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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울트라 2005. 9. 19. 00:35
한국 전통미의 현대적 해석, '향기속으로'
글로벌 미술대전 대상 수상 엄옥경 화가 초대전을 다녀와서

 

이경미 기자 icechoux@issuei.com

 

“나름대로 어린 시절부터 한국적인 물건들, 아름다움을 보며 자랐어요. 그런데 서양 물감으로 서양식 그림을 그리다 보니 정체성에 혼란이 왔죠. 나는 한국인인데, 내 그림은 어떤 빛깔을 가지고 있는가, 과연 이것이 내 그림인가"

   
자그마한 체구에 꼭 맞는, 자그마한 얼굴을 가진 화가 엄옥경씨. 시종 진지하게 작품을 설명하는 그에게서 오랜 시간 내면 깊숙한 곳의 한국적 정체성을 찾아 헤맨 고집스러움이 묻어났다.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대해 “내 속 깊은 곳에 흐르는 한국, 한국인을 찾아 내려가면서 발견한 것들”이라고 말했다.

그의 그림이 전시된 곳은 인사동 거리에 있는 갤러리이다. 스타벅스 마저도 ‘STARBUCKS'대신 한글 ‘스타벅스’를 간판에 써 넣은 곳. 이것은 하나의 힘겨루기였다.  제 아무리 잘나가는 외국 커피 전문점이라 해도 인사동에서 만큼은 자신만의 것을 고수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문화의 혼합, 하이브리드(hybrid)는 엄 씨 작품의 주요 특징 중 하나이기도 하다. 엄 씨는 ‘STARBUCKS'를 ‘스타벅스’로 바꾼, '한국 미술의 인사동'이라 불릴만하다.

한국의 민화에 드러나는 오색 창연한 화려함과 유려함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류 미술계는 근대화 이후 서양 미술 사조의 흐름에 포섭돼왔다.

그러나 엄 씨는 이러한 흐름 속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을 거부한다. 서양 물감이 입혀진 화폭에는 어느 새 연꽃과 꼬까신, 화관, 산조아쟁 같은 전통 악기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것은 언제나 한국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한국인 화가'의 시선 끝에서 구현된 것이다.

전통적 향기 속으로

그는 그동안 꾸준히 한국의 동양적 전통미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 왔다.‘과거 오늘 그리고 미래를 잇는 숨결’, ‘전통적 향기 속으로’ 등 그가 가진 전시회의 타이틀은 이러한 특징을 잘 보여준다.

‘전통적 향기속으로’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된 이번 작품들 역시 자수, 민화문양 등 민족의 생활, 사살, 문화로 자리잡은 상징적 표현양식과 발복의 기원을 담고 있다.

전시실 입구에서 가장 먼저 인사하는 것은 고개를 새초롬히 내민 연꽃 그림들이다. 모두 네 점의 연꽃 그림이 자리하고 있는데, 같은 듯 하면서도 다시 보면 모두 다른 형상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연밥은 5천년을 간다고 하죠. 수천년이 된 씨앗도 물 속에서 발아하면 싹을 틔우는 질긴 생명력을 가진 꽃이예요. 그러한 생명력이, 비스듬하기도 하고 눕기도 하고 하늘을 보고 있기도 하고 각기 재미있는 표정을 하고 있어요. 제가 연꽃을 그리는 이유입니다”
연꽃의 생명력은 그의 또 다른 그림에서도 상징화된다. 몽환적인 노란 빛 속에 단정한 선이 경건해 보이는 오리모양 토기. 화폭 한켠에 자리한 등잔이 명상적인 느낌을 더해주는 가운데, 오리의 발 아래 연꽃 세 줄기가 정갈하게 놓여있다.

   
▲ “발굴되는 고대 무덤들을 보면 유난히 새를 상징화한 부장품이 많아요. 이것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자유로 여겨 온 조상들의 죽음에 대한 신앙적 기원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연밥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는 영원성을 보여주죠”
그가 대표작으로 꼽는 연꽃 그림은 가로폭이 무려 324.5cm에 이른다. 물가에 연꽃이 흐드러진 가운데 두 쌍의 새들이 다정하다.

