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 서양의 공간개념
미술은 시점 (point view) 즉, 보는 (view) 위치 (point)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2만여 년 동안 서구 미술은 공간과 물체를 중심으로 운동, 변화, 빛, 리얼리티 (reality), 4차원 그리고 가상현실까지 세계를 보아 왔다.
이러한 미술의 변화 속에서 공간을 기록하고 인식하기 위한 인간의 태도는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 미술에 있어서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 네 차례의 시각적 혁명 - 그리드(grid)/원근법 - 카메라 - 복제 기계 - 컴퓨터 - 로 이어져 왔다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렌즈라는 기계 눈의 등장은 인간의 보는 방식을 결정적으로 변화 시켰다.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람과 사물 사이에는 렌즈라는 기계의 눈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인간은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인식해 나갔다.
즉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현실세계를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이라는 이분법(二分法)으로 구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혁명의 발달로 인해 물질적인 면이 무한히 확장되어 자연을 완전히 정복한 반면, 정신 혹은 영혼이 거주하는 실재의 한 부분으로서의 정신 공간의 개념은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분은 회화(繪 )에서도 영향 받아 각 시대의 공간에 관한 사상을 반영하여 오늘날의 현대 미술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에 동양에서 말하고 있는 공간은 무(無)의 세계와 접한다. 이것은 무한(無限)의 공간인 대우주(大宇宙) 자연의 외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 내적 현상을 가능케 하는 만물 생성의 근원적 공간을 의미한다. 즉 평면은 감성(感性) 지각(知覺)의 장으로 변하며 평면에 새로이 생기는 공간의 유동적 자율성을 강조하여 정신의 내면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도가 사상(道家 思想)·유가 사상(儒家 思想)·선가 사상(禪家思想)이 회화에 영향을 준 점은 절대적이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상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 뿐 아니라 서구 여러 나라에까지 사회적·심리적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상들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동양회화의 가장 중요
한 조형요소는 여백(餘白)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여백의 정의
는 "그림에서 묘사된 대상 이외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여백
의 정의는 비단 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 (文學), 음악(音
樂), 서예(書藝)에서도 여백의 의미를 폭넓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공간을 인식하기 위한 동·서양의 견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공간에 대한 인간의 사고(思考) 작용은 통
일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의 태도는 동일하지 않다. 그 이유로
는 물리적(物理的)·사회적(社會的)·개념적(槪念的) 환경 뿐 아니라
개개인의 심리적 세계 안에 존재하는 환경으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조건의 공간일지라도 인간의 반응은 다양하게 표출 될
수 있다. 이것은 시각적(視覺的)공간과 지각(知覺) 공간이 다르기 때
문이다. 그러나 본인에게 있어 서양회화와 동양회화의 공간은 그 본질
을 같이 한다고 믿으며, 궁극적으로는 동·서양의 회화가 추구하는 바
가 같은 귀결점에 이른다고 본다. 단지 서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이며 그에 따른 재료와 사상이 다를 뿐이다. 현대사회는 각
종 정보통신망의 발달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교류가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현대사회에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음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비록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만이 아니라 예술에서
도 마찬가지여서 동·서양 예술계에서의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밝
은 전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은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방법적인 면에서는
서구 회화의 표현 양식을 따랐지만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여백을 중
심으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동양의 공간사상을 따
른 점이 많다. 따라서 서구 회화의 기본이 되는 공간의 시대적인 개
념 변천 과정과 동양 공간사상의 주축을 이루는 도가(道家)·유가(儒
家)·선가(禪家)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본인의 작품에도 연관지어 볼
수 있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서양에서의 공간개념
1) 중세의 공간개념
서양의 공간개념의 변천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중세의 우주론부
터 살펴보아야 한다. 중세의 우주론은 기독교 사상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었으며, 태양 , 달 , 행성 , 그리고
항성으로 이루어진 천구의 동심원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항성 '너머' ,즉 물질 공간의 '바깥'에는 신과 천사들이 사는 곳으로
믿어진 가장 높은 하늘인 최고천(最高天)이 있었다.(도판 1) 이것을
통해 중세 기독교의 세계상은 물질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 둘 다를 포
용하는 이원론적인 우주론의 결과임과 동시에 인간이 보이지 않는 정
신의 질서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우주론에
서 우주는 근본적으로 지구의 공간과 천체의 공간으로 나뉘며, 지구
가 죽음과 변화의 세계라면 천체는 불멸, 불변, 그리고 영원의 세계라
고 믿었다. 이러한 중세의 우주론은 상징적·개념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시대의 우주론을 단테(Dante , Alighieri 1265∼1321)
의 <신곡 (神曲)>에서 극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단테의 여
행은 육체를 이용한 여행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초월한 여행이었다. 그
러나 영혼이 중세의 사고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
서, 육체가 결코 무의미하게 여겨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세에 대
한 일반적인 오해와는 반대로 중세 후반의 기독교도들은 육체를 인간
의 자아에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했다.
중세인들 에게 육체는 사실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어서, 인간의 영혼
이 내세에서 맞게되는 지복(至福)의 최후 단계는 영혼 육체와 마침내
재결합했을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었을 정도다. 무덤으로부터의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인간의 부활에 대한 예시이다.
13세기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1224?∼74)
의 말처럼, 인간이 만물의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을 당시의 은총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통해서이
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단테의 <신곡>은 문학작품 이상
의 의미 ― 중세의 종교·철학·과학·심리학까지도 포함 ―를 지닌
다. 특히 단테는 <신곡>을 통해 '영원한 구원' 다시 말하면 공간과 시
간을 초월한 천국의 장소에서 절대적인 구원을 언급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중세의 예술가들은 물질세계를
부정하고 영혼의 '내적인 눈' 즉, 안쪽의 내면사상을 나타내는데 주력
하였다. 그래서 이 시대의 회화를 보면 집중의 원리가 아닌 확산의 원
리이며 종속의 원리가 아닌 병렬의 원리 즉, 다시 말하면 폐쇄적인 기
하학의 원리가 아니라 개방적인 직선의 원리이므로 그림의 여러 단계
를 마치 파노라마처럼 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필사본 복음서의 그림의 일부분인 <수태고지>(도
판 2)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형태를 보
면 거의 뻣뻣하고 움직임이 없어 보인다. 성처녀는 정면을 향하고 있
고 놀라움의 표현으로 손을 위로 쳐들고 있는 반면, 성령(聖靈)의 비
둘기는 위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천사는 반쯤 옆모습을 보이며 오른손
을 동작을 의미하는 제스처로 뻗치고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해 자연
형태의 생생한 묘사보다는 수태고지의 신비를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
해 배치에 더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색채 또한 마찬가지여
서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음영(陰影)의 농담(濃淡)을 모방하기보다는 그
림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필사본에서 스테인드 글라스로 확대되어져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도판 3)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 성당의 유리창에 기독
교의 성서에 나오는 내용을 가득히 표현하여 투영되는 빛을 통해 자
연 적인 세계를 모방하려는 필요성을 벗어나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
을 전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테의 <신곡>에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장소에 관
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였다. 단지 언어로는 나타내기 어렵다고만 했
다. 사실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모든 사물은 존재할 수 가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중세 회화의 기독교의 성서를 중심으로 한
표현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세 유럽에서의 흑사병
의 발생은 신앙, 신분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 교
회가 아무런 보호를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의식에 뚜렷하
게 남게 되었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구원의 장
소'에 대해 증명하지 못한 그 결과, 육체의 공간과 영혼의 공간은 단
일 공간으로 융합되고 르네상스의 새로운 공간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2) 르네상스 시대의 공간 개념
위에서 언급한 단테의 <신곡>은 중세의 공간 개념의 한계를 알게 해
준 것과 동시에 공간에 대한 상상력의 변천과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
다. 따라서 앞으로의 새로운 공간 개념의 변화를 예고해 주는 것이 지
오토( Giotto 1266∼1337)의 그림(도판 3)이다.
여기서 지오토는 명료성·단순성·논리성·정확성을 바탕으로 하여
중세적인 가상현실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지오토의 그림을 시작으로
물질공간에 관한 현대의 '과학적인' 개념에 이르게 되는 새로운 사고
방식 ― 입체적인 형상을 그림에 담으려는 의도 뒤에 숨은 자연과 물
질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자연주의) ―을 나타내며 결국 중세의 세
계관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특징인 '원근법'이 탄생하게 되었
다. 사실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대의 창안(創案)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에까지 거슬러 그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고대에서도 -그리스
·로마시대- 생략법이 실제 사용되었으며, 각각의 사물의 크기를 관찰
자와의 거리에 따라서 축소시켰다. 그러나 고대에는 원근법에 의해 통
일되고 단 하나의 시점에 고정된 공간상은 알지 못했을 뿐더러, 상이
한 대상들 및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들을 연속적으로 표현할 줄
몰랐고 그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고대의 공간 묘사는 서로 관련이 없
는 부분들을 합쳐서 만든 구성이었고 통일적인 연속체가 아니었기 때
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원근법의 목표는 창문을 통해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재현의 이상이
었던 영적(靈的) 상상력을 물적(物的) 상상력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육체의 눈은 가장 근원적인 예술적 시각 기관으로 인식되
어 왔던 기독교 영혼의 내적인 눈을 대체하게 되었다.
따라서 원근법 회화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관찰자의 눈의 '위
치'를 그 안에 설정하고 있어, 그림의 가상 공간과 관찰자의 물질 공
간을 매우 형식적인 방법으로 서로 연결시켰다.(도판 4) 이렇게 르네
상스 시대의 육체에 대한 관심은 향후 오백 년 동안 서구 예술의 기본
을 구축함과 동시에 단연코 육체의 공간이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 르
네상스 시대의 3차원 모방은 직관(直觀)에 의거하여 시도되었다가 15
세기 들어 일련의 규칙들이 세워지면서 수학적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러한 예술에서의 변화는 근대 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근대 경험
주의적 운동 과학이 발달하는 데 기본이 된다.
