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경태
<차 례>
- 이윤을 낳는 황금 거위 : 마르크스 / 잉여가치
- 세상에 진리는 없다 : 니체 / 권력의지
-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 프로이트 / 무의식
- 언어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언어가 나의 주인이라니? : 소쉬르 / 기표와 기의
-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 : 후설 / 판단중지
- 세계대전을 조국의 내전으로 전화시키자 : 레닌 / 약한 고리
- 내안에 전체가 있다 : 융 / 집단무의식
- 빨리 움직일수록 시간은 천천히 흐른다 : 아인슈타인 / 상대성
- 거시경제학의 지평을 열다 : 케인스 / 유효수요
- 단절을 통해 발전하는 과학 : 바슐라르 / 인식론적 단절
-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급 : 루카치 / 계급의식
- 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형이상학 : 하이데거 / 현존재
-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마라 : 비트겐슈타인 / 언어 게임
- 혁명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다 : 그람시 / 헤게모니
- 태양 아래 내 것은 없다 : 라캉 / 욕망
- 자연이 설정한 인식의 경계 : 하이젠베르크 / 불확정성
- 가장 중요한 역사는 가장 느린 역사 : 브로델 / 장기 지속
- 밝은 계몽의 칙칙한 그림자 : 아도르노/ 계몽
- 부담스러운 자유 : 사르트르 / 자유
- 세계의 중심에서 탈락한 인간 : 레비스트로스 / 심층구조
- 현대의 신화 : 바르트 / 신화
- 벗을 수 없는 색안경 : 알튀세르 / 이데올로기
- 아는 만큼 보는 것과 보는 만큼 아는 것 : 쿤 / 패러다임
- 작은 것이 아름답다 : 리오타르 / 포스트모던
- 분열증이 정상인 신체 : 들뢰즈와 가타리 / 욕망
- 진리는 권력이 만드는 것 : 푸코 / 지식, 권력
- 기호를 통해 혁명으로 : 보드리야르 / 시뮐라시옹
- 자기가 뿌린 씨는 자기가 거둔다 : 하버마스 / 의사소통
- 저자도 독자도 없는 책 : 데리다 / 해체
- 매개라는 이름의 줄타기 : 브르디외 / 아비튀스
< 현대 철학자 30인의 약력 >
- 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 : 잉여가치 (이윤을 낳는 황금거위)
독일의 경제학자, 철학자. 그는 학자로서 자본주의의 운동 방식을 분석한 <자본론>을 저술 했을 뿐 아니라, 실천가로서 국제 노동자 협회를 조직하는 등 여러 가지 현실 정치 활동에도 열렬히 참여했다.
필요노동 시간을 초과하는 노동시간이 잉여노동 시간이고, 이때 노동자가 생산하는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이다. 그리고 그 잉여가치가 시장에서 판매되어 현실적인 이득이 되면 그것이 바로 이윤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노동자를 고용해서 생산한 자기 상품에 특정한 비율에 따라 이윤을 덧붙여 시장에서 판매함으로써 이윤을 얻는 것이 아니라 상품의 생산과정에서 이미 이윤을 얻는 것이다. 그러므로 흔히 잘못 알고 있는 것처럼 자본가가 이윤을 쪼개 노동자에게 임금을 주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의 임금이 되는 몫은 노동자가 생산하는 과정에서 함께 생산된다. 그러나 앞에서 본 것처럼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은 필요노동 시간을 기준으로 정해지고 잉여노동 시간에 생산한 잉여가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잉여가치는 모두 자본가의 수중으로 들어가 자본가에게 이윤을 안겨주고, 자본가는 그 이윤으로 재투자를 하여 사업을 확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는 유지되고 발전할 수 있다. 즉. 잉여가치의 생산이 자본조의를 번영시킨 결정적인 동력이다.