화면 앞쪽의 연꽃들이 작고 보드랍고 유연하게 빛나고 있다면 화면 뒤쪽의 연꽃들은 큼지막하고 묵직하다. 서양식 ‘원근법’에는 맞지 않지만 어두운 자줏빛 연꽃들은 결코 튀지도, 그림을 짓누르지도 않고 든든하게 제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의 그림은 배경이라고 해서 결코 소홀히 되지 않는다. 화면 어느 구석도 낭비되지 않고 주제에 맞는 형상이나 문양들이 붓 혹은 스탬프 기법으로 정교하게 채워져 있다. 엄 씨의 그림에서는 배경이 단순히 주제를 부각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또 하나의 주제, 혹은 부제로서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기도 하다.

정교함과 화려함으로 시선을 빼앗는 화관. 언뜻 보면 화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바탕이 연하게 채색된 것 같지만, 이것은 사실 과거 궁중 여인들이 입던 당의이다. 엄 씨는 이 당의를 결코 배경으로만 놔두지 않는다. 곱게 금박을 입히고, 화관 아래쪽으로 눈을 돌리면 당의 또한 ‘주인공’임을 눈치 챌 수 있다.

   
▲ “우리 여인들의 전통 옷은 정숙미를 보여줍니다. 그 위에 자리한 화관은 대례 등에서 성장을 한 여성의 고귀함을 나타내고요”

아래 그림의 원앙 한 쌍이 자리한 곳도 푸른 물이 아니라 왕이 입던 푸른 흉배 위다. 엄밀히 말하면, 흉배에 쓰였던 고전적인 문양 주위로 엄 씨가 고안한 문양들이 배치돼 있다.

   
고전적인 아름다움과 현대적인 아름다움의 조화는 ‘민화 시리즈’에서도 드러난다. 최근 민화 전시회가 개최되면서 민화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는데, 그의 작품도 그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민화 중에 화조도 라는 게 있죠. 주로 내실에서 여인들의 방을 장식했던. 화목과 부귀, 번영을 상징하는 이미지들을 차용한 것입니다. 배경의 문양들은 직접 고안, 배치했습니다”
이처럼 반복되는 문양들은 일견 정적(靜的)으로 보이는 그림들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박천남 미술비평가는 그에 대해 “지난 경험과 기억들을 병렬적으로 되새기는 반추행위와 어느 한 부분도 소홀함이 없이 화면에 가해지는 적극적인 호흡”이라고 표현했다.

고요하고도 섬세한, 때로 집요하기까지 한 호흡

엄 씨의 작품은 그렇게 호흡한다. 그 호흡은 작가에게서 작품으로, 작품에게서 관객에게로 전해진다. 그러나 빠르게 굴러가는 현대 사회의 가쁜 호흡으로는 작품 하나 하나가 가지고 있는 숨결을 음미할 수 없다.

배겟모에 놓인 자수 하나도 스쳐 보내지 않는 고요하고도 섬세한 호흡. 문양과 문양, 형상과 형상이 씨줄 날줄로 얽혀 때로 집요하게까지 느껴지는 그 호흡을 따라가려면 우리도 걸음의 속도를 늦추어야만 한다.

다녀오고 나서 : 엄옥경 화가는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대학원을 졸업하고 대한민국 글로벌 미술대전을 비롯한 각종 미술대전에서 수상하였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갤러리 수용화 초대전으로 9월 7일부터 일주일간 진행된 것으로 이미 마감하였습니다. 독자들은 그의 그림의 호흡만큼이나 진득하고 진지하게 다음 전시회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입력 : 2005년 09월 14일 17:59:30 / 수정 : 2005년 09월 14일 18:4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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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내마음의 캔버스-그림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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