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그림 이야기

[스크랩] 레오나르도 다빈치

영원한 울트라 2008. 7. 12. 10:07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vinci)

 

 

 

레오나르도다빈치는 르네상스 전성기에 1452년 4월 15일 사생아로 태어났다. 레오나르는 Anchiano의 유명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지는 Vinci에서3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레오나르도의 가족은 13세기 이래로 여기서 줄곧 살아왔다.

레오나르도가 태어났을때, 레오나르도의 아버지 Vinci, Ser Piero는 공증인이자 지주였다. 같은 해에 그의 아버지가 첫번째 부인을 맞이할때 태어났다.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농부의 딸이었기 때문에, 그의 어머니는 결혼을 하지않았던 것으로 추측이 된다. 레오나르도의 어머니는 Catarina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늘날 그녀에 관한건 단지 이름만이 알려지고 있을뿐이다.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같은 명화를 그린 단순히 위대한 화가로 불리우진 않는다.

레오나르도 자신 역시 '로도비 코스포르자공'에게 보낸 36가지 안건에서 볼 수 있듯이 판화, 대리석, 금속, 미술 분야에 대한 자신의 재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그에게 있어서 회화는 과학의 한 분야로 간주될 뿐이었다. 그의 목표는 실험에서 얻은 통찰력을 바탕으로 우주로서의 세계를 지각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레오나르도를 르네상스인의 전형으로 보면서도 한편, 그 가 창조한 것들의 방대한 영역과 그 가치를생각한다면 그 어떤 개념으로도 그를 규정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본다.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며 시대의 대표작을 배출해 낸 위대한 르네상스인이었으며,동시에 규정불가의 위대한인물 이었다고 본다.

그는 화가, 조각가, 건축가, 발명가 등등 어는 명칭에도 해당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이른바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의 대표적 인물로 손꼽힌다. 이와 같이 그는 어떤 한계도 훌쩍 뛰어 넘어서고 있다. 그런가 하면 인체해부 및 빛과 그림자의 연구를 비롯한 과학연구는 새의 비행이나 지질, 지지학, 식물학, 입체 기하학을 거쳐 슈류에 관한 연구나 운하공학, 또는 기계학과 해부학등에 이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많은 업적을 이룩한 것은 그의 뛰어난 창조성에 기인한다. 창조성이란 상당히 복합적인 개념이다.거기에는 유동성, 유연성, 준비성,그리고 독창성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때 유동성은 수많은 생각들을 안출해 내는 능력이고, 유연성은 서로 다른 원천들로부터 유래하는 매우 다양한 응답들을 제공하는 능력임에 반해, 독창성은 뻔한 것,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것과 연관되지 않은 생각들을 인출해 내는 능력이고, 준비성이란 생각들을 발전시키고, 확장하고, 개선하는 능력을 뜻한다.

 

 





* 성안나와 마리아와 아기예수 (Virgin and Child with St Anne) *



* 레다 (Leda) *



* 세레자 요한 (Saint John the Baptist) *



* 모나리자(The Mona Lisa) *



* 체실리아 갈라라니의 초상 (Portrait of Cecilia Gallarani) *



* 지네브라 벤치의 초상(Portrait of Ginerva de'Benci) *



* The Annunciation(성수태 고지) *



* Adoration of the Magi *



* The Madonna of the Carnation *



* 막달라 마리아 *

 

 

 

그가 예술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과학자였다.

디지털을 이용해 3D로 다 빈치 노트 속의 장갑선(裝甲船), 권양기(捲揚機)와 비행용, 전쟁용, 작업용 및 수력 작업용 등의 기계류를

복원해 본다면?

 

 

1. 비행장치

 

△퍼덕이는 날개, 프로펠러, 비행 기계, 기계 날개(왼쪽부터)

 

2. 전쟁용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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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사대, 다연발표, 성벽 방어 장치, 낫이 달린 마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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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립식 대포, 장갑차, 투석기, 연발대포

 

 

 

3. 수력으로 작동되는 장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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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톱, 외륜선, 움직이는 다리

 

 

 

4. 작업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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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복 운동 장치, 쇠시리 제작 장치, 연마기

 

 

 

5.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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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개골 모양의 리라, 자동 드럼, 비올라 오르가니스타

 

 

 

6. 그 밖의 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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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기, 주행기록계, 캠퍼스와 디바이더

 

 

놀라운 과학자로 거듭난 다 빈치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위대한 예술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그림 그리는 일보다 전쟁무기를 개발하거나 쓰임새도 확실하지 않은 엉뚱한 발명에 더 많은 열을 올린 사실을 혹시 알고 있었나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다빈치 코드>의 소재를 제공한 <최후의 만찬>을 그리면서 장갑차나 화염포를 개발하고 아름다운 미소의 대명사인 <모나리자>에 만족하지 않고 잠수함과 자전거 따위를 열정을 바친 다 빈치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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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그의 전쟁무기들이 상상을 뛰어넘는 살상력을 지닌 죽음의 화신들이었다면 아름다운 화폭에 감춰진 그의 이면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가까이 다가가기에도 섬뜩한 낫 전차의 경우 말이 끄는 수레의 한복판에 사람 키만한 시퍼런 낫이 바람개비처럼 빙글빙글 돌아갑니다. 그 날개에 부딪쳐 몸통과 사지가 거침없이 토막 나서 나뒹구는 적군들의 울부짖음을 상상해보세요. 더 이상 평화주의자와 예술가로서 그를 미화시킨 역사적 기억들에 동조할 수만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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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낫이 달린 마차 : 긴 구동축에 의해 발생한 회전력은 기계의 앞쪽에 위치한 기어 시스템에 전달되어 마차의 주무기인 낫 네개를 회전시킨다

 

진정 다 빈치는 어떤 존재였을까요? 그가 남긴 발명 노트를 보면 기술자와 과학자, 공학자, 디자이너로서 새로운 다 빈치를 추억하게 됩니다. 또한 그의 업적을 조금만 더 빨리 알아냈더라면 인류의 과학기술의 진보는 250년을 앞서갈 수 있었으리라는 학자들의 한숨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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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탄 : 포탄을 만드는 마지막 단계는 꿰매는 것이었고, 이는 정확도와 정밀도가 요구되므로 손으로 직접 했다

 

다양한 종류와 대규모의 발명품으로 발현된 천재의 상상력

 

그렇다면 다 빈치의 머릿속에는 어떤 아이디어들이 번뜩이고 있었을까요? 놀랍게도 그의 발명품들은 전쟁용 무기를 시작으로 악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어요.
레오나르도의 발명품 가운데 가장 탁월하면서 비극적인 것으로 비행기계를 들 수 있어요. 솔개와 비둘기를 관찰하며 인간의 비행을 상상한 다 빈치는 수많은 관찰 끝에 박쥐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비행체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물론 모든 포획할 수 있는 조류를 낱낱이 해부하고 나비와 잠자리와 꿀벌의 비행습성까지 두루 섭렵한 뒤에 내린 결론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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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 다 빈치가 비행 기계의 가능성을 연구하는 출판점이었다. 그는 비행 기계의 연구를 위해 자연을 모티프로 삼았는데, 특히 곤충과 날아다니는 동물을 관찰했다

 

