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돌질하는 여인>의 소재는 이미 1940년 國展(조선미술전람회)에 출품된 선례가 있다. 설정이나 구도가 거의 같은 점으로 미루어 작가는 한 10년이 지난 뒤 문득 과거의 어떤 소재에 대한 애착을 구체적으로 실현 해 보려는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이처럼 박수근의 작품 가운데는 소재에 대한 반복현상이 자주 눈에 뜨인다.
<아기보는 소녀>나 <기름장수>도 이후의 작품 가운데 번번히 반복되어지는 것도 작가 특유의 소재에 대한 애착의 반영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소재의 항상성은 박수근 예술의 일관성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근간임을 발견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이다.
50년대 전반에 속하는 이들 작품에선 예각적인 선묘(線描)에 의한 대상의 파악과 마티에르의 균질화현상은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지 않으나, 굵은 흑선으로 대상을 요점적으로 파악해 들어가는 수법에선 박수근 독자의 형태 해석의 일면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형태를 매스(덩어리)로 파악해 들어가려는 기본적인 생각에서 그는 대단히 조각적인 요소를 많이 지닌 화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으며, 그러한 점에서 화가를 형태와 색채로 그 중심적 관심을 구분해
본다면
단연 형태화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과
이런 점은 모티프를 단순화시키는 설정에서도 파악되어진다.도마위에 감자와 칼이 놓여 있는 정물이나, 역시 같은 도마 위에 두마리 생선과 칼이 놓여 있는, 이 너무나도 단순한 소재 설정이 대상을 매스로 파악해 들어가려는 그의 기본적인 시각의 일면을 아주 잘 반영시키고 있다. 좀 지나치다싶을 정도로 무미한 대상 설정은 소재 자체만을 강조하고 주변을 일체 생략하는 다른 작품들과 그대로 통한다.
굴비
생선 또는 굴비를 다룬 작품은 이 외에도 몇 점 있다. 비교적 정물적 소재를 다루지 않은 이 작가에게 있어 생선 또는 굴비가 몇 차례 그려졌다는 것은 작가 특유의 생활에 밀착된 소재적 기호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 이런 소재가 지니는 어둡고 가난한 생활의 그늘은 반고호의 초기 네덜란드 시절의 그림들과 통하는 데가 있다.
나물캐는 여인들
<나물캐는 여인들>역시 1937년 국전에 출품된 수채의 작품이 있다. 해방전의 작품들을 고스란히 북쪽에 남겨둔 채 월남한 그로서는 옛 작품들에 대한 애착이 더욱 강렬했을 것이다. 이 작품도 해방전에 그려진 작품을 재 제작하는 기분으로 그렸을 것이다. 대각선으로 화면이 분절되고 그 중심에 두 여인(아이업은 여인과 처녀)이 앉아 있다. 이 대각선 구도는 이후 <빨래터>에서 다시 반복되지만, 수평적인 시각에 고정되었던 박수근의 전체 작품군에선 퍽 동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으로 꼽을 수 있다. 선전에 출품된 같은 소재의 작품은 <봄>이란 명제로 나와 있다. '나물캐는 여인들'이라 하지 않고 '봄'이라고 한 소재의 상징성은 황량한 빈 들녘에 쪼그려 앉은 여인네들의 봄을 기다리는 심사의 상징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억센 매스로 태어난다. 돌판에 새겨지듯 각인된 선획은 요지부동의 형태감각을 만들어낸다. 이 조용하면서도 강인한 선묘는 소박한 서민의 풍속을 기념화하는 데 더없이 적절하게
보인다.
여인과 소녀들
<여인과 소녀들>의 한 여인을 중심으로 둘러 앉은 세 소녀의 포즈는 마치 그 자리에 영원히 꿈쩍하지 않을 듯이 각인되어져 있다. 어느 한 순간의 기념화라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꾸르베가 일상의 평범한 사건을 역사적 사건으로 끌어올린듯이 박수근도 하잘것 없는 생활의 한 단면을 영구히 남기는 기념적 사건으로 다루려고 한다. 흔히 볼 수 있는 이 평범한 정경이
얼마나 기념화되고 있는가를 주시해 보자.
그림그리는 소녀들 1
<그림 그리는 소녀들>의 스케치북을 앞에 놓고 쪼그려 앉거나 퍼져 앉은 모습도 어느덧 한 기념물로 새겨지고 있다. 여기저기 앉아 있는 소녀들의 모습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묘지의 돌비석처럼 그 자리에 돌이 되어 나타난다. 이 기념화의 특징은 박수근 예술의 한 요체로
전 작품에 관류된다.
