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미술 2006년 2월호 게재>
한 시대를 향한 두개의 시선: 앵그르와 들라크루아
전영백(홍익대 미술대 교수)
라이벌이 되는 경우를 파고들면 크게 두 가지이다. 유사성이 두드러진 경우와 너무 다른 경우이다. 앵그르{J.A.D.Ingres}와 들라클르와{E.Delacroix}는 후자에 해당한다. 이들의 무대는 모던 아트가 형성되기 전, 전통에서 모던으로 전이되는 가장 결정적인 격변의 현장이다. 또한 이 시기는 시대정신의 주도권을 두고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가 공존하며 팽팽하게 맞선 시기이기도 했다. 이같이 굵직한 화두를 품은 시대의 역동적 갈등은 역사의 발전과 예술의 확장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었다. 그 격정은 19세기 초 앵그르와 들라클르와의 회화에서 눈으로 확인된다. 미술사의 영역에서 앵그르는 신고전주의의 마지막 대가였고, 들라클르와는 혁신적으로 부상하는 낭만주의의 선두주자였기 때문이다.
화가의 개인성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것은 자화상이다. 앵그르와 들라클르와의 자화상을 비교하면 두 작가의 상반되는 특성이 고스란히 보인다. 배경과 취향, 그리고 성격이 이렇게 반대일수 있을까 싶다. 연장자 우선의 예를 갖춰, 들라클르와보다 18세나 위인 앵그르의 자화상을 먼저 보자. 그는 훈장과 매달을 자랑스레 단 근엄한 모습으로 79세 노익장을 과시하였다. 높은 지위와 권력을 자랑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앵그르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작가의 79세 때 모습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juste Dominique Ingres는 1780년 프랑스 몽토방에서 태어났다. 툴루즈의 왕립아카데미에서 공부한 뒤, 1796년 파리로 가 당시 화단에서 명성을 떨치던 자크 루이 다비드의 문하에 들어갔다. 1801년 <아가멤논의 사절들>로 로마상을 받은 그는 1806년-1824년 이탈리아에 체류하면서 고전회화와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의 화풍을 연구하였다. 1824년 파리로 돌아와 살롱에 전시된 들라크루아의 <키오스 섬의 학살>에 맞서 <루이13세의 성모에의 서약>을 출품하고, 1827년에는 들라크루아의 <사라다나팔루스의 죽음>에 대항하여 <호메로스 예찬>을 출품하는 등 신흥 낭만주의 화풍에 대항하는 고전파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1834년로마에 있는 프랑스 아카데미의 관장으로 다시 이탈리아에 갔다가, 1841년 파리로 돌아와 1867년 87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표작으로 <오달리스크>, <샘>, <발팽송의 욕녀>, <리비에르 부인>, <터키 목욕탕> 등이 있다.
그런데 들라클르와의 자화상은 이와 대조적이다. 우선, 자신의 지위를 과시하는 액세서리 장식이나 권력의 암시보다는 얼굴의 지적 표정과 섬세한 성격을 드러내는 묘사가 압권이다. 약간은 도도하고 냉정한 느낌, 고상함과 감성을 겸비한 외모, 그리고 귀족적 분위기에 자유로움마져... 이보다 더 낭만적일 수 있을까.
들라크루아 <자화상> 캔버스에 유채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는 1798년 파리 교외의 생모리스에서 태어났다. 명문가 출신으로 외교관 부친을 둔 그는 16세에 고전파 화가인 P.N 게랭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1816년 관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1819년 제리코가 발표한 <메두사호의 �목>을 보고 큰 감화를 받은 그는 1822년 최초의 낭만주의 회화인 <단테의 작은 배>에 이어 1824년 <키오스섬의 학살>을 발표하여 당시 '회화의 학살'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지만 힘찬 율동과 격정적인 표현으로 낭만주의 화풍을 확립시켰다. 당대의 문학가, 음악가들과 폭넓게 교류하며 뛰어난 상상력과 다양한 소재의 회화작품 외에도 독창적인 예술론과 일기 등 미술사에 중요한 문헌을 남겼다. 1863년 65세의 나이로 죽었다. 대표작으로는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알제리의 여인들> 등과 여러 공공 건축물의 벽화, <파우스트 석판화딥>, <햄릿 석판화집>등의 판화 걸작을 남겼다.
