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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액션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

영원한 울트라 2008. 1. 31. 09:47

'액션페인팅의 선구자' 잭슨 폴록
Jackson Pollock 1912~1956)

 

 

 

잭슨 폴록(Jackson Pollock 1912~1956)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미술계 중심이 옮겨지던 시기에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작가이다. 그는 붓으로 그리는 회화의 제작 방식을 탈피해 ‘액션페인팅'이라는 낯설고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냈다.

1940년대 미술계는 기존의 미술운동이 낳은 회화기법들이 이미 다 소개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화지만 화가들의 변혁과 시도는 그치지 않았다.

잭슨 폴록은 이전의 화가들과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시도했다. 그는 캔버스를 벽에 세우는 대신 바닥에 눕혔다. 그리곤 페인트통과 붓을 들고 마음껏 캔버스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서 느끼는 내면의 움직임에 따라 폴록은 기쁨이나 슬픔, 놀람, 분노 등을 표현했다.

하지만 보는 이들은 그의 그림 앞에서 한참을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그림들은 모두가 확실성이 결여된 채 난잡한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관찰해야 할 것처럼 보여진다. 물론 이 같은 의문은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잭슨 폴록의 추상 미술은 칸딘스키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형태가 없다. 형태가 이미 녹아버렸기 때문이다. 다만 그의 작품이 미술사에서 자주 거론되고 중요시 되는 이유는 작품 제작의 방법적인 측면에 있다. 적어도 그는 보이지 않는 추상의 세계를 새로운 조형언어로 그려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뉴욕파라고도 불리는 추상표현주의는 40년대에 뉴욕에서 출발했는데 1950년대에 들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그리고 이 운동은 잭슨 폴록의 ‘액션 페인팅(Action Painting)’을 빼놓고는 설명될 수 없을 정도로 그의 위치는 중대하다. 폴록은 드립페인팅을 통해 주제의 중심에 서서 계획되고 정리된 작품이 아니라 거미줄같이 얽혀버린 심리적 미로를 표현했다.

회화 기법이 난무하던 20세기의 시대, 잭슨 폴록은 자신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화법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캔버스에 물감을 떨어 뜨리거나 들이 붓는 ‘드리핑 기법'이 대표적인 예이다. 하지만 잭슨 폴록이 현대 미술의 대표주자로 주목받았던 이유는 단지 ‘드리핑 기법'에 있는 것은 아니었다. 세련되지 못한 리얼리즘과 나약한 파리파의 모디니즘을 해방시키며 ‘추상표현주의'를 이끌었던 그는 회화의 중심을 파리에서 미국으로 옮기는데 견인차 역할을 했다.

와이오밍 주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잭슨 폴록은 1930년 가을, 18살의 나이에 서부에서 뉴욕으로 왔다. 그 해 그는 미술학교에 입학하며 화가로서의 꿈을 키웠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음주와 반사회적인 행동으로 얼룩져 갔다. 만찬의 식탁을 뒤엎기 일쑤였고, 바에서 패싸움을 벌이는 일도 그에겐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그리고 결국은 44세에 술취한 상태에서 교통사고로 요절한 화가로 남고 말았다.

멕시코 화가 시쿠에이로스의 작업실에서 있던 시절에 그는 물감을 섞거나 석고를 개서 바르는 등의 잡다한 심부름이나 일을 주로 했었다. 그래서 그의 동료들은 드로잉도 할 줄 모르는 무식한 화가라는 말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의 시대에 와서, 폴록의 전성기는 곧 뉴욕의 전성기로 이해된다. 폴록 회고전이 열릴 때면 뉴욕은 50여 년 전의 활기를 되찾을 만큼 그가 이루어 놓은 혁명적인 변화는 위대한 것이었다.

폴록이 죽고 난 후 많은 화가들은 그의 회화 기법을 인용한 새로운 방법을 모색했다. 그림 물감이 담긴 주머니를 총으로 쏘아 캔버스에 흘러내리게 하기도 했고, 에어브러시를 이용해 물감을 분사하거나 난도질을 하기도 했다.

뉴욕에서 토마스 하트 벤톤과 함께 그림 공부를 했던 폴록은 세잔과 피카소의 큐비즘적인 요소를 받아들이기도 했으며, 한편으로는 칸딘스키의 추상적이고 표현적인 그림을 추종하기도 했다.

1940년에 들어서 그는 연속적인 구성의 대작을 많이 그렸다. 초벌칠도 하지 않은 캔버스 위에 그는 물감을 부어 깊이감을 이끌어내려 했다. 그의 색채가 전해 주는 느낌은 자유분방한 것들이었다. 거센 소용돌이처럼 공격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매우 낭만주의적인 평화로움과 즐거움을 암시하기도 한다.