그림그리는 소녀들 2
<그림 그리는 소녀들>은 꼭깥은 구도로 두 점을 남기고 있다. 이 작품을 위한 데상도 수 점 있다. <그림 그리는 소녀들 1>의 경우는 예의 박수근 특유의 마티에르 위에 인물군을 설정한 것이나, <그림 그리는 소녀들 2>는 더욱 거친 표면에 재빨리 인물을 묘파해 들어간 직정적인 요소가 강한 작품이다. 소녀들의 옷에도 선명한 색채를 가하고 있어, 같은 소재, 같은 구도이면서도 <그림 그리는 소녀들 1>의 경우와는 대단히 다른 감흥을 유도한다. 전자가 완성을 위해 꼼꼼한 밀도를 가한 작품이라면 후자는 스케치풍의 분방한 여흥이 압도된다.
나물캐는 소녀들
무리지어 앉아 있는 <나물캐는 소녀들>과 <공기놀이하는 소녀들>도 많은 소녀들을 소재로 한 작품 중의 한 유형이다. <나물캐는 소녀들 1, 2>에 비해 <공기놀이하는 소녀들>이 그 예각적인 선획이나 기포가 심한 마티에르의 표면층으로 박수근 양식의 전형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독서
<독서>는 한 소녀를 모델로 한 점과 전체적으로 두터운 표면층을 이루고 있으면서도 선명한 색채를 가하고 있음이 이채롭다.
작고한 해인 65년 국전에 유족들에 의해 출품된 <遊童(유동)> 은 박수근의 국전 최후 작품이기도 하다. 박수근은 선전 출품 이후, 53년 환도 직후에 열린
제 2회 국전에 응모하면서 꾸준히 입선·특선을 기록하였는데, 59년에 추천작가가 되고 62년에 단한번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한다. 그는 국전 외에 미협전이나 조선일보초대전 같은 데도 출품했지만 주로 국전 출품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 같다.
그의 국전 마지막 작품이 된 <유동>도 미리 준비되었던 것같이 보인다. 골목길에 나와 앉아 공기놀이를 하는 소녀들에서 한 시대의 풍정과 그가 마지막까지 애착을 보였던 서민생활의 단면이 정감깊게 떠오르고 있다.
좌판
아기보는 소녀 1
박수근의 작품엔 캔버스보다는 하드보드나 베니어판 위에 캔버스천을 입힌 것이 많다. 대부분이 10호 내외의 소품이란 점을 감안하면 캔버스보다는 하드보드가 사용하기나 구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어떤 편인가 하면, 박수근은 캔버스보다는 바닥이 딱딱한 하드보드 같은 판이 체질적이었던 듯하다. 그의 독특한 마티에르와 그것의 점착에 있어 캔버스보다는 딱딱한 판이 더욱 적절한 것으로 보인다. 캔버스는 일정의 탄력을 지니고 있어, 그리는 사람의 붓의 움직임과 그 반동이 만들어내는 긴장이 유화 제작의 한 독특한 맛을 형성해 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긴장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화가들이 있다. 이 점에서 주로 종이나 판에다 그림을 그렸고 나중엔 송곳으로 눌러 특이한 은지화를 제작한 李仲燮(이중섭)의 경우에서도 캔버스 기피증을 찾아 볼 수 있다. 박수근의 경우는 우선 마티에르의 점착이 처음부터 구조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캔버스의 탄력은 오히려 방해 요인이 될 수 있다. 안료를 칠하기보다는 다독거리면서 발라 올리는 과정을 한동안 반복해야 되기 때문에 탄력이 있는 것보다는 딱딱한 쪽이 훨씬 용이했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낸 표면층에 구체적인 대상을 선묘로 그 윤곽을 떠간다. 이 과정도 그린다기보다는 상감을 하듯 아로새겨 간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마지막에 이 대상들에 일정의 색채를 가한다. 표면층이 거칠기 때문에 이 위에서의 색채의 덧칠이란 것은 슬슬 문질러 가는 방식일 수밖에 없게 된다. 아마도 이런 제작 구조상의 문제가 색채가 끼어들 수 있는 자리를 미리 앗아 갔는지도 모른다.