그러나 타고난 외모와 태어난 환경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더구나 작가의 경우, 작품에 주목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앵그르가 이름없는 화가이자 조각가의 아들, 빈곤한 평민가정 출신이라 해서 그의 작품의 가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고급관리의 부친을 둔 들라클르와가 수려한 외모와 고귀한 취향을 가졌던들 그의 회화가 그렇게 보이리라는 추측은 근거 없는 것이다. 사실, 그림의 외양적 특성으로만 볼 때 이들 작가의 태생과 작품의 성격은 사실 뒤바뀐 꼴이다. 소위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그림은 차라리 앵그르 쪽이다.
앵그르의 그림은 특히 텍스츄어의 섬세한 표현에서 칭송받았는데, 그 소재며 질감의 선택이 단연 상류층 취향이다. 우단, 면, 실크, 깃털의 촉감은 눈으로 만지는 듯 하고 이를 헐거이 두른 누드의 매끄러운 살은 손끝을 자극한다. 여기에 영롱한 보석의 반짝임이 시각적 액센트를 더한다. 전체적으로 나른한 감각성이 성적인 매력을 고조시키는데, 거의 몽환적인 시각의 유희인 셈이다. <리비에르 부인(Madame Rivière> 1805)>을 포함한 다수의 초상화는 이러한 텍스츄어 표현의 달인인 앵그르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감각성의 최고조이다. 그의 적수 들라클르와는 앵그르를 비판하면서 “단순히 영리하고 나태한 호기심만을 만족시킬 뿐”이라 말했지만, 패션에 대한 그의 지식과 장식에 대한 뛰어난 감각적 표현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타고난 외모와 태어난 환경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 더구나 작가의 경우, 작품에 주목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앵그르가 이름없는 화가이자 조각가의 아들, 빈곤한 평민가정 출신이라 해서 그의 작품의 가치와는 하등의 관계가 없다. 마찬가지로, 부유한 고급관리의 부친을 둔 들라클르와가 수려한 외모와 고귀한 취향을 가졌던들 그의 회화가 그렇게 보이리라는 추측은 근거 없는 것이다. 사실, 그림의 외양적 특성으로만 볼 때 이들 작가의 태생과 작품의 성격은 사실 뒤바뀐 꼴이다. 소위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그림은 차라리 앵그르 쪽이다.
앵그르의 그림은 특히 텍스츄어의 섬세한 표현에서 칭송받았는데, 그 소재며 질감의 선택이 단연 상류층 취향이다. 우단, 면, 실크, 깃털의 촉감은 눈으로 만지는 듯 하고 이를 헐거이 두른 누드의 매끄러운 살은 손끝을 자극한다. 여기에 영롱한 보석의 반짝임이 시각적 액센트를 더한다. 전체적으로 나른한 감각성이 성적인 매력을 고조시키는데, 거의 몽환적인 시각의 유희인 셈이다. <리비에르 부인(Madame Rivière> 1805)>을 포함한 다수의 초상화는 이러한 텍스츄어 표현의 달인인 앵그르를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만든다. 감각성의 최고조이다. 그의 적수 들라클르와는 앵그르를 비판하면서 “단순히 영리하고 나태한 호기심만을 만족시킬 뿐”이라 말했지만, 패션에 대한 그의 지식과 장식에 대한 뛰어난 감각적 표현능력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앵그르는 들라클르와보다 18세 더 선배였으나 4년을 더 오래 살았는데, 앵그르는 87세의 장수를 누렸고 들라클르와는 65세에 생을 마쳤다. 평생 결혼하지 않은 들라클르와에 비해 앵그르는 전력이 화려하다. 앵그르는 두 번 약혼에 실패했고, 첫 결혼에서 상처한 후 3년 후인 71세 때 친구의 딸과 재혼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들라클르와가 독신으로 작업에만 열중했다는 것은 소위 천재 화가에 대한 낭만주의적 신비감을 더해준다. 많은 사람이 따랐던 카리스마의 소유자였던 들라크르와는 오로지 그림 그리기와 회화이론에만 열정을 쏟았다.
