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금융 위기의 충격은 잊은 것일까. 경기 회복 기대감이 퍼지면서 뼈아픈 참회와 반성의 분위기는 채 1년도 못돼 눈 녹듯 사라지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벌써 조용히 과거로 돌아가고 있다. 리처드 프리먼(66)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금융시장의 잘못된 인센티브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하면 다시 위기가 발생할 수 있다”며 “또 한 번의 금융 위기는 감당하기 어려운 대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노동경제학 분야 세계적 석학인 프리먼 교수는 현재 한국 학자들과 한국 노사관계와 노동시장 문제에 관한 공동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제주에서 열린 ‘제5회 제주평화포럼’에 참석한 그를 지난 8월 12일 만났다. 갈색 중절모가 트레이드마크인 프리먼 교수는 아직도 휴대전화를 쓰지 않는다며 스스로를 “미국에서 휴대전화가 없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산책길의 평화를 방해 받고 싶지 않다는 게 그가 밝힌 이유다.
요즘 금융 위기의 교훈이 퇴색되는 느낌입니다.
사실 매우 걱정스러운 부분이 많아요. 금융시장의 인센티브 시스템을 바로잡지 못하면 다시 위기가 발생할 수 있어요. 그건 엄청난 재앙입니다. 정부 부채가 천문학적인 규모로 급증했기 때문에, 특히 미국 정부는 또 다른 금융 위기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요. 언제까지나 돈을 계속 찍어낼 수도 없고 빚을 무한정 질 수도 없기 때문이죠. 다행이 이런 점들이 금융부문 개혁에 상당한 압력으로 계속 작용할 거예요.
금융 위기의 원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미국식 월스트리트 자본주의 모델은 실패했습니다. 이익을 본 사람은 월스트리트에 있던 몇몇 사람들밖에 없어요. 자본주의의 약점은 노동이나 사회복지 같은 문제가 아니라 금융시장의 탐욕이었어요. 금융시장의 탐욕은 원자력과 맞먹는 파괴력을 갖고 있지요. 거대 금융회사의 욕심이 경제를 망가뜨리고 불안정성을 높이는 상황을 막아야 해요. 금융회사 경영진은 사회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인센티브를 추구했고, 아시아 나라를 겨냥한 비난의 표적이던 ‘정실 자본주의’가 실제로는 미국에도 만연하고 있었어요. 전문가들에 대한 과도한 믿음도 버려야 해요.
정실 자본주의가 미국에 만연한다고 하셨는데요.
예를 들어 보죠. 요즘 헨리 폴슨 전 재무장관은 의회의 공격을 받고 있어요. 골드만삭스 최고경영자(CEO) 출신인 그가 구제금융을 실행하면서 골드만삭스와 어떤 접촉을 했는지가 논란이에요. 그동안 민주당 정부든, 공화당 정부든 가장 중요한 자리인 재무장관을 골드만삭스 출신이 차지해 왔어요.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시절 재무장관인 로버트 루빈 역시 골드만삭스에 있었죠. 거대 은행이나 증권사에서 일하다 정부 요직에 들어가는 것은 이제 너무 흔한 일이 됐어요. 규제 대상 기업에서 근무하던 사람이 거꾸로 규제 당국자가 되기도 해요. 이건 제삼자처럼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시스템을 지향하는 정부라고 할 수 없지요.
고용 상황은 언제쯤 나아질까요.
현재의 어려움은 금융 시스템에 의해 유발된 겁니다. 지금까지 겪어 온 경기 침체 중에서 금융 위기와 관련된 경기 침체는 최악입니다. 유사한 과거 사례를 보면 실업 문제가 생각처럼 빨리 해결되지 않아요. 1997년 한국은 비정규직 증가라는 문제가 발생했고, 아르헨티나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로 어려움을 겪었어요. 사회복지 국가인 스웨덴도 1992년 금융 위기로 같은 문제를 경험했어요. 핵심은 다시 성장을 회복해도 일자리는 잘 복구가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위기 때 취업 시장에 들어간 사람들은 평생 그 여파를 겪게 되지요. 단순한 미봉책이 아니라 새로운 정책을 찾아야 해요.
한국 정부의 ‘휴먼 뉴딜’을 어떻게 보십니까.
‘휴먼 뉴딜’은 아직 완성된 개념이 아니라고 봅니다. 여러 가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까지 한국 정부가 제시한 정책들은 빈곤층에 도움이 되고 가치 있는 내용이라고 평가할 만해요. 하지만 정부의 주된 관심은 ‘휴먼 뉴딜’보다는 아직은 경기 회복에 놓여 있는 느낌이에요. 옳은 정책들이지만 어떻게 실천될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아요.