- 프리드리히 니체 (1884- 1900) : 권력의지 (세상에 진리는 없다)
독일의 철학자, 광인 철학자답게 그는 만년에 정신 질환을 앓다가 죽었지만, 인류 지성사에서 한 시대를 마감하고 다른 시대를 연 선각자였다. 오늘날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위치한 사상가들은 대부분 니체에게 정신적 빚을 지고 있다.
얼핏 생각하면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은 대단히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것처럼 들리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진리를 묻는 사람은 우선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는 의도를 숨기고 있다. 또한 지금의 세계는 진리를 찾아야 할 만큼 허위로 가득 찬 기만적인 세계라는 가치판단을 숨기고 있다. 그렇다면 그는 현상의 세계가 아닌 모종의 진정한 세계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는 현상의 세계는 그릇된 세계이며 진정한 세계는 참된 세계라는 도덕적 대립을 전제하고 있다. 그의 의도는 자신의 현재 삶을 뒤집어 자신이 설정한 진리에, 도덕에, 지식에 복속시키려는 데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청교도적인 도덕이며, 종교에서 가르치는 금욕주의다. 이렇게 니체는 진리에 대한, 순수를 가장한 탐구의 이면에 도덕적인 금욕주의가 자리 잡고 있음을 폭로한다.
하나의 물음 속에 내포된 의도. 의지를 읽어 내는 것은 곧 그 물음과 연관된 지식과 인식의 꾸러미, 즉 계보를 추적하는 일과 같다. 그래서 니체는 그런 질문방식을 계보학이라고 부른다. 계보학적 질문에는 단일한 대답으로 응할 수 없다. ‘진리가 뭡니까?’라는 장학퀴즈식 물음에는 단답형으로 대답해도 되지만, ‘진리가 뭔지 묻는 의도는 뭡니까?’ 한다면 주관식 질문이 되며 대답도 만만치 않다. 이 물음에 대답하려면 자기 족보(계보)를 속속들이 내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계보학을 내세우는 니체의 ‘의도’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니체는 그런 물음을 힘의 관계로 보고 있는 것이다. 객관적인 물음이란 없다. 동어반복과 같은 비생산적 물음이 아닌 한 어떤 물음도 힘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계보학적 물음은 힘과 그 힘에 의한 변형을 수용하고 있다. 계보학적 물음에는 이미 그 속에 힘 대 힘의 관계, 가치. 의지가 내재하고 있다. 언제나 가치중립을 외치며 가치판단을 뭔가 불순하게 보는 전통철학은 오히려 그 근엄한 태도 뒤에 모종의 가치를 숨기고 있으므로 오히려 불순한 것이다.
니체는 근대 철학을 완전히 뒤집어 놓는다. 그 동안 안정된 상태에서 불변적으로 존재해왔다고 여겼던 우리의 세계는 생성의 세계이며, 어떤 존재도 안정된 동일성을 누릴 수 없는 소용돌이의 세계다. 니체의 철학은 이성의 철학이 아닌 반이성의 철학, 실체의 철학이 아닌 관계의 철학, 정적인 철학이 아닌 동적인 철학, 계몽의 철학이 아니니 허무의 철학, 이원론이 아닌 일원론이다. 그저 충동이라든가 비천한 감각과 같은 것으로 여겨져 왔던 권력의지가 실은 모든 현상을 설명해주는 중요한 열쇠가 된다.
- 지그문트 프로이드 (1856-1939)
오스트리아의 의학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의 2대 발명이라 할 무의식과 정신분석학은 철학을 연구한 적이 없고 철학자를 자칭한 적이 없던 그를 현대 철학의 토대를 구축한 인물로 탈바꿈시켰다.
- 페리디낭 드 소쉬르 (1857-1913) : 기표와 기의 (언어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언어가 나 의 주인이라니?)
프랑스의 언어학자. 그의 구조언어학은 언어학 자체보다 오히려 구조조의라는 20세기의 커다란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소쉬르 역시 프로이트처럼 철학과 무관하면서도 현대 철학사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 에드문트 후설 (1859-1938) : 판단중지 (진리에 접근하는 유일한 방법)
독일의 철학자. 19세기를 유럽 학문의 위기로 부르짖으면서 그에 대한 철학적 대안으로 현상학을 주창했다. 데카르트를 극복한다는 애초의 의도를 충분히 실현하지는 못했지만 그는 근대 철학과 현대/ 탈현대 철학을 잇는 역할을 했다.
