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파일]가장 미국적인 사실주의 화가의 탄생 - 에드워드 호퍼
Mornging Sun(1952
평범해 보이지만 가끔 ‘저 인간은 천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을 아주 드물게 만난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추고 있기에 그 특별함이 더욱 빛나고, 한편으로는 주변을 감쪽같이 속여온 것 아니냐는
생각에 오싹함마저 들 때가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현대미술작가 속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자면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를 들 수 있겠다.
Self
Portrait
야수파, 입체파, 다다와 초현실주의 등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예술의 시도가 난무했던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돌이켜본다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평범하다 못해 공허해 보이기까지 한다. 1930년대 언저리 미국 상업광고의
삽화로나 쓰였음직한 사실주의 화풍 역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퍼가 1930년대 미국 풍경화파(American Scene
Painting)의 대표작가로 손꼽히는 이유는 뭘까.
다시 한번 들여다보니 텅 빈 거리, 무표정한 사람들의 표정 등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더 강하게 와 닿는다.
순간 깨닫는다.
그림이 평범해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없어 느껴지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림 속의 대상이 지닌 공허함을 그만큼 실감나게 담은 그림이라는 걸
말이다.
1920년대 이후 산업화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 변화된 미국사회의 현실을 호퍼만큼 설득력 있게 그려낸 작가도 흔치
않다. Nighthawks(1942)
모더니즘 대신 삶의 진실 파헤치는
리얼리즘을
1882년 미국 뉴욕주 나이아크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호퍼는 청소년 무렵부터 이미 화가로서의 재능이 다분했지만, 그의 부모는
가난뱅이 예술가보다 먹고살기에 나을 거라는 계산에서 아들이 상업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길 원했다.
그의 그림이 마치 크기를 부풀려 놓은 광고삽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뉴욕예술학교에서 리얼리즘회화의 대가로 손꼽히던 로버트 헨리에게 사사했던 호퍼는 24세 되던 해인 1906년 10월 파리로
떠난다. 현대미술운동의 중심지였던 활기찬 파리에서 호퍼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사로잡혀있던 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모더니즘보다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리얼리즘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파리에서 한 일이라곤 고흐가 그린 풍경처럼 밤의 카페에 앉아 있거나 밤거리를
싸돌아다니는 일이었다.
몇 달을 파리에서 더 보낸 후에 1910년까지 유럽 여행을 지속했던 호퍼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차라리 과거의 명작, 그 중에서도 렘브란트의
‘야경꾼들’(1642)이었다.
어둠 속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빛은 호퍼의 그림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됐다. 호퍼의 대표작‘밤을 지새는 사람들’(1942)은 빛의
극적인 느낌을 강조한 3백년 전 렘브란트 그림의 또 다른 변용이라고 볼 수 있다.
3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호퍼는 밥벌이 수단이었던 일러스트레이션을 놓고 비로소 순수예술가로 전향했다.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는 그의 풍경화에서 인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텅 빈 거리는 극복할 수 없는 공허감을 보여준다. 둘 이상의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그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 빠져있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벽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호퍼의 그림 속에는 구원을 갈구하는 듯한 상징적인 요소로 ‘창’이라는 요소가 반복해 등장하지만, 창 내부에서 혹은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빛은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희망으로 나타난다.
경직된 인간군상 속에 드러나는 황량한 현대인의
삶
호퍼의 이름을 널리 각인시킨 것은 도시풍경을 그린 일련의 그림들이지만, 그는 시골 풍경이나 바다 풍경과 같은 자연에도 종종 눈을
돌렸다. 하지만 모든 인물들이 경직되고 소외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호퍼 그림의 특징은 자연을 그릴 때에도 유감 없이 드러난다.
심지어 파도를 묘사할 때조차 석고로 빚어낸 듯 딱딱하게 그려낼 만큼 모든 사물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없다. 그가 쏟아낸 그림들은 풍경이든
인물이든 산업화와 제1차 세계대전, 경제대공황을 거치면서 황량해진 미국인들의 삶을 오롯이 담아냈다.
리얼리즘의 아버지 쿠르베 이후 가장 탁월한 미국 리얼리즘 화가로 에드워드 호퍼의 이름을 꼽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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