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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흐

영원한 울트라 2008. 8. 15. 08:40

고흐 (Van Gogh 1853-1890)


 


세잔느와 쇠라가 인상주의 약식을 엄격한 고전주의 양식으로 만들어 가고 있을 때
고호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자신의 화필을 이끌어 갔다.
인상주의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표현하는 데 충분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고 믿었으며
이 점이 그의 주요관심사로 그는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자 자연을 재구성하지 않고
사물의 전형적인 성질을 부각했으며 사물이 가진 독특한 면을 드러내려 했다.
화면의 모든 형태는 고호 바로 자신처럼 느껴지도록 개성적인 화필과 색면으로 균형감과 움직임을 강조했다.
특히 터치에 의한 동적인 화면은 그의 그림의 특색으로 고호 자신의 치열한 예술가로서의 삶과
생명의 모든 형태를 통합하여 표현하려 했던 그의 강한 종교 감정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형태왜곡은 추상을 예고하여 병적 심리 내면적 드라마의 표출이라는 면에서
20세기 표현주의의 기틀을 마련하고 있다.

 

 




---- 고흐의 일생 ----

빈센트 윌렘 반 고흐는 1853년 3월 30일, 네덜란드 브라만트 지방의 작은 마을 그루트 준데르트에서 엄격하고 보수적인 칼뱅파 목사 테오도루스 반 고흐와 온화한 성품의 안나 코르넬리아 카르벤투스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삼촌 세 사람이 모두 화랑인 덕분에 1869년 7월 유명한 미술품 매매점 구필 화랑의 수습사원으로 일하게 되었다.

1872년 8월, 같은 일을 하게 된 동생 테오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평생에 걸친 두 사람의 편지 왕래가 시작되었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는 모두 668통이나 되었는데 편지 왕래는 세 차례 일시적으로 끊기기도 했다.

1873년 6월, 그는 구필 화랑 런던 지점으로 옮겼다.

이 무렵 19살의 하숙집 딸 유제니 로이어에게 구혼했다가 거절당하고 충격을 받았다.

1875년 5월 파리 본점으로 옮긴 고흐는 성서를 탐독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종교에 몰입하게 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미술품 거래를 혐오하게 되었고 고객이나 동료직원들과도 사이가 나빠져서

 

1876년 3월 말 직장에서 해고되었다.

에텐에 있는 부모 곁으로 돌아간 고흐는, 자연이나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하기를 원했던 어머니의 뜻을 저버리고

 

기숙학교의 무보수 견습교사, 서점 점원을 전전했다.

1877년 5월에 실제로 복음을 전파하려는 갈망 사이에서 방황했다.

1878년 7월 신학 공부를 그만 둔 그는 전도사가 되어 가난한 광부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벨기에의 탄광지역인 보리나주로 갔다.

그러나 그의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와 광적인 신앙심,

 

가난한 사람에 대한 봉사정신으로 인해 다른 종교인들과 마찰을 빚게 되고 여러 모로 힘든 생활을 했다.

1879년 여름, 고흐는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되어 테오에게 데생기법에 대한 책과 물감을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마침내 전업화가가 되겠다고 결심했을 때, 테오는 경제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고흐는 생전에 한 점의 그림만 팔았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것은 유화에만 국한된 이야기다.

그는 화상이던 센트 삼촌의 주문을 받고 헤이그 풍경을 담은 열두 점의 스케치를 그려서 20길더를 받았다.

다른 화가들과 관계를 끊고 고독하게 작업하던 고흐는 1882년 7월, 처음으로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는 유화도 그렸다.

이 새로운 장르에 매료된 고흐는 일주일 동안 일곱 점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또, 주로 평범한 남녀들 중에서 모델을 찾으며 100여 점에 이르는 인물습작을 했다.

1882년 11월에는 처음으로 석판화를 제작해서 테오에게 시험인쇄를 보냈고,

 

석판화 <슬픔>을 본 화상이 특별 주문을 의뢰해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 '슬픔', 1882, 연필과 흑색 분필, 44.5x27㎝, 월솔 미술관



1883년 9월, 경제적인 어려움에 처한 고흐는 (시엔과 해어짐)드렌테로 갔다.