그는 상류층 출신답게 문학을 좋아하고 박식한 지식과 예술적 소양을 겸비한 화가였다. 그는 낭만주의의 시발자이자 보헤미안 예술가의 원형인 제리코(Gericault)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들라클르와는 선배작가 제리코와 함께 소위 보헤미안적 삶을 영위하며 배우, 작가, 예술가가 구성하는 문화적 그룹에 참여하였다. 쇼팽은 그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들라크루아 <묘지의 고아소녀>
캔버스에 유채 1824
보헤미안 정신(Bohemianism)은 19세기 낭만주의의 산물로 이를 따르는 이들은 당시 부르죠아 전통의 테두리 밖에 있는 자들로 생각되었다. 당시의 분위기는 보헤미안 예술가를 사회로부터 탈당한 일종의 배반자로 규정하였다. 따라서 초기 낭만주의자들은 예술가들을 사회의 기존체제에 메이지 않는 자유로운 이탈자로 인식한 셈이다. 보헤미안이 갖는 자유롭고 모험적 성격은 오늘날의 ‘BoBos(Bohemian Bourgeois)'라는 신계층이 계승하고 있다.제리코의 죽음 이후 들라클르와는 폭넓었던 보헤미안적 생활을 접었고, 나이가 들수록 작업실에 은거하여 수도자처럼 거의 아무도 만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거리로 나가면 젊은 예술가들이 그를 우상처럼 숭앙하여 따라다녔는데, 들로클르와는 그들에게 혁명, 독립, 그리고 총체성의 상징이었다.
<단테와 베르길리우스(Dante and Vergil in Hell)>는 그가 24세에 완성한 작품이다. 이를 1822년 살롱전에 출품하려 할 때 그의 스승, 게랭(Guerin)은 놀라, 이를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 해 살롱전의 심사의원 중 하나였던 그로(Gors)는 이를 숭앙하여 자신의 비용으로 액자를 만들어주며 전시를 종용하였다. 고위관리의 아들이었던 들라클르와가 액자값마져 남에게 의존해야 했던 상황은 납득이 가지 않으나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그는 부모로부터 물려받게 되어있던 재산을 친척들 사이에 벌어진 법정 분쟁 때문에 어이없이 잃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이 살롱에 입성하게 된 후 들라클르와의 그림은 살롱 심사자들에게 혐오감과 공포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시대의 조류에 힘입어 매번 관전에 등장하였고, 정부에 의해 구매되었다. 그리하여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미술체제에서는 그를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이후 갑자기 등장한 벼락출세 정도의 인물로 여겼고 그의 작품을 불경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미술사에서 늘 그렇듯이, 과거의 작품은 당시의 눈으로 보아야만 그 작품의 혁명적 의미를 알 수 있는 법이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삼각형 구도 및 루벤스와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키는 누드 표현 등으로 고적적 회화라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고전주의자들에게 이 그림이 보여주는 애매한 공간과 낭만주의가 특히 선호하는 폭풍의 주제, 그리고 전통적인 입체 표현과 달리 눈에만 충실한 디테일의 표현 등은 받아들일 수 없는 반역이었다. 들라클르와의 도전은 감성 중시의 낭만주의와 더불어 시각적 표현에 충실한 인상주의의 전조가 되는 것이었다. 이를 모두 아울러, 들라클르와가 제시한 혁명은 색채에서 일어났다.
