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2일 지방선거에서 이명박 정부와 한나라당은 완패했다. 국민은 4대강 재개발 사업과 세종시 수정 등 이명박 정부의 국정 독주를 견제해야 한다며 야당에 몰표를 주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가 국정 기조를 바꾸지는 못했다. 대통령은 6월14일 라디오 담화에서 논란이 된 사업들을 변함없이 추진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국민이 꺼내든 옐로카드를 무시하겠다는 것이었다.
언론 정책도 마찬가지였다. 국민이 문제를 제기했던 MBC 장악 진상규명이나 KBS 수신료 인상, 조·중·동 종합편성채널 인가 문제 등에 전혀 제동이 걸리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월드컵 열기에 묻혀 여론이 주춤한 틈을 타서 가속도를 내고 있다. 축구로 치자면 오프사이드 반칙을 하는 것이다.
이 ‘막장축구’에서 가장 돋보이는 선수는 SBS다. SBS는 2008년 SBS미디어홀딩스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 뒤 ‘상업화’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SBS인터내셔널을 통해 2010~ 2016년 동·하계올림픽 단독 중계권과 2010년 남아공 월드컵,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중계권을 독점한 SBS는 독점적 지위를 실컷 누렸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중계 화면을 내보내는 공공전시권(Public Viewing, PV권)을 마음껏 휘둘렀다.
SBS 단독 중계로 윤세영 회장 위상 높아져
월드컵 중계에서 배제된 KBS·MBC 사장들은 창피를 당했다. 취임 당시 낙하산 사장이라는 욕을 먹기는 했지만 MB 측근이기 때문에 회사의 이익을 지켜주리라는 기대가 내부에서는 있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어보니 마치 스카우트 비용만 높고 아무런 활약을 못하는 ‘부도수표 선수’였다. MBC 노조의 한 관계자는 “김재철 사장이 왔을 때 ‘그래도 MB 측근이니 공동 중계권 정도는 확보해주겠지’ 하는 우호적인 여론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하는 ‘먹튀’ 사장일 뿐이었다”라고 말했다.
반면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SBS 윤세영 회장의 위상은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급으로 격상되었다. KBS와 MBC 사장보다는 한 계단 격이 높고 방송통신위원회 최시중 위원장에 맞설 만큼 영향력이 크다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SBS는 여론의 비판을 넘고, MBC·KBS의 협공을 막고, 방통위의 지시까지 거부하며 단독 중계를 관철했다. 단독 중계는 재허가 파동 이후 수세에 있던 윤 회장이 언론사주로서 몸값을 높인 계기가 되었다.
윤 회장이 방송계 ‘원톱’으로 서는 것을 견제한 사람은 KBS 김인규 사장이었다. KBS는 SBS가 중계권 협상과 관련해 ‘할리우드 액션’ 반칙을 했다며 지난 5월27일 서울중앙지검에 윤세영 회장 등 SBS 전·현직 임직원 8명에 대해 사기 및 업무방해, 입찰방해 등의 혐의로 형사 고소했다.
KBS 측은 “피고소인들은 2006년 5월8일 스포츠 마케팅사인 IB스포츠와 중계권 단독 구매를 위한 비밀합의문을 작성한 뒤 5월30일에는 방송 3사 사장단 합의 등을 통해 공동구매 협상에 참여하는 것처럼 위장했다. 공동 입찰금액을 알아낸 뒤에는 곧 협상을 깨고 입찰가보다 높은 금액으로 중계권을 단독 구매했다”라고 고소 이유를 밝혔다.
ⓒ시사IN 조남진 SBS가 월드컵 중계권과 취재권을 독점하면서 KBS와 MBC 등 다른 방송사는 애를 먹었다. |
KBS, 보도 통해 SBS 독점 집중 성토
KBS는 다시 1910만 가구 중 440만 가구 (23%)가 SBS를 직접 수신하지 못하는 난시청 가구라 월드컵을 볼 수 없다며 SBS의 단독 중계가 보편적 시청권에 위배된다고 지적했다. KBS는 이날(6월14일) 이 보도를 비롯해 SBS의 월드컵 독점 중계 관련 뉴스를 여섯 꼭지나 내보냈다. 이에 대해 SBS는 방송통신위원회의 반박 자료를 바탕으로 KBS 주장을 반박하며 KBS가 SBS 중계를 볼 수 없다고 지적한 곳은 사실 중계를 볼 수 있는 곳이라고 보도했다.
