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스크랩] 한국 서예사

영원한 울트라 2007. 2. 3. 23:53

우리나라에 한자가 들어온 시기에 관해서는 확실한 문헌이 없으나 대체로 B.C. 2-4세기 경 으로 추정되고 있다. 당시의 문자 자 료는 현재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며 다만 전 한(前漢)시대의 명문(銘文)에 새겨진 동경(銅鏡)이 평양지방에서 발견된 일 이 있고, 그후 낙랑군(樂浪郡)유물로서 와당(瓦當)이나 전(塼) 등이 출토된 바 있다.

우리나라의 서예는 당 초부터 중국의 직접적 인 영향을 받아 발전되었으며, 왕희지(王羲之), 구양순(歐陽詢), 안진경(顔眞卿), 우세남(虞世南) 등은 많은 영향을 끼친 서가들 이다.

 

1. 삼국시대

 

1) 고구려
고구려는 중국의 문자를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이다. 한인(漢人)들은 낙랑(樂浪)시대부터 5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일부에서 행정을 펴고 있었고 그들이 물러간 뒤에도 육지로 연접되어 고구려는 문화교류가 아니면 무력적 공방으로 그들과의 접 촉이 끊일 사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문화예술면에 있어서도 그들의 직접적인 영향을 민감하게 받아 들였다. 그 러나 당(唐)에 의 하여 왕조(王朝)가 없어지고 문화적 전승자가 없었기 때문에 문헌으로 전 해져야 할 고구려의 역사 마져도 겨우 왕의 세계(世系) 를 알리는 정도에 그치고 대부분의 사료는 오히려 중국측 자료에 의거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고구려 서법(書法)을 알려줄 수 있는 자료로는 예서(隸書)로 쓴 {광개토왕릉비(廣開土王陵碑)}와 해서(楷書)로 묵서(墨書)한 {년두루묘지(年頭婁墓誌)}와 행서인 {평양성벽석각(平壤城壁石刻)} 그리고 최근에 발견된 {중원비(中原碑)}와 북지(北地)에서 발굴한 고분벽서(古墳壁書) 수 점이 있다.

광개토왕릉비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는 거비(巨碑)로서 자체는 한자의 크기가 30cm에 달하며 높이 7m 의 4면에 빈틈없이 꽉 차여져 있다.

이 시기는 414년으로 중국에서는 해서가 상용되고 예서는 많이 쓰이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것인 년두루묘지도 해서를 쓴 것으로 보아 역시 해서 를 상용하였을 것이며 왕릉에서 예서를 쓴 것은 특별히 정중과 장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 생 각된다.

이 예서는 파임과 삐침이 없고 고구려에서 형성된 독특한 서풍을 이룬 자체이다. 얼마전에 발견된 중원비는 글자의 짜임 해는 능비(陵碑)와 공통된 것이 많으나 자체는 해서였고, 년두루묘(年頭婁墓)의 벽서(壁書)는 필력에 박력이 넘쳐흘러 생동함을 보여주었다.

평양석각은 성벽에 있는 것으로 행서인데 자체는 육조(六朝)의 특징을 잘 살린 힘찬 명품이다. 이는 상무적(尙武的) 이고 진취적인 고구려인의 정신을 잘 나타내고 있다.

 

2) 백제(百濟)
백제는 서법을 살펴볼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으로 현재까지 발견된 것으로는 공주 무녕왕릉의 {매지권(買地券)}과 부여지방에 서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의 2종 뿐이다.

고구려가 중국의 북조의 문화를 받아 들이고 있었던 것과는 달리 백제는 남 조와의 접촉이 많았다. 무녕왕릉비는 순수한 남조풍을 띤 명풍이다. 그러나 사택지적비는 북조의 풍미가 있기도 하다.

이로 미루 어 백제는 남북조문화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나 생각된다.

유려하면서 기품있는 왕릉지(王陵誌)의 필치는 당시의 수준높은 문화 를 나타내고 있으며 이 밖에도, 불상명(佛像銘), 와전명(瓦塼銘) 등이 유물로 남아있다.