‘휴먼 뉴딜’ 정책은 교수님께서도 참여하셨고 미국 민주당이 양극화 해법으로 만들었던 ‘해밀턴 프로젝트’와 유사하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해밀턴 프로젝트는 월스트리트 출신인 로버트 루빈 전 재무장관의 재정 지원으로 시작됐습니다.(웃음) 중도·보수 성향 민주 당원을 겨냥한 정책 개발이 목표였죠. 역사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대변한’ 토머스 제퍼슨 대신 미국 초대 재무장관을 지낸 알렉산더 해밀턴의 이름을 선택한 것은 일종의 시그널이에요. 함께 참여한 사람으로서 불만은 없지만 ‘월스트리트 타입’의 시각인 것이죠. 하지만 이 프로젝트는 버락 오바마 정부에서 매우 큰 영향을 미치고 있어요. 여기에 참여했던 인맥들이 정부 핵심에 포진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프로젝트 첫 책임자였던 피터 오재그는 백악관 예산국장으로 갔고,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도 지금 백악관에 있어요.
미국 자동차 산업의 몰락 원인은 무엇입니까.
일본 자동차 회사들은 미국 시장에서 여전히 잘 운영되고 있습니다. 유럽 기업도 마찬가지죠. 실패자는 제너럴모터스(GM)를 비롯한 디트로이트의 미국 자동차 회사들뿐이에요. 그들은 매우 잘못된 의사결정을 했어요. 무엇보다 우수한 노동 인력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지요. GM은 미국 기업 가운데 가장 많은 엔지니어를 보유하고 있는데도 일본 자동차와 경쟁할 수 있는 모델을 만들지 못했어요. 경영진의 판단이 잘못됐기 때문이죠.
노동조합의 책임은 없습니까.
노동조합은 조합원을 위해 노사협상을 잘 한 것뿐이에요. 만약 회사에 재앙이 될 만한 내용이라면 협정문에 사인을 하지 않을 만큼 경영자들이 영리하다고 그들이 믿는 것은 당연해요. 하지만 경영진은 충분히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던 겁니다. 결국 기존에 누리던 건강보험과 연금, 그리고 높은 임금과 중산층의 지위가 사라져 버렸어요.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분명한 희생자죠.
‘이익 공유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는데요.
기업과 근로자가 이익을 나누는 방식은 크게 5개가 있습니다. 우선 이익배분제와 성과배분제, 종업원주식소유제(ESOP), 스톡옵션이 있지요. 여기에 개인적인 주식 소유가 추가됩니다. 이 경우 할인된 가격으로 주식을 사게 되죠. 현재 미국 근로자의 46.7%가 이 가운데 1개 이상의 혜택을 받고 있어요. 이미 다양한 공유 시스템이 확산돼 있는 겁니다. 이익 공유제는 근로자를 더 열심히 일하게 하고 한국에서 큰 문제가 되고 있는 노사 대립을 감소시킵니다. 기업이 하나의 팀처럼 운영돼 이익이 많이 나면 근로자도 혜택을 보기 때문이에요.
이익 공유제가 주류가 될 수 있을까요.
장기적으로는 분명히 주류 형태가 될 것입니다. 현재는 금융 위기의 영향으로 노동자들이 리스크를 부담하기 싫어할 수 있어요. 이익 공유는 기업이 잘 되면 혜택을 보지만, 안 되면 손해를 볼 수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기본적으로 노동자들은 회사의 지분을 갖고 싶어 하고 오너처럼 느끼고 싶어 합니다. 장기적으로 이익 공유제는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어요.
한국의 노사문제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아직 공개적으로 의견을 말할 단계는 아닙니다. 한국의 노조와 기업에 대해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에요. 현재 김선웅 위스콘신 밀워키대 교수, 최경수 KDI 선임연구위원과 함께 한국 노사문제에 대한 공동 저술을 준비하고 있어요. 10월쯤 결과물이 나올 겁니다. 거기에 제 나름의 제안을 담으려고 해요. 그게 얼마나 현실 가능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노력을 계속해야 합니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주제이기 때문이죠.
리처드 프리먼 교수는…
1943년 미국 뉴욕 주 뉴버그 출생. 64년 다트머스대 졸업. 69년 하버드대 경제학 박사. 예일대 경제학과 조교수. 시카고대 경제학과 조교수.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현). 하버드대 로스쿨 노동·직업생활 프로그램 소장. 전미경제조사국 노동연구 책임자. 영국 런던정경대(LSE) 경제효율센터 노동시장 특별 연구원.
'무한경쟁 > 경영경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카리스마적 리더십 이론 (0) | 2010.09.12 |
---|---|
리더십의 행동주의 이론 (0) | 2010.09.12 |
신규사업 사업성 검토 방법론 (0) | 2010.07.07 |
컨설팅 절차 (0) | 2010.07.07 |
경영 해결사’ 컨설턴트가 뜬다 (0) | 2010.07.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