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2-1883
프랑스 파리인상주의 화가
사법관인 아버지의 권유로법률 공부를 하다가 화가가 되기로 결심하여 토마스 쿠트르의 화실에서 공부하며 루브르 박물관에 드나들며 벨라스케스 고야와 같은 에스파냐 화가들의 작품에 매료되었다. 1863년 낙선 전람회를 계기로 파리 화단의 문제아로 등장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남겼던 화가로는 벨라스케스 리베라 고야 등이 있다. 또한 그의 밝고 눈부신 톤의 회화는 당시 대중에게는 당돌한 자극이었으나 새로운 시대로 향하는 젊은 세대의 예술가들에겐 너무나 매력적인 것이었고 그를 중심으로 모여든 젊은 화가들에 의해 인상파가 탄생되었다. 그는 죽기전 해에 대규모의 개인전을 가졌으며 처음에는 격렬한 비방을 받던 '올랭피아'가 1890년 루브르에 정식으로 수장하게 되었다.
대표작 : 피리부는 소년, 막시밀리안 황제 처형,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 웨이트레스, 풀밭에서의 식사
이하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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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누아르나 마네나 역시 인상파 그림들은 재미없긴한데, 마네 그림에서 어떤 눈여겨 볼 점이 있다면 독특한 색감과 작가정신이다.
19세기 후반에 일어났던 한 사건을 다룬 이 작품은 후일 마네가 전해들은 이야기를 토대로 그린 것이다. 소재를 제공한 로슈포르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프랑스에서 활동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나폴레옹의 제 2제정을 반대했던 로슈포르는 파리 코뮌 시기에 코뮌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872년 누벨 칼레도니아로 유배되었다. 그는 투옥된 지 2년이 지난 1874년 섬을 탈출하였다. 이후 스위스에 숨어 지내던 로슈포르는 1880년에 사면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 작품의 소재가 실재 사건을 토대로 한 것은 틀림없지만, 사건에 대한 정확한 정보나 혹은 암시적인 비판, 시사성을 찾을 수 없다. 이는 마네가 한 정치인의 극적인 일화에 어떠한 중요성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극적인 탈출을 감행한 로슈포르가 누구인지, 함께 탈출을 돕고 있는 인물들은 누구인지, 그러한 것들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물결치는 파도가 화폭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로 그림의 주된 모티프는 탈출자가 아니라 일렁이는 파도이다. 바다를 강조함으로써 작은 배는 더욱 위태롭게 부각되어서 탈출자의 고독이 강조되고 있다. 모든 인상주의자들에게 있어 바다는 가장 중요한 묘사 대상이었다. 모네가 네덜란드 출신의 화가 종킨트로부터 처음 그림을 배운 것도 바로 프랑스 북부의 해안이었다. 19세기 후반, 바다는 단순한 자연 공간이 아니라 해수욕 붐과도 관련된 현대적이고 도시적인 삶이 이루어지던 공간이기도 했다. 인상주의자들에게 바다는 눈부신 빛의 공간이자 동시에 해수욕이나 해변 산책을 할 수 있는 여가를 즐기는 도시 공간이기도 했다. 1880년대 초에 그려진 마네의 그림은 인상주의의 터치가 눈에 띠긴 하지만 그림의 분위기에 있어서는 인상주의와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마네의 바다는 좌절된 꿈의 공간이었다. 어린 시절 선원이 되기 위해 두 번이나 시험에 응했지만 실패했고 그 사이 견습 선원으로 일을 하기도 했던 마네에게 바다는 남다른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바다가 인상주의자들의 바다보다 어둡고 해변의 사람들도 우울한 분위기를 띄고 있는 것은 아마도 이러한 연유인지도 모른다.
만취한 여인.1877
마네는 만취한 이 여인을 처절하리만큼 외로운 상으로 부각시키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나타내 보였다. 마네는 당시의 파리 시민들의 생활상을 그리기 위해 카페, 비어홀 등에 자주 출입했고, 이 술집에서 창녀, 취녀, 취남, 무희, 악사, 여종업원 등을 그렸으며, 시대감정을 나타내는 이러한 걸작들 중에서도 이 작품은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파리의 상류층 사회의 퇴페풍조를 전하는 작품으로, 속옷바람의 육욕적인 여인이 거울 앞에 서서 루즈를 바르고 있다. 긴 의자에는 야회복 차림의 중년신사가 화장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여인의 생명력이 응축된 튀어나온 엉덩이와 이 엉덩이를 탐욕스럽게 바라보는 사나이와의 대조가 해학적이다.