그는 드렌테에서 예술가 공동체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또, 황무지와 석탄구덩이의 작은 집, 마을과 일하는 농부 등을 그렸다.

드렌테의 풍경은 마음에 들었지만 작업조건은 너무 열악했다.

날씨가 나빴고 작업실도 없었으며 유화나 데생 재료도 부족했다.

게다가 테오의 경제적인 형편도 불투명했다.

고독을 견디지 못한 그는 석 달 후 누에넨에 있는 가족에게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부모와의 관계는 매우 심각했다.

그러나 그가 병든 어머니를 돌보면서 상황이 조금 나아지기도 했다.

목사관 창고에서(아버지가 목사) 그는 독서를 열심히 하는 한편 그림에 열중했다.

1884년 초에는(1,2월) 직조공과 풍경을 소재로 유화와 수채화를 많이 그렸다.

그해 여름, 열 살 연상의 마르고트와 사귀면서 결혼을 생각했으나 그녀 가족의 반대에 부딪혀 수포로 돌아갔다.

1885년 3월 26일, 아버지 테오도루스 반 고흐 목사가 목사관 입구에서 쓰러진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와 심각한 갈등을 여러 번 겪었던 그였지만 슬픔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4월 말 <감자 먹는 사람들>을 그렸다.

 

 

고흐 - 감자 먹는 사람들 - 1885년 4월

 

 



이것은 그가 처음 시도해보는 대규모 구성작품이었다.

이 그림은 어두운 색조를 띠고 있었는데, 그후로 밝은 색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1885년 11월 고흐는 도시 풍경과 초상화를 그려 생계를 유지하려는 희망을 품고 엔트워프로 떠났다.

떠들썩한 항구의 풍경이 그에게 강렬한 인상을 주었다.

처음으로 일본 판화를 감상하기도 한 그는 자화상에 몰두했다.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6년 1월에 엔트워프에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했으나, 신경과민 증세가 심해져 2월이 끝나기 전에 그곳을 떠났다.

파리에 온 고흐는 탕기 영감이 운영하던 클로겔 거리의 그림물감 상점에서 로트렉, 앙케텡, 베르날, 러셀 등을 만났다.

이들은 1870년 <니벨룽겐의 혼인>이라는 작품으로 살룽전에서 상을 받은 바 있는 코르몽의 화실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4월에 이들과 합류하면서 그는 인상주의 회화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화실에서 무엇을 추구하는지 알 수 없어서 넉 달만에 떠나고 말았다.

여름에는 색 다루는 연습을 위해 꽃을 다룬 정물화 연작을 그렸다.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과음과 퇴폐적인 생활을 한 그는 건강이 나빠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들의 영향을 받아 화풍에 변화가 생겼고 한때 점묘화의 기법에 심취하기도 했다.

베르나르와 가깝게 지냈던 고흐는 클리시 거리에 있는 포세라는 대중식당에서 그와 함께 전시회를 가졌다.

그러나 고흐가 그 식당의 주인과 다투는 바람에 탬버랭이라는 선술집에서 작품을 전시했다.

그 선술집의 주인이며 이탈리아 화가의 모델이었던 세가토리와 사귀었지만 헤어지고 말았다.

6월, 벵 화랑에 전시된 일본 그림에 강한 충격을 받았다.

이를 계기로 그의 그림의 색채는 더 밝아지고 양식도 많이 변했다.

11월에는 살레 레스토랑에서 <쁘띠 불르바르의 인상파 화가들>이라는 전시회를 열었는데,

 

그의 작품과 함께 앙케텡, 베르나르, 드 코닝, 로트렉 등의 작품을 전시했다.

이 전시회를 통해 고갱, 기욤, 쇠라 등을 알게되었다.

파리에 온 지 1년 6개월이 지나자 도시에 대해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더 많은 빛과 색을 찾아 남프랑스의 아를로 떠났다.

파리에서 고흐는 자화상, 정물화, 몽마르트 풍경 등 200점이 넘는 작품을 남겼다.