비단 과학과 철학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자본주의 경제·사회제도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술의 규범이 되는 원근법의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브
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
은 경제의 합리주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르네
상스 시대의 경제에서 보이는 계획성·목적성·타산성과 같이 계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일체의 것에 대한 혐오를 말해줌과 동시에
그 당시의 노동의 조직화, 교역기술, 신용제도, 복식부기 그리고 국가
통치·외교·전쟁수행 방법에서 관철되고 있던 동일한 정신의 소산이
다. 즉 원근법의 사용은 진화론적인 진보가 아닌 문화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3) 근대에서 현대까지 공간 개념의 확장
앞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공간 개념 변천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양사상에 있어 그 기본은 범신론적인 사상 ―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 ― 과 자연주의 ― 인간에 대한 관심과 실제 현상을 중요시
하는 세계관 ―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와 현대까지의 공간 개
념을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두 사상을 중심으로 예술과 과학분
야에 있어 천체 공간(天體空間)에 관한 믿음의 변천과정을 살펴본
후, 이것을 토대로 근대와 현대의 공간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 형이상학
(形而上學) : 시간?공간 속의 초자연?초경험적인 우주의 근본 원리
를 연구하는 학문, 철학의 한 부문 (部門) [metaphysics]
인 이원론 사상이라고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따라서 예술에서도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예술의 성격을 잃지 않았으며 근본적인 특색으
로 시종일관(始終一貫)하였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들어와서는 “신
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서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신
학적 태도를 알 수 있는데, 즉 현실계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아무
리 사소하고 덧없는 것일지라도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제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신을 표현하며, 따라서 예술의 관점에서
도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르놀트 하우저,『문
학과 예술의 사회사 ― 1.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백 낙청?반 성
완 역, 서울, 창작가 비평사, 2000, p.308~309
비록 그때까지만 하여도 모든 것의 우선은 신을 증명해야 존중받
고 등급이 정하여 있다는 제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전혀 무가치한 것
이 없다는 사고방식 자체는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중세후기
의 배경은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생물학자. 사상 최대의 현자(賢者)
라고 불리며,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승으로는 그 유명한 플라
톤(Platon)이며, 그에게서 형이상학적 관념철학(觀念哲學)을 출발점으
로 종래의 자연과 인생에 관한 경험론적 실증주의(實證主義)학설을 비
판하여 1대의 체계(體系)를 세웠다. 플라톤의 초감각적(超感覺的)인
이념의 세계에 사상적 눈을 뜬 그는 이념 또는 형상과 개개 사물의 세
계를 이원적(二元的)으로 보는 플라톤의 설을 비판하여, 형상은 초월
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모든
사물, 즉 존재는 사물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만들어 규정지
은 형상과, 형상에 의하여 형태가 만들어진 규정된 소재 (素材 ; 質
料)와의 결합체로서 항상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에로 활동한다고 생각하
였다. 이런 점에서 변증법적(辨證法的)사고의 선두라고 볼 수 있으나
형이상학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플라톤 학파의 추상적이며 초현실적
인 점을 비난하면서 육체로부터 영혼을, 질료(質料)에서 형상을 존중
한 것도 청년시대의 플라톤의 영향이라 하겠다. 또 그는 동물의 발
생?분류 ?해부?생태 등에 관한 연구의 업적도 남겼으며, 만물을 4
원소(四元素 ; 흙 ?물?공기?불)로써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으며 천
체는 지구의 둘레를 동심(同心)의 천구에 따라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학원 출판공사,『학원 세계백과 대사전』, 서울, 1987,
vol. 12 p.531~532 )
의 공간론이 발달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지오토의
그림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
스의 공간개념에서의 핵심내용은 텅 빈 공간에 대한 부정이었다. 다
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無)의 부피와 같은 것은 결코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공간자체는 부피를 가질 수 없으며, 그 대신 그는 공간
은 단지 사물을 둘러싼 대기의 면, 즉 표면일 뿐이므로 오직 물체만
이 깊이를 갖고 있을 뿐 공간 그 자체는 그렇지 않다 op. cit, p.137
는 것이다. 이점은 그 당시의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였다. 다
시 말하면 그것은 오직 개별적인 사물들만이 깊이의 환상을 불러일으
킬 수 있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있는 중간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
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오토의 작품도 예외는 아니어서(도
판 4)의 그림을 보면 건물들은 3차원적인 공간으로 보이서도 건물 사
이의 공간은 3차원적인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14세기 초 화가들뿐
만이 아니라 과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어서 중세 후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관에 대해 과학자들은 비판적인 입장
을 취한 과학자들이 생겨나고 급기야는 과학과 신학자들간의 충돌이
일어나 결국, 파리의 주교였던 에티엔 탕피에 (Etienne Tempier)는
219개에 달하는 의심스러운 철학적 견해를 비난하는 교령을 1277년
에 발표하였다. 비록 탕피에의 교령은 심한 반발에 부딪혀 1325년 취
소되기는 하였지만, 과학의 발달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를 마련해 주
었다. 특히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에 공간에 관한 논쟁 중 다음의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우주는 움직일 수 없다는 논쟁이었다. op. cit, p.139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주의 부
동성은 텅 빈 공간은 있을 수 없다는 데서 그 원인을 둔다. 만약 어
떤 존재가 우주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텅 빈 공간이 뒤에 남게 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우주를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적인 입
장에서 보자면 신까지도 우주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되므로 과학자
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뜨거웠고 공간과 운동에 관한 아리스토
텔레스의 주장을 재검토하도록 이끌어 그 결과 철학자들은 텅 빈 공간
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끔 되어, 이론
적으로는 신은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
다. op. cit, p.140
탕피에의 교령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고
14세기 초에 경험주의적 운동 과학이 출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속도
와 가속도의 개념을 공간에 도입했으며 근대 역학의 기초를 공식화하
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관에 도전함으로써 갈릴레오, 케
플러 ,데카르트 등을 비롯한 17세기의 대표적인 물리학자들을 위한 초
석을 마련해 공간과 신을 연결짓는 것은 현대의 과학관을 통합한 뉴턴
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중요했다.
이렇게 과학자들이 힘겹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관을 벗어난 반
면, 화가들은 어렵지 않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속에서 벗어 날 수 있
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20 ~ 1492 )의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도판 5)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예술가들이 찾아낸 직
선 원근화법(혹은 투시화법)은 3차원 공간 안에 있는 사물을 2차원 표
면 위에 재현하기 위한 일련의 규칙들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15세
기 내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in Battista Alberti 1404 ~
147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같은 화가들은 이러한 규칙들을 개
발했으며, 그들이 개발한 것은 공간자체의 이론이라기보다는 재현의
이론이었으며,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 공간의
현대적 개념이 발전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op. cit, p. 145
그들이 새운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려면 끝도 없지만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의 육체를 원근화법에 따라 실물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육체를 그림의 공간 구도 속에
또한 끌어들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원근화법에 의해 설정된 구체공
간은 규칙이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화가들은 색다른 시점들을 실험한
다. 예를 들어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 1506 이탈리
아의 화가이자 판화가)의 <성 제임스의 처형>(도판 6)을 보면 투시의
중심점은 실제 그림의 맨 아래 테두리 밑에 설정되어 있어 초현실적
인 효과를 자아낸다. 또 다른 예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도판 7)에서는 투시의 중심점은 관찰자의 눈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분
리시켰다. 이 두 개의 그림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즉, 시점의 체화(體化)로부터 시작된 원근법 회화는 관찰자를
육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수단으로 다시 쓰이게 되면서 공간에서 ‘독자
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가상의 눈을 창조함으로써, 후기
단계의 원근화법은 사람들에게 확장된 물질공간 그 자체를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op. cit, p.153
더불어 인간의 정신을 물질세계의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해줌과 동시
에 사람들이 스스로 공간개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공
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가상의 눈’은 17세기에 갈릴레오와 데카르
트가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로 채
택되기에 이른다.
현대 물리학의 토대가 된 갈릴레오의 공간개념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과 똑같은 연속적이며 균등한 3차원의 공간이었
다. op. cit, p. 154
다시 말하면 갈릴레오에게 있어서 공간은 실재 자체의 존재론적 기반
이자 모든 사물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중립적인 활동영역이었다. 따라
서 그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수학적 해석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원자론자 들이 * 원자론 :우주는 원자로 되어 있다는 고대 그리
스의 데모크리토스 의 자연 관 [atomism] 곧 물질은 최소단위인
화학 변화에 관계하는 미립자(微粒子), 곧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는 이론. 1803년 돌턴이 확립. 현재는 원자 구조의 연구로 나아갔
다. 여기서 원자론자 들은 이러한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을 옹 호하
는 학자들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믿었던 것처럼, 갈릴레오가 파악한 우주는 오직 물질과 공간만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의 모든 것 ― 예를 들어 색깔, 냄새, 맛, 소리와
같은 모든 감각적인 것들― 은 진정한 실재 텅 빈 공간에서 움직이는
물질의 부산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갈릴레오의 사상은 독일
의 수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에 의해 지구 공간과 천체공간
의 중세의 이원론적 구분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흔히 지동설의 발견이라고 하면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
1473~1543 폴란드의 천문학자?사상가)를 꼽는다. 하지만 코페르니쿠
스는 2천 년 전의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던 지동설(태양 중심
설)을 미, 조화 , 균형의 이상을 강조한 르네상스 화가들의 미학을 영
향 받아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한 것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지동설(태양 중심설)은 완전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는 못했다. 그에 반해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받아들
여 태양 중심의 우주체계가 물리적으로 실제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
한 결과 천체의 세계를 자연의 법칙에 따라 타원의 형태로 도는 구체
적인 물질 세계로 재발견하였다.
이들에 의해 사람들은 우주가 태양 중시의 물질세계라는 것을 인정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주가 과연 얼마나 큰 것인지 궁금증으로 남게
되었다. 중세의 우주는 작고 유한했으며 그 경계선은 가장 바깥의 천
구까지였다. 그러나 지동설로 넘어오게 되면서 태양 중심의 우주도 외
부 경계선을 갖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무한공간의 개념이 대
두하게 된다. 이러한 무한 공간의 개념이 받아들여지도록 기여한 핵심
적인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은 르네 데카르트 (Descartes Rene, 1596~
1650 프랑스의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였다. 그는 우주가 엄격한
수학 법칙에 다라 무한 공간으로 움직이는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구상하게된다. 그의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은 과학혁명의 과정에서 새로운 우주론과 새로운 공간개념은 뉴턴
(Newton, sir Isaac, 1642~1727)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달하게 된다.
그는 케플러로부터 시작된 지구 공간과 천체 공간의 통합을 완성한
‘만류 인력의 법칙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의 중력
의 법칙의 본질은 두 물체들간의 끄는 힘, 즉 인력이다. 중력이 있는
곳에는 물질, 즉 자연 그대로의 견고한 물체가 있어야한다. 이것은 천
체의 영역에도 그대로 작용되어 천체가 지구처럼 유형의 물리적 물체
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뉴턴의 우주론은 만들어진 become 이 아니라, 단
순히 있는 was 것이었다. op. cit, p.208
우주의 창조에 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독일의 형이상학자이자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 (Kant
Immanuel 1724 ~1804) 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우주가 물리학적으로
커지는 것에 대해 최초로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의 이러한 사상은 20세기 초 아인슈타인 (Einstein Albert 1879 ~
1955)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ality)'에까지 영향
을 미친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을 통해 시간과 거리의 관계는 분리
된 것이 아닌 합쳐진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으로 취급하
는 4차원의 세계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20세기 현대 미술 화가들도 마찬 가지어
서 절대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반발, 결국 하나의
시점을 이루는 3차원을 거부하여 나중에 ‘초공간’으로 불리는 4차
원 공간에 빠른 속도로 매료되었다. 우선 입체파(cubism)는 화면에 대
함에 있어 4차원 도입의 방법으로 다중 시점을 사용함으로써 절대적
공간을 상징하는 3차원의 공간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또한 마르셸 뒤
샹(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입체파
와 미래파를 결합한 작품을 통해 미국 다다이즘을 주도함)과 카지미
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소련의 화가로 절대주의
운동을 이끌었다.)도 고차원 공간에 관심을 가진 화가들이다. 이들 작
가들의 작품을 통해 현대 미술에 와서 공간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알
아보고자 한다.