이와 같은 기법적 전형이 완성되어 가는 시기를 50년대 말부터 잡고 작고하기까지의 5,6년으로 볼 수 있다. 예각적인 선획과 이에 따르는 대상의 단순화와 요점적 파악도 이 특징적 기법의 확립과 결부되어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아기보는 소녀>도 그 기법상으로 보아 박수근의 양식적 특성이 완성기에 도달했을 무렵의 작품임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박수근은 한 소재를 가지고 여러번 반복해서 그리고 있지만 물론 그대로 베껴내는 식이 아니라 그것을 다시 그린다는 애착에 의하고 있어, 같은 소재이면서도 때로 다른 감흥을 ㅈ전달해 준다. <아기보는 소녀> 1,2와 같은 소재의 두 작품의 경우도 그것이 전달하는 감흥은 각기 다르다. <아기보는 소녀1>과 <아기보는 소녀2>의 경우, 아기업은 소녀의 포즈는 완전히 일치한다. 단지 <아기보는 소녀1>은 종면으로 긴 화폭으로, 화면이 이분되어 상단엔 여인과 아이가 등장하고 하단에 아기업은 소녀를 배치했다. 반면, <아기보는 소녀2>는 아기업은 소녀만을 오롯하게 등장시키고 있다. <아기보는소녀> 는 소녀만을 부각시키고 있어 인물 표정에 관심을 기울이게 한다. 즉 전자의 경우는 박수근의 가장 빈번한 소재로서의 路上의 한 변주로 볼 수 있으며, 화면의 크기에 따른 적절한 구도의 묘미가 하나의 감흥을 자아낸다. 아기업은 소녀만을 클로즈업시킨 후자의 경우, 절제된 선묘가 아동들이 그리는 개념적인 선묘화를 연상케 하는 점이 많다.
모자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작품이 환기하는 감흥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소녀의 해맑은 표정에 있다. 가난하지만 건강한 서민생활의 맑은 정서가 까맣게
그을은 소녀의 얼굴에 흠뻑 배여 있다.
약간 옆으로 몸을 돌린 간은 소재 와 이 소재를 위한 적지않은 대상들이 있는 걸 보면 화가가 특별히 애정을 쏟았던 것 같다. 일하는 여인의 소재가 그의 아내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면, 아기보는 소녀는 그의 딸이 모델이었을 것같이 생각된다. <母子>는 일련의 아기보는 소녀나 여인과 같은 소재적 문맥에 넣을 수 있지만 많이 볼 수 없는 설정이다. 비교적 간략하게
묘출되었지만 여인과 아이의 표정이 풍부하다.
거리에 나와 앉아 있는 여인들 가운데는 노점상이 있는가 하면 아이들을 데리고 단순히 쉬고 있는 경우로 대별해 볼 수가 있다. 대개 노점상이거나 거리에 나와 쉬고 있는 경우에서 많이 띄는 것은 짝을 지은 두 여인의 등장이다. 이같은 배열에 대한 특별한 기호는 박수근의 작품에 뚜렷하게 발견되는 좌우대칭적 구도의 한 변주로 간주할 수 있을 것 같다.
<앉아 있는 여인>의 두 여인은 측면을 보인 전형성이 뚜렷하면서 인물의 묘출이 예각적이다. 뭉툭하게 자른 듯한 인물의 마감이 어딘가 모르게 기계적인 파악의 흠이 엿보이지만 잔잔하게 분위기로 이끌어 간다.
노상
<노상의 사람들>은 네 개의 단위적인 이미지가 합성된 구도의 작품이다. 아이를 앞에 세우고 앉아 있는 여인과 목판을 앞에 둔 노점상의 여인이 서로 대향하게 배치되었고, 상단엔 뒷면을 보이는 노점상 여인과, 세 사람의 노인들이 둘러앉아 있는 장면이 나란히 배열된다. 이 네 개로 독립되어 있는 인물상은 상하로 이분해서 두 개의 면을 만들어도 무방하고 좌우로 두 개의 면을 갈라 놓아도 무방하다. 화가는 화폭에 맞게 이들 이미지들을 분산시키기도 하고 또 때로는 합성시키기도 한다.
좌판
아이들을 데리고 길가에 나와 쉬고 있는 여인상의 <노상>이나 아이를 데리고 있는 부부 노점상의 <좌판>도 인물을 비스듬한 측면이나 뒷면에서 걷잡고 있는 공통성을 발견할 수 있다. 앞면을 나타내는 구도의 인물상도 없지 않지만 대부분의 시선이 측면 아니면 뒤쪽에서 잡고 있다. 대개 이런 시각은 맞닥뜨리지 않는, 조용히 지켜보는 시각이 될 것이다. 박수근의 화면을 관류하는 것은 이 조용히 지켜보는 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