그렇지만 자신이 고안한 초유의 비행기계를 공중에 띄우는 데 실패하고 맙니다. 인간의 어깻죽지 힘으로는 새의 날갯짓을 흉내 낼 수 없었으며, 새들이 공중으로 솟구치기 위해 날개를 퍼덕이는 것은 날개 아래쪽의 공기를 압축시켜서 밀어내고 그 반발력을 이용한다는 착오 때문이었지요. 또 압축된 공기가 밀려난 빈 자리에 주변 공기가 몰려들어서 새의 상승을 도와주면 새는 거뜬히 날아오를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생각과는 달리 날개 상하에서 공기의 속도가 달라져 공기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양력으로 비행기가 뜬다는 사실이 400년 지난 지금 밝혀졌지요. 하지만 천재의 상상력은 지금도 놀랍지 않은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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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퍼덕이는 날개 : 추측컨대 다 빈치는 여러 종류의 퍼덕이는 날개를 계획하고 제작했을 것이다. 다 빈치는 더 많은 공기를 붙잡기 위해 새 날개의 관절을 모방한 것이다

 

다 빈치는 빙글빙글 선회하며 떨어지는 단풍나무 씨앗의 원리를 이용해 수직상승 기계의 바람개비를 빠르게 돌리면 위로 뜰 수 있다고 생각해 헬리콥터도 발명했어요. 그의 과학적 전제는 모두 옳았습니다. 다 빈치는 당장 질기고 성긴 아마천에 녹말풀을 먹여 직경 5m의 프로펠러를 설계했어요. 프로펠러의 회전 속도를 조절하면 자유자재로 상승과 하강이 가능하고 심지어 고정된 위치에 머물러 있을 수도 있을 터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결과는 참담했지요. 프로펠러를 힘껏 돌렸지만 동력이 충분하지 않았던 탓이예요. 만약 고출력 엔진을 장착할 수 있었더라면 그의 프로펠러는 멋지게 하늘 위로 솟아올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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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들은 기계를 작동하는 두 가지 가설을 보여준다. 두 경우 모두 다 빈치가 묘사했듯이 나선형 구조는 위에서 보았을 때 시계 방향으로 돌아 공기를 뚫고 올라간다. 회전 동작은 두 가지 결과를 초래한다

 

그 이외에도 태엽과 톱니바퀴로 작동되는 시계, 직조기, 제분기, 인쇄기 등 수많은 기계장치들은 다 빈치의 손을 거치며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게 되었어요. 당시의 인쇄기는 올리브기름 압착기를 겸했는데 낱장으로 눌러서 찍어내던 인쇄 시스템을 자동 연사식으로 개량한 것은 다름 아닌 레오나르도의 업적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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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쇄기(위) : 이 장치의 정면에 위치한 큰 레버를 하번 가동하면 압력에 연결된 자동판이 종이를 밀어내면서 인쇄한다.

△컴버스와 디바이더(아래) : 작업을 위한 도구의 집합체로, 다 빈치의 가장 놀라운 업적은 기능가 미과 결합된 발명품들을 고안해냈다는 것인데, 바로 이 작품이 완벽한 예라고 할 수 있다.

예술을 사랑했고 스스로 화가이자 음악가이기도 했던 다 빈치는 오르페우스극 무대 장치나 두개골 모양의 리라, 자동 드럼, 비올라 오르가니스타 등을 발명하여 현대인의 입가에 탄성을 멈추지 않게 만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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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올라 오르가니스타 : 이 프로젝트를 단일 악기로 분류하기에는 매우 복합하다. 이 장치는 어깨에 걸쳐메고 건반을 연주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는데, 건반에 연결된 선은 말총으로 만들어진 현을 움직여 또 다른 소리를 낸다. 이때 현이 서로 미끄러지면서 내는 소리는 하프시코드ㆍ보디 바이올린에 더 흡사하다

 

공작기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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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빈치가 설계한 것으로 현대적인 공작기계의 효시가 되었던
것이라 합니다

 

초대형 발리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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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만으로 봐서는 수레에 의해서 끄는 초대형의 발리스타쯤으로 보이는군요

 

낙하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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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외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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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리자('Mona Lisa'),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
목판에 유채, 77 x 53 cm, 1503-06, 루브르 미술관


◈ 작품감상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의 저자인 바자리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피렌체의 프란체스코 디 바르톨로메오 디 자노비 델 지오콘도의 아내를 그린것으?되어 있다. 정식이름이 모나 리자 게라르디였던 모델은 1479년 태생으로 지오콘도의 아내로된 후 지오콘다라고 불렸다. 그녀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줄곧 가수? 연주자를 곁에 데려옴으로써 그녀의 미묘한 미소를 유지시켰다고 한다.

바지리의 기록이외에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지오콘다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자료?없다. 레오나르도 자신의 기록도 물론 없어서 이 작품의 주인공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그런점에서 이 작품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아름다운 지오콘다는 왼손을 의자위?올려놓고 오른손을 그 위에 겹쳐 정삼각형의 구도속에 묘사되어 있고, 배후의 대자연의 풍경에 의해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나리자>는 1911년 도난사건으로 미술계에 커다란 스켄들을 일으키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불가사의하게도 2년 뒤 피렌체에서 다시 발견되었다. 레오나르도는 리자의 머리에 3차원적 공간감을 부여 하면서 놀라울 정도의 섬세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곱슬머리를 덮고 있는 투명한 베일도 그 중 하나다. 손을 접어모은 주인공의 자세는 15세기 후반 여인의 미덕과 겸손을 상징하는 것으로 굳어진 전형적 자세다. 보통의 성모상이 여성은 가정적이고 정숙해야 한다는 일반의 기대에 부합하는 것처럼 리자의 의상과 태도 역시 당시의 사회적 맥락과 일치한다.

작품설명

모나(monna)란 부인의 경칭이며, 레오나르도가 4년을 그렸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는 이 걸작은, 레오나르도가 가장 원숙기에 접어들었을 때, 즉 1503년부터 06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전해진다. 초상의 주인공은 24세부터 28세 사이라고 한다. 레오나르도는 이 그림을 그릴 때 부인이 쾌할한 느낌을 지속하도록 하기 위해서 음악가와 희극 배우를 화실에 불렀다는 일화가 있다. 이 미소는 그 때 사람들에게 극히 즐겁고 아름다운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에 그러한 일화가 남았을 것이다. 이러한 웃음은 레오나르도의 독특한 기법으로서,문예 부흥기의 화가들이 탐구한 사실적 기법이 절정에 달했을 때를 보여 주는 것이다. 구도에 있어서도 종래의 초상화에서는 볼 수 없었던 웅대한 풍경이 배경이 되어, 인물이 배경에서 앞으로 튀어 나오는 듯한 느낌을 주고, 의자 위에 얹은 두 손이 화면의 아래쪽을 정돈하고 안정시켜, 얼굴에 못지 않게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레오나르도 보다 30년 쯤 후에 전기를 쓴 바사리는 눈썹이 없는 것은 이마가 넓은 것이 미인이었던 당시의 유행에 따라 눈썹을 뽑은 얼굴을 그린 것이라 전한다.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의 대표작일뿐더러 인류 회화상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작품 이다. 그것은 이그림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올바른 감상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제작 연대 는 1500년에서 1510년 사이로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피렌체로 돌아갈 때 잠깐 들른 만트바에서 이사벨라데스테 후작 부인의 상을 그리고, 그 화고를 가지고 1500년부터 그리기 시작하였다고 생각된다. 한편 이 모델이 모나리자라는 설도 있으나, 당시의 주변 기록이나 레오나르도가 조콘다 부인과 접촉 했다는 아무런 확증도 없다. 좌우간 신비로운 이 모델에 의해서 모나리자의 신화가 창조되고, 그것이 오늘날까지 퍼지게 된 것이다.

