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화가 일품(日品) 최쌍중
호남의 현대 서양화단이 오지호로 상징되는 자연주의와 인상주의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면, 최쌍중씨는 서울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그 화맥을 이어받은 작가로 인정받아 왔다. 신세계갤러리에서 오는 23일까지 열리는 최쌍중 서양화전은 작년말 타계한 그의 유작전이기도 하다.
최쌍중씨 작품의 출발점이자 귀착점은 자연. “현장감 있는 그림이 생명이 길다”는 평소 지론대로, 그는 자연의 다른 시간과 무수히 변하는 상황들을 직접 만나고 사람들을 겪으며 얻은 감흥을 캔버스에 따뜻하게 표현했다.
`눈길’에선 시골집 낮은 골목에 내려앉은 눈 사이로 아이를 업은 어미가 서있다. 눈은 순백의 아름다움이 아니라 질척한 흙길을 새기고, 어미의 굽은 등과 표정에서는 지친 삶에 대한 안쓰러움이 느껴진다.
황호경(신세계갤러리 큐레이터)씨는 “최씨의 작품은 거칠면서도 따뜻하다. 작가의 육신과 정신을 출산하고 키운 가난한 고향 땅의 모습이다”며 “그가 담아낸 남도의 자연과 사람들은 우리들 내면의 향수를 위로해 준다”고 설명했다.
나의 혼은 그림이며, 그림은 나의 종교
<불평하지 않는다, 다만 고뇌할 뿐이다. 탄식하지 않는다, 더욱 천착(穿鑿)할 따름이다. 쓰러지지 않는다, 저 미명의 새벽과 함께 올 찬란한 아침을 맞아야 하므로. 그들에게 한낮은 없다. 시대 또한 어둡다. 하여 대낮에 촛불 들고 현자를 찾듯 그들은 자신의 세계를 찾아 밤낮을 헤맨다. 결코 안주하려함이 아닌 그 세계, 성(城)이되 해자(垓字) 따윈 아예 없는 아름다운 영토, 그 예술의 성을 찾아 순례를 떠난다.>
“다만 끊임없이 창작의 세계를 향하여 비상하고픈 염원이 무엇인지를 세월과 함께 값지게 얻어 내었다. 이제야 그토록 찾던 그리움 같은 것이 아픈 상흔과 함께 깨달음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의 일생이 녹아있는 그림들, 삶과 죽음을 껴안은 색채가 은연중에 캔버스 가득 들어와 심상을 초연케 한다.” 3년 전 정착했다는 신둔면 도봉1리의 자택 마당엔 백일홍 마른 꽃대가 가득했다. 햇살이 환하게 드는 거실에서 마주 앉은 그의 얼굴은 다소 부기가 있었으나 눈빛은 형형했다.
작년 11월 서울 인사동 ‘갤러리 라메르’에서 가진 제10회 개인전 카탈로그의 서문대로, 그토록 찾던 그리움 같은 것이 깨달음으로 다가온 이제 그는 상흔만이 아닌 병고와 함께 창작을 이어가고 있다. 당뇨와 함께 온 신부전증으로 하루에 네 번 복막 투석을 하면서도 붓을 놓지 않는 그의 의지야말로 젊은 날 눈보라 속에서도 꿋꿋이 현장그림을 그리던 그 모습 그대로의 연장이다.
그림에 미친 후회 없는 일생
1944년 전남 담양 출생인 그는 홍익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후 수채화협회와 한국신미술회를 창립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다가 76년부터 3년간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며 유럽에 머문다. 뚫어진 구두로 눈이 들어와도 발이 시린 줄도 모르고 기뻐 돌아다녔던 그의 그림여행은 그를 새로운 조형에 눈뜨게 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안정된 구도에 자유스러움이 녹아있는 그 시기의 그림은 그 전의 까칠한 맛이 사라지고 고운 톤으로 처리된 이국 풍경과 함께 화면 전체에 높은 서정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때가 서른다섯이었어요. 구라파에 갔으면 이론적으로도 잘 배웠어야하는데 언어도 잘 소통이 안 되니까 심정적으로라도 느껴야한다는 생각에 참 열심히 많이 그렸어요.”
중학교 때 우연히 갔던 미술반 구경을 계기로 그림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 후 친구들과 어울려 좋아라 그림을 그리러 다녔고, 그럴 때면 항상 소풍가듯 들떠 이상한 흥분을 느끼곤 했다. 특히 어머니의 이해와 격려는 그림에 대한 의욕을 불사르게 해 소묘, 수채화, 유화, 판화 등 모든 장르를 넘나들며 열심히 그려나갔다. 상을 받고 안 받고를 떠나 꾸준히 자신만의 그림을 그려가며 좋은 화가로의 길을 모색하던 그는 군대 동기의 소개로 당시 초등학교 교사이던 한희순(58세)씨를 만나 결혼에 이른다.