SBS 비판에는 KBS뿐 아니라 거의 전 언론사가 십자포화를 쏟아부었다. 조선일보는 “‘전광판 중계도 돈 내라’ 돈독 오른 SBS”(6월16일) 보도를 통해 SBS가 전광판 중계료를 따로 요구한다고 지적했다. 동아일보는 ‘단독 중계 SBS, 월드컵 시청률은 극과 극’(6월17일) 기사를 통해 조 예선 경기 중 상당수가 동시간대 방영되던 자사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보다도 시청률이 떨어진다고 보도했다. 한겨레는 SBS가 경기·인천 지역 공중파인 OBS에 경기당 2분짜리 동영상을 제공하는 대가로 10억원을 요구했다가 철회했다고 보도하며 SBS의 상업성을 비판했다.
여론의 뭇매를 맞은 SBS는 지금 언론에서 비판하는 내용은 방송 3사가 공동 중계하던 2006년에도 있었던 일인데 왜 SBS만 욕하느냐, 월드컵 중계가 시청률에 미치는 영향이 적다는 것은 시청자들의 ‘채널 선택권’을 지켜줬다는 방증 아니냐, 올림픽과 다르게 월드컵은 상업행사니 상업성을 추구해도 괜찮은 것 아니냐며 볼멘소리를 낸다. 심판 구실을 하는 언론이 SBS에 대해서만 편파 판정을 한다는 것이었다. 항의가 빗발치자 지난 동계올림픽 때처럼 인터넷 게시판을 폐쇄하고 전화 문의만 받고 있다.
이처럼 다른 언론사가 SBS에 집중 태클을 거는 동안 직접 이해당사자인 MBC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이미 친정부 체제를 구축한 KBS 김인규 사장과 달리 MBC 김재철 사장은 내부 기반이 약했기 때문이다. 개인 기량도 시원치 않았다는 분석이다. 한 언론시민단체 관계자는 “월드컵 중계권 협상 때 보니 김재철 사장은 자신의 목소리를 못 냈다. 취임 당시 노조 설득 논리가 월드컵을 잘 준비하자는 것이었는데 제 몫도 못했다”라고 평가했다.
MBC 김재철 사장은 월드컵 기간을 ‘노조 죽이기’에 활용했다. 월드컵 개막에 즈음해 41명에 이르는 징계자 명단을 발표했다(노조 조합원 21명, 직능단체장 8명, 보직부장 12명). 지역 MBC 사장들을 부추겨 지역 MBC 노조 간부 63명을 징계하게 만들었다. 총 징계자는 104명, 창사 이래 최대 규모였다.
김 사장의 대량 징계에 대해 MBC 노조는 의연하게 대처하고 있다. 유일하게 해고당한 이근행 위원장은 “부당한 징계지만 감당하고 갈 것이다. 레드카드를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니라 김재철 사장이다. MBC 구성원들로부터 신뢰를 잃었기 때문이다. 공영방송 MBC를 이끌 능력도 자격도 없는 인물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라고 말했다.
MBC, 창사 이래 최대 104명 징계
올해 MBC 노조는 ‘MBC 대주주인 방송문화진흥회 개혁, 김우룡 조인트 발언 진상규명, 김재철 사장 퇴진’을 내세우고 39일 동안 파업했다. 이번 대량 징계는 파업에 대한 것이었다. 이 위원장은 “파업 목표 중 이룬 것은 없다. 그러나 이번 파업 과정을 통해 조직의 건강성과 개인의 각성을 확인한 것은 성과다. MBC를 지킬 힘과 의지를 얻었다”라고 말했다.
ⓒ시사IN 고재열 MBC 사측은 월드컵 개막 직전 직원 41명(지방사 포함 104명)을 징계했다. 위는 징계에 항의하는 MBC 노조원들. |
SBS는 특히 KBS의 아킬레스건인 수신료 인상 문제를 집중 공격했다. 수신료 인상은 KBS 김인규 사장이 KBS의 30년 묵은 숙원사업이라며 ‘공영방송 재원 마련’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의욕적으로 추진하는 사업이다. 김 사장은 월드컵 열기로 달뜬 6월 한 달 동안 수신료 인상안을 국회에 올리기 위한 모든 절차를 속공으로 처리할 계획이다.
