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천재 화가, 모딜리아니.
잘생긴(?) 외모와 짧고도 드라마틱한 삶으로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그리고 인구에 회자되는 가슴아픈 사랑으로
그 유명세에 신비로움을 더하게 합니다.
고흐가 2천점이 넘는 그림을 남겼지만
생전에 단 석 점밖에 그림을 못팔았다던가(그것도 동생 테오가 몰래 사주었다지요)
하는 식의 안타깝고 슬픈 이야기들이
모딜리아니 주변에도 만개합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모딜리아니는
22세에 파리로 건너와 화가로 성공하고 싶어 했습니다.
유대인임을 평생 자랑스러워 했다고 전해집니다.
하지만 가슴에 내재된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하고 좌절되면서
평생을 방황하고 고단하게 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허약했던 몸과
스스로 만족할 수 없었던 작품에 대한 열망들,
많은 파리파 화가들이 겪어야 했던,
뼈가 시릴만큼 지독한 가난.
모딜리아니가 파리로 처음 왔을 때는
아틀리에 안에 피아노를 놓을 정도로 그도 여유가 있었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가난했던 피카소에게 돈을 빌려주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후에 엄청난 부자가 된 피카소는
모딜리아니에게 그 돈을 정확히 갚았다고 합니다.
모딜리아니는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지만
끊임없는 방황을 했고 반항적이었고,
자존심이 강해서 누구 말도 잘 들어먹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결국 자신의 이름을 파리의 화랑가에 쉽게 올리지 못했습니다.
심지어 조각을 하기 위해 돌을 훔쳐야만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물론 건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욕심처럼 조각을 할 수 없기도 했습니다.
조각... 그것은 그림보다 더 노가다거든요. ^^
어떻든 모딜리아니는 너무도 허약했고,
지독히 외로워 보이는 큰 눈때문에
여자들에게 인기가 짱이었다고 합니다. ^^
그를 보기만 해도
많은 여자들이 모성본능을 일으켰다고 전해지니까요.
그에게는 모델이 되고 싶다며
스스로 찾아오는 여자들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를 사랑하는 여자들도 많았다고 합니다.
다른 남자화가들이 부러워할 일이었겠지요. ^^
하지만 그는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주지 않았습니다.
소심하고, 내성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신 그는 술과 마약에 빠졌고, 냉소적이었고,
성격도 몹시 괴팍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그에게도 봄날이 찾아왔습니다.
33세의 모딜리아니가 자신보다 14세나 어린 잔느를 만나고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을 처음 만난 것입니다.
하지만 둘은 오래 할 운명이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사랑은 대체로 마가 끼기 마련이지요.
1920년 겨울
36세의 모딜리아니는 사랑하는 아내 앞에서 피를 토하며
얼음장 같은 방바닥에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렇게 순식간에 세상과 결별을 해버렸습니다.
죽은 시체에 오래도록 키스를 했다는 그의 아내 잔느.
사람들이 겨우 끌어냈을 정도라고 합니다.
결국 모딜리아니가 죽은 그 다음날
그의 아내는 임신 9개월의 몸으로
뱃속의 아이와 함께 아파트 6층에서 뛰어내려
그의 뒤를 따르게 됩니다.
"죽어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줄게요."
너무도 유명한 스토리이지요.
모딜리아니는 평생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을 뿐입니다.
그것도 그의 나체화가 미풍양속에 저해된다는
경찰관들의 지시에 따라 금방 철수해야만 했습니다.
즉 한 번의 개인전도 옳게 열어보지 못했다는 소리입니다.
결국 그의 그림도
많은 유명화가들처럼 살아있을 때는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고, 오히려 이름조차 미미했습니다.
그러나 특유의 긴 목선과 눈동자가 없는 독특한 초상화로
그는 죽은 후 많은 이들의 눈을 새롭게 고정시켰습니다.
고독했던 그의 삶이 반영된듯한 그의 작품 속 인물들,
음울하고 한없이 슬픈,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코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선과 색,
단순하지만 우아한 형태들은
그림을 사랑하는 많은 이들에게
독특함을 불러 일으키고 있습니다.
[두상 (1912)]
모딜리아니는 조각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건강때문에 조각까지 할 수 없었기에
유명한 조각가 브랑쿠시와의 교류를 통해
어느정도 대리 만족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작품에서도 침착하고도 우아한 브랑쿠시 스타일과
모딜리아니 특유의 선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 피카소의 초상 (1915) ]
모딜리아니 특유의 양식이 보여지지는 않지만
이 그림을 보면 피카소에 대한 그의 생각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눈동자를 잘 그리지 않는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피카소에게 짙은 눈동자가 끼워져 있습니다.
피카소는 우리보다 언제나 2년이 앞선다며 그의 천재성을 숭배하였던
모딜리아니는 파리시절 초기 가난하고 괴팍한 그를 만나
훗날까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한 몇 안되는 친구였습니다.
반면 피카소는 그의 그림을 그리 인정해 주진 않았다고 합니다.
화상을 움직일 줄 알았던 천재화가 피카소는
친구들의 죽음을 차례로 보면서
외로워하다 92세까지 살았던 반면,
돈과 명예에 관심이 없었던 모딜리아니는
친구들이 한참 인생에 뛰어들어 세상 속에 머물러 살 무렵인
36세에 폐결핵으로 피를 토하며 세상을 떠났습니다.