우선 마르셸 뒤샹의 작품<자신의 구혼자들에게 의해 벗겨진 신부
(큰 유리)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The large
Glass)>(도판 8)에서 4차원의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현
대 미술에 있어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기에 충분
하다. 그러나 본인은 공간에 관해 이 작품을 설명하고자 한다. 뒤샹
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비 유클리드 기하학과 고차원에 관한 기
하학을 공부했다. 그 결과 두 부분으로 이등분되어, 그림의 위에는 신
부가 아래에는 구혼자들의 무리가 그려졌다. 뒤샹의 기록에 따르면 신
부는 처음부터 4차원적 실체로 의도되었으며 반면에 구혼자들은 3차원
적 실체로 의도되었다. op. cit, p.272
또 다른 예로는 말레비치의 작품 <절대주의>(도판 9)에서 볼 수 있는
데 그는 형태를 단순화시켜 종국에는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인 형태만이 남는 지점을 절대 * 절대 (supreme) : 절대는
supr/super (over) + em(e) 의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넘음”으로 현실을 넘어서야 나타나는 세계이
다. 절대는 눈으 로 볼 수가 없다. 절대는 이성으로 접근할 때
나타나는 관념의 세계이다.
라고 하였다. 절대의 세계에는 현실에서 인식할 수 있는 물체(object)
는 없고 대신 검은 원이라든지 흰 사각형, 빨간 삼각형 등 완전 기하
학적으로 만든 형태만이 존재한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그림을 “예술
을 물질성의 안정된 기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
도”라고 모호하게 대답했는데, 현대미술사가들이 좀더 깊이 연구한
결과 말레비치가 속해 있었던 러시아의 미래파 화가들과 그들의 동포
인 우스펜스키가 신봉했던 4차원 신비주의 사이에서 강한 연관성을 찾
을 수 있었다. op. cit, p.270
이와 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후에 이론적으로는 10차원의 세
계도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컴퓨터(computer)의 등장 ‘컴퓨
터는 합리적, 이성(reason)을 대표하는 계산하는 도구이다.’ 은 현
대 사회에 있어 새로운 공간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하급수적
으로 그 사용량이 증가하였다. 결국 21세기에 이르러 예술가는 모니터
로 재생된 상(image)을 보고 기계가 제시하는 물체의 거리, 색채, 질
감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계, 과학문명의 발달로 물질공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과
반비례하게 인간의 마음?정신?영혼을 중요시하게 생각하지 않는 풍
토를 갖게 되었다. 특히 현대 사회에 와서는 내적 공간의 결핍으로 인
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를 예술에서
도 인식하고 해결방법을 모색하게 되는데 지금부터 언급할 동양회화사
상은 본인을 포함한 현대 예술을 하는 작가들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동양에서의 공간개념
서양에서 물리적인 면을 강조하여 분석하는 공간개념이 발달하여 온
것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자연에 대해 감정을 이입?동화가 되어 본질
적인 정신에 접근하기 위한 조화의 공간개념이 발달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으로 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양회화에 있어서 조형성(造形性)의 미(美)는 화면
에 나타난 표현보다는 그 주위에 형성된 여백에 더 큰 의의를 둔 독특
한 공간미(空間美)를 발달시켜 왔다. 따라서 여백은 단순히 배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조형성을 갖춘 공간이며 무한한 창조
의 잠재력이 존재하는 자유로운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백에 대한 태도를 동양의 주축이 되는 유가사상
(儒家思想), 도가사상(道家思想), 선가사상(禪家思想)에서 어떻게 인
식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유가(儒家)의 공간성
일반적으로 유가를 말하는 데 있어 유교(儒敎)를 언급하는데 이 두
낱말은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유가의 예술사상을 말하는데 있
어 먼저 유교에 대해 언급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유교는 동양
학문의 그 사상적 기원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흔히 유교는 공자(孔子)를 시조로 하는 중국 고대의 정교일치(政敎一
致) 사상으로 인(仁) *인(仁) : ①자애(慈愛)를 기본으로 한 인도(人
道)의 으뜸 미덕(美德).[perfect virtue] ② 애정을 남에게 바치는
일 . 박애(博愛) .[humanity]
을 통해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철학사상을 말하며, 수신제가치국평천
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루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공
자의 사상은 맹자(孟子)와 순자(筍子)로 계승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수신제가치국 평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仁)의 중요
성을 강조하였다. 인(仁)을 인식하는 것이 일체의 도덕과 진실을 인식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인이 몰락하면 일체의 도덕도 허사로 빠진다
고 하였다. 김 종 태 ,『동양 회화 사상』, 서울 , 일지사 , 1999,
p.9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회화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화면상에서도 조화
를 강조한 중용(中庸) * 중용(中庸) : 어느 쪽으로나 치우침이 없고
중정(中正)함. [moderayion]과 후소정신(後素精神)으로 나타난다.
중용에 대해 송나라 주희는 "편들지 않고 기대지 않으며 과함도 없
고 미치지 못함도 없다." 고 하였다. ―「中庸者 不偏不倚無過不及」
이어서 주희는 설명하기를 희노애락이 아직 발동하지 않는 것을 일컬
어 중(中)이라 하고 중절(中節)되어 있는 것을 화(和)라고 하여, 중이
란 천하의 근본이요 화란 천하의 도(道)에 달(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라 하였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
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다시 말하면 아직 형상을 갖추지 못한
형(形)을 중(中)이라고 하였으며 없는 것이 아니라 형을 가질 수 있
는 가능성을 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도교(道敎)의 무(無) 와 비슷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용은 동양회화에서 여백과 관련지어 살
펴볼 수 있으며, 미학의 관점으로 보면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단순히
물체를 보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 이상으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철학을 나타내는데 있다고 본다. 따라서 유교의 중용사상은 예로부터
산수화와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중(中)의 의미는 도교의 무(無)와 차이점을
보인다. 도교의 무는 무관(無關)이 모든 것을 항상 일정한 방식만을
취하려고 하는 경향(傾向)이 강한 반면 중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은 암시를 주고 용(庸)에 있어서는 항상 실
현되는 중을 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素)의 의미를 들 수 있는데, 소란 회화의 질(質) 즉 색
채의 정신적 표현으로 후공(後功)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
은 것을 논어<論語> 정사농(鄭司農) 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회화란 화문인데 모든 회화는 먼저 구도를 잡고 난 다음에 채색
을 하며 그 후에 소(素)로써 그 사이를 분포하며 문을 이루는 것이 이
를 미녀에게 비유하건대 비록 미인이 간드러지게 어여쁜 아름다움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뒤에 예절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孔子, 鄭
司農, 『論語』,鄭民注譯, 서울, 일지사, 1999, P.13. 재인용 라고 하
였다.
이러한 정사농의 해석을 송나라 때 주희에 이르러 공자의 <繪事後素>
와 <素以爲絢>에 대해 발전된 해석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 素란
회화의 質이고 絢이란 회화의 장식이라고 하였다.” 朱熹,『朱子大
全』, 서울, 일지사, 1999, P.13. 재인용
이렇게 정사농과 주희의 소의 해석을 통해 회화에 있어서 색채의 아
름다움과 회화 내용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함을 언급하고 있어, 앞에
서 언급한 중용과 함께 여백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동양회화에
있어 마음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여백으로 나며 잔잔하
고 고요하게 화면을 침묵으로 나타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을 집중하
게 만든다.
2) 도가(道歌)의 공간성
도가 사상은 흔히 도교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自然) 예
로부터 동양인에게 있어 자연은 극복이나 정복의 대상이 아닌 조화?
순응의 대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여기서의 자연은 반드시 "스스로 그
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self -so, naturally -so, What-is -
so-of-itself 등으로 영역되지 nature로 영역되지 않는다.
정신을 떠올림과 동시에 노?장자 (老?壯者)의 무위자연사상(無爲自
然思想)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도교는 유교와 함께 중국철학의 전
반을 대변하는 커다란 기반임과 동시에 현대 산업사회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제시해 21세기에 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
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은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를 먼저
살펴 본 후 여백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무위를 통
한 노?장자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도교의 대표적인 철학인 무
위(無爲)를 말함에 있어 여러 사람이 그 뜻을 해석하였는데 대표적으
로 <회남자 (淮南子)>에서는 무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무위란 것은 적적하고 고요하며 무성(無聲)으로 아무리 움직여
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끌어도 오지 않고 멀어도 가지 않는
것이다.? op. cit, p.39 재인용
다시 말하면 무위란 인간의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서는 안되고 우주
(宇宙)의 순환법칙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미(美)라는 것을 노자
와 장자는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았으며
자연으로 복귀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을 그리
는데 있어 자연과 내면적으로 일치되어 사물(事物)의 외형(外形)을 꿰
뚫어 그 내적인 것을 찾아 절대적인 미(絶對美)를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절대적인 미의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사회
적 (社會的)인 구속에서 벗어나 무위(無爲)?무지(無知)?무욕(無慾)
의 ‘무위 사상(無爲 思想)’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노?장자의 사상
은 회화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과 장자의 <장자(莊子)>를 통해 동양회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
펴볼 수 있다.
