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회 이의재 개인전
'감옥같은 실존을 통찰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2006년 11월 22일(수) ~ 11월 30일(화)
학고제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100-5 T.02-739-4937
Opening: 11. 22 오후5시
[인천전]
2006년 11월 30일(목) ~ 12월 5일(화)
신세계백화점 갤러리
인천 남구 관교동 15번지 T.032-430-1158
Opening: 11. 30 오후5시
감옥같은 실존을 통찰하는 데까지 나아가기
심상용(미술사학박사, 미술평론)
이의재의 세계는 시지각 상의 경이로운 경험을 제공한다. 우리는 세계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와 시야에 도시 전체를 초대할 수 있게 된다. 높은 곳에서 세계를 내려다보는 경험을 갖기도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한 인도자로서 금붕어는 때로 구름 위 까지 상승한다. 이 인도자는 우리의 시선을 태우고, 세계라는 수족관을 자유로이 오간다. 하지만, 그 목적이 감질나는 눈요기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아니다. 이 모든 것들이 실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단지 허황된 이미지거나 환상이거나 꿈인 것만은 아니다. 그 환상이나 꿈으로부터 접점 더 크게 메아리쳐 오는 우리 자신의 실존의 이야기들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
이의재가 이 경이로운 시지각을 설계하는 방식은 매우 문학적이다. 그 문법은 탈기하학적 은유와 어른들의 사유에선 보기 어려운 느릿한 상상력에 의거하고 있다. 세상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작가는 비둘기, 어린아이, 한 마리의 금붕어의 눈을 빌 것을 권한다. 그것이 티눈처럼 굳어버린 실존의 결박을 푸는데 훨씬 유리하기 때문이다. 사유의 올을 느슨하게 하고, 이성의 감시를 잠시 완화시켜보시라! 그리고, 금붕어의 느릿하고 침착한 유영에 동참하면서 어느덧 우리 자신의 실존의 장을 내려다보시라! 아니면, 허공에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딛는 아이의 보행으로, 우리가 매일의 일상을 사는 그 바로 위를 지나가 보라. 이 흥미진진한 경험, 경이로운 조망이 세계를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것으로 경험하게 할 것이다. 세계는 그 내부의 실존자들에겐 결코 허락되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의 비밀을 풀어놓기 시작할 것이다.
이의재의 권유를 따라 우리는 지금 자아중심적인 일인칭의 관점 밖으로 벗어나 있다. 밖으로 빠져나와 되돌아보는 세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침묵에 싸여 있다. 조용하고 적막한 도시는 빼곡히 들어선 가옥들과 아파트 단지들의 끝도 없는 반복 속에서 생기를 상실한 무색의 공간으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우리가 몸담은 실존의 초상이 그토록 무미하고, 지루하며 창백한 모습이라니!
