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혁 림
연륜(1916년생)이 말해주듯이 그는 현대사의 격동기와 다양한 문화 변동을 살아낸 몇 안 남은 이 시대의 원로 화가 중의 한 사람이다.
그는 부산미술전(1938년)에 '신화적 해변', '월광(月光)' 등의 작품을 출품하여 입 선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화가의 길을 가기 시작하였다.
지방작가들의 흔한 보수적 성향에 비하여 드물게 그는 현대미술의 전위적(前衛的) 조형 방법으로서 전통을 표현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 때문에 때로는 실험의욕이 자기 영역의 확대를 시도하여 발랄한 생명감의 발산에 빠져든다. 그는 해방 후 감격과 좌절을 겪고 통영문화협회 창립 동인(1948)에 참여했다.
6.25 이후 부산에서의 유랑 생활을 거쳐 국전에 입선했다. 피난지 부산의 화단은 전혁림 화가의 토대를 굳혀주었다.
비록 지방성이란 특징이 있다하더라도 창작의 보고(寶庫) 노릇을 했다. 고향을 지키며 싱그러운 물빛을 안고 살아가는 지역작가로서 지역성을 적극적으로 예술세계의 토대로 삼으며 꾸준한 제작생활을 하였다.
1979년 '계간미술'에서의 과소평가 받는 작가로 소개되면서 그의 이름이 본격적으로 조명받기 시작하였고 1980년 대에 도약기를 맞이한다.
그의 작품은 날로 성숙해지면서 자신만의 독자적인 세계로 깊이 천착해 갈 수 있었 다. 이러한 성과에도 그의 탐구혼은 쉴 줄 모르고 또 다른 차원의 조형 세계를 모색하고 있다.
지방작가라는 폐 쇄사회에 안주하지 않고 늘 일렁이는 파도처럼 의식을 잠재우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지적 호기심과 미의 탐구, 예술에 대한 열정이 오늘도 그를 젊게 불태우고 있다.
화조도 (전혁림)
화조도 전혁림 작
회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건 1935년 그때는 일제 치하였다.피카소를 좋아했고 예술이란 돈이 있어야 하고 강렬한 충격과 자극을 주는 한편 어느정도 탐욕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면서 우리나라의 미술게.특히 미술교육의 방식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던 것이 사실. 즉 우리는 유럽중심문화적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그리고 그림을 그림그리려면 사회전반의 여러가지로 흐르는 심미안을 가져야 하며 동서양 전과정을 두루섭렵해야만 한다고 강조한바 있다.
전혁림 미수 기념전(전혁림 미술관)
1975년 시인 김춘수 선생께서 전혁림 화백을 방문하시고 그때 의 인상을 詩로 표현한 것으로 두 분은 유치환, 윤이상, 김상옥 등과 함께 통영문화협회(1945)를 창립한 절친한 친구 사이였다. |
全爀林 畵佰 에게 김춘수(金春洙)
全畵佰, 당신 얼굴에는 웃니만 하나 남고 당신 부인께서는 胃壁이 하루하루 헐리고 있었지만 Cobalt blue, 이승의 더없이 살찐 여름 하늘이 당신네 지붕 위에 있었네.
▶ 사진은 1995년 전화백의 팔순 연 을 축하하기 위해 방문하셨다가 떠나기 전 담소를 나누는 장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