우선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 39장에 의하면
“옛날에 일(一)의 도(道)를 얻었다. 하늘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편안하며, 신(神)은 일의 도를 얻음
으로써 영험(靈驗)하고, 계곡(溪谷)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물이 차
고 넘치며, 만물(萬物)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생성(生成)하고, 제후
(諸侯)와 왕(王)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하를 바르게 다스린다.”
op. cit, p.49 재인용
라고 하였으며, 제 40장에는
“도가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고 삼
은 만물을 낳으며 만물은 음(陰)을 짊어지고 양(陽)을 안고 있으며 충
기(?氣)는 화(和)함이 된다.” op. cit, p.49 , 재인용
라고 하였다. 또 같은 장에서 “천하의 만물(萬物)은 유(有)에서 나오
고 유는 무(無)에서 나온다” op. cit, p.49 , 재인용
라고 했다. 이것은 노?장자사상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예술창작
과정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 먼저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데, 이 기본
적인 본질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일(一)이다. 더불어 이 기본적인 본
질을 주관이라고 하며 그 밖의 객관적인 미를 인식 파악한 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구상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미(美)를 구성하는 데에는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이 서
로 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일(一)은 다(多)와 다를 것
이 없으므로 일은 곧 일절(一切)이요, 일절은 즉 일이라는 관념과 마
찬가지이다. op. cit, p.50
이러한 노?장자의 사상은 현대 미술에서 외부의 간섭이나 경제적 문
제를 탈피하여 작가의 정신을 중요시하는 노력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
다. 마찬가지로 장자의 예술이론 또한 노자와 비슷한 점이 많다.
장자의 우주관은 생명체의 우주관이라 할 수 있는데 , 우주의 모든
것은 생명체가 있는 가운데서 서로 작용한다. 이것은 단지 많고 적음
의 차이를 가질 뿐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편안히 지내고 있다는 것이
(遊逸) 장자철학의 이론이다. 따라서 예술가란 천지 조화의 작용을 자
신을 표현하여 나타내 보일 때에는 아무런 간섭이 없고 본인을 의심하
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서 작품을 제작해야 장자의 이론대로 좋은 작품
이 형성된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을 다음 글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
다.
?진인(眞人)은 삶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을 기피하지 않았다. 세상
에 태어났음을 기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고 슬퍼하지 않았다. 무심
히 왔다가 무심히 갈 뿐이었다. 자신을 자연 현상의 하나로 보고 죽음
에 개의치 않았다. 주어진 삶을 즐기다가 죽을 때가 되면 일체를 망각
하고 자연에 되돌아갔다. 마음으로 도를 해치지 않고 인위로 자연을
돕지 않았으니 진인이란 바로 이 같은 존재다. 진인의 마음은 무심하
고 용모는 한적하며 이마는 넓고 번지르 하다. 추상처럼 엄한가 하면
봄날처럼 온화하여 감정의 움직임은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고 자신
은 바깥사물과 조화를 이루어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장자,『大宗師
篇』, op. cit, p.55 재인용
라고 하였다. 이 말은 도인(道人)이란 지(知)를 초월해야한다. 따라
서 진정한 화가는 회화의 방법을 넘어 그림에 대한 애착이나 집념을
버리고 자연으로 되돌아가 만물의 변화를 통해 자연에 있는 사물을 파
악하여야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그림이 세상에 주목을 받는다
거나 아니면 남이 알아주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과 한 몸이 되어 화도(畵道)를 찾아 사
물을 그려야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노?장자의 사상은 산수화와
연관지어 여백으로까지 확대하여 살펴 볼 수 있다.
흔히 산수화는 자연 속에 들어가 작가의 정관(靜觀)과 이지(理智)를
화면의 공백에 표현하는 것으로 이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
어 규격화된 배경이나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닌 자유분방한 배경처리로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경치와 색채를 한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텅 빈 곳 에 색채와 경치를 표현하고 이를 통해 끝없는
생각의 형태(意象)를 이끌어 낸다. 노자<老子> 16장(章)에 의하면,
“천지가 그 사이를 공허하게 함이 궁극에 도달하고 정적(靜寂)의
상태를 보수(保守)함이 짙어지면 만물은 일제히 일어나 생동한
다......”
라고 말하였는데, op. cit, p.52
이것은 도의 근원을 공허한 허공(虛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림은 공백
인 무에서 인출하여 만물이 생동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유(有)와 무(無)는 뚜렷이 구별하는 것이 아닌 동일한 것으로 보
는 것 같지만 실은 유가 존재함으로서 무가 생기는 상대적인 존재(存
在)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여백과 연관지어 보면 다음
과 같다. 우선 자연을 낳고 생장하게 하는 공간이 우주인데 동양회화
에서 우주란 곧 여백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주와 자연의 관계는 곧 여
백과 그림의 관계이며, 무(無)와 유(有), 또는 음(陰)과 양(陽)의 관
계로 이해된다. 화폭은 무(無)의 상징으로 만물의 시작을 내포하는 정
(靜)의 공간이며, 만물이 생성됨으로써 유(有)가 되어 동(動)의 공간
이 형성되는 것이다.
3) 선가(禪家)의 공간성
선가 사상은 불교(佛敎)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사상
의 측면에서 공(空)이 여백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본다. 공
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① 속이 빈 것, ② 공간, 하늘, ③ 근거
가 없는 일, ④ 유(有)가 아니란 뜻으로 실체(實體)도 자체(自體)도
없는 것을 가리킴”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인 것만으로는 회화
에서 불교와 연관지어 공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해석을 가지고 여백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
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공을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말한다. 이러한 공은 산스크리트어로는 “sunya (순
야)”이며, 불교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어온 말로 공허(空虛) 또는 허무
(虛無)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
을 설명하는 것으로 불교에서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따라서 “다른 것
을 막지 않고 다른 것에 막히지도 않으며 불심(佛心)의 모든 법(法)
을 받아들이는 당체(當體)인 허공(虛空)에 이르러서 비로소 활동성(活
動性)을 가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권 세 혁 ,『동양회화에 있
어서 공간미학과 현대적 계승 연구』, 서울 ,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
2000, p.12 재인용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
른 것이 아닌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서 이루어져 있음을 “색
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空)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공은 그 파악되는 바의 사물을 떠나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공은 진리를 밝히는 한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으로 객관적 세계를 부정
하는 절대 무(無)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생활
에서의 정신적(精神的)?물질적(物質的)인 부분의 설명을 통해 여기
에 쓰인 색(色)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생활에 있
어 물질적?정신적인 모든 요소를 5가지로 분류한 <한역불전역어(漢譯
佛典譯漁)>를 사용하여색(色)?수(受)?상(想)? 행(行)?식(識)의 5
가지이며 이를 총괄(總括)하여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溫)이라
하였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가 모여 심신을 이루는데 색은 육체의 뜻
을 수?상?행?식은 심식(心識)의 요소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것을
통해 공(空)이 색(色)을 배척(排斥)하는 것이 아닌 윤회(輪廻)하는 관
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교의 사상을 통해 여백은 화폭 안에서
생성?변화하는 동시에 묘사형태가 가장 잘 나타나 보이게 하며, 무한
한 포용성을 갖는 허공(虛空)으로서 이해된다.
동. 서양의 공간개념- 정현진 석사학위 논문발췌
미술은 시점 (point view) 즉, 보는 (view) 위치 (point)의 변화에서 시작되었다. 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이유로 지난 2만여 년 동안 서구 미술은 공간과 물체를 중심으로 운동, 변화, 빛, 리얼리티 (reality), 4차원 그리고 가상현실까지 세계를 보아 왔다.
이러한 미술의 변화 속에서 공간을 기록하고 인식하기 위한 인간의 태도는 절대적이라고 볼 수 있다.
서구 미술에 있어서 공간을 인식하기 위해 네 차례의 시각적 혁명 - 그리드(grid)/원근법 - 카메라 - 복제 기계 - 컴퓨터 - 로 이어져 왔다고 말 할 수 있다. 특히 렌즈라는 기계 눈의 등장은 인간의 보는 방식을 결정적으로 변화 시켰다. 카메라의 등장으로 사람과 사물 사이에는 렌즈라는 기계의 눈이 굳건하게 자리잡고 인간은 그것을 통해 세상을 인식해 나갔다.
즉 서구인들에게 있어서 지금까지 현실세계를 물질(物質)과 정신(精神)이라는 이분법(二分法)으로 구분해 왔음을 알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혁명의 발달로 인해 물질적인 면이 무한히 확장되어 자연을 완전히 정복한 반면, 정신 혹은 영혼이 거주하는 실재의 한 부분으로서의 정신 공간의 개념은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부분은 회화(繪 )에서도 영향 받아 각 시대의 공간에 관한 사상을 반영하여 오늘날의 현대 미술에 이르게 되었다.
반면에 동양에서 말하고 있는 공간은 무(無)의 세계와 접한다. 이것은 무한(無限)의 공간인 대우주(大宇宙) 자연의 외적인 모습을 설명하는 것과 더불어 내적 현상을 가능케 하는 만물 생성의 근원적 공간을 의미한다. 즉 평면은 감성(感性) 지각(知覺)의 장으로 변하며 평면에 새로이 생기는 공간의 유동적 자율성을 강조하여 정신의 내면 공간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특히 동양 사상의 근본을 이루는 도가 사상(道家 思想)·유가 사상(儒家 思想)·선가 사상(禪家思想)이 회화에 영향을 준 점은 절대적이라 할 것이다.
이 세 가지 사상은 중국을 비롯한 동양 뿐 아니라 서구 여러 나라에까지 사회적·심리적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는 현대 사회의 여러 가지 문제점들의 원인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이 주목을 받고 있다.
위에서 언급한 사상들을 바탕으로 예로부터 동양회화의 가장 중요
한 조형요소는 여백(餘白)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여백의 정의
는 "그림에서 묘사된 대상 이외의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여백
의 정의는 비단 회화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문학 (文學), 음악(音
樂), 서예(書藝)에서도 여백의 의미를 폭넓게 찾아 볼 수 있다.
이렇게 공간을 인식하기 위한 동·서양의 견해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즉 공간에 대한 인간의 사고(思考) 작용은 통
일성이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인간의 태도는 동일하지 않다. 그 이유로
는 물리적(物理的)·사회적(社會的)·개념적(槪念的) 환경 뿐 아니라
개개인의 심리적 세계 안에 존재하는 환경으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같은 조건의 공간일지라도 인간의 반응은 다양하게 표출 될
수 있다. 이것은 시각적(視覺的)공간과 지각(知覺) 공간이 다르기 때
문이다. 그러나 본인에게 있어 서양회화와 동양회화의 공간은 그 본질
을 같이 한다고 믿으며, 궁극적으로는 동·서양의 회화가 추구하는 바
가 같은 귀결점에 이른다고 본다. 단지 서로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차이를 보이며 그에 따른 재료와 사상이 다를 뿐이다. 현대사회는 각
종 정보통신망의 발달로 동·서양의 사상과 문화에 대한 교류가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교류를 통해 현대사회에 전반적으로
일어나는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시도들이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음을
누구나 느낄 것이다. 비록 사회전반에 걸친 문제만이 아니라 예술에서
도 마찬가지여서 동·서양 예술계에서의 적극적인 문화교류를 통해 밝
은 전망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본인은 작품을 제작하는 데 있어 방법적인 면에서는
서구 회화의 표현 양식을 따랐지만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는 여백을 중
심으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것을 표현하는 동양의 공간사상을 따
른 점이 많다. 따라서 서구 회화의 기본이 되는 공간의 시대적인 개
념 변천 과정과 동양 공간사상의 주축을 이루는 도가(道家)·유가(儒
家)·선가(禪家) 사상을 살펴보는 것이 본인의 작품에도 연관지어 볼
수 있어 살펴보고자 한다.