“나는 그림 속에 있을 때 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 못 한다. 내가 어떤 행위를 저질렀는가를 알게 되는 것은, 그림과 친숙해지는 얼마간의 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가능해진다. 그림은 스스로의 생명력을 지니기 때문에 나는 그림을 고치거나 이미지를 부수는 일에 대해 조금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저 나는 그런 식으로 그림이 완성되기를 허용해 줄 뿐이다. 나 자신과 그림의 접촉이 끊어지는 경우는 결과가 엉망진창으로 나타날 때뿐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림과 나 사이에 서로 주고 받는 완벽한 조화 관계가 성립되며, 이 때 그 그림은 괜찮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이다." - 작가의 작업일지 중에서

 

 

 

1. 미국의 화가. 추상표현주의를 주도했으며, 특히 액션 페인팅의 대표적 인물이다. 상당한 양식적 실험을 거친 끝에 1947년경 '드리핑'이라는 극단적인 기법을 개발했는데, 이것은 후에 그의 전형적인 작품 양식으로 굳어졌다.

 

2. 1920년대 후반 로스앤젤레스에서 그는 신비한 종교의 분파인 '신지학협회'의 회원이자 화가·삽화가인 프레더릭 존 드 세인트 브레인 슈반코프스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그의 영향을 받았다. 폴록은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옹호한 무의식적인 형상을 연구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3. 폴록은 또한 초현실주의자들이 옹호한 무의식적인 형상을 연구하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1935년 가을에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 화가로 고용되어 대공황중에도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을 누렸으며 1943년초 그의 미술을 도약시킬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4. 1937년 그는 알코올 중독으로 정신과 치료를 받기 시작했으며, 1938년에는 잠깐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했다. 1943년 연방미술사업국이 해체된 뒤 페기 구겐하임이 운영하는 뉴욕 시의 '금세기 화랑'과 계약했으며, 그해 11월 그곳에서 최초의 개인전시회를 가졌다. 그뒤 그는 거의 해마다 새로운 작품으로 개인전시회를 가졌다.

 

5. 1945년 화가인 리 크레이스너와 결혼하여 뉴욕 주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으로 이사했으며 1956년 자동차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Jackson Pollock

 

                                                                                                                                             

                                                 

      

 

                                      <속기에 의한 인물>, 142.5×243.8cm, 1942

 

그 작품들은 붓으로 칠한 것이 아니라 튜브에서 직접 짜낸 것이다.폴록의 의도는 물감으로 그리는 것이었고 그래서 드리핑 기법과 함께 막대기가 사용되었다.

 

 

                           

 

                                             <남과 여>, 184.4×124.5cm, 1942

 

이 작품들의 경향은 원시세계의 신화적인 요소들이 내부에 내재되어 자연스럽게 상징성을 내포한 채 피카소적인 분해와 형태들로 표현되어져 있었다.

 

또한 초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사용되어진 오토마틱한 형태가 한몫하고 있음을 위의 그림에서 알 수 있다.

 

 

                    

 

                                              <달의 여인>, 177×107cm, 1942

 

                

 

                                                 <벽화>, 243.2×603.2cm, 1943

 

이 작품 제작에 있어 폴록은 미지의 공간을 상대했고 그는 이것으로 하여금 ‘이미지와 공간의 갈등’또는 ‘비 이미지와 공간의 갈등’을 갖게 되어 이젤 페인팅과의 결별과 올 오버 페인팅의 예고를 제시하는 전환점을 갖게 된다.

 

 

                                                    <암늑대>, 27×29.8cm,1943

 

상당한 상징성과 신비성이 내재 되어 있다.이러한 무의식의 역할에 눈을 뜨게 된 것은 그가 초현실주의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고 후에 오토마티즘 (automatisme)에 의해 그림을 그리게 하는 데에 있어서 발판을 제공하였다.

 

 

<드리핑, drippainting>
 

1947년에서 1950년 사이 잭슨폴록은 그의 절정을 이루는 시기를 맞이하게 되며 이 시기에 드리핑 이라는 기술을 개발하게 된다. 드리핑기법은 작가가 작품을 제작할 때 붓이나 나이프 등을 이용하여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물감을 캔버스 위에 떨어뜨리거나 부어버리는 회화기법의 하나를 말한다.

 

잭슨폴록에 의해 본격적으로 주목을 끌기 시작한다.잭슨폴록은 유화물감을 버리고 공업용 왁스인 듀코 에나멜 물감 등의 유동적 물질들을 사용하였고 보다 더 자율적인 자기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20세기 초부터 중요한 회화의 이면에는 행위의 문제가 늘 강조되며 논란이 되어 왔다.이러한 행위 중심적 방법으로 작업에 임함으로써 작가의 공간과 시간에 대한 관계는 변화 된다.

 

이 관계는 더 이상 화폭 바깥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림 그리는 작가감정의 움직임을 통해 화면에 곧바로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감정적 요소는 폴록에 이르러 절정에 달하게 된다. 

