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스크랩] 스위스 바젤미술관

영원한 울트라 2008. 2. 27. 12:37
[이주헌의 유럽 미술 기행] 스위스 바젤미술관

명작 풍성한 유럽 첫 공공미술관


 


▲ 홀바인,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 152, 유화, 30.5X200cm


인구가 20만명이 채 안되지만 무역도시이자 금융도시, 제약도시로 유명한 스위스의 바젤. 독일, 프랑스와 근접해 있고 알프스의 눈이 녹아든 라인강이 관통하는 이 도시는, 서양미술사에서도 나름의 중요한 역사적 자취를 남기고 있다. 유럽 최초의 공공미술 컬렉션, 그러니까 공공미술관이 바로 이곳 바젤에서 탄생했다. 바젤은 다른 무엇에 앞서 문화도시로서 그 위대한 빛을 발하는 도시인 것이다.

바젤미술관이 설립된 때는 1662년. 유명한 바젤대학의 부설기관으로 문을 열었다. 교황 피우스 2세에 의해 1460년 스위스 최초의 대학으로 설립된 바젤대학은 한때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가 가르치는 등 휴머니즘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중심지로 성가를 높였다. 그런 기초가 이렇듯 세계 최초의 공공미술관을 낳은 좋은 배경이 되어 주었다. 미술관 컬렉션의 모태는 ‘아머바흐’라는 출판업자·법학자 가문의 3대가 모은 회화 49점, 드로잉 1866점, 판화 3881점 등 총 5000여점의 미술품. 시 당국이 1661년 모두 구입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미술 컬렉션이 아직 왕후장상들을 주된 소유층과 감상층으로 하고 있던 무렵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공공미술관을 창설했다는 점에서 당시 이 도시공화국의 남다른 선진성을 읽을 수 있다.

바젤미술관의 이런 선진성은 바젤에서 태어났거나 활동한 작가들의 작품에서도 선명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이는 이 도시가 종교개혁의 세례를 받고 그 이상 아래 발전해왔다는 사실과 깊은 관계가 있다. 주지하듯 스위스는 독일과 함께 주요 종교개혁의 진원지였다. 특히 바젤은 에라스무스를 비롯해 츠빙글리, 칼뱅 등 저명한 인문주의자와 종교개혁가의 영향이 두루 미친 곳이다. 철저한 실증주의적 전통과 휴머니즘의 공기를 호흡한 바젤 작가들의 작품에서는 그래서 치밀한 조형의식과 더불어 실존주의적인 근대인의 정신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남부 독일 아우크스부르크 태생이지만 한동안 바젤에서 활동한 16세기의 거장 ‘작은’ 한스 홀바인이나 19세기 상징주의의 대가 아르놀트 뵈클린, 사회적 사실주의 경향의 농촌화가 알베르트 앙커 등이 그 대표적인 면면이다. 홀바인의 경우 소장품 수로 보자면 이 미술관의 컬렉션이 세계 최대이다.

▲ (左) 뵈클린, 페스트, 1898, 유화, 149X104.5cm / (右) 반 고흐, 피아노를 치는 가셰양 1890, 유화, 102.6X50cm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한 최초의 공공미술관


이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홀바인(1497~1543)의 걸작 가운데 ‘무덤 속 그리스도의 시신’은 그 냉철한 자연주의적 시선으로 유명한 작품이다. 흰 천이 깔린 바닥 위에 시신이 길게 누워 있다. 바짝 말라 명태처럼 굳어버린 몸뚱이, 갈색으로 타버린 얼굴과 손, 발. 주검의 참혹한 형상은 차마 똑바로 쳐다볼 엄두를 내기 어려울 정도다. 신의 아들로서의 위엄이나 권위는 어느 한구석 찾아볼 수 없다. 주검에 대한 철저한 자연과학적 관찰과 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만이 도드라져 보인다. 해부학 교실 앞에서 곧 쓰여질 차례를 기다리는 듯한 을씨년스런 분위기의 시체와 꽉 막힌 답답한 공간….