- 블라디미르 레닌 (1870-1924)
러시아의 정치가. 사회주의 사상가/ 실천가의 전형적 인물이라 할 레닌은 세계사에서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유럽의 후진국 러시아의 사회주의 혁명을 성공으로 이끌었으며, 직접 유물론 철학을 기초하기도 했다.
- 칼 융 (1875-1961)
스위스의 심리학자, 프로이트가 무의식을 발견했다면 융은 이 정신분석학적 개념인 무의식을 더욱 발전시켜 집단무의식이라는 심리학적 개념으로 만들었다. 프로이트와 더불어 현대 심리학을 발전시키는 데 주요한 공헌을 한 그는 만년에는 연금술과 동양적 신비주의로 기울었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1879-1955)
독일의 물리학자,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에 비견될 만한 현대 물리학의 최대성과인 상대성 이론을 정립한 그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반 물리학을 뒤흔든 30년’을 선두에서 이끌었다. 그의 상대성 이론은 물리학 이론이지만 주관-객관의 구분이 허물어지는 19세기 지성사의 흐름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 : 유효수요(거시 경제학의 지평을 열다)
영국의 경제학자. 그는 흔히 주류 경제학이라고 부르는 철저하게 자본주의적인 경제학, 그 중에서도 거시 경제학을 입론한 인물이지만, 자유로운 사고방식과 상상력이 풍부한 발상의 전환은 오늘날의 주류 경제학자들을 반성하게 만든다.
유효수요란 가치가 이윤으로 실현될 수 있는 수요를 가리킨다. 아무리 많은 상품을 생산했다 해도 이 상품에 대한 수요가 효과적으로 형성되지 않으면 이윤은 나오지 않는다.
케인스의 탁월한 점은 그의 경제이론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발상의 전환에 있다. 굳이 고정경제학자가 아니더라도 생산의 규모로 경제 활동수준을 측정한다는 생각은 상식이다. 그런데 케인스는 산출량과 생산능력이 아니라 수요가 경제활동 수준을 결정한다는 파격적인 생각을 한 것이다. 생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고전경제학이 생산주체인 노동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서 총생산량이 결정된다고 본 데 비해 케인스는 마치 오늘날의 대량소비 사회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기업가가 예상하는 유효수요의 규모가 생산량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가스통 바슐라르 (1884-1962) : 인식론적 단절(단절을 통해 발전하는 과학)
프랑스의 과학철학자. 쿤의 패러다임 이론보다 앞서 인식론적 단절이라는 개념으로 과학의 발전이 단절과 비약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을 선구적으로 주장했다. 그의 영향으로 이후 프랑스 현대철학은 과학철학의 관점을 대폭 수용하게 되었다.
과학의 발전이 단순히 기존의 과학을 수정하고 정정하는 과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대체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무엇으로 대체된다는 것일까? 바슐라르는 그것을 문제틀 (problematique)이라고 말한다. 역사는 문제틀의 변전과정이다.
상식은 새로운 과학적 사고가 나타나지 못하게 방해하면 새로운 과학적 사고가 나타났을 때에도 그것을 일상적 사고, 즉 상식의 수준으로 떨어뜨리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바슐라르는 이러한 상식을 인식론적 장애라고 부른다. 과학혁명은 이 장애를 넘어서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시간과 공간이 별개의 것이며 우리의 이성에 이미 주어진 것이라는 상식을 뒤집음으로써 출현할 수 있었다.
