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 확산의 원리를 다룬 <티핑 포인트> 등의 저술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언론인이자 경영 컨설턴트 말콤 글래드웰이 시사평론지 <뉴요커>에 글을 올렸다. 제목은 ‘사소한 혁명’, 부제는 ‘왜 혁명이 트윗되지 않는가’, 그리고 해당 기사의 논지는 “‘약한 연결’(weak tie)를 중심으로 한 소셜 미디어의 세계는 1960년대 인종차별 등의 문제를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한 시민운동과 같은 사회 변화를 불러 일으키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근거는 ‘중대한’ 변화는 ‘강한 연결’(strong tie)이 일으키기 때문이다.
1960년 미국에서 시작된 흑백 분리 문제를 중심으로 한 인종 차별에 대한 저항 운동의 발단은 그 해 2월 1일이었다. 네 명의 흑인 청년들이 흑인을 고객으로 대우하지 않는다며 무단으로 상점 테이블을 점유하고 시위하기 시작했다. 하루 하루가 지나면서 시위에 동참하고 지지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늘어나 어느 순간 기하 급수적이 됐다.
재미있는 것은 이 운동을 초기에 주도한 네 명의 흑인 청년, 데이비드 레이몬드, 프랭클린 맥케인, 이젤 블레어, 그리고 조셉 맥네일이 서로 아는 사이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기숙사 친구 등의 관계로 끈끈하게 묶여있는 사이였다. 스탠포드 대학의 사회학자 도 맥아담은 시민 운동에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배경에는 그들의 ‘이념’이 아니라 ‘관계’가 문제가 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이를 인용해 글래드웰은 네 선구자들의 ‘끈끈한 관계’ 혹은 네트워크 이론에 따르면 ‘강한 연결’이 변화의 발원이라고 해석했다.
이같은 해석에 따르면, 친구가 친구를 소개하고, 친구의 친구가 친구를 이어주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세계는 혁명의 무대가 되기에는 너무 취약한 기반이다. 네 친구가 목숨까지 위협할 수 있었던 인종갈등에 함께 맞섰던 것처럼, 트위터나 페이스북이 극심한 사회 변화에 맞서 싸울 수 있는 동력을 제공할 수 있을까? 트위터 친구, 소위 ‘트친’에게서 그처럼 함께 목숨이라도 나눌 수 있는 끈끈함이 있을 수 있을까? 그 것이 글래드웰이 갖는 ‘중대한’ 의문이다.
이에 대해 ‘테크소셜로지’(techsociology)라는 유명 블로그를 운영하는 메릴랜드 대학의 사회학자 제이넵 터프키가 글래드웰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글래드웰이 자신의 주장의 이론적 배경으로 삼은 마크 그라노버터의 <약한 연결의 힘>(The Strenth of Weak Ties)이라는 논문을 잘못이해했다고 지적했다. 그라노버터의 논문에서 ‘약한 연결’과 ‘강한 연결’은 상호 대치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 것은 상보적인 존재다. 약한 연결은 강한 연결로 묶인 그룹들을 서로 다시 묶어줌으로써, 아이디어가 확산될 수 있는 유용한 루트가 되기 때문이다.
또한, ‘약한 연결’과 ‘강한 연결’은 항상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다. 약한 연결이 강한 연결이 될 수 있고, 다시 강한 연결이 약한 연결이 될 수가 있다. 그래서 글래드웰이 주장한 것처럼 강한 연결이 사회 변화의 핵심이라고 한다면, 그 강한 연결이 등장하는 발원지는 가족, 교회, 국가 등 전통적 강한 연결 집단의 힘이 약해진 지금, 소셜 미디어의 세계일 수도 있다.
그리고 현재 우리의 당면 과제는 ‘기후 변화’ 등을 비롯해 상호 연결된 세계 시민의 힘이 그 해결책으로서 필요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그 힘이 일어날 수 있는 바탕은 어디이겠는가? 1960년 2월 미국의 인종문제 해결에 한 획을 그은 4인의 지역 친구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 것은 전세계 시민들의 하나로 소통된 채널에서 가능할 것이고, 그 소통 채널이 인터넷이고 소셜 미디어다.
글래드웰과 터프키의 의견 중 누구의 말이 옳은 것일까? 소셜 미디어는 과연 중대한 사회적 변화를 촉발할 수 있을까?