 

3) 신라(新羅)
신라가 본격적으로 중국와 왕래를 시작한 것은 6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는 비교적 많은 유적이 금석문(金石文)에 남 아 있다. 율주에 있는 선사 시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암각화가 있는 암벽 하부의 마애기(磨崖記)는 가장 연대가 오래된 것인데 법 흥왕 때 것으로 추정된다.

다음으로 진흥왕 때 세운 창녕척경비(昌寧拓境碑)와 북한산, 황초령, 마운령 3 군데의 순수비(巡狩碑) 가 있으며 진평왕 때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최근에 발견된 단양적성비가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은 순수비로서 이 비는 신라에서 한문화를 받아들인 이후 법에 맞는 글자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이다. 문장이 병려체(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 도 전중건엄(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육조풍을 띠고 있다.

신라의 서법은 자유분방하게 운필 한 가운데에도 장중하면서 유아한 품격을 지니고 있으면서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은 삼국시대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고구려는 웅건강용(雄健剛勇), 백제는 우아유려 (優雅流麗), 신라는 전중질실(典重質實)함을 알 수 있다.

 

2. 통일 신라 시대

백제는 660년에, 고구려는 668년을 전후하여 신라와 당에 의해 망하고 신라가 통일된 왕조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는 당의 문화 를 받아들이면서 학술, 문화, 정치, 제도 등 모든 분야에서 당의 색채를 띠었다. 또한 당으로 유학을 가는 승려, 관료의 자제들 도 많았으며 그 곳에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이 시기에는 서법(書法)도 발달하여 많은 유적을 남겼다.

남 북조시대는 자체가 예서에서 해서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시기였기 때문에 그 서풍(書風)이 자유분방하며 고박(古朴)한 맛이 짙어 예술적인 풍격은 매우 높지만 자획 (字劃)과 결구(結構)에 대한 기본적인 법칙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였다. 당초의 명가들에 해법( 楷法)의 규범이 정립되었고 서가들이 개성있는 독자적 서풍을 형성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서적으로는 최근에 발견된 사본화엄경(寫本華嚴經)과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전해오는 고문서가 있을 뿐이다. 금석문(金石文)은 상당수가 남아있다. 초기에는 대체로 남북조시대부터 내려오는 왕희지체가 주축을 이루었고 뒤에는 당의 구양 순체를 많이 썼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가로서 제일로 꼽을 수 있는 김생(金生)은 당시 서적(書蹟)으로 남은 것이 없다. 고려 초 기에 와서 그의 글씨를 집각(集刻)한 낭공대사비(朗空大師碑)가 김생의 글씨로 유일한 금석인데, 그의 서법의 전형은 왕희지에서 나왔다 할 것이나, 왕의 글씨는 온화한데 비하여 김생은 그 전서가 유동미(流動美)와 여율감(旅律感)이 생동하는 변화를 여러 모로 살려서 한 획을 긋는 데에도 굴곡과 거세(巨細)를 달리하였다.

또한 자의 결구(結構)에 있어서도 상호조응(相互照應), 음양향 배(陰陽向背)의 묘를 마음껏 섭취하는 등 그의 천재적 예술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어 정말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다. 김생의 글씨는 낭공 비 이외에 법첩으로 전하는 전유(田遊), 엄산가서(嚴山家序), 당시첩(唐詩帖) 등이 전한다.

말기의 최치원(崔致遠)은 시문(詩文)에서 뿐 아니라 글씨에 있어서도 한 시기를 대표하는 명가(名家)이다. 그의 자선자서(自選自書)인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는 구양순(歐陽詢)의 아들인 구양통(歐陽通)의 도인법사비(道因法師碑)와 비슷한 신품이다.

통일 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에 비하여 양적으로 미치지 못할지라도 격에 있어서는 단연 우리 서예사상 결정에 달한 시기라 할 수 있겠다.

