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염치 사라진 정치판
지각에 대한 향수는 민주화가 덜 된 사회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닌 듯하다. 1960년대 말 미국에서 대학 교정들이 온통 데모에 휩쓸리는 곤욕을 치른 뒤 대학들이 그 원인을 분석하고 대응책을 제시한 보고서들을 보면 ‘mindlessness’가 대학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각없다’로 직역될 수 있는 말이다. 70년 넘게 공산주의 실험을 해 왔던 러시아가 실패를 자인하고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1998년 여름 심각한 재정경제위기를 맞았을 때도 똑같은 표현이 나왔다. 세계적인 농경제학자 테오도르 샤닌에 따르면 러시아의 위기는 단순한 경제위기가 아니라 ‘krizis poznaniia’, 곧 지각의 위기라는 것이었다.
지각이란 전문지식이나 정치의식과는 구별되는 말이다.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 가운데도 지각없이 행동하는 사람이 많고 정치의식의 과잉이 오히려 지각없는 행동을 촉발하는 사례도 흔하다. 앎이 보편적 진리에 대한 깨침으로 연결되어 균형 잡힌 행동을 낳게 될 때 비로소 지각이 있다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각 있는 사람은 사물의 앞뒤와 상하, 그리고 경중을 가릴 줄 안다. 지각의 동반자였다가 지금은 함께 실종될 위기에 처한 듯한 말이 ‘분수’와 ‘염치’이다. 전자는 자기의 상대적 위치와 역량이 어떤 것인가를 감지할 줄 아는 능력이며, 후자는 부끄러움을 아는 능력이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한다면 측은지심, 곧 불쌍히 여길 줄 아는 마음일 것이다.
한편에서는 무한대의 창의성과 경쟁력만이 강조되고 다른 한편에서는 맹목적 평등주의가 판치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 분위기 속에서 지각, 분수, 염치, 측은지심 같은 말들은 수구 꼴통들의 잠꼬대쯤으로 외면당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각과 분수, 염치와 측은지심이 사라진 사회는 인간이 사는 사회라기보다는 금수(禽獸)들의 세계, 또는 조직폭력배의 세계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인문교육 강화만이 해법
지각과 분수와 염치와 측은지심이 사라지는 것을 막는 방법은 가정과 학교에서 사라져 버린 인문교육을 강화하는 길밖에 없다고 본다. 제대로 된 인문교육은 돈 버는 데 직접 도움을 주지는 못할지라도 사람은 왜 사는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깨우쳐 준다. 위기를 겪으면서 미국의 대학들이 내린 결론은 인문교양교육의 강화였다. 소련 또한 스탈린의 학정(虐政) 시절에도 푸시킨 읽히기를 중단한 적이 없었다. 미국은 바로 그런 인문적 소양이 바탕이 되어 이상주의가 살아남아 있기에 세계패권국가로서의 위상을 유지하고, 러시아도 공산주의 환상을 뒤로하고 강대국으로 거듭나고 있다.
‘선진화’가 새 시대의 구호로 떠오르고 있지만 경제가 아무리 잘되어도 지각과 분수, 염치와 측은지심이 없다면 세상은 살 만한 곳이 못 될 수가 있다. ‘내가 왜 사는가’를 깊이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상사의 명령이나 동료들의 압력이라도 도리에 어긋나면 거부하고 눈앞의 이익이나 출세보다는 후세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까를 생각할 것이다. 지각없는 사람은 덜된 사람이고, 그런 사람들이 판치는 사회는 오래 번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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