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전시소식

배수관 조각전

영원한 울트라 2006. 12. 17. 20:05

제3회 배수관조각전

'내재된 생명의 세상풍경'

 

생명-쌀, 황등석, 동봉, 200(h)x200x300mm, 2006

 

 

2006년 12월 15일(금) ~ 12월 21일(목)

대안공간 갤러리 눈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북수동 232-3 보시동 3길 15 T.031-244-4519

 

 

생명-알, 황등석, 스테인레스 스틸봉, 200(h)x200x300mm, 2006

 

조각이 공간과 만나는 유기적 상상력

김성호(미술평론가)

배수관은 이번 전시에서 7점의 조각품을 선보인다. 쌀, 검정콩, 강남콩, 땅콩, 콩깍지, 그리고 두개의 알. 모두 확대된 씨앗이나 알의 형상이다. 화강석으로 비교적 거칠게 마감된 이들 조각의 표면을 매끄러운 스테인리스 스틸 봉이나 동(銅)봉이 마치 잎맥의 모습처럼 감싸 안고 있다. 돌과 금속이라는 두 매질이 대별하는 자연과 인공이 하나의 작품 안에서 만나고 있는 것이다. 조각품들은 솜이 수북이 쌓인 전시장 바닥 위에 듬성듬성 자리를 잡고 놓여 있거나 천장위에 매달려 있기도 하다.

배수관에게 있어 이번 전시는 무엇보다 조각적 완결체로서 실재 환경 속에 잠입하는 것을 시도하던 그간의 ‘설치적 조각’으로부터 조각 자체가 만들어진 인공 환경의 일부로 개입하길 시도하는 ‘조각적 설치’로 변모하는 지점이 된다. 표면상으로는 조각으로부터 설치로 방점을 옮긴 셈이다. 주목할 만한 또 하나의 지점이 있다면 외형상 2회 개인전 당시의 입방체적 미니멀(cubic minimal) 형식과는 또 다른 차원의 구(球)형의 미니멀(global minimal)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일 게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적 변모에 대한 기술 자체는 피상적일 수 있다. 배수관의 전 작업 시기 동안 둘의 대비되는 형식은 더러는 한쪽이 주도하는 형태로 더러는 혼재된 양상으로 부단히 모색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전시를 꼼꼼히 읽어내기 위해서는 둘의 대비되는 형식이 그 동안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살피는 일이 병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생명-알2, 황등석, 스테인레스 스틸봉, 210(h)x200x300mm, 2006

조각이 대면하는 환경

환경 디자인, 공간 설계 분야에 대한 이론과 실천을 조각 언어와 조합해 온 그 동안의 작가의 이력을 상기해볼 때, 단연코 그의 화두는 조각과 환경이다. 그의 조각이 오픈 에어로 뛰쳐나가 '장소 특정적 미술'(Site specific art)의 유형을 시도하거나 화이트 큐브에 들어와 '구조적 미니멀리즘'(structural minimalism)에 근간한 ‘건축적 미니멀 아트’(constructional minimal art)를 다양하게 모색해 온 사실은 이러한 환경 속에 위치할 조각에 대한 고민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것이 야외에서든 실내에서든 혹은 입방체이든 구형체이든 ‘최소한의 형식’을 근거로 한 모더니티의 ‘환원성’에 집중되어 왔다는 점에서, 배수관의 조각이 점유하는 공간과 그를 둘러싼 환경은 그의 조각과 친밀히 교통하면서도 단연코 그것을 유감없이 돋보이게 한다. 거대한 장식적 모뉴먼트처럼 환경을 압도하지는 않지만, 환경과의 상관성에 고민하는 조각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그의 구축적 조각이 환경을 여전히 지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조각의 딜레마이자 한편 조각이 당위적으로 갖는 위상이다. 회화가 매체적 태생 탓에 인공환경 속에 안주하고 자연 환경과 친밀하게 조우할 수 없는 ‘따로국밥’의 세계라 한다면 조각은 3차원성이라는 본질 때문에 태생부터 자연 환경과 상호작용할 수밖에 없도록 설정된 ‘비빔밥’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조각이 자연환경을 대면하는 상황은 늘 공존, 조화, 대립, 지배와 같은 말들과 싸움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배수관의 조각이 지향하는 바가 있다면 조각이 환경을 대면하는 최소한의 불가피한 지배 양상을 극소화하고 나아가 적극적으로 상생의 방식을 모색하려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한마디로 ‘조각의 친환경적 인식에 관한 끊임없는 각성’이라 할 것이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노부오 세키네(Nobuo Sekine)의 작품 세계를 연구하는 그의 석사논문에서도 고찰되고 있듯이 “(조각적) 오브제에서 한발 더 나아가 환경과 호흡할 수 있는 시스템적 설치를 추구하는” 그 무엇으로 집중된다. 즉 오브제적 모뉴먼트(object monument)-시스템적 설치(systematic installation)로 확장되어 최종적으로는 '환경과의 합일화‘를 시도하는 인식이 그의 작품 세계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배수관의 말을 빌리면 그것은 닫혀진 ’형식‘(form)으로부터 열려진 ’체계‘(system)로 가는 것이다.