 

3. 고려시대

고려시대에는 과거제도가 당에서 도입되었다. 제술(製述)과 명경(明鏡)이라는 두 개의 과(科)를 두었는데 제술(製述)은 시(詩), 부(賦) 등 문학작품으로 응시하는 것이지만 글씨도 따라서 선을 보이게 되므로 서학(書學)의 수련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상황이 었고 이외에 잡과 (雜科)가 있었는데 여기에는 서업(書業)이라는 서사전문직(書寫專門職)이 있어 설문(說文), 오경(五經), 자양( 字樣)의 기본과목 외에 진서(眞書), 행서(行書), 전서(篆書)의 실기과목이 있어서 그야말로 서예의 발전과 보급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도 진적은 극히 드물어 금석(金石)은 비갈(碑喝)과 묘지(墓誌) 등이 많이 남아있다.

이 시대의 서법은 당 초기 대가의 필법을 주로 따랐으며 특히 구양순체(歐陽詢體)가 많았다. 구양순체는 자획이 방정건엄(方正健嚴)하여 한 자 한 자를 쓰는데 순간이라도 정신이 흐트러짐을 용인하지 않는 율법적(律法的)인 서법이므로, 특히 구체(歐體)가 많이 쓰인 듯하다.

고려시대의 명가 로는 구족달(具足達), 한윤(韓允), 민상제(閔賞濟), 안민후(安民厚), 임현(林顯), 오언후(吳彦候) 등이 있고 우 세남(虞世南)에 능한 이로서 이원부(李元符), 장단설(張端說) 등이 있으며 이 외에 김원(金遠), 채충순(蔡忠順) 등이 있다.
고려시대 중엽에 이르러 탄연(坦然)(1070 1159)이라는 대서가(大書家)가 출현했다. 탄연은 고승인 동시에 명필가인데 그의 법명 은 대감(大鑑)이고 속명은 손씨이다.

 일찌기 유학의 경전에 통하였고 불법에 들어가서 뒤에 왕사(王師)까지 되었다.그는 고승이 었지만 서예로서 그 이름이 더 높았다. 대표적인 그의 글씨로는 문수원비(文殊院碑)가 있는데 행서로서 왕희지의 성교서(聖敎書) 와 일맥상통하는데가 있으면서 일면 당대 이후로 전승되어 온 사경풍 (寫經風)의 필법(筆法)이 합하여 새로운 일체(一體)를 형성 한다.

그의 서는 유려하면서도 강철같이 굳센 골(骨)이 있다고 하여 김생과 더불어 신품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무렵의 서가로 승혜소(僧慧素)가 있는데 그는 당대로 부터 전해져 온 사경(寫經)에 바탕을 두고 세해(細楷), 대자(大字)에 모두 뛰어났는데 대표적 작품으로서 영통사(靈通寺) 대각 국사비음기(大覺國師碑陰記)가 있다.

고려시대 후반 무신난이 일어난 뒤에는 정권이 무인(武人)의 손에 넘어 갔고 문인들은 도피하거나 무인에 붙어사는 처지로 전락 되었다. 그리하여 전반적인 문화, 예술은 퇴보하게 되었고 글씨도 마찬가지의 운명이었다. 그러나 고려말기 원나라와의 밀접한 관계가 생기면서 활발한 교류가 전개되었다.

충선왕은 원의 북경에 만권당(萬券堂)을 지어놓고 있을 때 당시 서가중 최고인 조맹 부와의 교류가 많아서 당시 왕을 따라 원에 간 문인들은 조의 서체를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이군해(李君孩), 이제현(李齊賢) 같 은 이는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말기의 서가로는 예서에 능한 권중화(權仲和), 한수(韓脩) 등이 있었으나 초기에는 미치지 못했 다.  고려 시대에는 비갈(碑喝)외에도 경판(經板), 사경(寫經)등이 적지 않은데 특히 묘지(墓誌)는 200여점을 헤아리고 있다. 연대로 는 초기에서부터 말기에 이르기 까지 400여년에 걸친 모든 것이 나타나 있어 더욱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이 묘지(墓誌)들은 일반 비석과는 달리 자유스럽게 행필하여 친말감을 갖게 하고 서체도 다양할 뿐 더러 공굴(工掘)의 차도 심하고 정확한 연대가 기록되어 있어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 수 있는 커다란 가치가 있다.