신비의 미소로 유명한<모나리자>(1503~1505년경)의 제작연대와 모델은 정확히 알수 없다. 레오나르도가 세상을 떠났을 때부터 <모나리자>는 프랑스 왕실의 소유가 되었다. 바사리는 <모나리자>가 플로렌스의 은행가 프란시스 델 조콘도의 부인 '라조콘다'이며 미완성품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모나리자의 눈썹은 인간의 삶에서 볼수 있듯이 갈망과 윤기에 차 있으며, 속눈썹은 아주 섬세하게 그려져 있다. 눈썹 또한 살에서 나오기 때문에 여기는 숱이 많고 저기는 드물며, 곱슬머리로 되어 있으며 자연스럽다"고 평했다.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모나리자> 작품은 실제로 속눈썹과 눈썹이 없다. 그러나 작품은 미완성품이 아니라 완성품이다. 물론 16세의 '리자 게라르디니'라는 처녀가 두 번 상처한 35세의 바르톨로메오에게 시집간 사실은 있다. 리자의 아버지는 사업에 실패하여 신흥 부자인 사위에게 딸의 지참금을 지불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가 리자의 남편의 초상화를 그렸기 때문에 부인의 초상화도 그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바사리는 현재 루브르에 있는 그림이 아닌 다른 그림을 보고 글을 썼거나, 아니면 남한테 들은 이야기를 썼을지도 모른다.

<모나리자>의 실제 주인공은 누구일까? 레오나르도가 사랑한 어느 여인이 아닐까? 레오나르도가 어떤 여자를 사랑했다는 기록은 없다. 프로이트가 쥐를 포식한 고양이와 같은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 있다고 한 이 여인은 누구일까? <모나리자>에게는 은행가의 평범한 가정주부라기보다는 귀부인 같은 품위가 있다. 레오나르도가 일했던 군주 스포르차 가문에는 많은 귀부인들이 있었다. 로도비코 스포르차의 젊은 부인인 베아트리스 데 에스테와 정부인 이사벨라 데 아라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특히 이사벨라는 미래의 군주가 될 기안 가레아초 스포르차의 부인이었는데, 그녀의 남편은 1494년에 죽고 시동생인 로도비코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그녀의 아들 프란체스코도 로도비코의 감시하에서 불행한 생활을 했다. 레오나르도는 이사벨라가 사는 궁전에 자기 화실이 있어서 그녀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스포르차가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밀라노를 떠날 때까지 이사벨라를 보살폈으며, 그녀를 위해 난로와 온수의 목욕탕을 설계하고 완성하기까지 했다. 스위스에 있는 이사벨라의 초상화는 모나리자와 너무도 닮았다. 또 뉴욕 주 글렌스 폴 하이드 컬렉션의 아라곤의 초상화는 들고 있는 갈대를 제외하면 거의 동일하다.  

모나리자는 유심히 관찰해보면 속눈썹과 눈썹이 없지만 완성된 작품이다. 그의 얼굴에서 피어나는 애매하고 묘한 웃음은 레오나르도 기법인 '키아로스쿠로 (명암대조법)'때문이다. 구도와 원근법의 측면에서도 의문을 자아내는 모나리자는 동시대 (르네상스)의 다른 화가들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명확한 윤곽선도 보이지 않는 작품이다. 이후 X선 촬영 결과 레오나르도는 일부러 손가락으로 문질러서 윤곽을 지워낸 것으로 드러났다. 자세히 보면 모델 뒤의 배경으로 보이는 풍경은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았을때의 시점으로 모델의 시점과 일치하지 않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뛰어난 화가로서 선원근법(한점 소실 원근법)을 잘 알고 있었던 화가이지만 선원근법이 자연의 풍경을 표현하기에 적합하지않다고 보고 공간의 깊이에 따라 색채가 달라진다는 공기원근법(색채원근법)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인물의 배경으로 풍경을 그려넣은것은 그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렇게 여러가지 측면에서 이 작품은 신비스러움을 자아내는 레오나르도의 걸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 모나리자의 실제 모델은 누구일까? 그에 대한 의견은 매우 분분한데 [이탈리아 미술가 열전]의 저자인 바자리의 말에 의하면 이작품의 주인공은 피렌체의 은행가 프란체스코 디 바르톨로메오디 자노비 델 지오콘도의 아내인 '지오콘다'를 그린것으로 되어 있다.

정식이름이 모나리자 게라르디였던 모델은 1479년 태생으로 지오콘도의 아내가 된 후 '지오콘다' 라고 불렸다. 그녀는 음악을 매우 좋아하여 레오나르도는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는 동안 줄곧 가수와 연주자를 곁에 데려옴으로써 그녀의 미묘한 미소를 유지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바자리의 기록이외에는 이 그림의 주인공이 지오콘다 라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자료가 없다. 레오나르도 자신의 기록도 물론 없어서 이 작품의 주인공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다. 그런점에서 이 작품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아름다운 지오콘다는 왼손을 의자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그 위에 겹쳐 정삼각형의 구도속에 묘사되고 있고 그 배후의 대자연의 풍경에 의해 더욱더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화가가 그리는 자연은 풍경이나 정물은 물론 인간과 동물 모두를 포함 한다. 자연을 사생한다는 것은 단순한 색채나 형태의 시각적 성질을 본뜨는 것이 아니라,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의 본질적 의미나 아름다움에 도달 하고자 하는 것이다. 형태의 아름다움과 자연물의 의미를 동시에 관조한다는 것은 아는 것과 보는 것에 관여한다. 벽에 걸린 모나리자의 손이 매적인 것은 그것이 아름다운 부인의 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대상에 관한 지식은 많으므로 그 대상을 직접 보고 느낄 때는 연상이 따른다. 그래서 그 지식에서 오는 흥미가 보충되는 경우가 많다.

모나리자의 '미소'에 관한 한두 가지 일화가 있다. 그녀를 그릴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항상 웃기는 제스처를 해 보였다는 얘기가 있고, 또하나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악사를 불러다가 연주함으로써 그녀를 즐겁게 해 주었다는 얘기이다

우리는 모나리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레오나르도가 1516년 프랑스에 초청되어 왕실화가로 갈 때 이 작품을 가지고 갔고, 그가 죽은 1519년까지도 아끼던 작품이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영국의 월터 페이터가 말했듯이 "어린 시절부터 모나리자의 이미지는 레오나르도의 꿈결 속에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래서 그 이상적인 숙녀가 실제로 나타나 마침내 바라보고 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적인 이야기보다는 실제로 작품을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 원래 <모나리자>는 기둥 있는 벽을 가진 건물의 로기아(난간 혹은 거실)에 앉아 있었지만 그 부분은 잘려나갔다. 그녀는 오른손을 왼손 위에 놓고, 한 쪽 어깨를 안쪽으로 돌리고, 머리는 밖을 향해 관객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신비로운 미소는<동굴의 성모>에서도 사용했던, 윤곽이 확실하지 않는 '키아로스쿠로(명암대조법)"라는 레오나르도의 기법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또 눈의 시선이 우리가 움직이는 방향에 따라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움직이는 것 같은 환상도 막연한 분위기의 '키아로스쿠로'기법 때문에 생긴다. 키아로스쿠로 기법은 리자의 심성을 드러내기보다는 감추어서 눈가와 입가가 항상 변하는 것 같고 또한 눈웃음치고 미소짓는 것같이 보이게 한다. 송나라의 산수화 같은 그녀의 뒷배경은 레오나르도가 중국 송나라 산수화를 접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한다.