6월14일 ‘KBS 수신료 현실화 공청회’ 개회사를 통해 김 사장은 “광고가 수신료보다 많은 기형적 구조를 깨고, 종편 광고 재원 마련이 아니라 공영방송 재원구조 마련을 위해 이사회와 국회 등 대의기구를 거쳐 수신료 문제를 현실화하겠다”라고 말했다. 수신료 인상 건은 6월17일 시청자위원회에 보고되었고 6월 마지막 주 KBS 이사회에 상정된 후 방송통신위원회에 보고될 예정이다.
여기에 SBS가 태클을 걸었다. 6월15일 ‘KBS, TV 수신료 2.6배 인상… 올릴 자격 있나?’라는 보도에서 SBS는 “시민단체들은 KBS가 방만한 경영에 대한 내부 자성 없이 수신료 인상안을 내놓을 자격이 있는지 의심스럽다고 비판했습니다”라며 KBS 수신료 인상이 졸속으로 처리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언론단체들은 A매치급 의제인 수신료 인상 문제를 동네 조기축구처럼 처리하려는 데 이의를 제기한다. 언론연대 유영주 상임정책위원은 “따져야 할 문제가 너무나 많다. 수신료를 왜 6500원으로 올리느냐, 수신료를 더 내면 KBS가 바뀌느냐, 종합편성채널에 광고 몰아주기가 아니냐, 보스턴 컨설팅그룹의 24억원짜리 보고서 내용을 왜 공개 안 하나, 수신료를 전기요금에 계속 통합해 징수할 것이냐 등 다 따져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디어행동이 공공미디어연구소, 한겨레와 함께 실시한 국민 여론조사 결과 80.2%가 수신료 인상에 반대한다고 응답했다.
조·중·동, 종편 앞으로 각개 약진
화려한 월드컵 경기 화면 뒤에서 SBS· KBS·MBC가 내우외환의 ‘막장 방송월드컵’을 치르는 동안 종합편성채널을 준비 중인 ‘방송 후보선수’ 조·중·동은 열심히 몸을 풀고 있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연내에 종합편성채널 사업자를 선정하겠다고 발표한 상황이라 물밑으로 치열한 경쟁을 벌이는 것이다. 눈여겨보지 않았던 후보 매일경제까지도 6월8일 매경미디어그룹 전 직원을 대상으로 종편설명회를 열며 의욕을 불태운다.
이들이 후보 딱지를 떼고 방송시장의 주전으로 활약하기 위해서는 종편 사업자로 선정되는 것 외에도 몇 가지 ‘특혜성 제도 개편’이 필요하다. 일단 KBS 수신료 인상이 이뤄져 KBS 2TV 광고 물량(6000억~7000억원)이 풀려야 한다. 또 종편 채널이 공중파 방송사 채널 중간에 배치되어야 한다(현재는 주로 홈쇼핑 채널). 중간광고·가상광고·의약품 광고도 허용되고, 프로그램 협찬 규정도 완화되어야 한다. 말 그대로 산 넘어 산이다.
그러나 한발 한발 앞으로 나가고 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지난 6월9일 ‘방송콘텐츠 제작시스템 선진화방안’을 발표했다. 골자는 정부가 사전 제작 지원을 할 수 있게 만드는 것과 드라마 등 콘텐츠 유통 권리를 제작사에게 주는 것인데, 외주 제작사에 힘을 실어줘서 이들이 미래의 종편과 일할 수 있도록 숨통을 터준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방송 대표팀’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이 크지 않다.
한국언론학회가 주관한 ‘종합편성채널의 합리적 도입 방안에 관한 세미나’(6월17일)에서 현실적으로 종편은 한 개 정도밖에 수용될 수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이렇게 갈 길이 먼데 한나라당이 방송시장 재편과 관련해 간판으로 내세웠던 정병국 의원(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장)의 골 결정력 미숙이 짐이 되고 있다. 정 의원은 최근 언론 인터뷰에서 “기본적으로 종편이나 보도전문 채널에 관해서 좀 부정적이다. 방송 트렌드 양상과 맞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반면 그동안 수비축구로 일관하던 야당은 6월 임시국회에서 역공에 나설 태세다. 지방선거 승리로 전열을 가다듬은 야당은 KBS 수신료 문제, 종합편성채널 사업자 선정 문제, MBC 청문회를 논의하자고 국회 문방위 간사 회의 때 제안했다. 한나라당 간사인 한선교 의원은 이 중 MBC 청문회는 수용하지 않았다. 야당은 6월25일 방송통신위원회 업무보고에서 본격 공세를 취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번 월드컵에서 수비 위주의 팀이 선전했던 것이 국회에서도 재현될지 관심을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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