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백내장 수술과 세 번의 척추 수술이라는 커다란 진통을 겪고도 미수(米壽)의 노화백은 여전히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다. 2004년 신작을 발표한 지 2년만에 ‘춘화 드로잉’을 선보이며 또다시 화제를 뿌렸다. ‘한국의 피카소’로 불리는 서양화가 김흥수 화백.
지난달 부산 도시갤러리에서 초대전을 성황리에 마친 후 김 화백은 “(백내장 수술을 두 번이나 받아) 시력은 찌글찌글 하지만 감각은 아직도 녹슬지 않았다”고 말했다.
숱한 화제와 염문을 뿌리며 자신의 그림처럼 화려한 인생을 살아온 김흥수 화백. 하얀 턱수염, 빨간색 목티셔츠에 큼직막한 파란팬턴트 목걸이, 깃털달린 중절모는 그의 트레이드마크다. 서울 평창동 김흥수미술관에서 만난 노화백은 ‘우와∼멋쟁이’라는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했다.
팔순의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정력을 자랑한다는 ‘강한 남자’ 이야기의 전설인 그는 이제 ‘산타클로스 같은’ 인자한 모습이다.
학연에 얽히고 설킨 화단을 향해 쓴소리를 마다하지 않던 ‘폭군 화가’, ‘고함쟁이 영감’, 특정한 그림을 그리면 대통령상을 주겠다는 유혹도 뿌리친 ‘다혈질·고집불통’. 그를 따라다니던 수식어는 지팡이를 힘있게 쥐어잡은 손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
노화백은 두서너 번 크게 말해야 들리는 청력이지만 기억력은 옆에 앉아 있는 부인 장수현씨(45·김흥수미술관 관장)보다 더 정확했다.
“환쟁이는 일생동안 빌어먹어야 하는 거지같은 생활을 한다”며 화가가 되는 걸 펄펄 뛰며 반대했던 아버지에게 “미술학교를 보내주지 않으면 죽어버리겠다”고 악을쓰며 뛰쳐 나왔던 사춘기 시절부터 93년도에 한국인 최초로 러시아 에르미타쥬박물관에서 개최한 역사적인 작품전에 이르기까지 노화백은 전시회 연도와 주변인물 관람자들의 평가 등을 또렷하게 회상했다.
내년은 김화백이 77년 미국에서 ‘하모니즘 회화’를 주창한지 3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세상의 관례를 깨고 새로운 문을 열어젖힌 노화백에게 예술은 무엇일까.
“감동하라고 해서 되는 게 아니야. 절로 감동하는 것이 예술이야.”
/hyun@fnnews.com 박현주기자
※김흥수는 누구인가
1919년 함흥에서 태어난 김흥수화백은 40년 동경미술학교에 수석 입학했고 6.25 한국전쟁 중 종군화가로 일했다. 67년 미국 필라델피아대학에 초빙교수로 갔을 때 우연히 추상화와 구상화가 함께 놓인 것을 보고 '이거다' 했고 77년 추상과 구상이라는 상이한 화면을 하나로 조화시킨 '하모니즘 미술'을 개척했다. 한국화가로는 최초로 살로·또논드 정회원·서울 미대 교수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세계적인 미술관에서 수많은 초대전을 가졌다.
현재 김화백의 작품값은 호당 500만∼600만원에 거래된다. 굿모닝신한증권과 신한은행이 만든 제1호 '아트 펀드'에 김화백의 작품이 들어 있다.
■사진설명=김흥수 화백과 부인 장수현씨. 지팡이를 짚고 있는 김 화백은 의자에 앉으라는 주변의 권유를 마다하고 부인을 대신 앉혔다. 김 화백이 부인에게 "나는 당신의 의자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사진=서동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