 

4. 조선시대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는 문화적인 면에서 고려의 말기적 폐단을 척결하고 학자를 우우(優遇)하고 문치(文治)를 국시(國是)로 하여 서(書)의 왕성한 발전을 이루었다. 초기에 있어서의 조선의 서(書)는 고려시대의 서풍을 이어받아 조맹부의 서풍이 풍미하 였다.

조맹부는 원나라의 서예가로 호를 송설(松雪)이라 하여 그의 서체를 송설체라 하였다. 이는 충선왕때에 직접적으로 그에게 서 배워온 관계도 있고 그의 진적(眞蹟)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그대로 교본이 되었고 법첩(法帖)으로 간각(刊刻)한 것도 적지 않 았기 때문이다.

초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정도전, 권근, 황희, 맹사성 등이 있으나 이중에서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사람은 안평대군(安平大君)이었다. 안평대군은 고려의 계승과 유습(遺習)을 새로운 기운(氣運)으로 쇄신하려는 기세와 고유한 민족기질을 농후케 하려 는데 집중하고 계속적으로 서(書)의 연원을 탐구하는 한편, 진수(眞粹)를 체득하여 구현하려 하였따.

또한 안평대군은 서(書)에 만 능한 것이 아니라 문학에도 통달하여 시에도 능하였으며 박식(博識)은 고금에 통철(通徹)하고 도덕과 도량과 풍채에 뛰어났으 며, 사리에 통하여 많은 이의 존경과 귀감이 되었다.
중기에 이르게 되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게 되고 서예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를 보이게 된다. 먼저 송설체의 쇠퇴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송설체가 균정미(均整美)에 치중한 결과, 힘이 유약하고 여러가지 자형(字樣)이 판에 박은 듯이 변화가 없기 때문이 다.

그리고 왜란 동안에 많은 힘을 입었던 명나라의 서풍이 많이 받아들여지게 됨에 따라 문징명, 동기창, 축지산 등의 서풍이 유행하게 되었다.

또한 유학의 복고사상에 따라 왕희지의 서법으로 환원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론적 근거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에 왕희지의 법첩으로 전하는 것은 모두 위작이거나 몇 차례의 모필을 겪은 것이어서 진적과는 거리가 멀었다. 중기 의 서법이 현저하게 쇠퇴한 원인이 여기에 있다고 하겠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석봉(石峰) 한호(韓濩)를 들 수 있다. 한석봉은 왕희지의 글씨를 이어받아 일생동안 공을 쌓아 능 숙한 지경에 이르렀으나 서품(書品)이 낮고 격조와 운치가 결여되어 외형의 미만 다듬는데 그쳤다. 이것이 그대로 궁궐의 서사정 식(書寫程式)을 이루어 중국에서 말하는 천록체(千祿體)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 영향은 오랫동안 후대에 미쳐서 석봉체를 본받은 사람의 수가 많았고 서법이 쇠퇴하게 되었다. 후기의 서(書)를 알아보면 영조 이후에 일어난 자아각성으로 문예부흥적 기운이 농후하여 문화 전반에 걸쳐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이 시기의 서(書)는 한국 서예의 원천으로서 또 그 방향과 운명을 결정하게 되었다. 이 시기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백하 (白下), 윤순(尹淳)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각체에 능하였고 특히 행서에서는 각 서예가의 장점을 잘 조화시켜서 스스로 일가 (一家)를 이루었다.
18세기 후반부터 한국의 신진 학자들은 청나라에 가는 사신을 수행하여 그 곳 학자들과 지식을 교환하는 가운데 많은 지식을 넓 혔다. 서법에 있어서도 청나라의 새로운 사조들을 많이 받아들여 올바른 서법

이론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청대의 학술은 다양하 였으나 주축을 이룬 것은 고증학이었다.

