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가 김달진 미술연구소와 함께 한 설문조사 '(100년 후에도) 잊히지 않을 작가들'을 지난 15일에 이어 게재합니다. 첫 회에 실린 이우환, 김수자, 박서보, 정현에 이어 이번에 소개되는 작가는 설치미술작가 이불, 화가 김창열과 김홍주입니다. 설문조사에는 미술평론가, 큐레이터, 미대 교수 20명이 참여했습니다. 전문가들은 '국내외에서 활동을 하는 한국 생존 작가 중 미래에도 잊히지 않고 기억될 작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각각 3~5명씩 추천했습니다. 이 설문조사는 미술시장의 뉴스가 비대한 오늘날 화랑이나 경매회사가 아닌 비영리 부문에 종사하는 미술 전문가들을 통해 우리 미술작가들의 미래 가치를 가늠해보자는 의도에서 기획됐습니다. 설문결과 복수로 추천된 작가들을 몇 차례에 나눠 무작위로 소개합니다. '잊히지 않을 작가들' 연재가 끝나면 미술 전문가 60명이 선정한 '2008 미술품 전시의 베스트 건물'을 연재합니다.
엽기적 퍼포먼스로 시작 예민한 감각으로 세상을 읽고
이에 대해 조용히 깊은 자기 성찰 통해 반응
여타의 작가들에게 이런저런 기대를 갖는 것은 한국을 대표해서 21세기 미술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주기를 바라는 뜻에서일 것이다. 이불(44)의 대학졸업 후 지금까지의 작업을 줄곧 살펴본 필자는 이불을 100년 뒤에 남을 작가로 선택하는 데 크게 주저하지 않았다. 미술가들의 순위를 매기는 권위 있는 매체들의 원칙에 부합하기 때문이며, 또 필자 스스로가 정하고 있는 원칙과 일치하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이불은 시장의 인기와는 거리를 두고 있다. 철저하게 자신의 시각을 통해 세상을 보고 독자적인 언어로 자기미학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미술가에게 시장성은 당대의 인기를 반영하며 오늘의 가치관에 부합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예술적 성과는 역사와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봉사하는 것임으로 당대의 인기는 그리 중요치 않다.
- ▲ 이불의 설치작품‘사이보그 W4’(1998년작·185 x 60 x 50cm). /PKM갤러리 제공
이불은 도발적인 여성주의를 상징하는 히드라 모습의 설치작품,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뒤를 닦는 엽기적인 퍼포먼스로 시작했다. 이후 그의 작품은 고통인 동시에 희열이고 아름다운 동시에 그로테스크한 것으로 진화했다. 자석의 남극과 북극처럼, 서로 밀어내면서 동시에 일체를 이루는 이율배반의 상황, 즉 '불편한 공생'이 그의 작업의 요체이다. 기계인 동시에 인간이기도 한 '사이보그'나 '몬스터'로 부조리한 현실을 표현하면서 이런 태도를 유지했다.
이불은 간단없이 그의 작업을 전개해 왔다. 그리고 이런 뚝심은 여전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성실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뚝심과 성실만으로 좋은 예술가가 될 수는 없다. 그는 뚝심만큼 예민한 감각으로 세상을 읽고 이에 대해 조용히 깊은 자기성찰을 통해 반응한다.
그는 실험적인 경향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스트로 출발했다. 인내를 필요로 하는 수공적인 작업을 통해 예술의 전통적 덕목인 '작가의 손'을 복권했다. 마라톤에서 모든 주자들이 결승점에 골인하지는 못한다. 성실하게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고 연습량이 충분한 주자만이 골인하게 마련이다. 이불은 그런 주자다.
김창열
'영롱한 물방울'을 회화 주제로 창조
화가 김창열(79)의 물방울이 회화로서 성공한 이유는 몇 있다. 가장 두드러진 이유는 방법론의 개발과 그 기술이다. 원천기술이라는 말은 과학의 세계에만 있지 않다. 김창열은 '물방울'의 원천기술을 보유했다.
원래 물방울은 미술에서 친숙한 소재였다. 과일에 맺힌 물방울에서부터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까지, 주제를 부각하는 조역으로서, 혹은 화장품으로, 화면에 쉼 없이 등장해 왔다. 그런데 이 조역을 갑자기 주역으로 바꾼 작가가 바로 김창열이다.
- ▲ 김창열‘물방울의 형태’(1978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사실 물방울이 갖는 차고, 맑고, 투명한 기운 자체를 독자적인 역할로 부각시킨 것만 해도 대단하지만, 그것을 기성의 기법과는 달리 분할기법으로 대담하게 이미저리(imagery·마음의 상〈像〉)를 유도해 물방울 고유의 '영롱'한 아우라(분위기)를 만든 것은 더욱 의미가 있다. 그래서 그의 물방울은 가까이서 보면 물방울답지 않은 물방울이 개념적인 절차에 따라 나열된 것일 뿐이지만, 일정한 거리를 두고 보면 갑작스럽게 영롱한 이미지가 눈을 압박하며 새로운 물방울의 이미지로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작가가 미술사에 대해 이론적이고 기술적인 분석을 했다는 증거이다. 그는 모더니즘의 전형적인 비평방식의 작가라 할 수 있다.
김홍주
그림이 무엇인지 평생 끊임없이 문제 제기
김홍주(63)는 그림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고 이를 해명하면서 그리기 자체를 기꺼이 즐기는 화가다. 회화에 대한 풍성하고 매혹적인 문제를 일관되게 제기한 작가이기에 그는 미래에도 기억될 것이다.
그는 평생 지독하게 그리기에 매진해 왔고, 그림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물어왔다. 그에게 그림 그리기는 그런 질문과 수행의 과정에서 나온다. 대부분의 작가들에게 회화란 소박한 사실적인 재현이나 관념의 도해, 혹은 학습된 서구 미술의 여러 경향 중에서 하나를 받아들여 이를 번안하는 그리기다. 그러나 김홍주는 그런 작가들로부터 멀찍이 물러나 있다.
- ▲ 김홍주의‘무제’(2004년작). /로댕갤러리 제공
김홍주의 그림은 창백한 재현, 과도한 개념이나 의미 부여, 혹은 주관적인 드라마 없이 오로지 회화 자체를 대상으로 그것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흥미롭게 그려 나간다. 밑칠을 하지 않은 캔버스(리얼 오브제)를 이용해 그린 곳과 안 그린 곳의 미묘한 관계를 문제 삼고, 회화적 재미를 교묘히 감추면서 즐겨 사용하는 매력이 있다. 그리고 캔버스의 조직과 붓 자국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 동질화된 상태로 화면을 만들어, 보는 이의 시선을 이완시켜 놓기도 한다. 아울러 그로테스크한 환상, 조감도적인 배열, 대상의 왜곡이나 변형, 오브제 콜라주의 독특한 구성, 변태적인 왜상(歪像), 투시화법에 의한 이중상과 같은 특이한 구성과 방법에 의존하는 그의 그림은 또한 수를 놓은 것 같이 세밀하면서도 무수한 시간의 축적, 노동에 힘입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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