먼저, 글래드웰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시계를 좀 더 과거로 돌려서, 1517년 독일로 돌아가자. 당시 교황청의 면죄부 판매에 반대하여 95개조 반박문을 써서 종교 개혁을 주장하던 마르틴 루터가 당대의 ‘소셜 미디어’인 ‘인쇄술’없이 그 일을 성사시킬 수 있었을까? 그리고 반대로, ‘강한 연결’의 힘이 그렇게 중대하다면, 존 위클리프와 얀 후스를 비롯한 루터 이전의 숱한 종교 개혁가들은, 왜 실패해야만 했었나? 인쇄술을 배제한 종교개혁은 상상하기 어렵다. 글래드웰은 ‘미디어’가 곧 ‘시대의 한 성격’을 정의하는 힘에 대해서 간과했다.
글래드웰의 주장에 대해서는 터프키가 이미 면밀한 반박을 했으므로 더 이상의 지적은 생략하고, 이제 터프키의 주장을 살피보면, 그녀의 주장의 한계는 ‘이론적인 논의’에 치중했다는 것이다. 예컨대, 현실적인 문제로 돌아가서,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수 권위주의 국가들에게 ‘소셜 미디어’가 미치는 힘은 무엇인가?
2009년 이란에서 부정 선거에 대한 반발로 시민운동이 일어났을 때, 정부의 언론 검열에 맞서 상호 소통을 위해 트위터가 열렬히 활용됐다. 그래서 이란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그들이 비폭력 투쟁시 자신들을 구분하기 위해 사용했던 녹색을 따서 ‘그린 혁명’이라 부르기도 하고, 트위터가 주요한 도구가 되었다고 해서 ‘트위터 혁명’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정말 트위터는 이 혁명에 중대한 공헌을 했을까? 당시 트위터에는 이란 부정 선거에 대한 트윗이 올라와 타임라인을 장식했던 것이 사실이다. 미국 정부에서도 이를 이란에 민주화를 일으킬 주요한 기회로 보고 이례적으로 트위터의 정기 점검을 일시 지연하도록 요청했고, 트위터가 이를 승락한 바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란인들이 쓰는 언어는 당시 타임라인의 이란 선거에 대한 주요 언어였던 ‘영어’가 아니라 ‘파르시’(????)다. 이 단편적인 예만 봐도, 외부에서 이 ‘트위터 혁명’에 걸었던 기대의 ‘크기’와 실제 ‘영향’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트위터가 이란 사태를 ‘외부’로 알리는 데는 큰 역할을 했지만, 정부의 검열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내부’의 규합을 위해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는 지는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사태에 얽힌 ‘워싱톤과 실리콘 밸리의 밀월 관계’의 맹점을 파고들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이 ’트위터 혁명’ 이후 이란 정부의 인터넷 검열을 피해 트위터를 쓸 수 있게 해줬다고 해서 영웅이 된 것이 ‘헤이스택’(Haystack)이라는 인터넷 검열 우회 소프트웨어(circumvention technology) 개발 회사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같은 온라인 게임을 탐미하다가 이란의 인권 위협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고, 인터넷의 정보 흐름을 통제하려는 움직임에 저항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를 개발했다는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20대 창립자 오스틴 힘은 일시에 세계 언론의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정보 자유화의 덫’에 대해 끓임없이 경계의 목소리를 높여왔던, 미국 외교지 <포린 폴러시>(Foreign Policy)의 기고자 에브게니 모로조프는, 기존 검열 우회 기술 개발을 뛰어넘는다는 헤이스택의 성과가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했다. 헤이스택은 ‘인터넷에 자유’를 준다는 소프트웨어를 USB에 담아 이란에 밀반입한 다음 이란에 디지털을 통한 시민 운동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는 데, 공식적으로 그 기술의 성과는 검증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미 국무부는 무역제재 조치를 넘어 이 소프트웨어의 이란 수출을 이례적으로 공식 허가한 바 있다.
이 투명성 부족에 불만을 느낀 모로조프는 그의 관련 분야 인맥을 이용해 ‘헤이스택’이 언론에 의해 부풀려졌으며, 기존 기술에 비해 우월성을 갖고 있는 소프트웨어가 아님을 밝혀냈다. 최근에는 헤이스택의 안정성 문제 때문에 이란내 헤이스택 이용자들에게 해당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말라고 요청한 상태다. 힐러리가 국무부 장관으로 취임한 이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 민주화를 이끌어 보겠다는 미국의 ‘21세기 외교’(The 21st Century Statecraft)는 또 하나의 ‘벌거숭이 임금님 사건’으로 그 1장 1막의 결론을 지었다.