그가 제시한 색채에 대한 완전히 새로운 인식과 표현은 보들레르가 그를 ‘최초의 현대적(modern) 화가’로 칭송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에 대표적인 것이 1824년 살롱전에 출품한 <키오스섬의 학살(The Massacre at Chios>(도판 )이다. ‘회화의 학살(the Massacre of painting)'이라고도 불렸던 이 그림은 그에 대해 적대감을 가졌던 아카데미뿐 아니라 그를 지지했던 자들마져 경악하게 만들 정도로 파격적 색채 실험의 작품이다. 색채를 단순히 장식적인 염료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신고전주의를 정면 도전하여, 다비드(David) 방식의 규율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시도였다. 대담한 붓텃치는 혁명적이었고 관습을 탈피하여 눈에 충실한 색채 도입 또한 서슴치 않았다.
들라크루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캔버스에 유채 1827-1828
들라클르와의 <키오스섬의 학살>으로 떠들썩했던 1824년 살롱전은 앵그르에게도 그 의미가 크다. 그는 <루이 13세의 맹세(The Vow of Louis XIII)>를 출품하여 고전주의자의 새 지도자로 부상하며 자신의 사회적 입지를 굳혔기 때문이다. 이 구체적인 사건 속에서 앵그르와 들라클르와는 고전-낭만의 분규 속에 공적인 적 혹은 반대파로 인식되었다. 여러모로 눈에 띄게 매력적이던 들라클르와에 비해, 소심하고 따분하고 고집스럽기까지 했던 앵그르가 느꼈을 심적 스트레스는 가히 짐작할 만하다. 저계급 출신이었던 그는 지위 상승의 야망을 갖고 있었고 언제나 아카데미의 수상 여부에 연연하였다. 스스로 타고난 것이 적은 사람이 권력욕이 더 많다는 말은 앵그르의 경우 딱 들어맞는 듯하다.
앵그르는 툴루즈 아카데미에서의 초기 아카데미 훈련을 받은 후 그는 1796년에 파리로 갔고, 신고전주의 대가 다비드의 작업실에 들어갔다. 1801년에 로마상(Prix de Rome)을 획득, 1806년에 이태리로 간 그는 그 곳에서 18년 동안 체류하며 고전주의의 정수를 습득하였다. 그는 거기서 드로잉과 디자인을 위한 놀라운 재능을 발전시켰는데, 큰 영향을 받은 선배로 이태리의 라파엘과 스승 다비드를 들 수 있다. ‘최후의 신고전주의자’답게 앵그르 회화는 그 전반적 특징으로 색채보다는 드로잉의 중요성을 드러낸다. 그리하여 앵그르와 들라클르와 사이의 쟁점은 회화에 있어 드로잉과 색채 사이의 우위성 논의에서 격앙된다. 드로잉을 형태의 맥락에서 이해할 때, 이는 미술의 역사에서 뿌리 깊은 논제이다. 이는 푸생의 고전주의가 강조했던 선적 규명이 명확한 형태와 루벤스의 바로크 회화의 생생한 색채 표현에 각각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앵그르와 들라클르와에 의해 동시대 파리 살롱전에서 본격적으로 격론화된 이 논쟁은 20세기의 피카소와 마티스로 이어졌다. 요컨대, 미술에서 ‘형태냐 색채냐 이것이 문제이다’라는 것이다.
앵그르 <오달리스크> 캔버스에 유채 1814
물론 앵그르의 색채가 떨어진다는 뜻이 아니다. 그의 색채는 <오달리스크(The Grande Odalisque)>등에서 보듯, 미술사에서 손꼽는 고도의 세련미를 지닌다. 매끄러운 살의 장밋빛과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매혹적인 북유럽의 남색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색채화가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색채가 그림을 구성하지 않기 때문이다. 흑백사진에 칼라를 고르게 입히듯 그의 그림에서 형태와 색채는 따로 볼 수 있다. 이에 반해, 들라클르와의 색채는 그림상의 실제 구성요소로 작용한다. 그의 색채는 스스로 폭발하고, 경계선들을 분쇄하고, 형태와 형태 사이를 넘나들며 연합한다. 형태와 색채는 실상 서로를 고양시킨다. ‘사고의 융합’으로서의 색채는 들라클르와에게 그림 자체였고, 회화의 표현적 기능일 뿐 아니라 그림의 구조였다.