극명한 대비입니다.
[큰 모자를 쓴 쟌느 에뷔테른느 (1917)]
잔느를 만난 지 얼마 안되어 사랑에 빠진 그가 그린,
연인에 대한 애정이 충만한 작품입니다.
당시 잔느는 그림을 배우기 시작한 학생이었고,
화장조차 하지 않았던 순수하고 청순한 소녀였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방황에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고,
죽은 남편을 뒤따라 자살함으로 해서
자신의 사랑을 보여준 여인이기도 했습니다.
죽음으로 사랑을 증명하다......
개인의 가치관이지만 임신중이었다는 사실앞에선
무책임하기 그지없는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가 없으면
내 자신도, 아이도 필요없는 것이었을까요?
그것만이 사랑이라면,
사랑이 늘 함께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하지만 함께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사랑은 치명적인 상처일 뿐입니다.
[푸른 옷의 소녀 (1918)]
유난히 어린아이를 좋아했던 모딜리아니는
아이들의 초상화를 많이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잔느가 아이를 출산하기 전에 그린 것으로
곧 태어날 자신의 딸에 대한
소망을 담아 그린 것으로 전해집니다.
여느 아이와 같지 않게 차분하게 가라앉은 소녀를 통해
조용하고 순종적인 아내 잔느의 모습이 보입니다.
[남 프랑스의 풍경 (1919)]
"풍경화,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말을 하면서
평생 인물화만 그렸던 모딜리아니는
생전에 단 넉점의 풍경화를 남겼습니다.
모딜리아니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대부분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던 그의 눈에 하늘과 나무가 들어오기 시작한 건
악화된 건강 때문에 시작한 남프랑스 여행에서 였습니다.
심플한, 더없이 외로운 풍경이지만
집 뒤로 보이는
바다와 하늘, 해안으로 통하는 길과
한 채의 집, 가운데 나무는 힘이 있습니다.
세잔느 스타일의 간소한 그의 풍경화에서
인간이 아닌 자연을 보며 느꼈던
그의 새로운 감흥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가 진작에 인간이 아닌 풍경에 눈을 돌렸다면
정신세계가 좀 더 여유롭고 윤택해졌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정은 다 필요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린애를 안고 있는 여자 (1919)]
집시를 주인공으로 그린 이 작품을 보면
영원한 보헤미안이 되고 싶어했던
모딜리아니의 절실한 소망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림 속 주인공의 슬픈 눈을 보면서
모딜리아니는 동질감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화면 전체에 흐르고 있는 녹색 안에
사람을 긴장시키는 듯한 붉은 색이 인상적입니다.
[자화상(1919)]
“ 죽음의 미소를 띤 부드러움은
영원 속에서 파스칼이나 나폴레옹의 그것과 흡사하다. ”
모딜리아니의 모습을 극찬한 어느 철학가의 말입니다.
잔느의 보살핌 속에서 그렸다는
모딜리아니의 마지막 작품입니다.
"나는 나를 향해 마주보고 있는
살아 있는 인간을 봐야만 일을 할 수 있다"
이런 말을 하면서 모딜리아니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습니다.
당근 아주 귀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폐결핵 때문에 몹시 파리해진 얼굴이지만
귀족적인 면모를 볼 수 있으며
그림을 그리는 그의 자세와 표정이
평화롭고 안정되어 보입니다.
[노랑 스웨터의 쟌느 (1919)]
아내인 잔느가
딸 잔느(그는 딸에게 어머니의 이름을 물려주었죠)를
임신하고 있을 때 그린 것입니다.
엄격한 카톨릭 집안에서 자란 그녀가
가난한 유대인 화가와 결혼하겠다고 했을 때
겪어야 했던 정신적 고통을 뒤로 하고,
작품 속의 그녀는 사랑으로 충만해 보입니다.
이 때가 그들에게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일 것입니다.
[에뷔테른느 부인의 초상 (1919)]
그가 그린 잔느의 많은 초상화 가운데 하나로
가장 유명한 작품입니다.
백색과 청색의 과감하고도 가벼운 대비가
잔느로 인해 한층 밝아진 자신의 마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다소 어른스럽게 보이는 작품 속 잔느의 모습에서는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그녀의 성숙함이 엿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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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화가
1884년 7월12일 리보르노생
1920년 1월 24일 파리에서 죽다
이제 곧 영광을 차지하려는 순간에
죽음이 그를 데려가다...
쟌느 에뷔테른느
1889년 4월 6일생
1920년 1월 25일 파리에서 죽다.
모든 것을
모딜리아니에게 바친 헌신적인 반려...
파리 시내의 (벨 라시즈) 공동묘지에 있는
모딜리아니와 쟌느의 묘비 글입니다
모딜리아니의 관심은 인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은 누드를 남기기도 했지요.
여자의 누드를 많이 그렸다는 것은,
그가 그만큼 근원적인 외로움에 시달렸다는 뜻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아무리 사랑해도 내가 너일 수 없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도
결국 혼자일 수 밖에 없는 것들에 대해
그리고 이별이란 단어가 찾아올 수 밖에 없는
안타까움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성주간을 맞아
그리고 봄비가 촉촉히 내리는 오늘
"죽어서도 당신의 아내가 되어줄께요"라는
잔느의 마지막 말이 가슴에 여운을 남깁니다.
난 그분의 죽음앞에서
과연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까 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