.. 그래서 바슐라르는 모든 철학에는 일단 부정의 철학, 비철학(philosophie du non)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비철학이 온전한 철학으로 발전한다면 비철학이라는 낙인은 버릴 수 있겠지만 그것은 곧 그 철학의 완성인 동시에 죽음이 된다. 따라서 살아있는 모든 철학은 비철학이다. 그러나 비철학 역시 철학의 한 형태 아니냐고 형식논리적으로 항변한다면 할 말이 없으나, 아직까지 우리의 상식에서는 비철학은 역시 미완성이다.
- 게오르기 루카치 (1885-1971) : 계급의식 (꿈을 실현할 수 있는 최초의 계급)
헝가리의 철학자. 누구보다도 마르크스의 사상에 충실하고자 했으면서도 경직된 소비에트 이데올로기로부터 비 정통이라는 비난을 받았던 그는 철학과 정치, 사상과 실천을 통일하고자 했던 근대적 사상가의 마지막 전형이었다.
- 마르틴 하이데거 (1889-1976) : 현존재(막다른 골목에 부닥친 형이상학)
독일의 철학자. 후설의 현상학을 이어받아 현상학적 존재론이라는 독특한 철학적 관점을 발전시켰다. 인식론의 극복으로 존재론을, 형이상하의 극복으로 언어를 내세운 그는 현상학과 실존주의 계열뿐 아니라 탈현대 사상의 조류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으며 아직도 그의 사상은 충분히 연구되지 못하고 있다.
-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1889-1951)
오스트리아의 철학자. 단 두 권의 철학서로 서구 철학계에 커다란 파문을 던진 그는 칸트 이래로 칩거와 은거 생활 속에서 철학을 한 차가운 철학자이다. 그러나 일상생활의 언어 실천을 테마로 하는 그의 후기 언어관은 그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메마fms 논리실증주의와는 달리 뜨거운 것이었다.
- 안토니오 그람시 (1891-1937)
이탈리아의 철학자. 사회학자,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운동을 주도하고 이탈리아 공산당을 창건한 그는 짧은 생애의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내며 집필 활동을 했다. 루카치와 비슷하게 그 역시 가장 정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였으면서도 이단 취급을 받았다.
- 자크 라캉 (1901-1981)
프랑스의 의사,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사상에 구조조의를 접목하여 독특한 타자의 철학을 전개했다. 프로이트와는 달리 그는 철학, 문학, 인류학, 언어학, 예술에까지 이르는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구조조의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1901-1976)
독일의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과 함께 현대 물리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양자역학의 토대를 놓았다. 확실성의 학문 물리학을 가장 불확실한 학문으로 바꾸어놓은 대가로 노벨 물리학상을 받았지만, 그의 이론은 당대의 사상적 조류와 궤를 같이한다는 점에서 역시 동시대적이다.
- 페르낭 브로델 (1902-1985)
프랑스의 역사학자, 현대 역사학의 커다란 흐름을 주도하고 있는 아날 학파를 창립했고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구조주의와 역사학을 결합했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보는 역사는 가장 느린 역사, 곧 장기 지속의 역사이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 (1903-1969)
독일의 철학자. 비판적 사회철학을 주장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이끌었다. 이성이 파시즘과 전쟁은 낳는 것을 겪으면서 인간 이성의 양면성을 몸소 체험한 그는 도구적 이성의 파괴성을 극복할 대안으로 비판적 이성을 제시했다.
- 장 폴 사르트르 (1905-1980) : 자유 (부담스러운 자유)
프랑스의 철학자. 소설가. 행동적 지식인의 원조라 할 그는 현상학, 실존철학, 마르크스주의를 오가는 등 사상적 편력이 잦았으나 소설 희곡 등 문학에도 조예가 깊은 팔방미인형 사상가였다.
