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기 교회는 사람들에게 종교적 교의를 알기 쉽게 설명하기 위하여 그림을 사용했다.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맹자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날 상황은 정반대가 되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그림은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암호가 되었고, 반대로 글자는 누구나 알 수 있는 전달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수수께끼같은 그림과의 직접적인 대화는 포기하고,
미술 전문가의 말과 글을 통해 간접적으로 그 내용을 설명받는 것으로 위안을 삼고 있는 실정이다.
왜 과거에는 사람들에게 쉽게 읽혀졌던 그림들이 지금에 와서는 이해하기 곤란한 암호가 되었을까?
오늘날 사람들은 모두 그림의 문맹자들이기 때문인가?
(사실 현대미술은 일반인들뿐 아니라 그것을 전문으로 다루는 미술평론가나 미술사가들에게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왜 오늘날 사람들은 그림과의 직접적인 커뮤니케이션을 포기해버렸을까?
이러한 물음들에 대한 가장 설득력 있는 대답은 아마 현대미술이 화면에서
사람이나 동물, 식물 등과 같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이미지)을 없애버려,
화면에는 사람들이 '읽을거리'가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대답일 것이다.
현대미술은 몬드리안이나 잭슨 폴록의 그림와 같이 주변의 대상들을 있는 그대로 화면에 그리는 일을 포기하고,
선이나 색과 같은 순수 조형요소로서 화면을 구축하거나 작가의 주관적 감성을 표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 결과 작가가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현대미술은 화가가 만든 공식을 풀 줄 아는 사람들만의 지적 유희로 전락하기에 이른 것이다.
과거부터 화가들은 현실세계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동물, 식물, 그리고 각종 사물의 모습을
화면에 재현하여 그것들로서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표현하곤 했었다.
그려진 대상이 현실 속의 대상을 닮으면 닮을수록 사람들은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화면에서 구체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이미지가 해체 혹은 폐기됨으로 해서
사람들은 화면에서 아무것도 읽어내지 못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작품과 관객간의 커뮤니케이션은 단절되고 말았다.
하나의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끊임없이 그 속에서 '무엇' 인가를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이해하고자 한다.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그렸는가(내용)?' '왜 그렸는가(동기)?'를 아는 일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그런데 현대미술에는 놀랍게도 사람들이 그토록 찾고자 열망하는 그 '무엇'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엇이 없다니? 일반인들에게는 좀 의아하게 들리겠지만, 여기서 무엇이 없다는 말은
그림 속에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읽을거리, 즉 내용이 없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그림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결국 그림과의 대화를 진행할 '얘깃거리'를 찾고자 함인데
몬드리안이나 잭슨 폴록의 작품 속에서는 아무것도 찾을 수가 없다.
무엇인가를 찾아보려고 무척 애는 쓰지만, 결국 사람들이 찾아낼 수 있는 것은
혼란스럽게 흐트러진 색이나 선 또는 잘 정열되어 있는 색면과 같은 순수 조형요소들 뿐이다.
(물론 각자의 체험에 따라 다르겠지만…) 사람들이 그림에서 더 이상 찾을 것이 없다는 사실은
한편으로 대화가 거기에서 끝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더 이상 대화를 전개할 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그림에 대하여 더 알기를 원한다면 '격렬한 몸짓'이니 '순수 조형요소의 아름다움'이니
'내면의 세계로부터의 울림' 이니 하는
소위 전문가들의 알아듣기 곤란한 추상적 언어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한 말에 동의 안하는 것은 보는 사람의 자유겠지만…) 그림에서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거나
설령 알아볼 수 있다고 해도 도무지 해독이 되지 않을 때,
사람들은 자괴감으로 움츠러들거나 심하면 분노를 일으키게 된다.
(아마 이러한 경험은 현대미술을 접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겪게 되는 일들일 것이다.)
사람들이 현대미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커다란 이유 중의 하나는
현대미술이 목적하는 바를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미술이 걸어온 길은 이미지를 통한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에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과학과 같이 그림을 하나의 공식으로 만들고자 함에 있었다.
현대 미술가들에게 그림은 주변의 이야기를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언어와 같은 조형문법 체계의 구축이나
캔버스라는 물질과 물감이라는 물질의 상호 작용을 실험하는 장소로서 만들기를 원했다.
근대 과학의 요소환원주의에 강하게 영향을 받은 현대미술은 그림도 과학에 편입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림을 화학적 세계관에 입각하여 물질로서 철저히 분석, 실험하였다.
그들은 화면에 그려진 나무나 동물을 실제 물이 아니라 물감이라는 물질로 그려진 허상(虛像)에 불과할 뿐이라고 생각하고
급기야 그 허상을 화면에서 추방시켜버린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구체적인 사물의 모습을 통하여
그림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무엇' 에 관한 것인데,
그동안 현대미술이 치중해 온 것은 그림을 '어떻게’그리는가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관심의 차이가 오늘날 관객과 작품의 커뮤니케이션을 단절시킨 중요한 원인이었다.
<도서출판, 재원. 저자:박우찬, '머리로 보는 그림. 가슴으로 느끼는 그림'책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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