이 때문에 금석학이 발달되었고 전서와 예서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으며 특히 비(碑)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여 졌다. 당시의 유명한 서예가로는 완원(阮元), 김정희(金正喜), 신위(申緯) 등을 들 수 있는데 특히 김정희 는 그의 독특한 서체로 이름이 높았다.

 

한국 서예사 II

한국서예사를 논함에 있어서는 대부분 중국과의 비교가 흔히 이루어짐을 본다. 이러한 비교 자체에 대해서는 가치의 평가를 가 질 수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어느 쪽의 문화가 더 우수하고 열등하냐 하는 순서를 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이러한 것을 따지는 자체가 무의미한 것이며, 사실 북방 유목민족이 중국을 통치할 때도 문화의 교류가 있었는 데 하물며 같은 정착 농경민족으로서 서로간의 대한 관계를 생각할때, 억지로 우열문제를 강조할 필요는 없겠다.

 

가. 삼국이전의 시대
삼국이전의 시대를 논하는 문제는 매우 어려운 점이 많다. 한국 고대사의 규명에 있어서 특히 한사군의 문제는 그 심각성을 더 해가고 있는데, 기존의 한국서예사를 다룬 책에서는 낙랑군(樂浪郡)의 유물을 가지고 설명을 시작하는 것이 많다.

하지만 본 입 문서에서는 그 부분에 대한 언급을 생략함으로서 좀더 관심있는 후배들에게 맡긴다.이는 민족주의를 표방하는 것이 결코 아니며, 단지 어느것이 진실인가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는 것이다.

 

나. 고구려
고구려 서법을 논함에는 참으로 어려운 점이 많다. 특히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물이 약간 밖에 없다는 사실은 퍽 안타까운 것이 겠다. 여하튼 고구려는 지리적으로 북방에 위치하면서 한족(漢簇) 및 북방민족과 끊임없는 접촉을 통해 발전하고 쇠퇴했다.

민족 의 방파제 구실을 하면서 고구려의 문화는 강인하여 굳센 진취적 기질이 나타났는데, 이는 매우 독자적인 기품이었다.

 

1) 광개토대왕릉비(廣開土大王陵碑)
이 비는 동서고금에 유래가 없는 거비(巨碑)로서 높이 7m의 4면에 빈틈없이 꽉 차여진 글자는 1800여자에 달한다. 이 비의 서체 는 예서체인데, 횡획(橫畵)이 수평에 가까운 직선으로 파책은 인정되지 않는다. 또한 비문(碑文)이나 서체등을 살펴볼때,다시 중 국과는 많은 다른점이 보이는 등 고구려인에 의한 고구려 특유의 정신이 잘 나타났다고 할 수 있겠다.

 

2) 모두루묘지(牟頭婁墓誌)

모두루란 사람의 묘지(墓誌)로 장수왕 때의 것이며, 중국에서는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벽상묵서(壁上墨書)이다. 서체는 해 서이며, 서풍은 육조(六朝)풍을 많이 준다.

 

3) 고구려 고성각석(高句麗 故城刻石)
평양성의 수축때 성벽에 각(刻)한 27자를 말한다. 서풍은 예법(隸法)을 갖추고 있어서, 육조의 예(隸)가 변하여 해(楷)로 이루 는 것을 볼 수 있다.

 

다. 백제
백제에 대한 서법을 논함에는 그 자료가 거의 없는 형편인데, 근년에 발견된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정도를 들 수 있다.

 

1)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부여에서 발견된 비인데, 비에는 세련된 문장의 노장사상이 나타나 있고 서풍은 건실한 북위의 전형(典型) 그대로이다.

 

2) 무녕왕릉지(武寧王陵誌)
공주 무녕왕릉에서 발견된 것으로, 서풍은 순수한 남조풍을 띠고 있다.

 

라. 신라
신라는 삼국중 가장 늦게 한문화와 접한것으로 알려져있다.