모나리자가 눈썹이 없는 이유에 대하여....

  

모나리자가 눈썹이 없는 이유는 크게 두가지입니다.

하나는 그 시대의 미인의 모습이 눈썹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긴 여자를 미인으로 기준으로 하는 지금의 시대와는 사뭇 대조적이죠? (미인의 기준은 시대에 따라 역시 다르긴 다르네요!!)

나머지 하나는 미완성품으로 남겨졌다는 것입니다. 4년을 넘도록 끌면서 끝내는 미완성품으로 남겼다고 레오나르도에 대해 여러 서적들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 모나리자의 눈은 인간의 삶에서 볼 수 있듯이, 갈망과 윤기가 있으며, 속눈썹은 최고의 섬세함이 없이는 그릴 수 없다고 서술하고 있다. 눈썹 또한 살에서 털이 나기 때문에 여기는 숯이 많고 저기는 드물고, 곱슬머리로 되어 있는가 하면, 이러한 표현이 자연스럽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루브르 미술관에 있는 "모나 리자"는 실제로는 속눈썹이나 이마의 눈썹이 없고, 그림은 로버트 페인이 레오나르도의 전기에서 주장하듯이 (Robert Pain, Leonardo, New York, 1978) 미완성으로 끝마친 완성품이이라고도 합니다.

 

 

첨부이미지

전쟁

 

 

첨부이미지

Ginevra de' Benci ; 1474 ;

Oil on wood, 38.2 x 36.7 cm (15 1/8 x 14 1/2 in); 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DC

◈작품설명

The subject of Ginevra de' Benci has nothing of the Mona Lisa's inward amusement, and also nothing of Cecilia's gentle submissiveness. The young woman looks past us with a wonderful luminous sulkiness. Her mouth is set in an unforgiving line of sensitive disgruntlement, her proud and perfect head is taut above the unyielding column of her neck, and her eyes seem to narrow as she endures the painter and his art. Her ringlets, infinitely subtle, cascade down from the breadth of her gleaming forehead (the forehead, incidentally, of one of the most gifted intellectuals of her time). These delicate ripples are repeated in the spikes of the juniper bush.

The desolate waters, the mists, the dark treess, the reflected gleams of still waves, all these surround and illuminate the sitter. She is totally fleshly and totally impermeable to the artist. He observes, rapt by her perfection of form, and shows us the thin veil of her upper bodice and the delicate flushing of her throat. What she is truly like she conceals; what Leonardo reveals to us is precisely this concealment, a self-absorption that spares no outward glance.

이 그림은 1474년경 그려진 것으로 지네브라 벤치가 1474년 1월 15일 17세 나이로 결혼하였을 때 그 기념으로 그린 것이라고 한다. 이 그림은 레오나르도의 만년의 여성그림에 나타난 미소가 보이지 않고, 딱딱한 표정으로 있으나, 레오나르도의 젊은 시절의 필치에 의해서 대상 인물에 깊은 감정이 표현되고 있다. 그러나 구도가 가슴부터 윗부분을 잡았기 때문에 약간 단조로운 느낌을 주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다. 이 그림의 뒤에는 종려와 월계수, 그리고 소나무가 그려져 있고 [아름다움은 덕을 장식한다.]라는 글씨가 작품 뒤쪽에 기록되어 있다. 이는 지네브라가 덕을 갖추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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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례>1481년.(미술관?)

◈작품 설명

베로키오라는 화가가 레오나르도가 자기의 <세례>란 작품에 그린 한 천사상을 보고 아예 그림 그리기를 포기했다고 전해올 정도로 섬세한 작품이며, 적지 않는 인생의 시간을 투자하며 완성한 작품이다.세례자의 얼굴과 손짓을 유심히 살펴보면 작품이 표현하고 자하는 것을 서로 상호 보완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손짓은 분면 하늘(하느님)을 가르키는 것이다. 어느 한곳을 가리킴으로써 작품이 딱닥해지는 것을 살며시 덮기 위해 세례자의 부드러운 곡선형태를 지닌 팔과 그의 웃는 모습은 손가락이 가르키는 그곳에 희망이 있음을 가리킨다. 이 작품은 특히 명암표현이 돗보인다. 어떻게 보면 명암, 즉 밝고(선) 어두움(악)의 조화라고도 할수 있지 않을까 싶다.

배경이 검게 처리된 것은 무엇인지 어두운 풍경을 그려 넣으려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자신의 명령에 따라 제자들이 검게 지워 버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제작 연대는 1510년부터 1516년 사이로 이미 레오나르도가 화가로서의 일을 포기하고 해부학이나 지질학 등 과학적인 일에 몰두하였을 때이다. 성요한의 얼굴에는 어느 의미의, 성적(性的) 의미를 내포한 미소를 담고 있다. 반은 남성이고 반은 여성이며,신적도 아니고 동물적도 아닌 미소가 담겨있는 것은 교묘한 레오나르도 자신의 의도를 잘 나타내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 상이 천사상에서 유래하는 것은 그 성격이 잘 설명하고 있다. 즉 천사는 중성적 존재 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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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설명

<동굴의 성모> 또는 <바위의 성모>라고도 불리우는 이 그림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연의 원주처럼 구성의 중심과 깊이를 강조하는 주된 바윗덩이가 그녀의 위치를 강화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바위 표면의 어두움은 성모의 찬란한 광채를 대조적으로 분명하게 한다. 광선으로 인해 모습이 두드러지는 성모 왼쪽의 천사와 오른쪽의 어린 성 요한은 피라미드형을 넓히며 강한 색채 악센트로써 그 피라미드형을 풍부하게 한다.

각각의 색채는 배경 속에서 수천 가지의 더 부드러운 색조로 울려 퍼지고 있다. 천국의 빛에 감싸여 축복의 동작으로 손과 옆 모습이 치켜 올라간 아기는 구성의 실질적인 중심점이다. 성모 뒤편의 바위 노출부 모서리에 앉아 있는 그는 그녀로부터 장면의 중심을 가로채고 있다. 지탱하고 있는 그의 왼손은 하나의 축을 이룬 빛의 초점이 되는데, 이 빛은 미묘한 사지 위를 진동하면서 그의 머리, 천사와 마리아의 손 쪽으로 이르게 된다.

