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펠탑(1926
들로네 Georges Rouault(1871-1958)프랑스의 화가 파리 출생. 주로 역사화를 그린 고전주의 화가 J.E.들로네의
아들이다. 처음에 신인상파의 그림에 관심을 가지고 색채 연구에 열중하였고 입체파 운동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만족하지 못하고 미래파의 동향 등에
촉발되어, 1912년경부터 순수한 프리즘색에 의한 율동적인 추상구성을 발전시켜서 오르피슴의 창시자가
되었다.
들로네는 1909년 경의 에펠탑 연작에서 분석적 큐비즘의 영향을 보여주지만,
피카소나 브라크와는 달리 색채를 지양하지 않는다. “로베르가 에펠탑을 부수어 버리지 말아야 할텐데…” 화가 두아니에 루소는 1910년 9월
2일, 종양으로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겼다. 아닌 게 아니라 들로네는 이 즈음하여 에펠탑을 화폭에 옮기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산업도시와 기계 예찬자였던 들로네는 철근으로만 만들어진 에펠탑 찬미자가 되었다.
공기.쇠그리고물(1937)
그리고,
이후에 그려진 <창> 시리즈와 <해,달> 연작에서는 비구상 계열의 순수색채회화를 보여준다. 그래서 아뽈리네르는 들로네와,
또 같은 시기에 이와 비슷한 작품을 보여준 쿠프카나 피키비아 등의 작품경향을 일컬어 <오르피즘>이라 부른다. 오르피즘은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에서 따온 말로(자신의 싯구에도 있다) 이들의 그림에서 느껴지는 순수한 색채의 율동성과 색채의 프리즘 효과를 나타내주는 말이다.
오르피즘은 그래서 오르페우스적 입체주의, 혹은 순수색채적 큐비즘이라 불려지게 된다.
1937년에 파리 만국 박람회의 철도관·항공관의
대벽화를 제작하였다. 이러한 입체주의 운동은 당대에 이탈리아의 미래주의와 러시아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으나, 그
본격적인 활동은 1차대전의 발발과 함께 종결된다. 물론, 입체파의 영향은 2차대전후의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운동에도 미치게 된다. 또한
색채론과 독일미학에도 조예가 깊어 V.칸딘스키, F.마르크, P.클레 등의 ‘청기사(靑騎士)’ 그룹전(展)에 초대 출품하는 등 국외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주었다. 부인 소니아(1885∼1979)는 러시아인으로 1905년 파리에 와서 10년에 그와 결혼하였다. 그녀 역시 오르피슴의
대표자로서 화사한 화면을 제작하였다.
붉은탑(1911)
오르피슴Orphisme
특징 1912년 무렵부터 R.들로네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한 화풍. 시인
G.아폴리네르가 그리스신화의 음악신 오르페우스를 따서 명명하였다. 들로네는 스스로 입체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그 형체 중시에 의한 색채 배제라는
점에 반발하여, 밝고 풍부한 색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밝은 색채를 되찾기 위해 M.E.슈브뢸의 색채론을 배워
색채대조법을 이론적으로 익히고, 이탈리아 미래파의 영향도 받아 색채와 형체의 조합에다 다이내믹한 운동감을 도입하여 화면에 음악적인 리듬과 선율을
가져왔다.
색채의 음악적·시적 이미지를 구체적인 대상에서 분리하여 순수하게 추구한 오르피슴 회화는 W.칸딘스키·P.C.몬드리안과
나란히 추상회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들로네 외에는 F.레제· F.피카비아 M.뒤샹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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