마네는 1873년 살롱전에 <비어 홀>을 출품해, 네덜란드 화풍을 제대로 옮긴 작품이라 하여 보수적인 평론가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비어 홀>은 조각가 에밀 벨로의 초상화로서, 1872년 네덜란드에서 본 프란스 할스의 <술고래>에 대한 마네의 경애심을 담고 있었다. <해변에서> 역시 그림 속의 모래알에서 찾아볼 수 있듯이, 할스의 예술적 감각에 대한 정취를 감지할 수 있다.
마네의 풍경화는 풍경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언제나 거기에 인물을 배치하고 있다. 으젠느 부댕이나 모네가 그린 해변과 비교해 볼 때, 마네의 <해변에서>는 화면 대부분을 인물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 작품은 1873년 7월 마네가 가족과 함께 베르크쉬르메르에서 3주간 체류하는 동안 그린 그림으로, 해변에서 책을 읽고 있는 부인 쉬잔과 남동생 유진을 담고 있다. 수평선은 그림의 윗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하늘을 배경으로 선박의 닻이 드문드문 점을 그리고 있다. 마네는 모래와 하늘뿐인 회색빛 세계에 붉은 선을 가미하면서, 북해의 해변을 밝은 분위기로 바꿔 놓고 있다.
한때 선원이 되려고 했던 마네는 견습 선원의 자격으로 브라질 등지로 나가는 외항선을 타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마네는 자신이 동경하였던 바다와 항구를 소재로 삼았다. 마네는 1869년 여름, 불로뉴 항에 머물면서 이 그림을 그렸는데, 항구의 한 호텔 방에서 창문을 통해 밤 풍경을 직접 그렸다. 밤에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대상의 세부가 어둠 속에 묻히기 때문에 모험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네는 빛과 어두움에 대한 시각적인 탐구를 위하여 이러한 모험을 주저하지 않았다. 마네가 달밤에 포착하고자 한 것은 형태나 양감, 원근법이 아닌 달빛이 자아내는 효과였다. 만월이 비추는 부둣가는 밤이 깊지 않은 새벽녘이나 저녁 무렵처럼 밝게 빛나고 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싸여 있는 선박들과 인물들, 그리고 달빛을 환하게 받은 지면, 음영의 대조가 강렬하기까지 하다. 과감하게 생략된 데생과 어두운 색과 밝은 색의 분명한 대조, 그 결과 그림은 평면적으로, 미완성된 듯한 분위기를 띠고 있다. 이러한 특징들은 과거 미술과의 단절을 뜻하는 것이다. 종래의 화가들이 중간 색조를 꼼꼼하게 단계별로 칠하면서 명암을 표현하고, 3차원적인 형태감을 중시하였던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회화 기법이다. 순간적인 빛의 효과를 포착하는 데 초점을 둔 이 그림은 모네의 <해돋이, 인상>에 앞서 빛과 자연 대상을 진지하게 탐구한 작품이다. 두 작품은 항구와 배, 빛이라는 모티프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느낌을 잡아내고자 한 시도 등을 함께 공유하고 있다. 제1회 인상주의전이 1874년에 열렸던 것을 생각할 때, 1869년에 그려진 이 작품은 인상주의의 선구적인 작품으로 볼 수 있다.
머리에 꽃장식을 하고 양산을 든 여인이 마네의 부인이고, 그 옆이 부인의 음악친구이며 인상파 화가인 베르뜨 모리조, 남자는 화가인 기르메, 어둠속에 있는 소년은 아들로 전해진 레옹 코에라이다. 작품속의 네 사람의 시선이 각각 다른 방향을 보고, 표정도 다르며, 대화조차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구도이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이 기이한 작품이라고 생각한 그림이다.