“친척 오빠가 권해 만났는데 남자가 이러고저러고 군소리 안 하고, 한번 결정하면 끝인 게 장점으로 보였어요. 반대요? 집안 반대 같은 건 없었고, 이 사람이면 배고파도 좋으니까 살겠다고 결정했지요.”
그런 그녀였기에 그가 열흘씩 보름씩 그림여행에서 돌아오지 않아도 무던히 이해하며 기다렸으리라. 그 동안 봉고차를 세 대씩이나 말아먹으며 천지 사방 안 돌아다닌 곳 없는 그가 무사히 돌아오기만 기다리며 책을 읽고 글을 썼으리라.
소설가 부인과 작품 활동 위해 이천 정착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한 작가이기도 해서 그로부터 반 평론가란 대접을 받는 그녀가 한두 번 그를 따라 나선 적도 있기는 했다. 그런데 차를 대기 무섭게 답사를 한 뒤 이튿날부터 그리기 시작하면 옆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심심할 테니 돌아다니라고 내몰기 일쑤였다.
“낚시요? 글쎄요, 낚시도 그렇고 술담배를 전혀 안 하세요. 그림 그리기 바쁜데 그럴 시간이 어디 있냐고 그저 그림밖에 몰라요. 어느 정도냐 하면 뭘 믿으면 그림 못 그린다고 종교도 갖지 않을 정도예요.”
포장도 안 된 길을 헤매고, 여관도 없어 그냥 차 안에서 쓰러져 자 가며 그토록 열심히 추구했던 그의 현장 그림은 자연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현장감과 역동성을 획득한다.
“나의 혼은 그림입니다. 그림이 제 전부지요. 자연의 숨소리에 가슴 벅차하고, 조금이나마 그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보헤미안처럼 돌아다녔지요. 풍경을 떨어져보거나 사진으로 보고 그릴 수도 있지만, 전 좀더 가까이 다가가길 원했습니다. 현장감 있는 그림이 더 생명이 길다는 게 제 지론이지요.
실제 바다 풍경을 그리더라도 횟집 유리창 너머로 보며 그리는 것과 바닷가의 포말을 맞아가며, 또는 배에 올라타 그리는 건 차이가 날 수밖에 없어요. 그 살아있는 생생한 느낌이 저를 팽팽하게 한다고나 할까요.”
꿋꿋한 의지로 도자기그림도 해나갈 작정
강렬한 색채 속에서 피어나는 절정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잡아낸 그의 그림은 그 흡인력으로 보는 이의 눈길을 다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이제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뚝심 있게 40여년을 살아온 그가 그리는 남은 생은 어떤 모습일까?
한국미술대전을 비롯해 여러 미술전 심사위원을 하고, 인체 소묘에 대한 책을 내고, 중학교 3개 학년 미술교과서도 저술하며, 열 번에 걸친 개인전을 통해 한국 화단의 거목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그로서도 아쉬운 대목이 있을까?
“군대 갔다 오고, 결혼 하고, 애 낳고 하는 사이 살림에 신경 쓴 것도 아닌데 30대 40대가 금방 가버려요. 50대 조금 되니 건강 나빠져 버리고, 기념비적인 작품도 남기고 싶은 욕구는 여전한데 말입니다…. 그래서 얘기지만 젊은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적당히 하지 말라’입니다. 그림을 해서 어려운 게 현실이긴 하지만, 그림을 통해 얻는 내면의 즐거움과 기쁨에 만족하고 캔버스가 뚫어지든 뭐하든 열심히 밀어붙이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10년만의 개인전을 통해 자신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음을 보여준 그는 그 전시회를 6년 전 타계한 어머니(홍귀순)에게 바친다며 그의 그림에 목말라한 사람들에게는 단지 보여주기만 했다.
“몸은 불편해도 정신은 더욱 활발하고 그림에 대한 생각은 더욱 집중되시는 것 같아요. 그림 그릴 때가 가장 저 분 다워요. 앞치마 차고 그림 붙들면 세상에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원하는 분들이 있었지만 고생하며 그린 그림을 차마 팔지 못 하겠더라구요.”
부인 입장에선 건강과 바꾸는 것 같아 팔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서울 평창동 시절부터 꿈꿔온 소망대로 장차 자신의 미술관에 소장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황급히 지은 작업실을 개조하기도 그렇고 하여 망설이고 있다는 대목에서, 그의 고향인 광주쪽에서의 러브콜 전에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10년 넘게 견디다보니 이젠 내성도 생겼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은 저 사람에게 고마울 따름이구요, 지금 상태라면 차츰 이천의 예술계를 위해 도움 되는 길도 찾아보고, 청강대에서 도자기를 전공하는 큰 아들과 함께 도자기그림도 시작해볼 생각입니다.”
2004년 11월 제10회 개인전 때 친지와 자리를 함께 한 모습(맨 왼쪽, 맨 오른쪽이 부인 한희순 씨)
<자료 출처 :이천저널신문 제522호, 2005년 3월 10일자 12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