이 그림이 당시 이 작가에게 전유럽적 명성을 가져온 최초의 작품이라는 데 대해서는 의문을 달 이유가 없을 것 같다. 홀바인이 바젤에 머물 당시인 1521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스물넷에 한스 오버리트란 부유한 상인의 부탁을 받고 그린 제단화인데, 시선을 사로잡는 그 고밀도의 표현력은 이미 대가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처럼 철저히 실존주의적인 정신을 표현한 데서 우리는 인문주의자로서 홀바인의 선구적인 시각과 자질을 읽게 된다. 그는 바젤로 이주해오면서 미코니우스라는 한 인문주의자로부터 형과 함께 에라스무스의 ‘우신 예찬’을 학습했다. 그리고 작가로서 명성이 쌓이면서부터는 에라스무스와 직접 교분을 쌓는 한편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다. 이런 교유 관계가 말해주듯 그는 그 시대 인간의 본성을 정확히 읽고 표현할 줄 알았던 극소수의 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바젤 출신의 대가 뵈클린의 대표작 ‘페스트’는 미완성이다. 단숨에 많은 생명을 앗아가는 전염병 주제가 미완성으로 끝난 것은 왠지 ‘불길한’ 느낌을 준다. 인간을 위협하는 자연의 힘 앞에서 결국 무력하게 무릎을 꿇는 우리의 운명적인 나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라고나 할까. 1898년에 그려진 것이니까 작가가 죽기 3년 전에 착수한 작품인데, 그 배경에는 자식을 각종 전염병으로 잃은 그의 가족사가 진하게 깔려 있다. 그의 열두 자녀 중 여섯이 페스트, 콜레라, 장티푸스 등에 의해 희생됐다.

이 그림이 아니더라도 뵈클린의 다른 많은 작품은 그가 늘 죽음에 사로잡혀 있던 인물이라는 인상을 준다. 흰옷을 입은 사람이 나룻배를 타고 죽음의 강 스틱스의 검은 수면을 가르며 외딴섬으로 나아가는 ‘망자(亡者)의 섬’ 등 그의 작품 곳곳에는 죽음을 응시하는 외로운 인간의 시선이 배어 있다.

▲ 스위스 바젤미술관 전경


로댕 ‘칼레의 시민’도 대표 미술품


바젤미술관의 전반적인 인상은 단정하고 검박하다. 입구와 이어지는 중정은 푹 팬 모양이 매우 아늑한 느낌을 준다. 로댕 작품 ‘칼레의 시민’이 바로 이 중정에 자리하고 있다. 미술관을 닮아서일까, 미로의 ‘태양 앞의 사람과 개’, 몬드리안의 ‘청, 황, 백의 구성’, 레제의 ‘서커스의 곡예사’, 샤갈의 ‘검정 장갑을 낀 나의 약혼녀’, 피카소의 ‘앉아 있는 아를르캉’, 데 키리코의 ‘불행의 수수께끼’, 반 고흐의 ‘피아노를 치는 가셰 양’ 등 널리 알려진 이곳의 명화들 역시 모두 반듯한 인상이다. 1936년에 지어진 기능적인 미술관 건물의 이미지 덕도 있을 것이고, 미술관 안에 그대로 들어앉은 이 도시 특유의 조용한 기풍이 은근히 작용한 이유도 없지 않을 것이다.

중세 때 교통 및 통상의 요지였던 바젤 시가지에는 중세의 자취가 많이 남아 있다. 특히 몇 백 년 된 골목길을 다니다 보면 때로 너무 한적해 마치 시간이 정지된 것 같다. 이들의 안정된 삶이 무척이나 부럽다. 그 안정감 위에 얹혀진 니키 드 생팔이나 보로프스키 등의 멋들어진 환경조각들을 보노라면 거기서부터는 곧 환각마저 경험할 것 같다. 확실히 거리의 아름다운 조각은 삭막한 도시 공간을 금세 인간적으로 만든다. 서울의 많은 환경조각들이 오히려 없느니만 못한 것에 비긴다면, 바젤의 환경조각들은 분명히 생활 속의 신선한 이벤트로 자리잡고 있다. 삶의 의미를 되새겨보게 하는 이정표다.

 



출처 : Artist 엄 옥 경
글쓴이 : 스카이블루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