1888년 2월 20일 고흐는 하얗게 눈내린 아를에 도착했다.

이곳에서 그는 꽃이 핀 과일나무 연작을 그렸다.

 

 

꽃이 활짝 핀 아몬드 나무

 

 

고흐의 아를르 시절 


 Blossoming almond branch in a glass with a book




Path through a field with willows




Farmhouse in a wheatfield near Arles




Seascape at Saintes-Maries




Coal Barges




Ploughed field   

 

 



1880년대 말, 모네가 여러 작품으로 구성된 연작을 그렸던 것처럼 고흐도 꽃나무 그림을 각각 분리된 작품이 아니라

 

하나의 연작으로 생각하며 작업을 했다.

3월 말에는 처음으로 그의 작품이 파리 앵데팡당 살롱전에 다른 인상파 화가의 작품과 함께 전시되었다.

아를에 와서도 테오를 통해 파리에 있는 젊은 화가들과 편지를 주고받던 고흐는 노란집을 아틀리에로 꾸며서

 

화가 공동체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그는 고갱을 초대했다.

9월 16일 고흐는 고갱이 와주기를 기대하며 노란집으로 이사했고 10월 23일 도착한 고갱과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초기에는 두 사람 모두 작업에 몰두하여 많은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12월 들어 예술에 대한 견해 차이로 두 사람 사이에 불화가 심해졌다.

12월 23일 고갱과 심하게 다툰 고흐가 자신의 귀를 잘랐다.

고갱은 급히 파리로 떠났고 고흐는 2주동안 병원에 입원했다.

1889년 1월 예상 밖으로 빨리 회복한 그는 노란집으로 돌아왔고

 

<귀에 붕대를 감고 있는 자화상>, <양파가 있는 정물>, <자장가>등을 그렸다.

 

 

양파가 있는 정물


그러나 여전히 환각증상이 있었고, 그를 불안하게 여기던 주민들의 고발로 3월말까지 병원에 감금되었다.

(4월 17일, 동생 테오가 조안나 봉제르와 암스테르담에서 결혼했다.)

아를 시절 고흐는 이런 고초를 겪으면서도 200여점의 그림을 그렸다.

죄책감과 무력감에 시달리던 고흐는 1889년 5월, 프로방스의 생레미에 있는 생폴 드 무솔 요양원으로 들어갔다.

 

닥터 레가 그를 맞아주었다.

9월에 <별이 빛나는 밤>과 <불꽃> 두 점이 파리 앵데팡당 살룽전에 전시되었고 좋은 평가를 받았다.

 

 

고흐가 그 삶의 마지막 1년, 정신병과 싸우며 그린 작품이다. 공동생활을 하고 있던 고갱과 다투다가 자기 귀를 자른 고흐는 아를의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간혹 발작을 일으켜 "나는 자신에게 과(課)해진 미치광이 역할을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생각한다"며 1889년 5월 아를에서 가까운 상 레미의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고흐는 그해의 7월과 12월에도 발작을 되풀이하였으며, 이 그림은 그 발작 사이에 그린 상 레미 시대의 작품이다.

 

고흐가 비저널이었다는 사실은 아를 시대까지의 작품에는 거의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는 항상 현실의 사물에 밀착하는 화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은 어떠한 이유에서도 변화시키지 않겠다"고 한 고흐도 본질적으로는 서정가(抒情家)이고, 뛰어난 비저널로서의 일면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은 아를 시대까지의 작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자연이나 물체와 마음을 상통하는 일종의 주술사였으며, 그의 기술적인 제어력의 완성과 마음의 성숙함이 이윽고 상 레미 시대에 있어 비저널로서의 고흐를 탄생하게 하는 것이다.

 

철창이 쳐진 정신병원의 창 너머로는 상 레미의 시가와 별이 깔린 하늘이 보인다. 별 하나하나는 심장의 동계(動悸)처럼 빛을 변화시키고 끝 모를 창궁(蒼穹)의 푸름은 그 중핵(中核)을 탐구하는 것처럼 소용돌이치고 있다. 별들도 소용돌이치고 모두가 구심적인 운동과 통일적인 움직임을 보여 주는 이 장대(壯大)한 밤의 시(詩)는 자연과 사물의 내면에 접촉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서정성·신비성을 보여 주고 있다. 조용하면서도 생동감이 있는 신비한 밤이다.  