모든 단일 요소들은 그것들이 장면 내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지시한다. 그러나, 만약 시선을 채색된 화면 위로 자유롭게 옮겨 본다면 잇달아 나타나는 선들은 우리의 주목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의 탁월한 묘사와 완벽한 회화적 기법은 도용을 거의 불가능하게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은 다른 화가들에게서는 볼 수 없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그림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연에 대한 예리한 과학적 관찰이란 새로운 차원의 예술적 기법들을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기존의 미술에 첨가시켜 자신의 그림에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루브르의 작품에서는 화면 오른쪽 천사 가브리엘이 오른손을 내밀어 어린예수가 합장하는 아기 요한을 가리키고 있는데 반해 이 화면에서는 그 손짓이 생략되 어 있으며, 두광이 천사를 제외한 인물들의 머리뒤로 그려져 있는점이 루브르의 작품과 다르다.

런던의 것과 파리의 것 중에 어느쪽이 원작이냐는 점이 논란이 되었으나 파리 루브르의 것이 원작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레오나르도는 1483년 4월 25일에 산 프란체스코 성당의 제단화로서 이 작품의 주제를 처음으로 그렸다.

성당과의 불화로 인래 처음에 그린 그림은 성당에 들어가지 못하였다가 프랑스 왕실의 소유가 되었으며 이것이 현재 루브르에 있는 [동굴의 성모] 이다. 성당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후에 같은 주제로 다시 그린것이 이 작품이며 레오나르도가 밑그림을 그리고 한 제자가 대부분을 그려 1508년에 완성되었음이 문헌에 의해 밝혀졌다.

이 작품은 18세기 말엽 밀라노의 성당에서 반출되어 몇사람을 거쳐 1880년에 9천 파운드로 런던 국립 회화관 (내셔널갤러리)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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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세실리아 갈레라니의 초상(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 작품 설명

★1485-90년경 크라코비아 차르토리스키 미술관 소장
이 작품은 1485년부터 90년 사이에 그려진 것으로 다빈치의 독창적인 인물화로써 신비스로운 얼굴의 모습의 표현이나 깔끔하고 세련된 색채에서 다빈치의 감성을 엿 볼수 있다.

<담비ermine를 안고 있는 여인>(1485)의 주인공은 스포르차 군주의 애첩 세실리아로 알려져 있다. 그녀는 절세의 미인이며 그리스의 사포와 같은 여류시인이었다. 레오나르도는 자신의 일기에 이 여인을 "나의 사랑하는 여신"이라고 기록했다.

그녀는 초상화 사진을 찍는 여인처럼 어두운 배경에 자연스럽게 상반신만을 노출하고 있다. 그녀와 그녀가 안고 있는 애완동물은 머리를 왼편으로 돌려 그림 밖에 있는 누군가를(화가나 자기애인을)사랑에 찬 고운 눈으로 보고 있다.

어느 미술사 교수는 순결을 상징하는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에 대하여 아름다움에 관한 수필이며, 동작과 성격묘사에 있어 혁신적인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얼굴의 윤곽이 뚜렷한 이 미인은 약간 붉은 색깔의 머리카락을 턱 밑에 까지 내려뜨리고, 이마를 가로지르는 검정 장식끈으로 머리를 매고 있다. 검정 끈 밑에 있는 눈썹 위의 이마에는 또 하나의 금줄이 보인다. 잘생기고 둥근 긴 목, 원숙한 어깨와 앞가슴이 직각으로 앞이 넓게 트인 당시의 의상 대문에 잘 드러나 있다. 목에 감은 길고 검은 보석 목길이는 그녀의 건강하고 혈식 좋은 피부와 대조를 보인다.

그녀의 유연한 손가락에 애무당 하고 있는 동물의 미운 얼굴 때문에 그녀의 발랄한 얼굴은 한층 더 아름다워 보인다. 그녀의 우아하고 감미롭고 세련된 얼굴과는 대조적으로 정확하게 관찰된 짐승의 거친 얼굴은 사납게 그려져 있다.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동물을 애무하고 있는 세실리아의 손은 악기나 춤을 연상시키는 세련미를 보이지만, 짐승은 두려움 때문에 거친 발톱으로 이내 그녀를 할퀴고 도망칠 것 같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세실리아의 동작을 자세히 살펴보면 레오나르도의 세심한 배려가 깔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얼굴은 그림의 오른쪽을 바라보고 몸은 왼쪽으로 돌려서 초상화에 생기와 발랄함을 주었다. 또 섬세한 빛의 명암이 눈과 볼, 입술과 어깨, 가슴과 손에 섬세하게 반영되고 옷색깔의 뉘앙스를 잘 나타낸다. 여인의 몸은 성숙하고 용모는 자신감에 차있다. 간단한 장식품은 그녀의 인품을 높이다. 그녀 얼굴의 포착하기 어려운 심리적 표정은 신비감을 주는데, 이것은 <모나리자>같은 초상화에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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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王來朝(삼왕래조)
목판에 유채, 77 x 53 cm, 1503-06, 루브르 미술관


◈ 작품설명

三王來朝

레오나르도의 최초의 대작이라 생각되는 이작품은 미완성이지만, 여기에서 보는 것과 같은 단색의 소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레오나르도의 기술과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어느 의미에서는, 완성을 의도하지 않고 그렸다고 생각할 수 있다. 작품의 제작 연대는 1481년 3월로서 성 도나트 수도원의 제단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받은 것이 확실하다. 이 작품의 주제는 '三王來朝' 이지만 화가가 전통적인 도상(圖像)을 무시하고 왜 이처럼 많은 사람을 그려 넣었으며, 성 요셉 과 성 요한은 어디에 있고, 문제의 삼왕은 누구인지 또는 배경과 전경의 관계는 어떠한 것인지 이제까지의 연구 속에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三王來朝'를 위한 習作

초기의 미완성 걸작인 <三王來朝>에는 성모자, 노인, 말 등의 데상이 많이 남아 있는데 이 데상은 배경의 원근법적 공간을 위한 습작이라고 생각되어진다. 모든 선이 오른쪽 중앙을 초점으로 모여 있는 수학적인 완벽한 원근법 속에서, 뛰어 다니는 말의 무리와 사람들이 이중 노출의 이미지처럼 떠 올라 온다. 정(靜)과 동(動)의 신기한 융합이 <三王來朝> 속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 기묘한 투기장인지 폐허 같은 건축은 도나텔로의 어떤 릴리프에서 빌어온 것이라고도 일컬어지는데, 당시 고대 유적 발굴에 대한 레오나르도의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된다.

약 1481명의 1482명의 Leonardo는 왕들의 숭배이라고 불리는 그림에서 시작했다. 이렇게 그림을 그리고 있는 교회 성 Donato Scopeto.를 장식하는 것은 결코 끝내게 되지 않았던 순에 그림은이었다 Leonardo가 나타났기 때문에 그가 그림을 끝내기 전에 그의 것이 밀라노에서 Duke Lodovico 나쁜 Moro까지 서비스해. Leonardo는 밤색의 지면만을 칠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특히 만들었다 약간의 밑그림들.이 그림의 모든 생물들이 생존하는, 그리고 그것이 Leonardo의 스타일일 것 같다. 1482명의 Leonardo는 밀라노에 여행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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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천재적 미술가 ·과학자 ·기술자 ·사상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습작.
1490년대. 펜 목탄. 16×20cm. 윈저성 왕립도서관 소장.
레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아이톨리아의 왕 테스티오스와 에우리테미스 사이에 난 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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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sc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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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의 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 Vinci,1452-1519)
유채, 420 x 910 cm, 1495-97, 밀라노 산타 마리아델 그라체 성당

 

"너희들 중에 한사람이 나를 팔리라"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직후 12제자의 놀라움과 동요를 테마로 하고 있는 최후의 만찬은 중세 이후 많은화가들에 의해 작품화 되었지만 레오나르 도의 이 작품처럼 긴박감을 주는 것은없다. 12제자들의 정신적 충격을 묘사하기 위해 채택된 치밀한 구도는 주관적인 인간의 정신을 객관화 시키는데 기여하고 있다. 중앙이 그리스도, 그의 오른편부터 도마 야곱 빌립보의 그룹, 마태 타다이 시몬의 3인이고 그의 왼쪽에는 요한 베드로 유다의 그룹, 안드레 작인 야곱 바르톨로메인데 그리스도는 완전히 정 삼각형의 구도이고 나머지 그룹은 이등변 삼각형으로 치밀하게 계산되어 있다.

