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스크랩] 회화에서 보는 오늘날의 팝아트

영원한 울트라 2008. 2. 3. 13:19
회화에서 보는 오늘날의 팝아트


                                                                 

 마이클 크레이그 마틴, 빨아들이다, 캔버스에 유채, 2002

 

요즈음 미술에 재미있는 현상이 보인다. 포스트모던 시기에 들어 ‘회화의 복귀’를 맞은 것도 이미 역사상 두어 번 있었지만, 또 한 번 회화에 적잖은 관심이 쏟아지고 있다. 그런데 미술사의 속성이 늘 그렇듯이, 전에 보았던 방식이 아니다.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없을 듯, 이미 너무 많은 표현이 수많은 이야기가 진행된 회화가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즈음 서구를 위시한 미술 세계는 회화가 가진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분위기이다. 한 예로, 현재 런던의 싸치 겔러리에서는  장장 2년 동안 회화 특별기획전을 기획해서는 50여명이 넘는 화가들의 작업을 계속적으로 보이고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이를 분석하기란 아무래도 성급하다. 회화라는 장르가 본래 고급(high)미술의 주역이었고, 자본주의 사적재산의 ‘소유’라는 방식에 가장 잘 들어맞는 매체이기는 하다.   그렇다고 이 때문에 더글라스 크림프처럼 브르주아 이데올로기를 지지한다고 말하는 것은 좀 심하다는 생각이다. 반대로 바바라 로스와 같이 회화의 정신적 초월성을 강조하고 그 인본주의적인 속성을 찬양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오늘날 새로운 회화의 부각을 알아보기 위해, 회화자체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보다 구체적인 사례로 들어가는 편이 더 먼저이다. 

 

        회화의 영역은 하도 다층적이라 단순하게 일반화시킬 수 없다. 이질적 영역들이 서로 교차하여 복잡하게 연관을 맺는 작금 포스트모던 작업의 현상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면, 회화에서의 팝아트 혹은 팝아트의 회화가 두르러진다. 얘기가 재미있어진다. 본래 회화의 클라이막스라 할 수 있는 모더니즘의 추상표현을 공격하며 나왔던 것이 팝아트의 탄생이고 보면, 고급미술과 키치의 연계로 봐야 하는 것인가. 많은 생각이 오가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기존의 팝아트가 아니고, 회화의 주요 속성인 승화적 예술성이 아닌 점이다. 

 

        이렇듯, 회화에서의 팝아트를 생각할 때 ‘물증’이 필요한데, 때마침 적합한 전시가 열리고 있다. 겔러리 현대는 오늘날의 팝아트 회화를 대표적으로 보이는 미국, 영국 작가 7명을 전시한다. 마이클 크렉-마틴(Michael Craig-Martin)이 대표격이고, 줄리안 오피(Julian Opie), 폴 모리슨(Paul Morrison), 제프 건트(Jeff Gauntt), 카로 니더러(Caro Niederer), 리사 루이터(Lisa Ruyter), 로버트 멜리(Robert Melee) 등이 한 자리에 모였다.

 

        이들의 작업을 한마디로 종합할 수도 또 그럴 필요도 없다. 팝의 요소 중에서도 제각기 다른 양상을 평면에 구현하기 때문이다. 크렉-마틴의 경우는 개념미술과 일상 오브제의 디자인적 구성을, 오피는 대중적 기호와 애니메이션의 매끈한 연합을, 모리슨은 판화의 양각과 음각의 간결한 언어로 단순화한 자연의 이미지를, 건트는 동화같이 친숙한 구상이미지의 초현실적 구성을, 니더러는 흑백사진의 시상을 축약된 단색조 회화로, 멜리는 레디메이드의 키치의 추상적 패턴화를 보여준다.

 

        다층적인 표현 양상을 넘어 서로 통하는 점이 있다면, 놀랍도록 윤곽선이 명확하고, 간결하고, 깔끔하다. 한 마디로 “쿠-울(cool)”하다. 잘 닦이고 예쁘게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보는 산뜻함이다. 인간적 흔적을 없애고 대중문화, 대량생산의 산업사회를 단편적으로 떠내는 팝의 전형적 특성은 여전하다. 그런데, 지나치게 매끈하다. 이렇듯 ‘반짝거리는 표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결벽증의 사람을 대하듯, 너무 깨끗하다는 느낌이다. 뭐든 지나친 것은 수상한(?) 법이다. 이 작업들이 정말이지, 일간신문의 전시란에 소개되듯, 쉽고 대중적으로 친숙한 것으로만 받아들여도 괜찮을까.