1. 서양에서의 공간개념
1) 중세의 공간개념
서양의 공간개념의 변천 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우선 중세의 우주론부
터 살펴보아야 한다. 중세의 우주론은 기독교 사상에 그 원천을 두고
있다.
따라서 지구는 우주의 중심에 있었으며, 태양 , 달 , 행성 , 그리고
항성으로 이루어진 천구의 동심원이 지구를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항성 '너머' ,즉 물질 공간의 '바깥'에는 신과 천사들이 사는 곳으로
믿어진 가장 높은 하늘인 최고천(最高天)이 있었다.(도판 1) 이것을
통해 중세 기독교의 세계상은 물질의 영역과 정신의 영역 둘 다를 포
용하는 이원론적인 우주론의 결과임과 동시에 인간이 보이지 않는 정
신의 질서 한 가운데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중세의 우주론에
서 우주는 근본적으로 지구의 공간과 천체의 공간으로 나뉘며, 지구
가 죽음과 변화의 세계라면 천체는 불멸, 불변, 그리고 영원의 세계라
고 믿었다. 이러한 중세의 우주론은 상징적·개념적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중세시대의 우주론을 단테(Dante , Alighieri 1265∼1321)
의 <신곡 (神曲)>에서 극단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여기서 단테의 여
행은 육체를 이용한 여행이면서 동시에 육체를 초월한 여행이었다. 그
러나 영혼이 중세의 사고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해
서, 육체가 결코 무의미하게 여겨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중세에 대
한 일반적인 오해와는 반대로 중세 후반의 기독교도들은 육체를 인간
의 자아에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간주했다.
중세인들 에게 육체는 사실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어서, 인간의 영혼
이 내세에서 맞게되는 지복(至福)의 최후 단계는 영혼 육체와 마침내
재결합했을 때에 비로소 시작된다고 믿었을 정도다. 무덤으로부터의
예수의 부활은 이러한 인간의 부활에 대한 예시이다.
13세기 위대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 (Thomas Aquinas1224?∼74)
의 말처럼, 인간이 만물의 창조주에 의해 창조되었을 당시의 은총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은 오직 육체와 영혼의 결합을 통해서이
다 라고 할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단테의 <신곡>은 문학작품 이상
의 의미 ― 중세의 종교·철학·과학·심리학까지도 포함 ―를 지닌
다. 특히 단테는 <신곡>을 통해 '영원한 구원' 다시 말하면 공간과 시
간을 초월한 천국의 장소에서 절대적인 구원을 언급하였다.
위에서 언급한 시대적 배경으로 인해 중세의 예술가들은 물질세계를
부정하고 영혼의 '내적인 눈' 즉, 안쪽의 내면사상을 나타내는데 주력
하였다. 그래서 이 시대의 회화를 보면 집중의 원리가 아닌 확산의 원
리이며 종속의 원리가 아닌 병렬의 원리 즉, 다시 말하면 폐쇄적인 기
하학의 원리가 아니라 개방적인 직선의 원리이므로 그림의 여러 단계
를 마치 파노라마처럼 구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중세시대의 필사본 복음서의 그림의 일부분인 <수태고지>(도
판 2)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형태를 보
면 거의 뻣뻣하고 움직임이 없어 보인다. 성처녀는 정면을 향하고 있
고 놀라움의 표현으로 손을 위로 쳐들고 있는 반면, 성령(聖靈)의 비
둘기는 위에서 보이는 모습이다. 천사는 반쯤 옆모습을 보이며 오른손
을 동작을 의미하는 제스처로 뻗치고 있다. 이러한 예를 통해 자연
형태의 생생한 묘사보다는 수태고지의 신비를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
해 배치에 더 신경을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색채 또한 마찬가지여
서 자연 속에 나타나는 음영(陰影)의 농담(濃淡)을 모방하기보다는 그
림에 자신이 좋아하는 색채를 자유롭게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것들은 필사본에서 스테인드 글라스로 확대되어져 그 절정에
달하게 된다. (도판 3) 스테인드 글라스는 교회 성당의 유리창에 기독
교의 성서에 나오는 내용을 가득히 표현하여 투영되는 빛을 통해 자
연 적인 세계를 모방하려는 필요성을 벗어나 초자연적인 세계의 관념
을 전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단테의 <신곡>에도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장소에 관
한 구체적인 언급을 피하였다. 단지 언어로는 나타내기 어렵다고만 했
다. 사실 공간과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한 모든 사물은 존재할 수 가
없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중세 회화의 기독교의 성서를 중심으로 한
표현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중세 유럽에서의 흑사병
의 발생은 신앙, 신분에 상관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 교
회가 아무런 보호를 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의식에 뚜렷하
게 남게 되었다. 이렇게 공간과 시간을 초월한 '영원한 구원의 장
소'에 대해 증명하지 못한 그 결과, 육체의 공간과 영혼의 공간은 단
일 공간으로 융합되고 르네상스의 새로운 공간 개념에 도달하게 된다.
2) 르네상스 시대의 공간 개념
위에서 언급한 단테의 <신곡>은 중세의 공간 개념의 한계를 알게 해
준 것과 동시에 공간에 대한 상상력의 변천과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
다. 따라서 앞으로의 새로운 공간 개념의 변화를 예고해 주는 것이 지
오토( Giotto 1266∼1337)의 그림(도판 3)이다.
여기서 지오토는 명료성·단순성·논리성·정확성을 바탕으로 하여
중세적인 가상현실을 그림으로 나타냈다. 지오토의 그림을 시작으로
물질공간에 관한 현대의 '과학적인' 개념에 이르게 되는 새로운 사고
방식 ― 입체적인 형상을 그림에 담으려는 의도 뒤에 숨은 자연과 물
질 세계에 대한 새로운 관심(자연주의) ―을 나타내며 결국 중세의 세
계관에 대한 도전으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특징인 '원근법'이 탄생하게 되었
다. 사실 원근법은 르네상스 시대의 창안(創案)이 아니라 고대 그리스
·로마에까지 거슬러 그 기원을 살펴볼 수 있다. 고대에서도 -그리스
·로마시대- 생략법이 실제 사용되었으며, 각각의 사물의 크기를 관찰
자와의 거리에 따라서 축소시켰다. 그러나 고대에는 원근법에 의해 통
일되고 단 하나의 시점에 고정된 공간상은 알지 못했을 뿐더러, 상이
한 대상들 및 이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들을 연속적으로 표현할 줄
몰랐고 그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고대의 공간 묘사는 서로 관련이 없
는 부분들을 합쳐서 만든 구성이었고 통일적인 연속체가 아니었기 때
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원근법의 목표는 창문을 통해 장면을 보고
있는 것 같은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재현의 이상이
었던 영적(靈的) 상상력을 물적(物的) 상상력이 대신하게 되었으며,
그 과정에서 육체의 눈은 가장 근원적인 예술적 시각 기관으로 인식되
어 왔던 기독교 영혼의 내적인 눈을 대체하게 되었다.
따라서 원근법 회화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와 관찰자의 눈의 '위
치'를 그 안에 설정하고 있어, 그림의 가상 공간과 관찰자의 물질 공
간을 매우 형식적인 방법으로 서로 연결시켰다.(도판 4) 이렇게 르네
상스 시대의 육체에 대한 관심은 향후 오백 년 동안 서구 예술의 기본
을 구축함과 동시에 단연코 육체의 공간이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 르
네상스 시대의 3차원 모방은 직관(直觀)에 의거하여 시도되었다가 15
세기 들어 일련의 규칙들이 세워지면서 수학적으로 공식화되었다. 이
러한 예술에서의 변화는 근대 과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쳐 근대 경험
주의적 운동 과학이 발달하는 데 기본이 된다.
비단 과학과 철학뿐만이 아니라 당시의 자본주의 경제·사회제도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예술의 규범이 되는 원근법의
통일성의 원리, 통일적 공간감정, 비례의 통일적 기준, 하나의 모티브
에 집중된 묘사의 제한, 한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구도의 통일적 종합
은 경제의 합리주의 정신에 상응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르네
상스 시대의 경제에서 보이는 계획성·목적성·타산성과 같이 계산할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일체의 것에 대한 혐오를 말해줌과 동시에
그 당시의 노동의 조직화, 교역기술, 신용제도, 복식부기 그리고 국가
통치·외교·전쟁수행 방법에서 관철되고 있던 동일한 정신의 소산이
다. 즉 원근법의 사용은 진화론적인 진보가 아닌 문화의 선택이었던
셈이다.
3) 근대에서 현대까지 공간 개념의 확장
앞에서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공간 개념 변천에서 살펴보았듯이
서양사상에 있어 그 기본은 범신론적인 사상 ―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세계관 ― 과 자연주의 ― 인간에 대한 관심과 실제 현상을 중요시
하는 세계관 ― 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대와 현대까지의 공간 개
념을 변화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이 두 사상을 중심으로 예술과 과학분
야에 있어 천체 공간(天體空間)에 관한 믿음의 변천과정을 살펴본
후, 이것을 토대로 근대와 현대의 공간개념을 살펴보아야 한다고 생각
한다.
