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시맨 그림인 타메 체초코의 ‘해와 달과 별’ |
▶ 감구와의 그림 ‘쟈칼과 두마리 닭’ |
▶ 대표적인 쇼나 조각품인 A.마쿠리로파의 ‘생각하는 사람’ |
등 떠밀려 떠난 네팔 여행에서 뜻밖에 '번개'를 맞으며 "사람 사는 거 말짱 도루묵이구나"하는 깨침을 얻었다는 한 디자이너. 그의 고백은 울림이 크다. "처음에는 죽을 맛이었다. 그동안 외국여행 가면 내내 쇼윈도나 쳐다보던 내가 네팔의 산을 걷고 또 걸으니. 그러다가 와락 자연에 안기던 순간이 있었다. 한 밤 중인데 별, 별 그렇게 많이 쏟아지는 별들…. 정말로 죽는 줄 알았다. 순간 울음부터 터져 나왔다. 그게 진주였다면 지금 재벌이 됐겠지? 곁의 8mm 비디오 카메라도 집어던졌다. 까짓 걸로 무얼 찍겠다고."
지난 주에 나왔던 책 '김훈은 김훈이고 싸이는 싸이다'에 소개된 디자이너 이상일은 그 사건 뒤 여행광으로 변신했지만, 시인 정해종(41)의 경우는 상황이 더 심각했다. 그에게 왕창 필이 꽂힌 건 아프리카. 또 하늘의 별 대신 남아프리카의 현대미술에 감전됐다. 멀쩡하게 다니던 직장을 접은 뒤 출판 에디터에서 전시 기획자로 변신까지 감행했다. 그게 모두 2001년 첫 아프리카 여행에서 받은 충격 때문이다.
경기도 일산에 전시공간 '터치 아프리카'를 세운 그가 쓴'터치 아프리카'는 외양으로는 미술 기행서. 2001년과 지난 해 두 차례의 굵직한 기획전을 가졌던 그가 쓴 저술은 한국인의 손으로 쓰여진 가장 애정어린 아프리카 역사.문화 입문서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하면 정글.사하라.가난.에이즈 따위를 떠올리지만, 그것이 착각일 수도 있음을 이 우아한 장정(아프리카 부시맨의 회화로 감쌌는데, 매우 고급스럽다)의 책이 보여준다.
"로버트 레드포드와 메릴 스트립이 주연을 한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메릴 스트립은 흑인들에게 글을 가르치려고 한다. 그때 레드포드가 일침을 놓는다. '흑인들에게 글이 없는 게 아니고 다만 쓰지 않을 뿐이요. 그들에게 언어가 없다고 생각하지 말아요'라고. 즉 서구인들의 문자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인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19쪽)
"아프리카인들의 시간 감각은 철저하게 그들의 자연과 문화를 반영한다. 그들이 느리고 부정확하다는 것은 우리 기준일 뿐이다. 외려 그들은 이렇게 물어올 것이다. '당신들의 속도에 대한 집착과 경쟁이란 인류에게 무슨 도움을 주는가? 그리고 당신은 행복한가?' 우리가 믿는 기계적 시간관과 문명의 비극이란 되돌아볼 틈도 없이 전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게 맹목이라할지라도…."(머리말)
사실 정해종은 처음에는 아프리카 현지에서 받은 문화적 충격으로 혼란스러웠다. "처음 부시맨들을 대했을 때에 바보스러울 정도의 그들의 사고 앞에 '어쩌자고 이들은 정보화 시대에 석기시대의 마인드를 갖고 있을까? '하는 질문부터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미술품을 보면서 생각을 바꿨다. 그들이 생각을 멈춘 게 아니라 내내 같은 생각으로 일관해왔을 뿐이라고. 석기시대의 마음이 진실이라는 믿음 하나 때문에…."
'터치 아프리카'는 책의 상당량을 1970년대 이후 유럽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쇼나 조각과 부시맨 그림에 할애하고 있다. 쇼나 조각은 아프리카 남부 짐바브웨의 현대미술이며, 부시맨 그림은 남아프리카에 흩어져 사는 6만 인구의 사람들이 그리는 회화. 이들은 현대미술 1번지인 뉴욕현대미술관(MoMA), 파리의 현대미술관 전시를 통해 모더니티를 이미 인정받았다. 토속 공예라는 딱지 대신 현대미술로 뜬 것이다. 상식이지만 70년대 이전 피카소도 '아비뇽의 처녀들'에서 아프리카의 모티브를 구사했다.
철저하게 돌의 형태를 존중해 만든 작품들이고, 풍부한 종교적 상징성을 갖는다는 점에서 서구미술과 또 다르다는 점도 설명된다. 그에 따르면 아프리카미술은 고대 이집트 이래 상징주의 미술의 한 형태. 원근법과 특정 시점(視點)이라는 회화의 원칙을 무시했기 때문에 얼핏 어린애 그림처럼 유치찬란해 보인다. 하지만 최근들어 '문명 이전의 지고지순한 시선'으로 각광받는 변화를 보이고 있다. 한편 저자 정해종은 91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받으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우울증의 애인을 위하여'등을 펴낸 바 있다.
조우석 문화전문기자<wowow@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