 

        작품이 나타내는 바를 액면 그대로 읽으면 안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할 포스터는 포토리얼리즘 회화의 미끄러울 정도로 잘 밀봉된 표면을 보고 표현될 수 없는 실재(the real)의 트라우마가 표면에서 억압되어 있는 심적 긴장이라 하였다. 물론 팝아트는 심각한 것을 싫어한다. 파고들 깊이와 심도를 팝아트에서 찾는 것은 넌센스이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련의 팝아트 회화들의 특징은 하나같이 평면의 디자인에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다는 점이다. 잘 닦아놓은 컴퓨터 스크린을 보듯, 거칠거나 미완성의 모습을 모두 거두고 결벽증과 완벽함으로 모든 것을 표면에 집중시킨다. 

 

        이미 언급한 크림프가 목소리를 빌어, 자본주의의 사적소유라는 미술 소장의 본유적 욕구를 자극할 정도로 작업들이 예쁘고 표면이 반짝반짝하다. 오피의 작품은 단순하기 짝이 없지만 복잡한 외양을 단번에 멋진 윤곽선으로 처리해내는 방식이 감탄스럽다. 고도로 세련된 색채감과 디자인이 보는 이로 하여금 갖고 싶은 충동을 자아낸다. 그 그림을 내 방에 걸어놓으면 내가 그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듯이. 작가의 출생지인 런던이나 뉴욕의 대도시의 삶의 스타일이 바로 이런 것이고, 우리가 지향하는 방식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니더러는 어떠한가. 자신의 회화를 판매한 소장가의 사적 장소에서 사진을 찍어 이 사진 자체를 작품화하였다. 판매된 작품은 거실이나 부엌 등 일상의 공간으로 들어가고 그 현장의 장면은 다시 사진으로 작품이 되는 것이다. 돌고 도는 자본의 유통을 보듯, 그 과정에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 사이의 경계가 흐려진다. 작품이 작업실을 떠난 후의 거리를 가시화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작가의 사적인 창조 영역으로 다시 끌어오는 효과를 갖는다. 일종의 시각적 순환으로, 그 과정은 그림을 공공 영역으로 밀어내어, 작가는 작품을 소장가뿐 아니라 다른 관객들에게도 공개한다. 동시에, 이 작업은 작품의 자율성을 강조한다. 어미의 품을 떠난 자식처럼, 그림이 작가의 손을 떠나 다른 환경들을 거치는 과정을 보이는 것이기에. 

 

        이들의 회화는 회화임에 분명한데, 로스가 말하는 그림이 갖는 초월적 정신성은 찾아볼 길 없다. 이 작업들은 지나치게 가볍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60년대 팝의 첫 출현 이후, 미니멀리즘, 개념미술, 포스트미니멀을 거친 요즈음의 맥락에서 나오는 또 다른 팝이 그렇게 단순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팝 작가들의 작업을 사람에 비유하자면, 본래 아무 생각이 없어 가벼운 사람이라기보다, 너무 생각을 많이 하고 난후 모든 것이 단순해지고 쉬워진 일종의 ‘도사’를 마주 대하는 느낌이다. 다양한 작품들이지만 공통적으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듯 하다. 즉  삶의 일상사란, 아이가 세상을 보듯  작은 것 하나하나 또렷하고 쉽게 이해하는 것이라고. 이러한 팝의 자세는 처음부터 나이브한 단순 논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런 눈으로 크렉-마틴이 대규모 알류미늄 패널 위에 그려놓은 물통이며 책이며 신발을 본다. 아크릴의 단순한 디자인이 일률적인 윤곽선으로 처리되어 있다. 개념미술을 거친, 예일 대학 출신의 60대 중반의 작가가 제시하는 평범한 일상의 소재들이다. 크렉 마틴의 작품은 아크릴 윤곽선과, 기계적이고 구상적인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하기에 명확하고 구체적이다. 친숙한 소재는 명료하고 단순한 개념미술의 언어로 기호화되고, 밝고 명랑한 색채를 입은 산뜻한 디자인으로 각색된다. 단순한 윤곽은 감정을 배제한 팝아트의 전형적 특성을 갖는다.

