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노재현]
경기도 분당에 사는 주부 이혜자(53)씨는 "요즘 너무너무 행복해요"라고 말했다.
그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마니프 아트페어에 초대받은 화가 중
한 명이다. 24일 이씨의 전시작 '속삭임'이 낯모르는 미술 애호가에게 300만원에 팔려나갔다.
20호(약 73×60㎝) 크기의 '속삭임'은 엉겅퀴와 나팔꽃이 어우러진 그림이다.
큰불이 났던 낙산사를 지난여름 찾았다가 불탄 자리에 새로 피어나 군락을 이룬 꽃무리에 감동받아 붓을 들었다. 그는 "돈보다도 내 그림이 인정받았다는 게 정말 기쁘다"며 감격을 감추지 못했다.
이혜자씨는 전북 군산에서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서울로 유학 간 오빠가 방학 때 초등학생이던 이씨에게 비단구두 아닌 크레파스를 선물했다.
시골에선 '에노구(繪の具.그림물감)'만큼이나 구하기 힘든 물건이었다.
어른들이 "참 잘 그리는구나"라고 칭찬해 준 덕분에 세상에서 제일 그림 잘 그리는 아이인 줄 알았다.
중.고교 미술반에서 활동하며 상도 많이 탔다.
그러나 결혼하면서 그림과 점차 멀어졌다. 1990년대 중반 외아들이 대학에 진학할 무렵,
이씨는 남편에게 "이제 내가 해줄 일은 다했다"고 선언했다.
화가 한 분을 은사로 모시고 본격적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
10년 노력 끝에 2004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요즘은 이씨가 전시회 준비에 몰두할 때는 남편과 아들이 밥 짓고 빨래도 해준다.
인사동 '아줌마 군단'이 뜨고 있다.
이들을 주 고객으로 삼는 화랑들도 성업 중이다. 아마추어 주부화가들의 내공은 천차만별이다.
이씨처럼 프로급 실력을 인정받는 경우는 소수다.
그래서 아줌마 군단을 대하는 시각도 여러 갈래다.
대학에서 그림을 전공하고 졸업 후에도 작품활동 외길을 걷는 화가들은 대개 비판적이거나
착잡한 눈으로 바라본다.
인사동에서 개인전 한 번 열려면 1000만원은 든다. 1주일 대관료 300만원, 전시 도록 제작비 200만~300만원, 액자.재료비 300만원에 다과비나 운송비도 필요하다.
인기 작가나 교사.교수를 겸직하는 화가는 그래도 낫다. 무명 전업작가는 전시회 비용에 등골이 빠진다. 그래도 젊음과 오기로 몇 차례 개인전을 치르며 버티다 30대 중반쯤 되면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심각한 갈등에 부닥친다. 대조적으로, 30대 중반 이후 새로 붓을 잡은 주부화가 중 경제력까지 갖춘 일부는 2000만원짜리 전시회도 마다하지 않는다. 덕분에 전시장이나 도록 제작업체, 액자상, 사진촬영가까지 인사동 일대에 두루 기름기가 돌게 된다. 어떤 미술잡지는 이들 새내기 화가들을 미사여구로 포장한 특집기사나 특집부록을 내주고 반대급부를 챙기기도 한다.
'아줌마'라는 조금 토속적인 단어를 동원해서 미안하지만, 필자는 아마추어 주부화가를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입장이다. 한 미술평론가는 필자에게 직설적으로 농담을 던졌다. "바람 피우는 것보단 낫지 않나요?"
주부화가 양성 통로는 대학 부설 평생교육원부터 사설 미술관, 화랑의 미술강좌, 언론사 문화센터,
개인 스튜디오까지 다양하다. 이혜자씨가 초대받은 마니프 아트페어는 자체 검증절차를 거친 작가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경우다. 유명 화랑이 개설한 미술강좌에서 몇 년간 강의해 본 중견화가 S씨는 주부 화가지망생에 대해 "오랫동안 가정에 묶여 자기 표현을 못 하고 살아온 그분들의 늦깎이 열정은 정말 아름답다"고 말했다. 자신이 출강하는 미대 학생들에게 "아줌마들의 눈부신 열정을 오히려 너희들이 배워야 한다"고 일갈했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실력은 달리지 않을까. S씨는 "실력보다는 '내가 이 나이에 과연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용기 부족이 더 문제"라며 "용기를 북돋워주는 게 강의의 첫째 목표였다"고 말했다.
그렇다. 주부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너무너무 행복하다'고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예술적 성취도는 그 다음 일이다. 요즘 그림시장에 '개미 컬렉터'들이 뜨는 마당에 '개미 화가'라고 주눅 들 이유가 없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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