20세기에 꽃피운 민주주의란 대체로 이런 방식의 제도다. 법을 만드는 기관(케이크를 자른다)과 법을 집행하는 기관(케이크를 고른다)이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꼭 올바른 해결방식이라고 하기 이전에 일단 누구도 불만이 있을 수 없는 방식이다. 자유의 제도적인 제한,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요체다. 쉽게 말하면 민주주의란 모든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고 싶어한다고 가정하고 나서 (만인의 만인에 대한 이리), 그것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현실적으로 조정하려는 제도다.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자유의 반대말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속이고 또 하나는 필연이다. 구속은 가난하다. 법의 집행과정에서 범죄인을 구속하는 것을 생각하면 쉽다. 그 반대말이 자유라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 더 철학적인 의미엣 자유의 반대말은 필연이다. 필연은 인간이 만든 인위적인 ‘법’이 집행되는 것이 아니라 ‘법칙’이 관철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는 자연법칙이 무조건적으로 통용되는 것을 필연이라 한다. 물은 그 자연법칙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전통적인 해석을 무너뜨리고 자유를 그 반대말인 필연 같은 것으로, 오히려 인간에게 주어진 숙명으로 본 철학자가 있다. 바로 ‘자유의 철학자’ 사르트르 이다.
19세기 중반에 독일 철학자 후설이 현상학으로 그 지평을 열고 니체, 키에르 케고르, 야스퍼스 등이 발전시킨 실존철학은 20세기 초 하이데거에 와서 ‘실존적 현상학’ 혹은 ‘현상학적 존재론’으로 더욱 정밀하게 다듬어진다. 이 하이데거의 철학을 받아들여 자유의 철학적 개념을 정립한 사람이 사르트르다. 자유를 한자로 하면 自由가 된다. free라는 말에 ‘공짜’라는 뜻이 있듯이 프리덤은 ‘마음대로 한다’는 뜻이 쓰여 있다. 이에 비해 自由는 훨씬 철학적인 뜻을 담고 있다. 스스로 자, 말미암을 유, 스스로 말미암는다. 즉 자기가 자기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다. 사르트르의 자유는 바로 이 근원, 즉 자신의 존재근거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의미는 한자어 자유와는 정반대다. 스스로의 내부에 근거를 가지고 있는 게 自由라면 사르트르의 자유는 근거의 결핍 즉 무근거성에서 비롯된다. 실 끊어진 연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처럼 자유는 바로 실이 끊어진 상태를 가르킨다.
연은 자유로운 신분이지만 아제 다시는 땅에 내려오지 못한다. 갈기갈기 찢겨 죽음을 맞이하기 전까지는.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도 그것처럼 숙명적인 것이며 죽음이 오기 전까지는 자유에서 탈출하지 못한다. 자유에서 탈출하다니? 이 묘한 역설은 바로 자유가 인간에게 부담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자유는 인간존재에게만 고유한 것이다. 하늘에 떠 있는 구름이나 들판에 있는 돌, 산에 있는 나무나 풀 따위는 모두 사물로서 즉자존재다. 그렇지만 인간존재는 대자존재다. 즉자존재는 자신의 존재 근거를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으므로 그 자체로 (즉자적으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대자존재는 결핍된 존재, 즉 속이 텅 빈 존재이다. 따라서 대자존재는 자신의 빈 속을 채우기 위해 다른 무엇(대상)이 필요하며 그 다른 것이 없이는 자신도 존재할 수 없다.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게 일상생활에서는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생활 속에서는 그런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경우나 그런 조건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더 많으므로 ‘자유의 부담’이란 역설일 뿐이며 사치스런 핑계다. 그런 점에서 사르트르의 자유는 흔히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구체적인 인간존재의 모습을 그려내지 못하고, 철학적 관념론에만 머물렀다는 비판을 받는다. 하지만 사르트르의 자유는 일상적인 의미의 자유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그의 자유는 본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자유를 가리킨다. 일상적인 자유라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누구는 더 많고 누구는 더 적다는 식으로 얼마든지 이야기할 수 있지만 존재론적인 자유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피투성이‘로 태어나는 아기처럼 인간은 누구나 원해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이 세상에 내던져진다는 얘기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근거를 자기 속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이러한 무 근거성 때문에 필연적으로 자유로울 수밖에 없다는 실존철학의 명제와도 일맥상통한다.