가장 유명한 그림 중의 하나인 <최후의 만찬>은 대단히 순하면서도 대가다운 구성을 보여준다. 이그림에서 레오나르 도는 배신자 유다를 묘사하는 통상적인 전통적 표현을 따르지 않고 '나와 함께 먹는 자가 나를 배신할 것이다.' 라는 신약의 구절과 관련된 고도로 긴장된 순간을 묘사했다. 이 그림에서 유다는 등을 구부린 채 이의를 제기하거나 하지 않고 다른 제자들의 논쟁을 듣고 있다. 사도들은 세 명씩 네 그룹으로 분명하게 나뉘어 있지만 전혀 부자연 스럽지 않으며 다양한 동작을 통해 서로 연결돼 있다.

감상자는 단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는 제자들의 내적 갈등과 긴장을 감지하게 된다.

 

레오나르도가 밀라노에서 그린 <최후의 만찬은 많은 부분이 훼손되었지만 아직도 보는 사람들을 사로잡는 매력을 가지고 있는 최고의 걸작이다.

1495∼1498년 동안에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수도원의 식당에 그린 이 세계적 명작은 완성 직후부터 손상되기 시작했다. 문제의 근원은 습기 때문에 썩기 시작한 벽을 보수 공사하면서 원작을 많이 손상시킨 데에 있었다. 1556년에 출판한 <미술가 열전>이라는 저서에서 바사리는 그림이 너무 많이 훼손되어서 희미한 매체 외에는 아무 것도 볼 수 없다고 전하고 있다. 1796년에는 이탈리아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대들이 <최후의 만찬>이 있는 방을 마구간으로 사용했다.

1943년 제2차 세계대전 중 공중 폭격의 유탄에 맞아 식당 자체가 무너졌으나 사려 깊은 수도장이 쌓아놓은 모래 가마니 덕분에 명작의 벽을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했다. 이 비운의 걸작은 1943년 벽에서 떼어내어지고 캔버스에 옮겨져 습기와 차단되어졌다. 1977년 이후 하루에 한 평방 인치씩만 작업하는 보수작업과 청소작업을 단행하여 5백 년 동안 쌓인 먼지와 곰팡이, 그리고 다른 화가가 덧칠한 오일을 깨끗이 청소함으로써 원작의 화려한 색과 견실하고 생동감 있는 인물들의 개성이 되살아났다.

지금은 <최후의 만찬>을 보러 가는 관광객들이 가지고 온 공해와 먼지를 유리로 된 첫 번째 방에서 기계가 털어주고, 그 다음 방에서는 신선한 공기를 다시 공급받아서 작품 앞에 다가가도록 하는 과학적인 보전장치가 되어 있다.

<최후의 만찬>의 주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찬을 갖는 신약 복음서의 이야기다. 흔히 이 주제는 수도원의 승려들이 함께 식사하는 식당에 즐겨 그려져 있었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도 예수가 마치 사제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 같이 문에 들어가 뒤돌아 서서 보는 벽 위에 그려져 있다.

전통적으로 최후의 만찬을 예수를 한가운데에 앉히고 제자들은 식탁 양쪽에 예수를 판 가룟 유다는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의 <최후의 만찬> 그림에서와 같이 다로 식탁 건너편에 외롭게 앉히곤 했다. 레오나르도는 가룟 유다도 다른 제자들과 함께 앉히는 관용을 베풀었다. 그러나 돈주머니를 움켜쥐고 있는 가룟 유다는 유일하게 어두운 그늘에 앉혀 빛 가운데 앉은 다른 제자들과 구별시켰다.

사실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은 제목만 같을 뿐 다른 작품들과는 전혀 다름 작품이다. 레오나르도는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라고 폭탄 선언한 예수의 말씀에 제자들이 배신감과 자책감에 심리적으로 동요되는 극적인 순간을 택했다. 예수가 빵을 들어 축도하는 종래의 평범한 장면을 그는 폐기했다.

도 드라마틱한 순간을 강조하기 위해 그는 제자들을 세 사람씩 한 그룹으로 결속시키고, 또 좌우 여섯 명에 연대시키고 12사도 전체를 연관시켜 감정의 회오리바람을 그림에 도입했다. 그래서 예수와 제자들 개개인뿐만 아니라 그룹 전체가 갖는 모든 표정, 동작, 제스처(Gesture)가 이러한 극적 효과를 높이는 기능을 하도록 세심하게 배려했다. 괴테가 지적했듯이, 이탈리아에서는 사람의 몸 전체가 생동감 있게 표현되고 정서와 열정과 생각이 신체의 동작에 민감하게 나타난다. 손의 제스처는 이탈리아 사람에게서만 볼 수 있는 특이한 표현 동작이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예수와 제자들의 위치도 실은 레오나르도가 치밀하게 계획하여 배치한 것이다 먼저 그리스도의 오른편 첫 번째에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이 앉아 있고,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요한의 어깨를 잡고 누가 배신자인지 물어보려는 듯 일어서고 있다. 베드로가 오른손에 식사 때 쓰는 칼을 쥔 채 칼자루로 앞에 있는 가룟 유다의 옆구리를 본 아니게 건드려 유다가 기절할 듯이 앞으로 넘어지면서 소금 그릇을 엎지르는 장면을 통해 멋진 긴장 효과를 냈다고 괴테는 말했다. 유다 뒤에는 베드로 의 동생 안드레아가 열 손가락을 펴서 놀라움을 표시하고, 그 뒤 좌석의 요한의 큰형 야고보가 팡릉 펴서 베드로의 어깨에 손을 댄다. 그들은 예수의 참다운 제자들이며, 만찬상 맨 끝의 식탁에 두 손을 짚고 몸을 지탱해 서 있는 바르톨 로메오와 함께 짝을 이룬다. 요한에게 손을 뻗은 베드로처럼 야고보는 베드로에게 손을 벋어 처음 세사람과 다음 세사람의 그룹을 함께 연결시킨다.