또한 한문학을 수용하면서도 자기네가 이해 할 수 있는 특유의 한자 사용법을 만들었음이 향찰과 이두식 문장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여하튼 통일 이전의 신라유적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진흥왕 순수 비(巡狩碑)가 가장 대표적이다.

 

1) 4종의 순수비(巡狩碑)
진흥왕순수비는 창녕비(昌寧碑), 북한산비(北漢山碑), 황초령비(黃草嶺碑), 마운령비(摩雲嶺碑)의 4비로서 전체적으로 북조서풍 (北朝書風)의 원칙에 가깝게 쓰여졌다. 창녕비와 북한산비는 마멸이 심해서 거의 알아볼수 없으나 황초령비는 그 명성이 중국에 까지 미쳐 중국인의 위비(僞碑)라는 의혹감을 자아낼 만큼 필치가 뛰어나, 마운령비와 함께 뛰어난 필세에 괄목한다.

이는 진흥 왕 당시 신라의 의기(意氣)를 대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통일신라의 서법을 논하기 이전에 발해왕조의 서법부터 논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발해에 대해서 특별히 자료 를 얻지 못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마. 통일신라
신라는 통일이전까지는 이렇다할 문화적 진보가 없었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통일을 이룩하면서 고구려와 백제 문화를 융합하고 또한 중국과 좀 더 활발한 교류를 통해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다.
실제로 통일 신라기의 금석자료는 매우 방대하여 금석에 있는 서법은 당(唐)과도 대등할만한 고도의 것으로 한국적인 근원을 이 루어 그 특색을 완성하여 놓았다.

이는 신라인 특유의 기질로서 한문화의 수용에 있어서 향찰과 이두식이라는 것을 만듦과 연결 시킬 때 무조건적이고 노예적인 문화 창조가 절대 아니었음이 나타난다.

이 시대는 주로 왕희지나 구양순의 서를 기본으로 하였는데 신품4현(神品四賢)의 제1인 김생이라는 대가가 출현하여 동방의 왕 희지란 칭호를 들을만큼 신품의 세계를 독점하고 있었다.

또한 신라 말기에 최치원도 이 시기를 대표하는 신품의 경지를 걷고 있 었다.
통일신라시대는 비록 고려시대보다 양적으로는 미치치 못할지라도 품걱에 있어서는 우리 서예사상 최고의 절정에 달힌 시기라고 할 수 있겠다.

 

바. 고려시대
우리나라의 왕조는 거의 500년간 유지 되었다. 이는 중국의 단명왕조에 비하면 너무나 유구한 세월을 이끌어간 것이다. 따라서 고려와 조선시대에서 서법을 논함에는 각기 다시 나누어 논하겠다.
고려의 시대를 3기로 나누면 다음과 같다.

① 제 1기 : 태조-예종 (200년) →고려의 전성기
② 제 2기 : 인종-원종 (150년) →동란기
③ 제 2기 :충렬왕-공민왕 (120년) →쇠퇴기

 

1) 제 1기 - 전성기
고려는 먼저 국가의 기초를 다지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을 하였다. 신라문화를 계속 이어 받아서 구세력을 회유하기도 하고 과거제를 실시해서 지방 호족세력을 견제하기도 했다. 여하튼 초기의 문화면에서는 당문화를 수용한 신라문화의 연장으로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 같다.

이러한 노력의 결실이 문종때 부터 그 빛을 발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를 고려문화의 황금시대라 칭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이는 무인세력이 주축이었던 고려가 문치주의를 표방하던 송문화를 어느 정도 수용하면서 나타난 결과와 고려초기의 위와 같은 노력의 결실이라고 생각한다.
이 당시의 서는 구법(歐法)의 영향을 받은 비가 많이 세워졌고, 기타 북위(北魏)나 우세남, 류공권등의 영향을 받은 비도 세워 졌다. 구법의 영향을 받은 서체로 세워진 대표적인 비로 법천사(法泉寺)의 지광국사탑비(智光國師塔碑)가 있는데, 이 비는 안 민후의 글씨로 고려초 전성기 문화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여기서 우리는 랑공대사비(朗空大師碑)를 잘 살펴야 한다. 이 비는 김생의 서를 집각(集刻)한 것인데, 2500여 자의 장문(長文) 으로 김생의 생존으로부터 300년의 시간이 뒤쳐저 세워진 것이다. 따라서 동방의 희지(羲之)라는 신품 제 일의 김생 서풍이 이당 시에도 상당히 유행했음을 알 수 있겠다.