생명-검정콩, 오석, 스테인레스 스틸봉, 220(h)x230x290mm, 2006

네오미니멀리즘

2회 개인전의 작품들이 화이트 큐브에 마련되었던 것이지만 오픈 에어의 공간에서의 변형을 염두에 둔 것이었던 만큼 이들 작품에 드러난 나지막한 입방체와 계단 형상, 투과체의 공간 들은 환경으로 열려진 조각의 가능성을 실험하기 위한 조형언어였다. 일견 그의 작업이 입방체가 근간이 된다든가 반복이나 연속의 규칙들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우리가 그의 작업을 미니멀아트로 속박하려 한다면 그의 작업의 진정한 의미를 읽는데 실패하게 된다.

입방체로부터 환원(reduction)의 의미를 추출해 보거나 그 표면에 각인되거나 투과된 일련의 규칙적 무늬 그리고 이들 한 쪽 면에 자리하고 있는 3단 혹은 4단의 계단 형상처럼 ‘하나 뒤에 또 다른 하나가 뒤따르게 하는 방식(one thing after another)은 분명 미니멀 아트의 일종의 질서와 구축의 원리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쌍생아들의 무한 복제처럼 동일한 요소의 반복이나 증식이 아닌 만큼 그 본질은 탈(脫)미니멀리즘적이다. 그것은 오히려 미니멀 아트가 거부한 '관계적 구성'(relational composition)과 가깝다. 배수관의 작업이 구조적 완결성이나 환원성을 추구하기 보다는 그 구조적 원리나 특성에 주목하는 것도 그러하지만 작품의 외적 요소인 환경을 적극적으로 작품 내부로 끌어들이려 시도하는 것이나  작품을 지각하는 방식인 주체와 작품의 관계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더 ‘관계적 구성’에 근접한다.

배수관의 작업은 미니멀의 형식으로부터 출발하면서도 그로부터 미니멀리즘의 속성을 많은 부분 이탈하고 있다는 점에서 탈(脫)미니멀리즘이지만 반(反)미니멀리즘은 아니다. 미니멀의 형식은 계승하지만 그 미학을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에바 헤세 같은 작가에게 지칭되었던 포스트미니멀리즘(post minimalism)의 차원을 계승하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같은 용어도 마땅하지 않아 보인다. 배수관의 작업이 오브제적 조각을 넘어 환경과 관계를 시도하며 개념적 접근을 하고 있음에도 한편으로는 여전히 미니멀리즘이 강조했던 물질성의 차원에 강한 애착을 보이고 있는 탓이다. 오늘날 다양한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한 작가의 작업을 어떤 형식적 틀로 구속해서 살피는 것은 무용한 일이지만 ‘미니멀리즘으로 출발하지만 미니멀리즘으로 정초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점에서 필자는 네오미니멀리즘(Neo-minimalism)이라는 용어로 그의 작업을 느슨하게 묶어 본다.  

생명-강남콩, 황등석, 동봉, 220(h)x270x500mm, 2006

조각, 인간, 환경-유기적 상상(organic imagination)

그의 네오미니멀리즘 조각이 대면하는 환경 사이에 존재하는 인식은 ‘인간’이다.

주로 입방체에 근거하는 미니멀 형식을 빌려 천착했던 조각 작품들에서는 그 인간에 관한 인식이 건축적 상황으로 대별되고 유기적 구(球)형체에 근거하는 작품들로 이루어진 이번 전시에 드러나는 인간 인식은 자연으로 대별된다는 것이 큰 특징이라 할 것이다.

