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형구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다.
그의 작품을 자화상이 아니라 굳이 ‘자신의 초상화’라는 모순적인 용어로 일컫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을 대하듯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타자화된 시선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작가들은 평생을 거쳐서 그리는 자화상을 10여 년 간의 단 시간에 수십 점 그려낸다는 것,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이 주요한 대상이 된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연극배우처럼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고, 때로는 익살맞은 표정을 짓기도 하고, 때로는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등 다양한 표정으로 그림 속에 등장한다.
그 중에는 젊은 시절 렘브란트가 판화로 제작한 찡그린 표정의 자화상을
연상시키는 것이 있다. 이는 자신의 얼굴을 소재로 인간의 감정의 표현을 연습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자화상은 전체에 있어서 일종의 연작의 개념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이 경우 중요한 것은
‘강형구’라는 인물 자체가 아니라 그가 특정한 순간에 표현하고 있는 ‘표정과 감정’이다.
이 ‘표정과 감정’은 결코 강형구만의 삶의 역사를 의도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 순간에 인간 보편이 짓게 되는 표정과 감정인 것이다. 저 유명한 늙은 후의 자화상,
혹은 죽은 후의 자화상 역시도 강형구 자신의 삶의 역사를 담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인 조건인 노화와 죽음에 대한 문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중략)
우리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그는 우선 인물에 대한 우리의 인식 혹은 편견에 의문을 제기한다.
90이 된 마릴린 몬로의 초상이 이 경우에 해당이 된다.
영원한 젊음과 섹시함의 상징으로 기억하고 있는 여배우의 적나라한 주름과 검버섯으로 뒤덮힌 얼굴을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일종의 시각적인 새디즘처럼 보인다. 고전적인 의미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의 가장 근본은 묘사 대상에 대한 희구와 예찬이다. 이러한 희구와 예찬은 대상의 영원한
본질에 육박하려는 시도로 표현된다. 특히 구체적인 인물을 목표로 하는 초상화라는 장르에서는
구하는 이러한 경향이 인물의 이상화로 표현되기 마련이다. 아름다운 젊은 여인의 뒷덜미나
어린 아이의 얼굴을 가득 뒤덮고 있는 주근깨는 인물을 있는 그 자체로 보라는 경고이다.
초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전형적인 포즈나 태도(attitude)의 부제 역시 이와 맥락을 같이한다.
이런 적나라한 실체에 대한 인식은 인간의 본질적 규정에 대한 인식으로 나간다.
강형구가 인간의 얼굴에 시간의 흔적을 나타내는 주름 등에 집착하는 것은 인간 본질의
최종 심급에 있는 것은 모든 것은 시간의 지배하에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아름답고,
제 아무리 현명해도 신처럼 위대해질 수 없는 이유. 그것은 바로 인간이 시간의 지배를 받는
필멸(mortal)의 존재라는 것이다. 그간 묵살되었던 주름과 잡티의 표현은 바로 고전적 초상화에서
보고 싶지 않았던 인간의 필멸성(mortality)에 대한 냉정하고 잔인한 언급이다. 그림 속 인물의 생로병사를,
결국은 모든 것을 부패시키고 사멸시키는 끔찍한 시간의 흐름을 드러내는 이 점이 바로 강형구가 현재적인
순간의 묘사에 중심을 둔 하이퍼리얼리즘을 넘어서는 지점이 된다. 2004년 발표된 작품들에는 이런 인간의
필멸이라는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표정의 인물들이 묘사되어 있다. 이러한 인간의 본질적인 유한성에
대한 인식은 강형구의 다음 단계의 질문이 제기되는 중요한 받침돌이 된다. 통시적으로 개개인에게 시간이
유한하다는 인식은 대한 연구는 이제 시간에 대한 공시적인 통찰로 나가게 된다. 한 사람의 얼굴은 그가 살아온 삶,
그가 살고 있는 시대를 담고 있다는 신념으로 시대의 아이콘이라 할 만한 사람들의 얼굴에 몰두한다.
1달러짜리에 등장하는 링컨의 얼굴, 유명한 배우 소피아 로렌과 마리아 칼라스 같은 인물,
화가이면서도 허리우드의 스타 같았던 앤디 워홀을 그린다.
이 경우에도 작가는 각 인물의 전기적인 삶 전체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채택이 된 이유는 그들이 시대의 아이콘으로, 시대정신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컬러풀한 색채감과 상대적으로 매끄러운 피부 표면을 허용하는 것은 그들에게 통시적인
시간의 흐름의 지배를 강조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
라는 말로 전통적인 작가의 개념을 조롱한 앤디 워홀은 싸늘하면서도 고독한 시선으로 관객을 바라본다.
대중적인 인기를 구가했지만, 진정으로는 고독했던 앤디 워홀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소피아 로렌,
링컨과 앤디 워홀의 형상에서 보는 것처럼, 이런 종류의 인물 묘사들은 묘하게 과장되고 왜곡되어 있다.
인물의 전면성보다 일면적인 성격이 강조된 이러한 류의 초상화에는 캐리캐처적인 성격이 강하게 드러나고 있다.
캐리캐처는 초상화보다 더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이 인물들은 우리 시대에 매우 유명한 사람들 혹은 매우 유의미한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시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아이콘들이라고 할 수 있다. 유명인들은 모두 하나의 캐릭터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이 초상화라기보다 캐리캐처에 가깝게 묘사가 되는 것은 인물에 대한 우리 시대의 이해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