 

2) 제 2기 - 동란기
고려는 초기의 전성기를 끝내고 점점 하향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이라고 한 말이 다시 적용된다. 이 당시 고려는 안으로는 귀족세력과 숭문경무(崇文輕武)등의 모순으로 중앙과 지방의 변란이 계속 이어졌으며, 밖으로는 대륙왕조의 교 체가 북방민족에 의해 자행되면서 더욱 혼란을 가증시켰다.이런 혼란을 평정한 사람이 최충헌이었는데,이 때 권력을 쥔 사람을은 무인들로서 문화의 주체세력인 문인들은 활로(活路)를 찾 아 중앙을 떠났으며 더욱 문화사업에만 열중하였다.

따라서 제 1기의 문화업적을 바탕으로 문화방면에서는 더욱 발전을 하게 되 었는데, 서예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소화된 당의 서체와 송대의 신 서체가 조화를 이루면서 신품4현 중 두명이 이시대에 배출되었 다. 신품 제 2인 탄연과 최우가 그 주인공이다.

신품 제2인 탄연의 대표적인 현존 작품으로 문수원기(文殊院記)가 있는데, 이 것은 독자적인 탄연체(體)의 형성전에 왕희지체(體)를 익힌 것이다.
이 시기에 빼놓을 수 없는 위대한 업적이 있다. 몽고의 침입당시에 강화도에서 강력한 신앙심과 애국심을 결합하여 만든 팔만 대장경이다.

팔만대장경 이전의 대장경은 당의 사경체(寫經體)를 근간으로 만든 반면에, 팔만대장경은 송체(宋體)를 근간으로 하 여 만들어졌다.

이러한 대장경의 글씨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당시 고려인의 정신이 가장 잘 나타나 있음은 절대로 부인 할 수 없을 것이다.

 

3) 제 3기 - 쇠퇴기
몽고 침입으로 자주성을 상실한 이 때는 고려의 특색을 많이 잃어 가고 있었다. 이런 현상에 박차를 가한 것이, 충선왕이 연경( 燕京)에 세운 만권당(萬卷堂)이었다.

물론 문화교류의 활성화에 큰 기여를 했으며 그 곳을 통해 많은 신학문이 수용된 것은 사실 이지만, 설치시기가 전체적으로 볼 때 매우 안좋았다는 것이다.

여하튼 만권당을 통해 직수입된 조법(趙法)의 서풍은 당시에 쓰 여지던 여러 서법중에 단연 앞장을 서고 있었다. 조맹부체(體)의 영향으로 조법(趙法)의 대가가 출현하게 되는데, 이 암(李 ) 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특히 이암의 글씨는 중국에도 영향을 줄 정도로 조법에 대해서는 완벽한 해석을 하였다고 한다.그러나 원왕조도 유구할 순 없었다.

명이라고 하는 신흥 왕조가 원을 멸망시키고 성립하면서 강력한 한족 복고주의가 성립되었 다. 이에 고려도 원으로부터 자주성을 회복하기 위해 이전 시대로 복귀하는 자주화 운동이 벌어졌다.하지만 500여년간 축적되온 종교,사회체제등의 내부 모순으로 분열,대립이 격해지면서 곧 멸망하고 말았다.

 

사. 조선시대
조선시대를 세 부분으로 나누는 까닭은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우리 민족의 끈질긴 생명력으로 모통의 왕조가 500여년간 지속되 었기에 전체를 하라고 일관한다는 것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조선을 다음과 같이 세 부분으로 나눈다.