사르트르의 가장 주요한 철학 저작은 <존재와 무>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한 자유의 개념은 사실 이 책의 제목 자체에 이미 녹아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존재’란 즉자존재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며, ‘무’란 대자존재, 인간의 존재방식을 가리키는 말이다. 자기의 안이 텅 비어 있기에 항상 바깥을 지향하며, 지향하는 것마다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밖에 없는, 자유로우면서도 자유의 부담을 숙명처럼 지고 있는 인간존재, 그렇다면 그 인간존재의 하나인 사르트르는 자유로웠을까?
사르트르의 유명한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금리생활자다. 그르므로 그는 생활고의 부담을 지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자유롭다. 하지만 로캉탱은 그 자유의 대가를 톡톡히 치른다. 그렇게 해서 남는 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에게 여분의 시간이 주는 자유는 r기껏해야 실존적 부담일 뿐이다. 그래서 로캉탱은 도서관에 가서 백과사전을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공부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견딘다. 역시 사르트르에게도 실존적인 자유는 부담일 뿐이었을까?
-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1908-) : 심층구조(세계의 중심에서 탈락한 인간)
프랑스의 철학자. 인류학자. 구조주의의 대명사라 할 그는 겉으로 보기에는 지극히 다양해 보이는 인간 사회들의 근저에는 뭔가 공통적인 요소가 있다고 믿고 그것을 추구했다. 그는 그것을 근친상간의 금지로 보고, 각 사회에서 근친상간을 금지하는 방식을 연구했다.
왜 주로 멜로디만 기억에 남는 가? 그것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고요한 밤>을 주로 노래로만 불러서 우리의 귀가 멜로디에만 익숙해져 있는 탓이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멜로디는 마디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데 화음은 잘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변하지 않는 것보다는 자주 변하는 것이 귀에 잘 들어온다. 화음은 멜로디보다 더 깊은 곳에 있다. 예를 들어 도, 미, 솔의 화음만 가지고도 수십 수백 가지의 멜로디를 앉힐 수 있다.
그래서 음악가들은 대개 멜로디보다는 화음과 리듬을 더 중시한다. 화음과 리듬을 알면 수많은 멜로디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멜로디가 표층에 있는 것이라면 화음과 리듬은 심층에 있다. 이렇게 심층에 있으면서 상대적으로 불변적인 요소, 이것이 바로 레비스트로스가 찾는 구조이다.
심층, 즉 구조는 많은 사람들에게 당연시되고 있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나 구성을 의문시하지 않는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당연시하는 것 속에 가장 중요한 것이 숨어 있다고 보았다. 프로이드와 달리 그가 관심을 가지 구조는 사회구조이므로 개인의 무의식과는 다르다. 그래서 레비스트로스는 구조를 사회적 무의식이라 부른다. 기존의 사회확과 인류학이 눈에 보이는 것, 확실히 대상화될 수 있는 것을 과제로 설정했다면, 레비스트로스는 눈에 보이는 것의 심층에 놓여 있는 보이지 않는 구조를 연구과제로 삼는다.
식탁위의 세균은 누구에게나 노출되어있지만 현미경이 없으면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다. 이때 세균들을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할까. 이와 마찬가지로 구조란 누구의 눈에나 드러나 있지만 모두가 당연시하고 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구조는 그 구조를 포함하고 있는 (이를테면 사회, 체계 등)이 존립할 수 있도록 해주는 역할을 한다.
‘근친상간의 금지’ 레비스트로스가 가장 크게 의존한 것은 구조언어학이다. “언어는 무의식과 같은 것”이라는 명제 아래 새로운 방향의 언어학을 정립한 야콥슨, 트로베츠코이 등 N조 언어학자들의 성과를 방법론으로 삼아 레비스트로스는 구조인류학으로 나아간다.
구조 언어학은 개별 언어를 문제시하지 않고 모든 언어의 바탕에 깔려 있는 무의식적인 언어구조를 발견했다. 레비스트로스가 현존하는 수많은 인간사회를 정밀하게 분석한 결과 밝혀낸 하나의 공통적인 요소는 바로 근친상간의 금지이다.