인상파를 엄격히 규정하는 사람들은 마네를 인상파의 범주에서 제외한다. 틀림없이 그는 모네, 피사로, 스실레 등과 같이 빛의 변화에 열중하지도 않았고 인상파 전람회에 출품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인상파의 발상을 볼때 마네없이는 그 탕생도 발전도 생각할 수 없다. 즉 1863년의 <풀밭 위의 점심>이나<올랭피아>에 나타난 저 시원하고 신선하게 밝은 색의 빛남과 그대까지의 명암법의 발염을 버리고 뚜렷하게 색을 대비시킨 선명함은 인상파 탄생의 직접적인 원천이 되었다. 어느날 저녁, 파리의 거리를 걷고 있던 마네는 어느 카페에서 나오는 거리의 여가수를 보았다. 이 순간의 예술적 가능을 포착한 마네는 그녀를 좇아가 모델이 되어 줄것을 청했으나 완강히 거절당해, 마네는 모델인 빅토리느 물랭을 같은 포즈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 예술은 가장 평범한 제재도 자기의 객좐적 태도로부터 탄생딘다는 신념 속이 이룩된 이 초기의 걸작은 당시 강력하게 지배하던 아카데믹한 인습과 살롱을 풍미하던 취미에 대한 그의 명료한 반항기도 하다.
만년의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시끄러운 술집의 구석 카운터 앞인, 그림의 중앙에 우울한 표정의 젊은 여인이 서 있다. 전경은 클로즈업된 젊은 여인이 차지하고 있지만 그 옆에는 뒷모습을 보이는 여인이 있는데, 이 여인은 중앙의여인과 표리의 관계로 이어지는 것이 재미있다. 또한 그 옆에는 실크 해트를 쓴 남자의 얼굴이 구석의 공간을 메우고 있는데 이 세사람의 인물 배치가 교묘하게 연쇄되면서 그 앞에 나란히 놓인 술병과 함께 전경을 충실하게 메우고 있다. 이 전경에 대응된 배경엔 많은 인물들이 깊숙한 곳까지 연이어지고 있다. 잘 살펴보면 중경의 남녀와 배경의 작은 인물들이 실은 거울에 비친 인물군임을 알 수 있다. 우울에 젖은 여급과 서로 공유하기를 허용치 않은 배경의 화려함과 날카로운 대조를 이루는 이 작품은 마네 특유의 근대적이고도 도회적인 감각을 고도로 표현하고 있다.
마네의 회화 발전상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작품이다. 1863년 살롱전에서 낙선된 전 작품을 모아 전시한 [낙선자 전]에 전시되어, 비난과 조소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의 전통적 회화의 비전에 익숙해진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충격이었고 신기풍이었다. 생활의 한 정경에 나체를 들고 나온 주제의 대담성이 자극이었을 뿐 아니라 그늘에서 빛으로의 이행 부분을 없애고, 밝은 표현(나부의 살갗)이나 어두운 표현(남성의 복장)도 그 자체의 색체에 의해 평면적으로 포착, 그 색채를 극심하게 대비시키고 있다. 이른바 [인상파]가 탄생되는 계기를 만든 이 작품은 나체 여성에 남성을 배치한 구상은 지오르지오네<전원에서의 연주>를 따랐고 인물의 포즈와 배치는 라파엘로의 데생에 의해 마르칸토니오 라이몬디가 만든 동판화 <파리의 심판>을 따른 것이었다. 마네는 그림에서 상징적인 내용을 걸러 버렸기 때문에 작품이 발표된 당시에는 회화의 이 작품과의 관계를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1865년, 마네는 스페인 여행을 했다. 이 작품은 거기서 주제를 얻은 몇 안되는 작품의 하나다. 마네의 스페인에 대한 열의는 일찌기 스페인의 회화, 특히 벨라스케스에게 매료되면서 부터 비롯되었다. 이 그림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고야가 그린 투우에 이미 친수해 있었던 듯싶다. 마네는 고야의 모티프를 받아들였지만 그 극적인 정념을 잃고 있었다. 일체의 감정을 배제하고 단지 빛과 그림자 만으로 승부를 거는 듯하다. 여기에서 보는 것은 극적인 형상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전체적인 추상적 접근이다. 투우장에 펼쳐지는 생과사의 투쟁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한 저 고야의 세계<시골 투우>와는 거리가 있는 그림이 아닐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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