이전에 우리는 세계의 진실을 이렇게 직면한 적이 없다. 우리는 단지 그 안에서 정신없이 버둥거렸을 뿐이다. 언제나 바빴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우리는 언제나 실존의 당사자고, 덧없는 영예의 수혜자거나 터무니없는 부조리의 희생자였다. 반면, 지금 우리는 세계로부터 떨어져 나온 실존의 제 3자로서, 정지된 시간의 틈새를 떠도는 유랑자가 되어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또는 불행하게도- 세상은 유랑자의 눈에 더 잘 포착된다. 삶은 그 삶의 이방인에게 더 잘 자신의 은밀한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 내부를 한 눈에 경험할 수 있는 위치는 외부다. 이들의 지혜에 세상은 보다 쉽게 통찰의 길을 여는 것이다. 일인칭의 시야를 벗어나는 것, 제3의 관점을 갖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우리는 이 일인칭의 전망 밖에서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계의 진실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매일의 삶을 꾸려가는 그곳이 혹 실존의 감옥이 아니었던가를 새삼스럽게 질문하게 된다. 내려다볼수록 그것은 마치 제레미 밴덤의 파높티콘(panoption, 원형감옥)과 유사한 맥락으로 읽힌다. 수많은 가옥들과 아파트들은 마치 수많은 단조로운 방들로 된 효과적인 감시체계의 일환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노출되어 있고, 감시되고, 관리되고, 통제되고 있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은-우리들은-부단히 감시되는 대상이다. 그리고도 우리 모두는 결코 자신만일 수는 없는 운명적인 연대성 속에 내던져 있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전체적 감시체계, 사회적 규율, 학교, 병원, 군대, 병원, 공장 같은 유폐와 감시의 망 속에서 철저하게 관리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는 원형감옥에 갇힌 채 교정을 강요받으며 살아가는 푸코적 의미의 광인들일 수도 있다. 우리가 느끼는 삶의 억압, 감시되는 느낌들, 단절감, 소외와 불안, 죄의식이 바로 우리 실존의 이와 같은 저변 때문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저 뿌연 먼지 층 밑으로 보이는 회색의 도시, 무채색의 단색조로 겨우 저조한 활기를 조율하고 있을 뿐인, 놀랍게도 움직임이 거의 포착되지 않는 도시의 한 유력한 해석학이다. 물론 가로등으로 밝혀진 야밤의 도로를 전조등을 밝힌 채 질주하는 자동차들이 눈에 띠긴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그 속도와 소음은 금붕어의 조용한 유영에 묻히고 말 정도로 미미하다. 침묵이 시종 화면 전체를 조율한다. 화려한 색과 소음과 역동적인 움직임 대신, 회색과 침묵과 정지가 이 세계를 형성하는 질서들이다. 이것은 절망과는 다른 어떤 것이다. 정지와 느림에 가까운 것이다.
이의재의 세계에서 움직임은 극적으로 통제되어 있다. 시간은 거의 정지된 것 같다. 여기서 허용되는 최대 속도라 해봤자 배가 볼록한 빨갛고 작은 금붕어의 지느러미가 내는 속도를 결코 넘어서지 않는다. 이는 초음속 비행기의 내부에서 경험하는 시간과는 정반대의 것이다. 음속과 초음속의 기능적 담화들, 시간의 단축과 공간의 정복 따윈 여기서의 시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공간은 빠른 이동을 장해하는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이의재가 만든 공간은 실존의 인력이 작동하지 않는 무중력의 장이다. 이곳은 그 밑의 일상을 가득 매우고 있는 굉음들, 모순, 긴장, 갈등의 모든 실존의 드라마들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허공, 즉 부재(不在)와 무(無)의 공간이 결코 아니다. 그곳은 대기 이상의 어떤 형용하기 어려운 의미로 꽉 찬 하나의 세계다. 그곳은 은유의 세계고, 상상력이 직조한 공간이다. 느린 시간의 출처이자 관조의 미학이 발생하는 곳이다. 평화로운 침묵을 허용하는 매우 예민한 정지, 또는 실존의 진실을 대면하는 침묵의 대합실이다. 1934년 겨울 남극 탐험 중 쓰여진 버드(Byrd)장군의 일기의 한 부분이 뉘앙스의 이해를 도울 것이다 : "동작을 멈추고, 침묵에 귀기울였다. (...) 놀라운 평화와 함께, 헤아릴 수 없는 우주의 흐름과 힘이 있었다. 소리없는 조화 속에."
이 정지, 무중력, 고요함이 우리를 세상의 보조를 맞추며 사는 것으로부터 벗어나 감옥같은 실존을 통찰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하는 힘의 토대다. 이의재의 이미지들은 이 실재하지만 보이지 않는 힘을 통해, 단순하고 침착한 삶, 미친 듯 서두를 필요가 없는 ‘진정한’ 실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친밀함과 따듯함을 놓지 않으면서도, 실존의 빈자리를 결코 간과하지 않는 것, 이는 영혼을 깊이 소유한 모든 것들로부터 들려오는 힌트들과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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