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지나면 아침은 오는데
그날의 맥주 잔에는 달빛이 고여 있었다.
대학로 골목 끝, 간판도 흐릿한 생맥주 집.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깜빡일 때마다 벽에 걸린 레트로 포스터들이 숨죽인 듯 움직였다.
철제 의자에 앉으면 차가운 냉기가 허벅지를 스며들었고, 테이블 위에는 늘 촉촉한 물기와 함께 누군가의 낙서가 남아있었다. 그곳에선 밤이 깊을수록 사람들의 어깨가 무뎌졌다. 취한 이들이 허공을 향해 내뱉는 수다, 입가에 맺힌 거품, 그리고 유독 높게 울려 퍼지던 주크박스의 노래—그 모든 것이 뒤섞여 한 편의 서사시처럼 느껴졌다.
그 서사시의 한 소절에 쥬다스 프리스트의 〈Before the Dawn〉이 있었다. 헤비 메탈 밴드의 이름을 단번에 외치던 그들이 내뱉은 발라드는 어쩐지 그 공간과 찰떡이었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 어쿠스틱 기타 선율은 천장의 검은 곰팡이 자국을 타고 내려와 우리의 맥주 잔에 잔물결을 일으켰다.
롭 핼퍼드의 목소리는 평소의 날카로운 고음 대신, 깊은 우물 속에서 건져 올린 듯 침울했다. "기다려, 아직 새벽은 멀었지만…"—가사는 늦은 밤을 견디는 이들에게 익명의 위로처럼 다가왔다.
우린 그 노래를 들으며 무언가를 기다렸다. 아마도 취한 머릿속으로는 ‘미래’라는 단어가 맴돌았을 것이다. 철 지난 신문으로 막은 창문 너머로 보이던 가로등 빛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논문 통과를, 누군가는 짝사랑의 답을, 또 누군가는 그저 내일의 아침밥을 기대했다. 밤은 깊어졌고, 우리의 이야기는 점점 가늘어졌다. 술병이 비워질 때마다 어깨를 짓누르던 무게가 사라지는 듯했으나, 정작 마음속에선 더 큰 허기가 일었다. "언제쯤 이 어둠이 걷힐까?" 노래는 계속 물었지만 우리에겐 대답이 없었다.
그 시절의 새벽은 늘 허술했다. 생맥주 집 문을 나서면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할퀴었다. 빈 술병을 들고 재활용 쓰레기통을 기웃거리던 아저씨, 지퍼를 올리지 못한 채 길바닥에 웅크린 취객, 그리고 새까만 하늘에 박힌 달—모든 것이 흑백 사진 같았다. 발걸음이 텅 빈 골목을 울릴 때면 〈Before the Dawn〉의 후렴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여전히 여기에…" 노래의 아련함이 현실의 추위와 겹쳐졌다. 청춘이란 이름의 그릇에 담긴 아찔한 공허함을, 우리는 서로의 침묵으로 달래곤 했다.
세월은 그렇게 녹슨 주크박스 속 테이프처럼 감겼다. 어느덧 그 골목의 생맥주 집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철거 현장 사진에서 나는 테이블 각인을 찾으려 애썼지만, 허사였다. 그러던 어느 밤, 유튜브 알고리즘이 〈Before the Dawn〉을 들려줬다. 추천 동영상 목록에 떠있는 제목을 보자 심장이 내려앉는 듯했다. 화면 속 가사는 여전했지만, 이제 그 곡을 듣는 나는 테이블 위에 손바닥 자국을 남기던 그 시절의 나와 다르다.
노래가 끝날 무렵, 댓글 섹션에 한 외국인이 쓴 글을 보았다. "이 곡은 어둠 속에서도 새벽을 믿게 해요." 문득 그 생맥주 집에서 롭 핼퍼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밤들이 생각났다. 우리는 정말로 새벽을 기다렸던 걸까? 아니면 그저 어둠에 익숙해져 버린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의 나는 알 것 같다. 그 시절의 슬픔이야말로 가장 순수한 ‘기다림’의 형태였음을.
밤은 여전히 깊지만,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온 새벽 빛이 종이를 적시네.
https://youtu.be/1Qjoffl_Lgo?si=XyRlx3pQhjDWVY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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