- 롤랑 바르트 (1915-1980)
프랑스의 철학자. 기호학자, 문학 평론가. 지금은 하나의 유행처럼 되어 있지만 당시로서는 선구적으로 매체와 대중문화를 기호학 안으로 끌어들여 연구 주제로 삼았다. 그가 구조주의 방법론을 적용한 분야는 대중문화뿐 아니라 문학, 연극, 영화 등 다양하다.
- 루이 알튀세르 (1918-1990)
프랑스의 철학자. 사회학자. 이론적인 방법에서는 구조주의에서 많은 것을 차용했지만 그는 투철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평생을 두고 마르크스를 연구했으며 죽을 때까지 프랑스 공산당의 당원이었다. 이 점에서 그는 구조주의자라기보다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 토마스 쿤 (1922- 1996)
미국의 과학사가. 자연과학자로는 드물게 철학, 심리학, 언어학, 사회학 등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과학사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이룩했다. 특히 그의 패러다임 개념은 과학사의 분야를 넘어 다른 학문에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 (1924-)
프랑스의 철학자. 포스트모던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그리고 노골적으로 표방한 그는 모든 것을 하나로 설명하는 본질론과 헤겔류의 형이상학을 거대한 담론으로 규정하여 거부하고 보편성에 기초한 모든 개념을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질 들뢰즈 (1925 -1995 )
프랑스의 철학자. 1995년 급작스런 투신자살로 지성계를 놀라게 ogTejs 그는 스피노자, 니체 등 서구의 전통 철학에서 이탈해 있는 사상가들을 자신의 뿌리로 삼고 정통이 아닌 이단, 다수가 아닌 소수, 동일자가 아닌 타자의 철학을 전개했다.
- 펠릭스 가타리 (1930-)
프랑스의 철학자, 정신과 의사. 프랑스 공산 당원이었던 그는 사회주의는 물론 프로이트, 라캉 등의 사상을 받아들여 정신의학의 틀 내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했으면 특히 들뢰즈와의 공동 연구로 많은 책을 간행했다.
- 미셸 푸코 (1926-1984)
프랑스의 철학자. 그는 먼저 자신의 이론을 세우고 그 이론을 역사 속에 적용하는 혁신적이면서도 정통적인 방법론을 정립했다. 그는 니체의 계보학과 프랑스의 과학철학적 전통을 창조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바탕으로 기존의 역사 속에서 배제되어온 타자 (광기, 성 등)의 역사를 재구성하고자 했다.
- 장 보드리야르 (1929-)
프랑스의 철학자. 기존의 정치 경제학이 아닌 기호학을 통해 현대 자본주의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했다. 현대/탈현대 사회에서 기호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며 물질보다 더 물질적인 것이 되었다. 이를 토대로 그는 현대 자본주의의 분석 도구로 기호의 정치경제학을 주장했다.
- 위르겐 하버마스 (1929-)
독일의 철학자. 사회학자. 비판적 사회철학의 보루를 굳건히 지키고 있는 그는 이성의 부정적 측면을 극복하는 길은 이성의 해체가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완성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사상적 조류와 스스로 구분되고자 한다.
- 자크 데리다 (1930-)
프랑스의 철학자. 자기 완결성을 기반으로 전개되어온 서구 형이상학이 드디어 장벽에 부딪혔다고 본 그는 해체를 통해 새로운 형이상학을 재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새 것을 낡은 것의 언어로 기술할 수는 없으므로 그는 동일성이 아닌 차이(차연)를 기술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는 차이의 철학을 주창했다.
- 피에르 브르디외 (1930-)
프랑스의 사회학자. 주체와 실천의 지평이 부족한 기존 구조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구조주의 내에 주체를 집어넣고자 했다. 주체와 구조를 잇는 매개 고리로서 그가 제안한 아비튀스라는 개념은 결정론적 구조와 의지론적 주체를 매개하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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