중세 시대의 대표적인 사상은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 * 형이상학
(形而上學) : 시간?공간 속의 초자연?초경험적인 우주의 근본 원리
를 연구하는 학문, 철학의 한 부문 (部門) [metaphysics]
인 이원론 사상이라고 이미 앞에서도 언급하였다. 따라서 예술에서도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예술의 성격을 잃지 않았으며 근본적인 특색으
로 시종일관(始終一貫)하였다. 그러나 중세 후기에 들어와서는 “신
은 모든 것을 반기신다. 모든 것은 신의 본질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에서 예술에서의 자연주의에 대한 신
학적 태도를 알 수 있는데, 즉 현실계의 모든 것은 비록 그것이 아무
리 사소하고 덧없는 것일지라도 신과 직접적인 관계에 있으며, 모든
것은 제각기 독특한 방법으로 신을 표현하며, 따라서 예술의 관점에서
도 독특한 의미와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아르놀트 하우저,『문
학과 예술의 사회사 ― 1. 선사시대부터 중세까지』, 백 낙청?반 성
완 역, 서울, 창작가 비평사, 2000, p.308~309
비록 그때까지만 하여도 모든 것의 우선은 신을 증명해야 존중받
고 등급이 정하여 있다는 제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전혀 무가치한 것
이 없다는 사고방식 자체는 실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중세후기
의 배경은 아리스토텔레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
B.C. 322)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생물학자. 사상 최대의 현자(賢者)
라고 불리며, 후세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스승으로는 그 유명한 플라
톤(Platon)이며, 그에게서 형이상학적 관념철학(觀念哲學)을 출발점으
로 종래의 자연과 인생에 관한 경험론적 실증주의(實證主義)학설을 비
판하여 1대의 체계(體系)를 세웠다. 플라톤의 초감각적(超感覺的)인
이념의 세계에 사상적 눈을 뜬 그는 이념 또는 형상과 개개 사물의 세
계를 이원적(二元的)으로 보는 플라톤의 설을 비판하여, 형상은 초월
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사물에 내재하는 것이라 하였다. 모든
사물, 즉 존재는 사물을 그대로 있는 그대로의 형태를 만들어 규정지
은 형상과, 형상에 의하여 형태가 만들어진 규정된 소재 (素材 ; 質
料)와의 결합체로서 항상 가능성으로부터 현실에로 활동한다고 생각하
였다. 이런 점에서 변증법적(辨證法的)사고의 선두라고 볼 수 있으나
형이상학에 그치고 말았다. 그는 플라톤 학파의 추상적이며 초현실적
인 점을 비난하면서 육체로부터 영혼을, 질료(質料)에서 형상을 존중
한 것도 청년시대의 플라톤의 영향이라 하겠다. 또 그는 동물의 발
생?분류 ?해부?생태 등에 관한 연구의 업적도 남겼으며, 만물을 4
원소(四元素 ; 흙 ?물?공기?불)로써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으며 천
체는 지구의 둘레를 동심(同心)의 천구에 따라 원운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학원 출판공사,『학원 세계백과 대사전』, 서울, 1987,
vol. 12 p.531~532 )
의 공간론이 발달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지오토의
그림 역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
스의 공간개념에서의 핵심내용은 텅 빈 공간에 대한 부정이었다. 다
시 말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무(無)의 부피와 같은 것은 결코 없다고
믿었기 때문에 공간자체는 부피를 가질 수 없으며, 그 대신 그는 공간
은 단지 사물을 둘러싼 대기의 면, 즉 표면일 뿐이므로 오직 물체만
이 깊이를 갖고 있을 뿐 공간 그 자체는 그렇지 않다 op. cit, p.137
는 것이다. 이점은 그 당시의 화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였다. 다
시 말하면 그것은 오직 개별적인 사물들만이 깊이의 환상을 불러일으
킬 수 있고 사물과 사물 사이에 있는 중간 지역은 그렇지 못하다는 사
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오토의 작품도 예외는 아니어서(도
판 4)의 그림을 보면 건물들은 3차원적인 공간으로 보이서도 건물 사
이의 공간은 3차원적인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14세기 초 화가들뿐
만이 아니라 과학자들 역시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어서 중세 후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관에 대해 과학자들은 비판적인 입장
을 취한 과학자들이 생겨나고 급기야는 과학과 신학자들간의 충돌이
일어나 결국, 파리의 주교였던 에티엔 탕피에 (Etienne Tempier)는
219개에 달하는 의심스러운 철학적 견해를 비난하는 교령을 1277년
에 발표하였다. 비록 탕피에의 교령은 심한 반발에 부딪혀 1325년 취
소되기는 하였지만, 과학의 발달하는 데에는 충분한 근거를 마련해 주
었다. 특히 신학자들과 과학자들 사이에 공간에 관한 논쟁 중 다음의
것이 중요했다.
그것은 우주는 움직일 수 없다는 논쟁이었다. op. cit, p.139
위에서 언급하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주의 부
동성은 텅 빈 공간은 있을 수 없다는 데서 그 원인을 둔다. 만약 어
떤 존재가 우주를 움직인다면, 그것은 텅 빈 공간이 뒤에 남게 된다
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우주를
움직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기독교적인 입
장에서 보자면 신까지도 우주를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 되므로 과학자
들과 신학자들 사이의 논쟁은 뜨거웠고 공간과 운동에 관한 아리스토
텔레스의 주장을 재검토하도록 이끌어 그 결과 철학자들은 텅 빈 공간
의 개념이 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하게끔 되어, 이론
적으로는 신은 우주를 움직일 수 있다는 생각이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
다. op. cit, p.140
탕피에의 교령 이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영향력은 점차 약해지고
14세기 초에 경험주의적 운동 과학이 출현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속도
와 가속도의 개념을 공간에 도입했으며 근대 역학의 기초를 공식화하
기 시작하여,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관에 도전함으로써 갈릴레오, 케
플러 ,데카르트 등을 비롯한 17세기의 대표적인 물리학자들을 위한 초
석을 마련해 공간과 신을 연결짓는 것은 현대의 과학관을 통합한 뉴턴
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대단히 중요했다.
이렇게 과학자들이 힘겹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관을 벗어난 반
면, 화가들은 어렵지 않게 아리스토텔레스의 구속에서 벗어 날 수 있
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Piero della
Francesca 1420 ~ 1492 )의 <채찍질 당하는 그리스도>(도판 5)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 그림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예술가들이 찾아낸 직
선 원근화법(혹은 투시화법)은 3차원 공간 안에 있는 사물을 2차원 표
면 위에 재현하기 위한 일련의 규칙들을 공식화하는 것이었다. 15세
기 내내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in Battista Alberti 1404 ~
1472),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 1452~1519)와 같은 화가들은 이러한 규칙들을 개
발했으며, 그들이 개발한 것은 공간자체의 이론이라기보다는 재현의
이론이었으며, 그들의 작품은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물질 공간의
현대적 개념이 발전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 op. cit, p. 145
그들이 새운 업적을 일일이 열거하려면 끝도 없지만 중요한 사항은
다음과 같다. 즉 인간의 육체를 원근화법에 따라 실물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관찰자의 육체를 그림의 공간 구도 속에
또한 끌어들였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원근화법에 의해 설정된 구체공
간은 규칙이 단순하지만은 않아서 화가들은 색다른 시점들을 실험한
다. 예를 들어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 1431~ 1506 이탈리
아의 화가이자 판화가)의 <성 제임스의 처형>(도판 6)을 보면 투시의
중심점은 실제 그림의 맨 아래 테두리 밑에 설정되어 있어 초현실적
인 효과를 자아낸다. 또 다른 예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도판 7)에서는 투시의 중심점은 관찰자의 눈으로부터 의식적으로 분
리시켰다. 이 두 개의 그림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살펴 볼 수
있다. 즉, 시점의 체화(體化)로부터 시작된 원근법 회화는 관찰자를
육체로부터 분리시키는 수단으로 다시 쓰이게 되면서 공간에서 ‘독자
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는 가상의 눈을 창조함으로써, 후기
단계의 원근화법은 사람들에게 확장된 물질공간 그 자체를 강렬하게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op. cit, p.153
더불어 인간의 정신을 물질세계의 공간 속에서 자유롭게 해줌과 동시
에 사람들이 스스로 공간개념을 ‘느낄’ 수 있게 해주었다. 특히 공
간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가상의 눈’은 17세기에 갈릴레오와 데카르
트가 새로운 과학적 세계관을 공식화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모델로 채
택되기에 이른다.
현대 물리학의 토대가 된 갈릴레오의 공간개념은 르네상스 화가들이
그림으로 표현한 것과 똑같은 연속적이며 균등한 3차원의 공간이었
다. op. cit, p. 154
다시 말하면 갈릴레오에게 있어서 공간은 실재 자체의 존재론적 기반
이자 모든 사물이 존재하고 움직이는 중립적인 활동영역이었다. 따라
서 그는 공간과 시간에 관한 수학적 해석이 요구된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원자론자 들이 * 원자론 :우주는 원자로 되어 있다는 고대 그리
스의 데모크리토스 의 자연 관 [atomism] 곧 물질은 최소단위인
화학 변화에 관계하는 미립자(微粒子), 곧 원자로 구성되어 있다
는 이론. 1803년 돌턴이 확립. 현재는 원자 구조의 연구로 나아갔
다. 여기서 원자론자 들은 이러한 데모크리토스의 이론을 옹 호하
는 학자들이란 뜻으로 사용하였다.
믿었던 것처럼, 갈릴레오가 파악한 우주는 오직 물질과 공간만으로
이루어졌다. 그 외의 모든 것 ― 예를 들어 색깔, 냄새, 맛, 소리와
같은 모든 감각적인 것들― 은 진정한 실재 텅 빈 공간에서 움직이는
물질의 부산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갈릴레오의 사상은 독일
의 수학자 요하네스 케플러(1571~1630)에 의해 지구 공간과 천체공간
의 중세의 이원론적 구분을 파괴하기에 이른다.
흔히 지동설의 발견이라고 하면 코페르니쿠스(Copernicus Nicolaus,
1473~1543 폴란드의 천문학자?사상가)를 꼽는다. 하지만 코페르니쿠
스는 2천 년 전의 고대 그리스인들도 알고 있었던 지동설(태양 중심
설)을 미, 조화 , 균형의 이상을 강조한 르네상스 화가들의 미학을 영
향 받아 실제로 어떻게 작용하는지 설명한 것뿐이었다. 따라서 그의
지동설(태양 중심설)은 완전하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서 벗어나지
는 못했다. 그에 반해 케플러는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설을 받아들
여 태양 중심의 우주체계가 물리적으로 실제 어떻게 움직이는지 연구
한 결과 천체의 세계를 자연의 법칙에 따라 타원의 형태로 도는 구체
적인 물질 세계로 재발견하였다.
이들에 의해 사람들은 우주가 태양 중시의 물질세계라는 것을 인정
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주가 과연 얼마나 큰 것인지 궁금증으로 남게
되었다. 중세의 우주는 작고 유한했으며 그 경계선은 가장 바깥의 천
구까지였다. 그러나 지동설로 넘어오게 되면서 태양 중심의 우주도 외
부 경계선을 갖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면서 무한공간의 개념이 대
두하게 된다. 이러한 무한 공간의 개념이 받아들여지도록 기여한 핵심
적인 인물들 중의 한 사람은 르네 데카르트 (Descartes Rene, 1596~
1650 프랑스의 과학자 ?수학자 ?철학자) 였다. 그는 우주가 엄격한
수학 법칙에 다라 무한 공간으로 움직이는 물질들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는 기계론적 세계관을 구상하게된다. 그의 이러한 기계론적 세계관
은 과학혁명의 과정에서 새로운 우주론과 새로운 공간개념은 뉴턴
(Newton, sir Isaac, 1642~1727)에 이르러 그 정점에 달하게 된다.
