하는데 있어서 그림의 생성과정을 따라가는 것이 중요하다. 화가에 이어, 우리는 눈으로, 생각으로, 감동으로 새로이 그림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화가 자신에게조차, 그림은 눈앞에 놓여진 것이 아닌, 실제로 그녀의 손안에서 이루어진다. 화가가 요구하는 것은 일종의 "만들기"적 참여, 다시 말해서, 참여적 움직임인 것이다. 금동원이 아름답게 표현한 바처럼, 우리는 이러한 참여적 움직임을 통하여 "자유를 찾아 이제 막 새장에서 나온 새"가 되는 것이다. 정말로, 금동원의 그림은 "(양이 풀을 뜯듯이) 먹어야 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우리는 그녀와 그림에 존재하는 가능한(잠재적) 세계에 접근할 수 있다. 즉, 화가의 움직임(동작)에서 잠재성들이 실재화되는 것이다. 그림들이 구성하는 이미지(형상)들의 구조를 분해하기보다는, 우리는 형태, 선, 그리고 색채들이 신비스럽게 형성되도록 하는 그 움직임(운동)을 다시 실감하려 해야 한다. 붓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그 어떤 것이 생명을 얻어 움직이기 시작한다. 바로 그는 이 "붓의 흐름"을 매순간마다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모짜르트 혼 협주곡 제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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