 

 

               

 

                                            <더위속의 눈>, 137×109cm, 1946

 

폴록은 이젤을 넘어 액자 회화를 넘어서려는 의도로 올 오버의 표현을 하게 된다.이것은 그에게 새로운 공간적 시도가 시작된 것이었으며 마쏭을 통해 실험해왔던 선이 새로운 단계를 접어들어 형체의 서술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시작된 것이다.

 

 

 

                                          <다섯길의 심연>, 292.2×76.5cm,1947

 

캔버스를 이젤이나 벽에 걸지 않고 마루바닥에 펼쳐 놓고 공업용 에나멜리아 상업용 페인트를 가지고 뿌리고 흘리는 기법과 마른 붓,막대기 작은 삽을 도구로 사용해서 그림 작업을 했다

 

이 그림은 그림치고는 매우 큰 벽화 크기의 그림인데 이 부분은 이 그림을 확대시킨 그림의 일부분이다.

 

이 때부터 폴록은 붓으로 물감을 칠하지 않고 캔버스에 에나멜 물감이나 알루미늄 물감을 떨어트려서 우연히 묻어 나오는 물감의 기법을 사용했다. 또한 이 그림에서는 물감뿐만 아니라 여러 도구들을 한꺼번에 함께 사용했다.

 

                           <올 오버 페인팅, all over painting>

 

잭슨폴록은 40년대말 자동적인 드리핑 기법을 바탕으로 하여 1948년부터1951년까지 자신의 가장 성숙한 작품인 올 오버 페인팅을 제작하게 된다.


올 오버(Allover)란, 그려진 화면의 특정한 초점 또는 중심부가 없이 화면 전체가 고루 평등한 평면으로 처리되고 있는 회화를 말한다.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놓아 두고 작업을 하였는데, 전체적인 윤곽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려지는 회화는 시간적인 지속을 유지케 하는 순간 부분의 결합이 그 결합의 관계를 넘어서 동질적이면서 올 오버의 전체가 되는 것으로써 그것은 시각이 달라졌다는 문제가 있다.

 

폴록은 올 오버 페인팅을 제작하면서 명암의 대비를 완화해 갔다. 명암법을 기반으로 하는 윤곽선의 복잡함은 큐비스트와 같은 조각적인 음영에서 보는 삼차원적인 일루젼을 지니게 되며 그런 방법에 의해 몇 개의 대상물이 분해 되고 중복될 때 화면은 울퉁불퉁해 지면서 진동하게 된다.

 

 

 

                                  < 가을의 리듬 (Autumn Rythm : Number 30)>, 1950

 

폴록의 그림에서 그림의 제목은 중요한 것이다. 그림을 보고 도대체 무슨 그림인지 짐작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그림의 제목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지침서가 되어주기 때문이다.

 

                 

 

                                            <라벤더미스트>, 221×299.7cm, 1950

 

 작품에서는 알루미늄 도료의 은색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것도 어둠과 밝음을 강력하게 중화시키고 있다.

 

반사하거나 흡수하는 그 붙잡을 수 없는 빛은 색채의 엉킴 속에서 용해되고 그럼으로써 올 오버의 색조 속에 끼어드는 것이며 그것은 큐비즘의 회화와는 다른진동을 화면에 가져온다.

 

액션페인팅


액션페인팅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서 일어난 회화 양식의 일종으로, 형식적인 면은 추상적이나 내용적으로는 표현주의적이라는 점에서 추상표현주의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액션페인팅의 창시자들은 2차 대전 후 유럽에서 미국으로 망명한 전위 미술가들이었다. 현대 미술의 후원자인 페기 구겐하임이 ‘금세기 예술'이라는 화랑을 열면서 전위 미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고, 잭슨 폴록을 비롯한 로버트 머더웰, 한스 호프만, 마크 로드코 등의 개인전이 이곳에서 열렸다. 특히 잭슨 폴록은 미리 계획되는 지시성이나 방향성을 갖지 않고 형상을 만들어 나가는 행위를 강조한 액션페인팅 기법을 개발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을 대면하면 마치 색채의 뒤엉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묘한 기분을 느끼게 된다. 얼핏 보면 매우 단순해 보이는 색채의 뒤엉킴이다. 하지만 제각기 동떨어져 있던 이 색채의 혼합은 매우 역동적으로 파동을 일으킨다.

폴록의 그림은 수미터가 넘는 커다란 캔버스 위를 다양한 색상으로 뿌리는 작업에서 시작된다. 따라서 이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많은 힘과 기술이 요구된다. 이 과정에서 잭슨 폴록은 색채를 쏟아부은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혼을 부어 놓은 느낌이다.

1960년을 정점으로 액션 페인팅은 대가들이 점차 죽음을 맞이하면서 쇠퇴기를 맞게 되고, 이는 60~70년대의 ‘색면파’ 회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출처: 아티스트 엄옥경 블로그

출처 : Artist 엄 옥 경
글쓴이 : 스카이블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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