 

37년의 짧은 삶을 산 빈센트 반 고흐(1853~1890)는 오랜 우회(迂廻)의 길을 걷다가 27세가 되던 1880년에야 화가의 길에 들어, 불과 10년의 작품생활 끝에 회화사(繪畵史)를 빛내는 숱한 명작을 남겼다. 그것도 발작과 퇴원이 되풀이된 그의 마지막 삶의 2년 반을 보낸 아를 시대에 약 200점, 상 레미 시대에 약 100점의 그림을 남겨, 이 기간이야말로 고흐 예술의 참다운 개화기(開花期)였다. 그의 예술적 정신은 20세기 초에 일어난 포비즘 화가들의 지표가 되었다.


그즈음 고흐의 작품은 동료 화가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기 시작했으며,

 

테오의 집은 물론 탕기 영감의 미술용품 가게에도 전시되었다.

그러나 고흐는 12월 말, 일주일이나 계속된 발작으로 심한 고통을 받았다.

갑자기 물감 튜브를 빨아먹다가 발작이 진정되면 평소처럼 그림을 그리곤 했다.

1890년 1월 18일 브뤼셀의 20인전에 그의 유화 여섯 점이 전시되었고,

 

권위 있는 평론가 알베르 오리에르의 지극히 호의적인 평론 '고독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르 메리퀴르 드 프랑스>에 실렸다.

한편 브뤼셀의 20인전에 전시되었던 <붉은 포도밭>이 팔렸다.

 

 


 

안나 보흐라는 사람이 400프랑에 이 작품을 샀다.

이것은 그의 평생에 유일하게 팔린 유화작품이다.

(1890년 1월 31일 테오와 그의 아내 조안나 사이에 아들어 태어났다.

테오는 형의 이름을 따서 빈센트 윌렘 반 고흐라는 이름을 지었다.)

간질성 발작이 점점 잦아지는 가운데 2월 22일 아를을 방문했다가 다시 일으킨 발작이 4월 말까지 지속되었다.

생레미 요양원의 생활을 견딜 수 없었던 고흐는 테오의 권유로 파리의 피갈 8번지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

 

그해 5월 17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도 머물지 않고 또 떠나기로 했다.

이번의 행선지는 오베르 쉬르 오아즈였다.

그곳에는 의사이자 화가이며 피사로와 폴 세잔의 친구인 폴 페르디낭 가세가 있었다.

오베르 쉬르 오아즈로 옮긴 그는 라부 부부의 여인숙에 방을 얻어 살면서 닥터 가세의 치료를 받았다.

6월 말 테오가 직장에서의 갈등으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불안한 마음으로 파리를 방문했던 고흐는 테오와 돈 문제로 다투고 오베르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 <오베르의 교회>등을 그렸다.

 

 

 

까마귀떼 나는 밀밭,1890년작, 유채, 103*50.3cm, 반고흐 미술관

1890년 7월 27일, 초라한 다락방의 침대 위에 피를 흘리고 누워 있는 그를 라부의 가족이 발견했다.

그 스스로 가슴에 총을 쏜 것이다.

닥터 가세와 마제리가 라부의 집으로 급히 달려왔다.

이튼날, 파리에 있던 테오는 가세의 편지를 받고 오베르로 왔다.

두 형제는 이 지상에서 마지막으로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날 밤 고흐는 의식을 잃었고, 7월 29일 새벽 1시 30분 동생의 품에 안긴 채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기고 파란 가득한 삶을 마감했다.

7월 30일, 고흐는 테오, 베르날, 탕기 영감, 가세 등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베르의 묘지에 묻혔다.

8월에 테오가 베르나르의 도움으로 몽마르트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고흐의 추모전을 열었다.

고흐가 죽은 지 6개월 후인 1891년 1월 25일, 형의 죽음 이후 갑자기 건강이 악화된 테오가 네덜란드의 우트레히트에서

 

33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914년 테오의 화장된 유해는 형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다.