그리스도의 왼편에는 예수의 용모와 제스처를 닮은 예수의 동생 야고보가 양쪽 팔을 벌리고 비극을 예감한 듯이 공포에 사여 있다. 야고보 뒤에는 의심 많은 토마가 검지손가락으로 자기 머리를 가리킨다. 그 곁에서 빌립보가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자기의 순결을 주장한다. 이 세 사도들도 한 그룹을 이룬다. 그 다음 그룹의 마태는 두 동료에게 얼굴을 돌리고 그리스도 쪽으로 두 손을 뻗는다. 작은 야고보의 동생유대는 갑작스런 사태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다. 한 손으로 식탁을 짚고 다른 손은 식탁을 내리칠 듯이 들어올린다. 식탁 맨 끝에는 성 시몬이 대단한 위엄을 보이며 앉아 있다. 이들 두 사도들은 같은 날에 순교해 같은 날 기념된다.

모든 사도들은 '너희중의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예수의 선언에 제각기 다른 반을 보인다. 각 제자들의 흥분과 공포는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증폭되고 그들의 몸짓과 손의 동작에 나타나 있다. 자기의 진정한 듯을 알리지 못해 불안과 공포에 떠는 제자들과는 달리 예수는 자기의 숙명을 인식하고 조용히 외롭게 앉아 있다. 침착한 마음의 상태를 알리듯 예수 앞의 식탁은 제자들의 것과는 달리 질서정연하다.

제자들을 휩쓸고 있는 격정의 파도를 초월하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하여 인류를 구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예수의 고난과 희생의 정신이 이렇게 고상하게 표현된 것은 레오나르도의 <최후의 만찬>이 처음이다.

<최후의 만찬>은 작품의 내용뿐만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걸작 중의 걸작이다. 레오나르도는 한정된 비좁은 공간에 초자연적인 크기의 제자상을 그렸다. 그는 제자들의 동작을 통해 여유 있고 넓은 공간을 확보했다. 또한 레오나르도는 원근법과 색채를 이용해 넓은 공간과의 조화를 획득했다.

<최후의 만찬>은 최근의 화학적 청소작업을 통해서 깨끗이 복구되어 레오나르도의 색채에 관한 탁월한 재능을 입증했다. 이 그림에는 빛의 두 근원이 있다. 하나는 저녁 노을이 시골의 매력적인 풍경을 보여주면서 뒷 창문으로부터 들어오고, 또 하나는 식당의 앞 창문을 통해서 들어온다. 그리스도가 입은 붉은 겉옷과 소매 없는 청색 덧옷이 그 앞에 있는 흰 접시에 투영되어 있다. 빌립보 앞의 접시도 빌립보의 겉옷의 붉은색을 반영한다. 그리스도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작은 야고보의 옅은 녹색 옷은 그리스도의 청색 덧옷과 빌립보의 붉은 옷 색 사이에 일종의 전이된 색이다. 두 번째 그룹의 마태의 밝은 청색 옷과 유다의 황토색 튜닉 그리고 양홍빛 보라색은 삼색현을 형성한다.

그리스도 왼쪽의 요한, 베드로, 유다로 구성된 그림 중 유다의 회청색 옷은 그 톤이 불확실하고 죄인복처럼 어둡다. 이는 요한의 짙은 붉은색 덧옷, 청록색 튜닉의 강한 색과 베드로의 옷소매의 짙은 청색과 대조적인 조화를 이룬다. 왼쪽 끝의 그룹은 배경이 어둡기 때문에 더 풍요로운 색깔이 필요했다. 황금색 속옷 위에 녹색 겉옷을 입은 안드레아와 붉은 옷을 입은 야고보 그리고 보라색 계통의 청색 튜닉에 짙은 올리브 색 겉옷을 입은 바르톨로메오는 더 밝은 오른편 바깥쪽에 선 그룹과 여행되도록 세심한 배려를 했다.

요약하면, 색은 그리스도의 옷에 나타나는 순수한 기본색조에서 양쪽으로 섬세하게 더욱 섞여 가는 혼합된 색조로, 그리고 가장자리에서는 더욱 화려한 색채로 변한다.

최후의 만찬」22년만에 다시 복원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명작 ‘최후의 만찬’이 77년 복원작업에 들어간 지 22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고 99년 5월28일 공개되었다. AP통신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마리 델레 그라체스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 복원작업이 최근 끝나 27일 밤 기념행사가 열린다”고 25일 전했었다. ‘최후의 만찬’이 77년 복원작업에 들어간 지 22년 만에 제 모습을 되찾고 99년 5월28일 공개되었다. AP통신은 “이탈리아 밀라노의 성 마리 델레 그라체스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 복원작업이 최근 끝나 27일 밤 기념행사가 열린다”고 25일 전했었다. 관광객들은 1494∼1498년에 제작된 이 명화를 보려면 25명 단위로 성당에 입장해야 하는데 15분만 볼 수 있었다. 이탈리아 문화부 조반나 멜란드리 장관은 “이번 복원작업을 통해 ‘최후의 만찬’이 다시 ‘생명과 빛’을 얻었다”고 평가했다.
복원팀은 매일 몇 ㎜씩 고유의 색을 되살리는 작업을 벌여왔다. 과거 몇차례 복원작업을 했지만 작품의 원래 색깔을 살리지 못하고 전체 색상이 어둡게 됐으며 표면 일부가 떨어져 나갔었다. 대대적인 작업을 통해 원래 색깔을 찾았지만 일부전문가들은 이번에도 원본에 없는 색을 덧칠했다고 비판하고 있다.

'기술이 예술을 살린다 - .' 제작된지 오래돼 훼손.마모된 미술품을 정밀 과학기술로 복원한다는 것은 테크놀로지의 승리다. 우리나라의 경우 최초의 서양화가 고희동의 '자화상' 등 근대미술을 중심으로 국립현대미술관과 호암미술관 등의 보존과학실이 이제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단계. 미국이나 이태리서구의 복원 기술은 부럽기 짝이 없다. 하지만 최근 영국 일간지들의 보도를 보면 '원 상태로 돌려놓는다' 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알 수 있다. 78년부터 진행돼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프레스코 걸작 '최후의 만찬' (1495~97) 복원 사업. 이태리 중앙복원연구소장 카를로 베르텔리는 지난해 12월27일 방영된 채널4 다큐멘터리에서 "결국 복원이 원작을 파괴하고 말았다" 고 지적해 충격을 던졌다. 그는 "원작의 20%만이 살아남았고, 나머지 부분은 복구자들이 그려 넣은 것" 이라고 밝혔다.

'더 타임스' 는 루브르 박물관 복원 컨설턴트이자 다빈치 전문가인 자크 프랑크의 말을 인용, "다빈치의 의도를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거의 대부분을 다시 그리는 것이 무슨 복원이냐" 고 비판했다. 특히 복원팀은 다빈치의 것인지 불확실한 드로잉을 참조해 예수의 얼굴에서 수염을 제거한 것으로 알려졌다. 데일리 텔리그래프는 이미 지난해 7월 복원 중이던 '최후의 만찬' 이 원작과 전혀 달라졌음을 비판한 바 있다.

식탁에 놓인 꽃, 빵, 유리잔, 칼, 접시 등은 원래 육안으로 확인할 수 없었던 것. 선명도가 높아져 식별할 수 있는 물체 수는 많아졌지만 어디까지나 "다빈치의 원작을 보지 못한 복구자들에 의해 덧칠된 것일 뿐" 이라는 얘기였다. 이러한 결과는 복구자들의 태도 때문이라고 한다. 복구자들은 흔히 전임자보다 자신이 훨씬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므로 전임자가 해놓은 덧칠을 죄다 벗기고 다시 덧칠을 하게 마련. 이런 악순환이 20년간 되풀이된 끝에 결국 어떤 것이 '오리지날' 이고 어떤 것이 아닌지 구분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부분적으로는 훼손이 가려졌을지 몰라도 지나치게 밝고 지나치게 밋밋한 부분이 중구난방식으로 튀어나오면서 전체적 조화가 흐트러지는 것이다.