 

        루이터 회화의 가볍고 얇은 이미지도 예사롭지 않다. 전체 장면의 중간을 스넵샷으로 떠낸 것처럼 이미지를 단순하게 묘사한 그녀의 그림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내용을 많이 담고 있는 듯 보인다. 관람객은 퍼즐을 맞춰나가듯 상상하며 그림을 보는데 상당히 흥미롭다. 그녀의 작품은 20세기 초 표현주의의 주제, 팝아트의 간판과 같은 스타일, 연재만화와 같은 미학 등 다양한 사조를 통합한다. 작가 자신은 스스로의 작업을 정통적인 회화이기보다는 영상이나 사진과 더욱 연관성이 있다고 강조한다. 루이터의 작품은 근대 회화와 현대사진의 매개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팝아트’라는 범주로 이 다양한 작가들을 묶는 것은 인위적이다. 요즈음에는 미술양식을 범주화하는 것은 멋져 보이기는커녕 나이브하다. 소위 후기구조주의 사고방식에 힘입은 우리는 일군의 작가들을 하나의 무리한 범주보다는 개별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그래도 모래알처럼 모두 흩어버릴 수는 없다. 무리 없이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의 작업이 여러 시각적 언어를 관통하는 ‘팝아트’라는 기획 아래 “일시적으로” 모인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다른 기획으로 짜면 각기 제 갈 길로 갈 작품들이다.

        넓은 의미로 보아, 포스트모던 시기에 팝을 다루지 않는 작가들이 얼마나 되겠는가. 본래 팝아트는 모더니즘의 고도로 발달한 추상이 ‘고급’ 미술로 군림하며 일상적 삶과 유리된 상태를 가져온 것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팝의 출현은 그 반문화적 도전성과 더불어 포스트모던의 시작에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오늘날의 미술이 보이는 공통적인 속성은 이질적인 것들이 함께 공존하는 다층성에 있다. 팝아트 회화가 보여주는 다층성 내지 혼성성은 상이한 표현방식 사이의 경계를 흐리는 것에서 드러난다. 즉, 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 디자인과 순수회화, 고급미술과 대중미술, 회화와 벽화(설치), 평면과 오브제, 아나로그와 디지털, 인간적인 것과 기계적인 것, 캔버스와 컴퓨터그래픽 등의 장벽이 어느새 허물어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 팝아트 회화들의 작업에서 보는 명확한 윤곽선은 표면에서만 경쾌하게 두드러진다. 내부적으로는 기존의 경계들을 흐리는 윤곽선이다. 겉으로는 확실하지만 속으로는 더없이 모호한 작품들이다.

 

        60년대 팝아트의 첫 시작에서 우리는 이미 산업사회 대량생산이 가져온 기성품의 차용을 훌륭한 미술 언어로 수용하였다. 팝아트는 그러한 공장 생산의 익명성과 비인간성을 액면 그대로 찬양한 것은 아니다. 영국의 헤밀톤과 미국의 워홀, 로젱퀴스트, 올덴버그 등 팝 아트 1세대들이 보여주었듯이, 팝아트는 미묘하게 이중적이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는 워홀의 유명한 말은 말 그대로 받아들이기보다, 기계만능 세계에 대한 거울로, 혹은 인간성 발언의 역설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그의 코카 콜라나 마릴린 먼로의 실크스크린은 대량생산, 대중매체의 차갑고 반복적인 파사드 배후, 인간성의 상실을 함께 보여준다. 표면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반세기 전 출현한 역사적 팝아트가 깨지 못한 한 가지 금기가 있다. 이는 오늘날의 팝아트에서도 여전한 모양이다. ‘팝’이 지닌 친밀하고 대중적인 의미는 작품 하나의 가격이 수천만원에 이른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대중적 작업인 팝 아트를 대중이 결코 소유할 수 없다는 점은 아이러니가 아니고 무엇인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예술학과(서양미술사) 교수 전영백

   


 

    로버트 멜리, 준대체대용, 혼합재료, 2005 


 

 

             제프 건트, <우리는 모든 것을 남기고 죽는다> 나무에 아크릴릭, 2004-2005


 

 

                     줄리안 오피, <하루종일 비가 올 것처럼 보였다. 사실 여기는 언제나

                            비가 오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에 화학재료, 2004


 

 

폴 모리슨, 양지식물,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4
 
 
출처 : Artist 엄 옥 경
글쓴이 : orangepin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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