그는 케플러로부터 시작된 지구 공간과 천체 공간의 통합을 완성한
‘만류 인력의 법칙 (중력의 법칙)’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그의 중력
의 법칙의 본질은 두 물체들간의 끄는 힘, 즉 인력이다. 중력이 있는
곳에는 물질, 즉 자연 그대로의 견고한 물체가 있어야한다. 이것은 천
체의 영역에도 그대로 작용되어 천체가 지구처럼 유형의 물리적 물체
임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뉴턴의 우주론은 만들어진 become 이 아니라, 단
순히 있는 was 것이었다. op. cit, p.208
우주의 창조에 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독일의 형이상학자이자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 (Kant
Immanuel 1724 ~1804) 이다. 그는 어떻게 보면 우주가 물리학적으로
커지는 것에 대해 최초로 의구심을 가진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
의 이러한 사상은 20세기 초 아인슈타인 (Einstein Albert 1879 ~
1955)의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ality)'에까지 영향
을 미친다. 아인슈타인은 이 이론을 통해 시간과 거리의 관계는 분리
된 것이 아닌 합쳐진 것이고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으로 취급하
는 4차원의 세계를 설명하였다.
이러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20세기 현대 미술 화가들도 마찬 가지어
서 절대적인 공간을 상징하는 유클리드 기하학에 반발, 결국 하나의
시점을 이루는 3차원을 거부하여 나중에 ‘초공간’으로 불리는 4차
원 공간에 빠른 속도로 매료되었다. 우선 입체파(cubism)는 화면에 대
함에 있어 4차원 도입의 방법으로 다중 시점을 사용함으로써 절대적
공간을 상징하는 3차원의 공간을 벗어나려고 하였다. 또한 마르셸 뒤
샹(Marcel Duchamp, 1887~1968,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로 입체파
와 미래파를 결합한 작품을 통해 미국 다다이즘을 주도함)과 카지미
르 말레비치(Kazimir Malevich, 1878~1935, 소련의 화가로 절대주의
운동을 이끌었다.)도 고차원 공간에 관심을 가진 화가들이다. 이들 작
가들의 작품을 통해 현대 미술에 와서 공간이 어떻게 해석되었는지 알
아보고자 한다.
우선 마르셸 뒤샹의 작품<자신의 구혼자들에게 의해 벗겨진 신부
(큰 유리) The Bride stripped Bare by Her Bachelors (The large
Glass)>(도판 8)에서 4차원의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현
대 미술에 있어 아직까지도 여러 가지 논란의 여지를 제공하기에 충분
하다. 그러나 본인은 공간에 관해 이 작품을 설명하고자 한다. 뒤샹
은 이 작품을 준비하기 위해 비 유클리드 기하학과 고차원에 관한 기
하학을 공부했다. 그 결과 두 부분으로 이등분되어, 그림의 위에는 신
부가 아래에는 구혼자들의 무리가 그려졌다. 뒤샹의 기록에 따르면 신
부는 처음부터 4차원적 실체로 의도되었으며 반면에 구혼자들은 3차원
적 실체로 의도되었다. op. cit, p.272
또 다른 예로는 말레비치의 작품 <절대주의>(도판 9)에서 볼 수 있는
데 그는 형태를 단순화시켜 종국에는 지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인 형태만이 남는 지점을 절대 * 절대 (supreme) : 절대는
supr/super (over) + em(e) 의 어원을 가지고
있으며, “~넘음”으로 현실을 넘어서야 나타나는 세계이
다. 절대는 눈으 로 볼 수가 없다. 절대는 이성으로 접근할 때
나타나는 관념의 세계이다.
라고 하였다. 절대의 세계에는 현실에서 인식할 수 있는 물체(object)
는 없고 대신 검은 원이라든지 흰 사각형, 빨간 삼각형 등 완전 기하
학적으로 만든 형태만이 존재한다. 말레비치는 자신의 그림을 “예술
을 물질성의 안정된 기반으로부터 자유롭게 하기 위한 필사적인 시
도”라고 모호하게 대답했는데, 현대미술사가들이 좀더 깊이 연구한
결과 말레비치가 속해 있었던 러시아의 미래파 화가들과 그들의 동포
인 우스펜스키가 신봉했던 4차원 신비주의 사이에서 강한 연관성을 찾
을 수 있었다. op. cit, p.270
이와 같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후에 이론적으로는 10차원의 세
계도 설명이 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컴퓨터(computer)의 등장 ‘컴퓨
터는 합리적, 이성(reason)을 대표하는 계산하는 도구이다.’ 은 현
대 사회에 있어 새로운 공간개념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기하급수적
으로 그 사용량이 증가하였다. 결국 21세기에 이르러 예술가는 모니터
로 재생된 상(image)을 보고 기계가 제시하는 물체의 거리, 색채, 질
감을 표현하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기계, 과학문명의 발달로 물질공간에 대한 관심이 고조됨과
반비례하게 인간의 마음?정신?영혼을 중요시하게 생각하지 않는 풍
토를 갖게 되었다. 특히 현대 사회에 와서는 내적 공간의 결핍으로 인
해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문제를 예술에서
도 인식하고 해결방법을 모색하게 되는데 지금부터 언급할 동양회화사
상은 본인을 포함한 현대 예술을 하는 작가들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2. 동양에서의 공간개념
서양에서 물리적인 면을 강조하여 분석하는 공간개념이 발달하여 온
것과는 달리 동양에서는 자연에 대해 감정을 이입?동화가 되어 본질
적인 정신에 접근하기 위한 조화의 공간개념이 발달하여 왔음을 알
수 있다. 즉 대상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주관적으로 보아왔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동양회화에 있어서 조형성(造形性)의 미(美)는 화면
에 나타난 표현보다는 그 주위에 형성된 여백에 더 큰 의의를 둔 독특
한 공간미(空間美)를 발달시켜 왔다. 따라서 여백은 단순히 배경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한 조형성을 갖춘 공간이며 무한한 창조
의 잠재력이 존재하는 자유로운 세계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여백에 대한 태도를 동양의 주축이 되는 유가사상
(儒家思想), 도가사상(道家思想), 선가사상(禪家思想)에서 어떻게 인
식하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1) 유가(儒家)의 공간성
일반적으로 유가를 말하는 데 있어 유교(儒敎)를 언급하는데 이 두
낱말은 비슷한 뜻으로 쓰인다. 따라서 유가의 예술사상을 말하는데 있
어 먼저 유교에 대해 언급을 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유교는 동양
학문의 그 사상적 기원이라고 해도 큰 무리가 없을 듯하다.
흔히 유교는 공자(孔子)를 시조로 하는 중국 고대의 정교일치(政敎一
致) 사상으로 인(仁) *인(仁) : ①자애(慈愛)를 기본으로 한 인도(人
道)의 으뜸 미덕(美德).[perfect virtue] ② 애정을 남에게 바치는
일 . 박애(博愛) .[humanity]
을 통해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철학사상을 말하며, 수신제가치국평천
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이루는 것을 그 목표로 삼는다. 이러한 공
자의 사상은 맹자(孟子)와 순자(筍子)로 계승되어 더욱 발전하였다.
따라서 공자는 수신제가치국 평천하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仁)의 중요
성을 강조하였다. 인(仁)을 인식하는 것이 일체의 도덕과 진실을 인식
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인이 몰락하면 일체의 도덕도 허사로 빠진다
고 하였다. 김 종 태 ,『동양 회화 사상』, 서울 , 일지사 , 1999,
p.9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회화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화면상에서도 조화
를 강조한 중용(中庸) * 중용(中庸) : 어느 쪽으로나 치우침이 없고
중정(中正)함. [moderayion]과 후소정신(後素精神)으로 나타난다.
중용에 대해 송나라 주희는 "편들지 않고 기대지 않으며 과함도 없
고 미치지 못함도 없다." 고 하였다. ―「中庸者 不偏不倚無過不及」
이어서 주희는 설명하기를 희노애락이 아직 발동하지 않는 것을 일컬
어 중(中)이라 하고 중절(中節)되어 있는 것을 화(和)라고 하여, 중이
란 천하의 근본이요 화란 천하의 도(道)에 달(達)할 수 있는 원동력이
라 하였다.―「喜怒哀樂之未發謂之中 發而皆中節謂之和 中也者 天下之
大本也 和也者 天下之達道也 」다시 말하면 아직 형상을 갖추지 못한
형(形)을 중(中)이라고 하였으며 없는 것이 아니라 형을 가질 수 있
는 가능성을 둔 것으로 어떻게 보면 도교(道敎)의 무(無) 와 비슷한
의미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중용은 동양회화에서 여백과 관련지어 살
펴볼 수 있으며, 미학의 관점으로 보면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 단순히
물체를 보고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 이상으로 작가가 추구하고자 하는
철학을 나타내는데 있다고 본다. 따라서 유교의 중용사상은 예로부터
산수화와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유교에서 말하는 중(中)의 의미는 도교의 무(無)와 차이점을
보인다. 도교의 무는 무관(無關)이 모든 것을 항상 일정한 방식만을
취하려고 하는 경향(傾向)이 강한 반면 중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많은 암시를 주고 용(庸)에 있어서는 항상 실
현되는 중을 본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소(素)의 의미를 들 수 있는데, 소란 회화의 질(質) 즉 색
채의 정신적 표현으로 후공(後功)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와 같
은 것을 논어<論語> 정사농(鄭司農) 의 글에서 살펴볼 수 있다.
“회화란 화문인데 모든 회화는 먼저 구도를 잡고 난 다음에 채색
을 하며 그 후에 소(素)로써 그 사이를 분포하며 문을 이루는 것이 이
를 미녀에게 비유하건대 비록 미인이 간드러지게 어여쁜 아름다움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뒤에 예절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孔子, 鄭
司農, 『論語』,鄭民注譯, 서울, 일지사, 1999, P.13. 재인용 라고 하
였다.
이러한 정사농의 해석을 송나라 때 주희에 이르러 공자의 <繪事後素>
와 <素以爲絢>에 대해 발전된 해석을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 素란
회화의 質이고 絢이란 회화의 장식이라고 하였다.” 朱熹,『朱子大
全』, 서울, 일지사, 1999, P.13. 재인용
이렇게 정사농과 주희의 소의 해석을 통해 회화에 있어서 색채의 아
름다움과 회화 내용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함을 언급하고 있어, 앞에
서 언급한 중용과 함께 여백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동양회화에
있어 마음의 표현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여백으로 나며 잔잔하
고 고요하게 화면을 침묵으로 나타내 보는 이로 하여금 그림을 집중하
게 만든다.
2) 도가(道歌)의 공간성
도가 사상은 흔히 도교라고도 불린다. 따라서 우리는 자연(自然) 예
로부터 동양인에게 있어 자연은 극복이나 정복의 대상이 아닌 조화?