 

 

 

고흐의 자화상 모음

 

 

"나는 성당을 그리느니 차라리 인간의 눈을 그리겠다. 왜냐하면 성당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인간의 눈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 평생 50여 점의 자화상을 그린 고흐가 유명하다.

이것은 가난하여 모델을 고용할 수가 없었던 때문이기도 했지만,

자기 그림의 수법을 연구함과 동시에, 화면에 자기 자신의 내심(內心)을 표현함으로써

반성하고 고독을 달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고흐가 파리에 온 이후 처음 접한 전시회는, 바로 쇠라의 〈그랑드자트〉가 전시된 1886년의 마지막 인상주의 전시회였다.

고흐는 파리에서 거의 30점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작가 얼굴과 저고리의 부서진 듯한 색채,

특히 배경의 '점들'은 쇠라에 대한 그의 동경을 반영하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스케치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빈센트 같지 않은 자화상이다. 아주 깔끔하고, 금방 세수하고 나온 듯한...

한편으로는 슬픈 듯하고..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애정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는 듯 하다.






'고갱에게 바친 자화상(Self-Portrait Dedicated to Paul Gauguin)'



고흐는 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그 하나하나가 당시 그의 내면 생활을 읽을 수 있게 솔직하게 나타내고 있다.

이 자화상은 고흐 자신이 말했듯이 색채가 없는 회색 주조(主調)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간혹 자기 작품을 친구들에게 선사하기도 하고 교환하기도 했다. 때로는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까지도 작품을

나누어 주기도 했었다.

이 작품은 고갱과 교환 한 자화상이며 밤의 카페와 같은 주에 완성되었다.

그러나 밤의 카페가 빨강과 초록의 대조에 의한 강렬한 구성인데 비하면, 이 자화상은 상당히 억제되어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무렵의 내면 생활에 있어 격한 동요를 나타내고 있고,

아를르 시대 초기의 안정을 깨뜨리고 평형을 잃은 흔적이 짧은 머리칼과 예리한 시선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그린톤의 배경과 간결한 터치의 조화가 차갑고 엄숙하게 느껴진다.


테오에게


이번 주에 그린 두번째 그림은 바깥에서 바라본 어떤 카페의 전경이다. 푸른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다.

그 옆으로 별이 반짝이는 파란 하늘이 보인다.(아를의 포럼광장에 있는 밤의 카페테라스)

세번째 그림은 흐릿한 벨로네즈 녹색 바탕에 잿빛 톤으로 그린, 퇴색한 느낌을 주는 자화상이다.

모델을 구하지 못해서 대신 내 얼굴을 그리기위해 일부러 좀 좋은 거울을 샀다.

내 얼굴색을 칠하는 어려움을 극복하게 되면 다른 사람도 쉽게 그릴수 있겠지.. (1888년 9월)


존경하는 고갱


“당신이 내 모습을 볼 텐데 이 작품은 동시에 우리 모두의 모습이며, 사회로 부터 희생당한 가련한 자들이고 ,

모든 것을 사회에 친절로 반환하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1888년 9월 16경 고흐가 “자화상(고갱에게 바침)"을 고갱에게 보내면서 쓴 글이다.

<고흐는 자신의 모습을 마치 수도승처럼 그렸다.






빈센트 반 고흐 -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1887



1885년 파리에서, 고흐는 그의 그림을 획기적으로 바꿔 놓는 사람들을 만났다.

그건 바로 인상파화가들이었다.화상으로 성공한 동생 테오를 통해 그는 마네, 로트렉, 피사로, 고갱, 드가 등 인상파 화가들을

만난 것이다. 인상파의 그림에서 충격을 받는다.

그들의 그림에서는 빛과 공기가 만져졌다.

무엇보다도 인상파화가들은 고전회화기법을 깨고 주관적인 시선으로 사물을 그린 최초 화가들이었다.

인상파와의 만남을 계기로 고흐의 그림은 획기적으로 바뀐다.

어두웠던 그의 그림은 점점 밝아지고, 강렬한 색조를 띠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고흐식의 고집해온 그림 스타일이 자리를 잡아간다.

