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목욕탕 vs 사우나

영원한 울트라 2006. 12. 17. 10:26


박희숙의 명화읽기 |목욕탕 vs 사우나

 

 

 

뜨거운 사우나 열기에 몸을 맡기면 일상의 고된 피로가 날아가 몸이 개운해진다. 우리는 사우나의 열기로 숨 막혀 하면서도 나른한 느낌이 좋기 때문에 사우나를 즐겨 찾고 거기서 휴식을 취한다. 아무리 샤워를 매일같이 할 수 있게 주거 환경이 바뀌었다고 해도 대중탕처럼 피로를 씻어 주는 곳은 없기 때문에 자주 이용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목욕탕처럼 금단의 구역도 없다. 남탕은 남자에게, 여자는 여탕에 허용될 뿐이지 이성간의 접근은 그 누구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호기심을 자극하는 장소다. 더군다나 분명히 벗고 있을 이성이 한 명도 아닌 무더기로 있을 것을 상상하면 더욱 더 즐거워져 훔쳐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청소년뿐만 아니라 성인도 마찬가지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기 때문에 목욕하는 이성을 궁금해하고 화가는 상상 속에서 목욕탕을 그림으로 표현한다.

 

쾌락의 공간 사우나
로렌스 앨마 태디마의 <테피다리움에서>

 

요즘은 사우나가 진화되어 단순히 씻기 위한 장소가 아니라 온 가족의 놀이동산이 되었다. 목욕탕이 재미있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었지만 아직도 목욕은 개인의 은밀하고도 아름다워지기 위한 공간이다.

서민들은 대중탕에서 휴식을 취하지만 부유층은 목욕과 더불어 개인적인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을 필요로 하고 그런 시설을 갖춘 곳으로 목욕하러 간다. 사용료가 비싼 고급 스파가 성행하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다.

로렌스 앨마 태디마(1836~1912)의 <테피다리움에서> 작품에서 테피다리움이란 로마 시대의 개인 사우나시설을 말한다.

역사상 목욕을 가장 즐겨했던 민족이 로마인이다. 기원전 33년에 율리아 수로가 건설되어 물을 자유롭게 쓰면서부터 로마에서 목욕 문화가 발달되었다. 그 이후 로마의 부유층은 휴식과 사교의 장소로서 반드시 목욕탕을 갖추어야만 했고 개인 사우나실인 테피다리움은 부유층의 상징이었다.

로마인에게 목욕은 씻기 위한 것이 아니라 쾌락의 행위였다. <테피다리움에서> 이 작품 속의 여인은 왼손에 낙타 깃털로 만든 부채를, 오른쪽 손에는 몸에 자극을 주기 위한 도구인 몸 긁개를 쥐고 있다. 곰 가죽을 깔고 누워 있는 여인은 목욕 후에 성적 자극을 주기 위해 도구를 쥐고 있는 고급 매춘부다. 로마 상류층 여성들은 당시에 외출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사회는 미모와 교양을 갖춘 매춘부가 필요했다. 그녀들은 매춘의 대가로 부유층으로부터 많은 돈을 받아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개인 목욕탕을 갖춘 저택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로렌스 앨마 테디마는 로마의 궁정여인 생활에 호기심이 많아 이 작품을 제작했다.

로렌스 앨마 태디마 <테피다리움에서>-1881년, 24×33, 나무판에 유채, 레이디 레버 아트 갤러리 소장

휴식의 공간 목욕탕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터키탕>

지금은 샤워가 일상적이지만 목욕이 오랜만에 하는 행사였던 시절이 있었다. 일상의 피로도 느끼지 못하는 어린 나이지만 어머니 손에 이끌려 억지로 씻는 것처럼 지겨운 일도 없다. 거기다 한 술 더 떠 같은 반 남학생이나 여학생이라도 만나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였다.

가뜩이나 씻기 싫어하는 나이인데 같은 반 학생을 만나면 부끄러움으로 무너져 버린다. 하지만 우리의 어머님들은 어린애의 자존심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행사를 치르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목욕을 자주 할 형편이 못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우리나라 서민들이 행사처럼 목욕탕을 갔던 것처럼 중세 유럽의 평민들도 목욕탕을 자주 이용할 수가 없었다.

목욕 시설을 집안에 장만하기에 너무나 비쌌기 때문이다. 중세 대중탕의 문화는 남녀 혼탕이었다. 혼탕이다 보니 남녀가 목욕탕에서 눈이 맞아 배우자 모르게 은밀하게 정을 통하는 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남녀 혼탕은 성도덕의 문란을 가져와 중세 이후 대중탕은 창녀나 건달 등이 애용하는 장소로 변질되었지만 목욕하는 여인처럼 자극을 주는 소재도 드물 것이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매료된 많은 화가들이 목욕하는 여인들을 즐겨 그렸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의 <터키탕>은 그의 말년의 작품이다. 젊은 시절부터 목욕하는 여자에게 흥미를 느낀 앵그르는 18세기 무렵 터키 주재 영국 대사 부인이 쓴 《터키탕 견문기》를 읽고 이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누드화의 정물화로 불릴 만큼 많은 여인들의 관능적인 몸을 표현한 <터키탕>은 앵그르 작품 중에 드물게 구성 자체가 공상적이다.

터키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앵그르는 상상으로 할렘의 여자들이 목욕하는 장면을 표현했다. 원래 이 작품은 사각형의 캔버스에 제작되었으나 그 후에 원형의 캔버스에 제작된다. 그것은 관음증을 자극하는 엄청난 효과를 주었다. 마치 열쇠구멍으로 목욕탕을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사물을 볼 때 열쇠구멍으로 본다는 것은 은밀한 것을 훔쳐본다는 의미다.

금지된 것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앵그르는 원형의 캔버스를 사용했다. 이 작품에서 악기를 들고 있는 중앙의 나부의 모습은 이미 앵그르가 <발팽송의 욕녀>라는 작품에서 보여주었던 자세를 재현한 것이다. 악기를 들고 있는 여인 오른쪽에 어색할 정도로 관능적인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인은 앵그르가 가장 신경을 많이 써서 표현했는데 두 번째 부인 델핀을 모델로 했다. 그녀 뒤에서 서로의 가슴을 만지고 있는 두 명의 여인은 동성애를 암시하고 있으며 왼쪽 끝에 요염하게 서 있는 여인은 처음에 그려 넣지 않았으나 나중에 앵그르가 구도상 넣었다고 알려진다.

<터키탕>은 앵그르가 83세에 여성의 누드를 다양한 방향에서 다룬 그 동안의 경험에 의해 집대성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터키탕>-1863년, 캔버스에 유채, 직경 198, 파리 루브르 박물관 소장

 

화가 박희숙
동덕여대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성신여대 조형대학원을 졸업한 후 7회의 개인전을 연 화가다. 2004년에는 《그림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를 출간하면서 작가로도 명성을 쌓고 있다.

 

출처 : 이코노믹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