필자가 판단하기에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Frank Lloyd Wright)의 대표적인 작품인〈낙수장〉(falling water)이라 불리는 카프만 저택은 배수관의 입방체로부터 근거하는 건축적 작품 세계를 살펴보는데 있어 매우 유효한 모델이 된다. 라이트의 건축에서 ‘개방된 기초 평면’의 수평적 구성이 환경에 호응하는 양상은 배수관의 조각에 있어 ‘최소한의 미니멀적 구조’의 개방성이 환경에 상호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이트가 자신의 건축을 유기적(organic)이라 부르듯이 그의 ‘유기적 상상력’이 발휘하는 최대 지점은 자연환경을 배반하지 않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건축의 미니멀적 수평 구조라 할 것이다. 모더니즘이 조각에서 확증시킨 미니멀의 자기 증식 논리의 극단적 폐해가 건축에서 ‘가장 적은 수평 공간에 가장 많은 수직 공간을 확보하는 아파트’로 나타났던 것과는 달리 라이트에게나 배수관에게 있어서 미니멀리즘의 특성은 환경 친화적인 양상으로 나타난다. 라이트에게 자연 환경성과 조우하는 수평성의 철학과 유기적 상상력이 나타났다면 배수관에게 있어서는 장(field)-계단(stair)-창(window)으로 상정되는 들어가고 나감이라는 상호작용의 공간 체계와 유기적 상상력이 나타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특히 조각과 환경 사이에 놓인 인간 인식을 자연의 모습으로 상정한 이번 전시에서는 조각과 환경 사이의 조화와 일체감 그를 구현하기 위한 유기적 상상력이 출중하게 발현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설치적 조각’ 즉 조각 스스로가 감당하던 환경과의 조우는 이제 ‘조각적 설치’ 즉 여러 조각체로 흩어져 거대한 하나의 설치적 풍경을 이룸으로써 조각에 대한 환경의 문제를 암묵적으로 내포한다.

만들어진 인공 풍경이 창출하는 환경은 무엇보다 씨앗과 알의 유기적 상징성(organic symbol)으로부터 유발된다. 그러나 그의 작업에서 아이러니하게 씨앗이나 알의 정체성이라는 것이 기관(organ)이 형성되지 않은(non-organization) 생물체(organization)라는 점에 ‘유기적 상징성’이 촉발되고 있다는 지점이다. 그것은 들뢰즈 식으로 ‘주체 없는 주체’와 상징적으로 교감한다. ‘주체 아닌 주체’들이란 온전한 식물체나 동물체가 아닌 ‘그것’이라는 비정체적 개별체인 것이다. 들뢰즈의 유명한 ‘기관없는 신체’가 눈도 팔도 혀도 다리도 어떠한 기관도 행사하도록 특화되어 있거나 전제되어 있지 않는 ‘주체 아닌 주체’의 상태를 의미하듯이 알과 씨앗은 ‘기관없는 동물체, 식물체’가 된다. 기관이 미분화된 채 모든 가능태를 한 덩어리로 품고 있는 원형상으로서의 ‘주체 아닌 주체’인 것이다.

그런데 이들 알과 씨앗들을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 봉이나 황동 봉으로 용접해서 단단하게 감싸 안고 있다. 그것은 알과 씨앗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가하는 문명의 구속처럼 여겨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포기관을 퍼뜨려나가거나 신경조직을 성장시켜 기관의 분화를 꿈꾸고 있는 원형적 생물체의 역동적 움직임처럼 보이기도 한다. 마치 핏발처럼 혹은 마치 잎맥처럼 보이기도 하는 철선의 흐름은 비정형화된 방향으로 사방으로 싸여 있다. 이것은 들뢰즈의 리좀(rhizome)이라는 근경(根莖)식물, 즉 수경식물처럼 유영하며 사방으로 펼쳐지는 중심 없는 뿌리줄기를 가진 식물의 열려진 공간과 방향성을 상상케 한다.

거칠게 마감된 화강석 재질과 이에 대비되는 금속선을 함께 만나게 하면서 배수관이 창출한 알과 씨앗은 기관이 미분화된 불확정성의 ‘생명 전체’로서 관객에게 다가가 그들로 하여금 ‘이성으로서는 감히 인지할 수 없는 생명의 숭고함’에 대해 성찰케 한다.

배수관이 조각과 환경 사이에 개입하는 인간 인식이 건축이든 자연이든 친밀한 관계항으로 발전되는 이러한 유기적 상상(organic imagination)은 듬성듬성 씨앗을 뿌리듯 던져놓은 씨앗과 알의 형상을 한 조각체들 사이에 이루는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기제가 된다. 더불어 구름인지 흙인지 간파하기 어렵게 포근하고 따뜻한 풍경으로 솜들을 깔아놓는 전시장 바닥에서의 설치 전략이나 물질감을 둔화시키려는 듯 돌로 된 무거운 씨앗 조각을 전시장 천장에 가볍게 매달아두는 공간 연출은 작가의 역동적인 유기적 상상이 따뜻한 서정적 내러티브와 만나는 지점에서 실현되는 것이라 할 것이다. ■ 김성호(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