오랜 반복과 시행착오 끝에 고흐는 그만의 색깔을 찾은 것이다.

점점 빛나기 시작한 그의 그림, 그리고 막 폭발할거 같은 그의 광기는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를에서 그 절정을 만난다.






빈센트 반 고흐 - 밀짚모자를 쓴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 회색 중절모를 쓴 자화상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파리로 건너온 나에게 모델료를 델 수 있을 만한 충분한 여유는 없었다.

하지만, 거울에 비친 가난한 나의 모습을 보며 난 무한한 그림의 세계를 느낄 수 있었다.

행복한 웃음이 가득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지만, 나는 무한한 고독과 신에대한 경건함에 익숙해진 나의 얼굴을 왜곡시킬 수는 없었다.

터치 하나 하나에 나의 심상을 담으며 일정한 선들의 흐름을 그려보았다.

문명과 함께 병들어가는 도시에서의 삶에서 벗어나 난 아를르로 갔다.

하얀 눈에 깊이 잠든 자연과 그윽한 봄향기에 취해있는 벌판, 살갗을 시원하게 뚫고가는 바람의 신선함을 담아내며

난 늘 프른 삼나무 위로 지는 별들의 밤에 취해 깊이 잠이 들 수 있었다.

그 어느날 난 밀짚모자를 쓴 나의 모습을 그렸다.- 고흐






빈센트 반 고흐 -자화상; 1890



고흐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의 그림으로서 그의 유서와 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그가 남긴 몇몇 자화상 중에서 가장 결연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려고 한 비장한 결심이 엿보인다.

거의 단색으로 느껴질 정도의 청록 필선으로 그려진데다 붉은 수염과 밤색 머리카락에 둘러싸인 볼이 움푹 팬 고흐의 얼굴이 집요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마와 코에 냉정한 빛을 던지고,

그늘진 부분에 청색이나 녹색을 칠하고 청색과 갈색의 선을 넣고 있다.

무엇인가를 응시하고 있는 눈과 꼭 다문 입술에 고흐의 정신이 역력히 나타나있다.

이만큼 실감있게 시시각각으로 영혼이 살아 있는 모습을 느끼게 하는 초상화는 없을 것이다.

찬색인 녹색 의복은 아직도 튼튼한 골격을 한 동체를 감싸고 있으며,

옷을 그리는 동적인 필선이 무언가 억제할 수 없는 불안한 육체의 움직임을 느끼게 한다.

고흐는 이 냉철한 정신 또는 영혼이 충만한 속에 홀로 외로이 앉아서 귀를 기울여 무엇인가 마음으로 느끼려 하고 있다.
"내가 조용히 작업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시오. 미치광이의 작업인들 어쩌겠소." - 고흐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Self-Portrait; 1887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1887



아버지나 어머니가 본능적으로(의식적으로라고는 말하지 않겠다)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다.

그들은 덩치가 크고, 털이 많으며, 집안에 지저분한 발을 하고 드나들게 분명한 개를 집에두기 망설이는 것 처럼

나를 집에 들이는 걸 꺼려한다. 그래, 그 개는 모든 사람에게 걸리적거리고,

짖는 소리도 아주 큰, 불결한 짐승이다. 내가 개라는 사실을 인정하기로 했다.

가족들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 이 개는 한때 아버지의 아들이었지만,

그를 길거리로 내쫓은 사람은 아버지다. 너무 오랫동안 개는 더 사나워졌다.

개는 사람을 물 수도 있고 광견병에 걸릴수도 있다.

그러면 경찰은 그 개를 쫓아가 총으로 쏘아버리겠지. 아, 이 모든것은 완벽하게 진실이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 개를 집 지키는 개로 삼고 키울수도 있을텐데... 개는 이곳에 돌아온 걸 후회한다.

그들이 친절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황야를 떠돌때도 이 집에서처럼 외롭지는 않았다.