민주화 운동에 대한 탄압을 일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기적의 소프트웨어 같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데 왜 헤이스택 같은 사건이 발생할 수 있었을까? 거기에는 ‘정보 자유화’(the freedom of information)라는 새로운 외교 상품을 수출해보려는 워싱톤과 실리콘밸리의 합작이 있다.
지난 2010년 9월 26일, 구글은 헝가리에서 ‘인터넷 검열’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높였다. 이 자리에서 구글은 특히 ‘중국’을 지목하며 검열을 반대했다. 왜 구글은 인터넷을 검열하는 40개 국가중에 굳이 중국을 지목했을까. 당시 기조 연설을 맡았던 드러먼드 수석부사장은 발표 전인 2010년 9월 21일 <뉴욕타임즈>에 기고문을 썼는 데, 그 글에서 그는 ‘인터넷 검열’이 ‘불공정 무역’이라는 입장을 전했다. 그 입장을 ‘굳이 중국’이라는 이유와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WTO에 가입해 무역의 공정성을 준수할 의무가 있는 중국과 구글과의 관계를 생각해볼 수 있다. 2006년에 중국에 진입했다가 인터넷 검열에 대한 피해를 구실로 결국 퇴진한 그 구글과 중국과의 관계말이다.
그리고 최근 국무부에서 정책 기획을 담당하던 제어드 코헨이 구글의 ‘구글 아이디어스’라는 씽크탱크로 옮긴 사실도 허투로 들리지 않는다. 물론, 정관학계가 인재를 서로 공유하는 미국적 인사 시스템에서 그 같은 인적 교류는 일상적이다. 그러나 모로조프가 지적한 것처럼 그 것이 엔론 같은 에너지 회사와 워싱톤 정부 간에 인적 교류가 있을 때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처럼, 경계와 감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은 문제다. 그들이 다시 ‘이례적으로’ 조용히 가까워지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서로 가까워지는 것은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일까? ‘정보 민주화’를 통해 ‘더 나은 세계’를 만들자는 말씀은 훌륭하다. 그러나 구글, 트위터 같은 기업이 중국과 같은 거대한 신흥 시장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해 관계를 따져봐야 한다. 미국과 중국의 세계 패권 경쟁, 이란 같은 핵보유 국가에 대한 미국의 경계 의도도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 그렇게 보면 ‘정보 자유화’(the freedom of information)라는 명분도 거룩하게만 만은 들리지 않는다.
이렇게 실리콘밸리와 워싱턴의 밀월관계의 ‘위험성’을 따지는 것은 앞서 ‘정보 민주화’의 명분 속에 진행됐던 ‘헤이스택’이 준 중요한 교훈 때문이다. 거룩한 명분 뒤의 명백한 실리 앞에서 그 ‘정보 자유화의 덫’에 따라 무심코 ‘헤이스택’을 썼던 이란 내 시민운동가들, 그 장기판 위의 말들이 처했던, 처할 수 있었던 위기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역으로 ‘소셜 미디어’가 그 곳에 ‘혁명’을 일으킨다면, 그 것은 그 누구보다도 바로 ‘그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들이 만약 이 ‘소셜 미디어 덕분에’ 더 위험할 수 있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제 막연한 믿음이 아니라 냉철한 전략일 것이다.
위 논쟁에 대한 결론은 이것이다. 소셜 미디어에 의한 사회 변화를 이야기한다 할 지라도, 그 것이 ‘누구에 의한’을 넘어서, ‘누구를 위한 변화’인 지에 대한 의문과 문제 의식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한 연결과 강한 연결에 대한 논쟁만으로는 부족하다.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가 만든 새로운 세상, 그 디지털의 세계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세상의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먼저 정부와 기업, 기존 산업 사회의 영향력 있는 행위자들이 어떻게 이 디지털 세상에 관계하고 있는 지,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어떻게 그 세상의 변화를 주도하고 있는 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앞으로 일어날 사회 변화가 있다면, 그 것이 ‘소셜 미디어’의 힘이든 혹은 무엇이든 우리가 ‘믿는’ 변화가 아니라, 이미 일어나고 있는 변화, 그 원인의 ’필연적’ 결과일 것이기에.
'무한경쟁 > 뉴미디어' 카테고리의 다른 글
SKT "플랫폼 사업자로 무한 변신" (0) | 2010.10.26 |
---|---|
누구를 위한 디지털 혁명인가 (0) | 2010.10.18 |
2050년 미래는 어떤 세상? (0) | 2010.10.16 |
OTT 서비스란? (0) | 2010.10.13 |
10년내 `이백(eBag)`시대 온다 (0) | 2010.10.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