 

① 제 1기 : 태조-명종 → 발전기
② 제 2기 : 선조-경종 → 암흑기
③ 제 3기 : 영조-순종 → 문예부흥기

 

1)제 1기 - 발전기
조선은 신흥왕조의 기반을 닦는 것부터 일을 착수하였다. 그동안 국가를 지배해온 불교에 대해 새로운 사상으로서의 전환, 농본 주의 정책, 한글창제, 과학기기의 발명, 의서(醫書)의 집성등, 이러한 정책적 노력은 신흥왕조 답게 진취적이었으며 그 결실 역 시 매우 풍성하였다.
서예는 고려가 신라말의 서풍을 이은 것과 같이 고려 말의 조법(趙法)을 그대로 연장하는 선상에 있었다. 하지만 고려 ㄸ와는 달리 새로운 기운과 민족정기를 표현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풍조를 집대성한 사람이 안평대군(安平大君)이었다. 안평대군 역시 조맹부의 서법을 근본으로 삼았다.

그외에도 여말선초의 보수적 지식인들에 의해 계속 이어진 건엄하고 장중한 탄연체와 안진 경체의 서풍이 배어나온 글씨들도 있었지만, 안평대군에 의한 조법의 부흥으로 거의 빛을 볼 수는 없었다.

 

2) 제 2기 - 암흑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우리 민족에 커다란 타격을 주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란 큰 전란이 있은 시기와 그 이후의 약간의 시기를 말하는 데, 전체적인 문화 현상을 보면 암흑기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당시 명은 조선을 도와 주게 된다.

따라서 명과 조선은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는 데, 임란 전까지 유행하던 조맹부의 서풍이 주춤하고 임란이후 명의 문물이 대거 수용되면서 문징명,축윤명,동기창 등의 새로운 서풍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병자호란으로 치욕적인 굴복을 당한 조선은 배청사상이 풍미하게 되었지만, 이는 문화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따 라서 청의 새로운 기풍이 외면 당하였던 것이다.

총괄하면, 이 시기는 기존의 조맹부 서풍을 계승한 한호(韓濩)와 문 축 동(文 祝 董)등 명인(明人)의 뒤를 좇는 정도에서 허적 일 뿐이었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꼭 다루어야 할 것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비록 청나라와는 문화적 교류를 매우 억제는 하였지만, 그래도 청나라에서 일기 시작한 고증학의 기운이 이 시기에 조선에 유입되기 시작한다.
따라서 17c말경부터 중국의 비 고문등을 수집하여 학습하던 일련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이우(李 )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러한 결과로 허 목(許穆)과 같은 사람은 중국의 고전서(古篆書)를 바탕으로 자신의 전서체(篆書體)를 확립했으며, 동국진체라 하여 우리나라에 알맞는 서체를 이뤄보고자 노력한 이광사와 같은 인물들도 있었다.

 

3) 제 3기 - 문예부흥기
여기서는 영·정조의 중흥기를 그 중심으로 삼고 있다. 이때는 실학사상의 대두로 대의명분 보다는 실질적인 것을 숭상해서 청 의 선진문물을 대거 수용하게 된다. 따라서 청의 고증학과 금석학이 수용되었는데, 이를 통해 기존의 서학(書學)도 성격을 달리 한 매우 특이한 것이 등장했다. 금석학의 대가인 김정희란 인물이 출현한 것도 이 시대이다. 전체적인 서풍은 한호의 서풍을 따 라 배우는가 하면 송대(宋代)의 미불이나 소식, 원대(元代)의 조맹부, 명대(明代)의 문징명·동기창, 청대(淸代)의 옹방강(翁方綱)등 매우 다양해졌으며 발전 도상에 있었다.

이와같은 서예상의 중흥이 곧 이어질 개항과 더불어 조선이 망함으로서 그 맥을 잃게된다.
 

-자료출처: 연세대학교 연서회

출처 : 솔 향기 가득한 뒷 동산
글쓴이 : 松 園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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