영국 내셔널 갤러리는 이런 점에서 비판을 받는 대표적 경우. 한 복원전문가는 "내셔널 갤러리에 있는 르네상스 시대 회화를 보면 복원이 예술품을 어떻게 망치는지 알 수 있다" 고 말하기도 했다. 이 미술관의 디렉터 닐 맥그리거는 '모나리자' 의 복원을 주장하는 '복구파' 다. 결국 데일리 텔리그래프의 결론은 "걸작을 그냥 내버려두라" 는 것. "운좋게도 다빈치의 다른 작품은 대부분 루브르에 있고, 루브르는 걸작을 내버려둘 만큼의 양식은 있다." 철저한 고증에 자신이 없을 때는 그냥 두는게 낫다는 얘기. 물론 '복원보다 보존이 우선' 이라는 것은 상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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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의 얼굴

1491년경, ( )박물관

르네상스기의 대표적인 천재화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1452∼1519)에게도 네 점의 자화상이 전해 온다. 아마도 레오나르도만큼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의식한 화가는 없을 것이다. 그는 개인에 대한 철저함이 화가로서 최선의 길이라고 단언했다. 창조를 위한 첫째 조건은 고독이며, 그것을 의식적으로 조성하는 것은 바로 정신보존을 위한 것으로서, 그런 조건이 이루어지면 자기가 거울처럼 되며, 이 거울에 자연의 뛰어난 면이 선택되어 비친다는 것이 그가 <회화론>에서 주장한 논지였다. 이런 신조를 가진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자화상을 기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천재화가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출생 때부터 특이한 삶이 준비되어 있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프로이드(Sigmund Freud:1856~1939)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그의 유년기의 한 기억>이라는 논문을 통해 <모나리자>라는 작품-특히 미소의 의미-에 대해서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을 하였다. 빈치라는 마을에서 공증인인 셀 피에로 빈치의 사생아로 태어난 레오나르도는 농부의 딸인 생모 카테리나 밑에서 5세까지 자랐으며, 이 시기는 무의식의 형성기로서 아주 중요한 시기였다. 생모 카테리나는 아버지 없는 자식에 대한 연민과 남편 없는 설움 때문에 더욱더 자식에 대해 과도한 사랑을 퍼부었다. 이것이 레오나르도의 무의식 속에 깊게 자리잡아 훗날 피렌체의 부상(富商)의 아내인 모나리자 델 조콘도의 미소를 보자 자신의 무의식 속에 묻혀 있던 생모 카테리나의 미소-5세 때 아버지인 빈치와 돈난 알비에라 사이에 입적했기에 의식의 세계에선 생소한-를 끄집어 내고 이에 고착하여 그려 낸 것이 모나리자의 미소라는 설이 프로이드에 의해 흥미깊게 다루어진 바 있었다.

레오나르도는 14세 경 필네체의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chio:1435~88)의 공방에 들어가서 29세까지 계속 그 공방에 있었으며, 독립한 것은 1479년경이었다. 그는 일찍부터 투철한 자연관찰에 의한 엄격한 사실주의 습득한 후에 키아로스쿠로와 스푸마토 기법을 가미하여 준엄한 사실에 깊은 정신성을 가미하여 15세기 회화를 완전히 벗어났다. 거의 모든 분야에 나타난 그 깊은 진리탐구와 미답의 업적은 당대 '최적의 만능인'의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그리고, 미술가로서의 위대함은 빈틈이 없는 자연탐구에서부터 자연과 인간 내부의 깊은 곳에 있는 것까지 발견하고 찾아낸 것을 보편적으로 시각화하여, 거기에 다시 우주적인 생명의 신비와 영묘까지도 작품에 주입하였다는 점이다.

레오나르도의 자화상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토리노에 있는 노인의 얼굴을 그린<자화상>이다.

이 모습은 마치 사상가로서 깊은 우수에 잠긴 눈과 지그시 인내하는 듯한 입술이 그려져 있다. 이 얼굴을 라파엘이 바티칸 궁 서명의 칸에 그렸던 <아테네 학당>의 플라톤 얼굴과 중복된다. 플라톤의 모습은 심오하면서도 멜랑콜리한 분위기가 풍긴다. 비록 늙은 모습이지만 이 데생에서도 같은 이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현재 윈저 궁 왕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명상하는 노인>과 <노인의 얼굴>역시 자화상으로 간주된다. 이것은 앞의 토리노의 당당한 자화상 밑에 숨겨진 진정한 자신의 얼굴로 여겨질 만큼 머리도 벗겨지고 토리노의 자화상과 같은 긴 수염을 늘어뜨리고 있다. 특히 <명상하는 노인>은 왼손을 들어 뺨에 댄 전신 좌상으로 늙어서 쇠약해진 자신을 숨김 없이 그려 낸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는 또 하나 특이한 희화화(戱畵化)된 자화상으로 여겨지는 작품이 있는데, <그로테스크한 5인의 얼굴>이 그것이다. 이 그림은 중앙에 있는 옆얼굴의 노인이 희화화된 자화상으로 생각되며, 머리에 월계관을 쓰고 철학자 풍의 모습을 보이는 그의 주위에는 네 명의 남자가 있는데, 모두 이 노인을 조롱하고 비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네 명을 각각 인간의 네 기질을 극단화한 희화화라고 볼 때 중앙에 있는 노인은 자신을 희화한 것으로서 자기 성찰의 결과 그 어떤 것도 고대학자 이상으로 구현해낸 것이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나 키아로스쿠로와 스푸마토 기법에 뛰어났던 레오나르도에게 이런 기법을 여실히 보여 줄 수 있는 자화상이 전해 오지 않는 것은 유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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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나와 성모자]

1510년, 168.5 X 130CM, 목판에 유채,루브르 미술관

이 작품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몇점 안되는 완성작 중의 하나로 1501년에서 1510년 까지 단속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성 안나와 성모자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의 이탈리아 화가들이 그린 주제로서 그의 표현에는 두 가지 흐름이 있다.

하나는 마사치오 형과 같이 성 안나가 성모의 뒤쪽에 앉아있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오소리의 그림과 같이 두 사람이 나란히 앉 아있는 것이다.

레오나르도의 이 그림은 전자의 예이지만 제작과정에서는 여러가지 시도가 이루어 지고 있다. 영국의 내셔널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는 성안나와 성모자는 밑그림으로 이 작품을 완성하기 이전의 초기의 구도인데 다 빈치는 그가 즐겨했던 피라미드 구도로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14세기 이전에는 성안나는 잘 그려지지 않았으나 성 안나의 신앙은 15세기에 이루어져 마리아의 어머니로서 모든이에게 사랑을 받았다.

그런데 대부분의 작품 속의 성안나는 노인의 모습이지만 이 작품속의 성안나는 성모와 구별되지 않을 정도로 젊은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출처 : Artist 엄 옥 경
글쓴이 : 스카이블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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