순응의 대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여기서의 자연은 반드시 "스스로 그
러하다."로 번역되어야 한다. 즉 self -so, naturally -so, What-is -
so-of-itself 등으로 영역되지 nature로 영역되지 않는다.
정신을 떠올림과 동시에 노?장자 (老?壯者)의 무위자연사상(無爲自
然思想)을 떠올리게 된다. 이러한 도교는 유교와 함께 중국철학의 전
반을 대변하는 커다란 기반임과 동시에 현대 산업사회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제시해 21세기에 들어 세계 여러 나라에 정신적으로 지대한 영
향력을 끼치고 있다. 그러므로 본인은 도교에서 말하는 무위를 먼저
살펴 본 후 여백과의 관계를 알아보는 것이 순서일 것 같아 무위를 통
한 노?장자의 사상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도교의 대표적인 철학인 무
위(無爲)를 말함에 있어 여러 사람이 그 뜻을 해석하였는데 대표적으
로 <회남자 (淮南子)>에서는 무위를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무위란 것은 적적하고 고요하며 무성(無聲)으로 아무리 움직여
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며 아무리 끌어도 오지 않고 멀어도 가지 않는
것이다.? op. cit, p.39 재인용
다시 말하면 무위란 인간의 인위적인 힘을 가하여서는 안되고 우주
(宇宙)의 순환법칙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되는 미(美)라는 것을 노자
와 장자는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자연의 일부분으로 보았으며
자연으로 복귀하여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러므로 작가가 그림을 그리
는데 있어 자연과 내면적으로 일치되어 사물(事物)의 외형(外形)을 꿰
뚫어 그 내적인 것을 찾아 절대적인 미(絶對美)를 표현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절대적인 미의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사회
적 (社會的)인 구속에서 벗어나 무위(無爲)?무지(無知)?무욕(無慾)
의 ‘무위 사상(無爲 思想)’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노?장자의 사상
은 회화에 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었지만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과 장자의 <장자(莊子)>를 통해 동양회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살
펴볼 수 있다.
우선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제 39장에 의하면
“옛날에 일(一)의 도(道)를 얻었다. 하늘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맑고, 땅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편안하며, 신(神)은 일의 도를 얻음
으로써 영험(靈驗)하고, 계곡(溪谷)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물이 차
고 넘치며, 만물(萬物)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생성(生成)하고, 제후
(諸侯)와 왕(王)은 일의 도를 얻음으로써 천하를 바르게 다스린다.”
op. cit, p.49 재인용
라고 하였으며, 제 40장에는
“도가 일(一)을 낳고, 일은 이(二)를 낳고, 이는 삼(三)을 낳고 삼
은 만물을 낳으며 만물은 음(陰)을 짊어지고 양(陽)을 안고 있으며 충
기(?氣)는 화(和)함이 된다.” op. cit, p.49 , 재인용
라고 하였다. 또 같은 장에서 “천하의 만물(萬物)은 유(有)에서 나오
고 유는 무(無)에서 나온다” op. cit, p.49 , 재인용
라고 했다. 이것은 노?장자사상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예술창작
과정과 연관지어 볼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은 작가가 작품을 대하는
데 있어 먼저 사물의 가장 기본적인 본질을 파악해야 하는데, 이 기본
적인 본질이 바로 노자가 말하는 일(一)이다. 더불어 이 기본적인 본
질을 주관이라고 하며 그 밖의 객관적인 미를 인식 파악한 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구상해야 함을 뜻한다.
따라서 미(美)를 구성하는 데에는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이 서
로 잘 조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것은 일(一)은 다(多)와 다를 것
이 없으므로 일은 곧 일절(一切)이요, 일절은 즉 일이라는 관념과 마
찬가지이다. op. cit, p.50
이러한 노?장자의 사상은 현대 미술에서 외부의 간섭이나 경제적 문
제를 탈피하여 작가의 정신을 중요시하는 노력과도 연결시켜 볼 수 있
다. 마찬가지로 장자의 예술이론 또한 노자와 비슷한 점이 많다.
장자의 우주관은 생명체의 우주관이라 할 수 있는데 , 우주의 모든
것은 생명체가 있는 가운데서 서로 작용한다. 이것은 단지 많고 적음
의 차이를 가질 뿐 무한한 우주 속에서는 편안히 지내고 있다는 것이
(遊逸) 장자철학의 이론이다. 따라서 예술가란 천지 조화의 작용을 자
신을 표현하여 나타내 보일 때에는 아무런 간섭이 없고 본인을 의심하
지 않는 경지에 이르러서 작품을 제작해야 장자의 이론대로 좋은 작품
이 형성된다. 이러한 장자의 사상을 다음 글을 통해서 살펴 볼 수 있
다.
?진인(眞人)은 삶에 집착하지 않고 죽음을 기피하지 않았다. 세상
에 태어났음을 기뻐하지 않고 세상을 떠난다고 슬퍼하지 않았다. 무심
히 왔다가 무심히 갈 뿐이었다. 자신을 자연 현상의 하나로 보고 죽음
에 개의치 않았다. 주어진 삶을 즐기다가 죽을 때가 되면 일체를 망각
하고 자연에 되돌아갔다. 마음으로 도를 해치지 않고 인위로 자연을
돕지 않았으니 진인이란 바로 이 같은 존재다. 진인의 마음은 무심하
고 용모는 한적하며 이마는 넓고 번지르 하다. 추상처럼 엄한가 하면
봄날처럼 온화하여 감정의 움직임은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럽고 자신
은 바깥사물과 조화를 이루어 무한한 자유를 누린다.” 장자,『大宗師
篇』, op. cit, p.55 재인용
라고 하였다. 이 말은 도인(道人)이란 지(知)를 초월해야한다. 따라
서 진정한 화가는 회화의 방법을 넘어 그림에 대한 애착이나 집념을
버리고 자연으로 되돌아가 만물의 변화를 통해 자연에 있는 사물을 파
악하여야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자신의 그림이 세상에 주목을 받는다
거나 아니면 남이 알아주는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 편안한 마음으로 자연과 한 몸이 되어 화도(畵道)를 찾아 사
물을 그려야 하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노?장자의 사상은 산수화와
연관지어 여백으로까지 확대하여 살펴 볼 수 있다.
흔히 산수화는 자연 속에 들어가 작가의 정관(靜觀)과 이지(理智)를
화면의 공백에 표현하는 것으로 이념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더불
어 규격화된 배경이나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닌 자유분방한 배경처리로
작가가 그리고자 하는 경치와 색채를 한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
렇기 때문에 텅 빈 곳 에 색채와 경치를 표현하고 이를 통해 끝없는
생각의 형태(意象)를 이끌어 낸다. 노자<老子> 16장(章)에 의하면,
“천지가 그 사이를 공허하게 함이 궁극에 도달하고 정적(靜寂)의
상태를 보수(保守)함이 짙어지면 만물은 일제히 일어나 생동한
다......”
라고 말하였는데, op. cit, p.52
이것은 도의 근원을 공허한 허공(虛靜)을 말하는 것으로 그림은 공백
인 무에서 인출하여 만물이 생동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이다. 이것을
통해 유(有)와 무(無)는 뚜렷이 구별하는 것이 아닌 동일한 것으로 보
는 것 같지만 실은 유가 존재함으로서 무가 생기는 상대적인 존재(存
在)를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점을 여백과 연관지어 보면 다음
과 같다. 우선 자연을 낳고 생장하게 하는 공간이 우주인데 동양회화
에서 우주란 곧 여백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주와 자연의 관계는 곧 여
백과 그림의 관계이며, 무(無)와 유(有), 또는 음(陰)과 양(陽)의 관
계로 이해된다. 화폭은 무(無)의 상징으로 만물의 시작을 내포하는 정
(靜)의 공간이며, 만물이 생성됨으로써 유(有)가 되어 동(動)의 공간
이 형성되는 것이다.
3) 선가(禪家)의 공간성
선가 사상은 불교(佛敎)의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사상
의 측면에서 공(空)이 여백의 의미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고 본다. 공
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① 속이 빈 것, ② 공간, 하늘, ③ 근거
가 없는 일, ④ 유(有)가 아니란 뜻으로 실체(實體)도 자체(自體)도
없는 것을 가리킴”을 말한다. 그러나 이런 사전적인 것만으로는 회화
에서 불교와 연관지어 공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교에서 말하는 공(空)의 해석을 가지고 여백과 연관지어 보아야 한
다고 생각한다.
불교에서는 공을 인간을 포함한 일체 만물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으로 말한다. 이러한 공은 산스크리트어로는 “sunya (순
야)”이며, 불교이전부터 널리 사용되어온 말로 공허(空虛) 또는 허무
(虛無)를 의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현상계의 모든 사물의 이법
을 설명하는 것으로 불교에서의 근본사상이 되었다. 따라서 “다른 것
을 막지 않고 다른 것에 막히지도 않으며 불심(佛心)의 모든 법(法)
을 받아들이는 당체(當體)인 허공(虛空)에 이르러서 비로소 활동성(活
動性)을 가질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권 세 혁 ,『동양회화에 있
어서 공간미학과 현대적 계승 연구』, 서울 ,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
2000, p.12 재인용
따라서 <반야심경(般若心經)>에서는 물질적인 현상과 공이 서로 다
른 것이 아닌 서로 떠날 수 없는 상관관계로서 이루어져 있음을 “색
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는 사물의 본질이 공(空)으로 파악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과 더불어
공은 그 파악되는 바의 사물을 떠나서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공은 진리를 밝히는 한가지 방법에 불과한 것으로 객관적 세계를 부정
하는 절대 무(無)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 것이다. 더 나아가 인간생활
에서의 정신적(精神的)?물질적(物質的)인 부분의 설명을 통해 여기
에 쓰인 색(色)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불교에서는 인간생활에 있
어 물질적?정신적인 모든 요소를 5가지로 분류한 <한역불전역어(漢譯
佛典譯漁)>를 사용하여색(色)?수(受)?상(想)? 행(行)?식(識)의 5
가지이며 이를 총괄(總括)하여 오온(五蘊) 또는 오취온(五取溫)이라
하였다. 인간은 이 다섯 가지가 모여 심신을 이루는데 색은 육체의 뜻
을 수?상?행?식은 심식(心識)의 요소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것을
통해 공(空)이 색(色)을 배척(排斥)하는 것이 아닌 윤회(輪廻)하는 관
계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불교의 사상을 통해 여백은 화폭 안에서
생성?변화하는 동시에 묘사형태가 가장 잘 나타나 보이게 하며, 무한
한 포용성을 갖는 허공(虛空)으로서 이해된다.
동. 서양의 공간개념- 정현진 석사학위 논문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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