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 없이는 못살아
플루트 연주자는 플루트를 불면서 동시에 시를 읊을 수 없다.
이것은 교육적 의미에서 명백한 결격이다.
아테나 여신은 플루트를 발명했지만 곧 팽개치고 말았다.
플루트를 불면 얼굴이 우스꽝스럽게 일그러지기 때문이었다.
이 신화의 의미를 새겨보길 바란다.
아리스토텔레스 <정치학 8> 6. 기원전 4세기
고대 악기를 그린 가장 오래된 그림과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악보는 그리스에서 발견되었다. 그리스는 음악에 대한 글을 쓴 최초의 음악이론가, 즉 서양 철학의 선조인 플라톤과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그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의 거주지이기도 했다.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리듬과 조화는 영혼 속으로 가장 깊숙이 파고들고, 영혼을 가장 강하게 감동시키고, 또 영혼에 고귀한 태도를 부여한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음악을 통한 교육은 매우 중요하다. " 하지만 이 '고귀한 태도'는 '좋은' 전통 음악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고 플라톤은 보수적 어조로 단서를 단다. "새로운 음악은 경계해야 한다. 모든 것이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음악의 규칙이 무너지는 곳에서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법칙들 또한 무너지기 마련이다" 플라톤의 이 말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들이 '잘못된' 음악과 접촉하게 되면 반란과 무질서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감정 절제를 잘하는 플라톤은 특히 플루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플라톤이 보기에 플루트는 정열적이고 방종한 디오니소스 의식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즉 오늘날 많은 현대인들에게 헤비 메탈 밴드가 그러하듯, 플라톤에게 악마의 소행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의견에 근본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연주를 들었을 때 교육보다 감화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조건 하에서 플루트의 사용을 자신의 이상 국가에서 허용하려 했다.
에트루리아인들에게 플루트는 어떤 용도로 쓰였던 것일까? 기원전 10세기경에 소아시아 서부에서 이주해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민족은 오늘날의 토스카나 지방에 중부 유럽의 첫 도시들을 세웠고, 그리스 문화뿐만 아니라 음악도 가져왔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창조적 활동을 보여주는 가장 위대한 증인은 놀랄 만큼 화려하게 보존된 고분군이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둥근 지붕을 얹은 건축물뿐 아니라 중부 유럽의 첫 프레스코들도 발견되었다. 1830년 타르퀴니아에서 발굴된 <플루트 연주자>는 매우 장식성이 풍부한 프레스코로 에트루리아인의 묘지에서 발견되었다. 타르퀴니아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약 80킬로미터쯤 떨어진 도시로 에트루리아인들이 건설했던 가장 큰 도시들 중 하나이다.
..............................................클라우스 라이홀트의 세계를 움직인 그림들 中에서
'미술사랑 > 그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고흐의 마지막 발자취 (0) | 2008.01.28 |
---|---|
[스크랩] 보티첼리의 [봄] 프리마베라 (0) | 2008.01.27 |
[스크랩] 위엔민준 (0) | 2008.01.27 |
[스크랩] 명화속의 여인들... (0) | 2008.01.27 |
모나리자 (0) | 2008.01.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