앵그르와 들르클르와의 경쟁관계는 이들이 활동했던 19세기 초반 시대정신으로서의 신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주도권 논의에서 이해해야 한다. 한 부모에서 난 쌍둥이 같은 이 두 사조는 사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을 뿐 1세기 동안 병행되었던 사조라고 보아 마땅하다. 앵그르를 신고전주의자로 들라클르와를 낭만주의자로 보는 것은 기본적이다. 그런데, 개념적 범주라는 것이 항상 인위적일 수밖에 없다. 칼로 무 자르듯 미술의 성향을 나눌 수 없는 법, 언제나 잔여분과 섞이는 부분이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낭만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들라클르와가 푸생을 숭앙하고 자신을 진정한 고전주의자라고 명명하기 원했다는 점은 아이러니컬하다. 무엇보다 그는 당시 ‘낭만적’이라는 용어와 직결되던 격정적 감정주의, 자아탐닉, 방탕함, 그리고 훈련의 부족을 경멸하였다. 사실 그의 작업 방식은 당시 ‘낭만주의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처럼 결코 그림에 무작정 뛰어드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훈련을 부과하는 것이었다. 12,000 점이상의 작품 수가 이를 실증한다. 그의 회화에 대한 고전주의자들의 비난으로 유명한, ‘술 취한 빗자루(drunken broom)’라는 표현은 실제 들라클르와의 작업과 거리가 먼 것이다. 수없는 실험과 연구를 거치는 작업과정과 심도 있는 이론공부가 병행되는 것이 그의 낭만주의 회화였다. 이것을 ‘들라클르와의 역설(패러독스)’라고 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앵그르 또한 역설을 지닌다는 점이다.
앵그르는 공식적인 고전주의자였으나 개인적인 낭만주의 성향을 배제할 수 없다. 그의 적은 사회적으로 공공연히 대결해야 했던 들라클르와뿐 아니라, 자신 안에 내재한 낭만적 화가이기도 했는데, 어쩌면 후자를 더 경계해야 했을지 모른다. 엄밀한 의미에서 그를 ‘낭만적 고전주의(Romantic Classicism)’라고 부를 정도로 낭만성은 그의 회화에 중요한 특성이기도 하다. 그의 명작 <발팽송 목욕녀(The Bather of Valpinçon)>(도판 )만 보더라도 이는 명백하다. 지나칠 정도로 나른한 성적 감각성이 자아내는 시각적 탐닉과, 형태를 왜곡하면서도 달성해내는 완벽한 디자인의 리듬감은 온전한 고전주의자라면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렇듯 비밀스런 앵그르 회화의 매력에 눈을 뺏기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거나 냉혈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19세기 미술사의 절대절명의 라이벌, 앵그르와 들라클르와를 나란히 놓고 눈으로 비교한다. 드로잉의 완벽한 경지를, 정적 고요함의 시상(詩想)을, 고전주의 예술의 인위적 극치를 촉감으로 느끼고자 하면 앵그르를 선택하라. 반면, 동요하는 색채의 생명감과 함께 공기의 흔들림을, 역동적 공간이 자아내는 인간 감정의 격정적 고조를, 요동치는 심장의 박동을 눈으로 실감하려면 들라클르와를 사랑할 수밖에. 그렇지만, 하나를 고를 때 다른 쪽을 포기해야 한다면 이같이 선택하는 일이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
'미술사랑 > 그림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피카소의 여인들 (0) | 2008.07.20 |
---|---|
[스크랩] 레오나르도 다빈치 (0) | 2008.07.12 |
[스크랩] 구스타프 크림트 (0) | 2008.06.05 |
[스크랩] 영화 속에 나왔던 미술작품 1 (0) | 2008.03.17 |
[스크랩] 모딜리아니 (0) | 2008.03.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