불쌍한 짐승이 돌아온 것은 생각이 모자란 탓이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일이 다시 없기를 바랄 뿐이다. 1883. 12. 15; 고흐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1889




테오에게



사랑하는 동생아, 지금도 그림을 그리다 다시 너에게 글을 쓰고 있다.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림을 그리고 있다. 과거 그 어느때보다 작업에 대한 열으로 가득 차 있다.

이것이 회복을 도와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난 이도 다 빠져버리고 숨도 제대로 못 쉴때가 되어서야 그림을 발견 했다"

고 말했는데, 어쩌면 그 연장선상에 있는 어떤 일이 나에게도일어났는지 모르겠다. 내 슬픈 병도 아주 느리긴 하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쉼없이 열의를 갖고 작업하게 해주거든,

어쩌면 천천히 오래 일한다는 게 숨은 열쇠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그것에 대하여 뭘 알겠니? 단지 그리 나쁘지 않은 한두점의 그림을 진행중이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수 밖에,

하나는 노란색 밀을 수확하는 농부의 그림이고,또 하나는 20인전에 낼 환한 배경의 초상화이다.

물론 20인전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그때까지 나를 기억하고 있다면 말이다.

사실 나 자신은 어떻게 되든 별로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나에 대한 걸 다 잊어 버리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지...

1889년 9월 5일~6일 - 고흐






빈센트 반 고흐 - 이젤 앞의 자화상



반 고흐는 수많은 자화상을 남기고 있는데 이 작품은 그가 가장 정신적으로 안정되어 있을 때 제작된 것이다.

청, 황, 녹, 적을 기조로 짧은 필치를 병열시킨 이 작품은 화가의 예리한 시신에 의해서 더욱 선명해지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연한 느낌을 주며 인간의 무한한 탄력성을 의식할 수 있게 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색을 가지고 세계를 불태우는' 철저한 색채주의자인 그의 화풍과 자기를 억제시키려는 내면적 욕구의 충돌이 화면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고 본다면 잘못일까...

다른 화가의 추종을 불허하는 예리한 통찰력은 강하면서도 충실한 화면을 창조한 원동력임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서로 대립되는 요소를 조화시키는 것... 이것이 고흐의 예술이다.






빈센트 반 고흐 - 자화상



고갱에게 '해바라기를 그리는 고흐' (다소 우둔해보이는)를 받고선 그가 그 그림에 반항하여 그린 그의 자화상.

유난히 그의 눈동자가 선명하고 예리하며 강렬하다. 결국 이 그림은 그의 왼쪽 귀가 있는 마지막 초상화가 되었다.






빈센트 반 고흐 - 파이프를 물고 있는 자화상; 1889년 1월



이 작품은 고갱과 격렬히 다툰 후 자해한 사건이 있은지 2주 후에 그려진 작품으로서 고흐는 자신의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색채가 매우 제한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고흐는 고통스런 감정을 모두 눈에 집중시키고 있다.

이 자화상은 붉은색과 푸른색의 대비가 아름답다. 채워지지 않는 이상에서 오는 답답함을 해소하기 위한 그림처럼 보인다.

그의 광기가 붉은색으로 나타났을 때 그의 눈빛은 살아있다.

아래의 억압된 표정에 반해 위 자화상은 고흐 자신의 억압하던 무엇인가를 벗어던진 자유인처럼...






'귀를 자른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1889年



고갱과의 일로 인해 귀를 자르고, "화가이기 때문에 겪은 발작이었기를 바란다.

하루하루 내 머리는 평온을 회복하고 있다." 고흐는 테오에게 이렇게 썼다.

위의 자화상과는 다르게 이 자화상은 배경이 밝고 안정적이다.

하지만 안정적인 데 비해 고흐의 표정은 소외되고 억압되고 자신감 없는 '무언가를 하면 안된다'고

강요받는 환자의 표정같아 보인다. 뒤에 기모노를 입고 있는 여인들의 배경 또한 이색적이다.

고흐는 자신의 자른 귓볼을 술집 웨이트리스에게 주었다고 한다. 평생 여자를 혐오하면서도,

창녀와 살고 웨이트리스에게 응석을 부리던 그에게서 소외된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출처 : Artist 엄 옥 경
글쓴이 : orangepink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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