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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모니즘 30주년 앞둔 김흥수 화백②] 부인 장수현 “그 작품 제가 지킬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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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수 화백 “죽는순간까지 노력해야”
김 화백은 아침 일찍 일어나 2종류의 신문을 일독하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린다. 힘들다고 말려도 김 화백은 “죽는순간까지 노력해야 한다”며 고집을 꺾지 않는다고 한다.
프랑스 미술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가 표현했던 현대미술의 새로운 장을 열게 된 ‘김흥수의 하모니즘’은 무엇인가.
“‘하모니즘’은 추상과 구상의 만남이다. 바탕은 동양철학이며 음과 양의 조합이다.”
93년 동양인 최초로 러시아 에르미타쥬박물관에서 초대전을 가질때 러시아 신문은 김 화백의 하모니즘을 이렇게 평가했다. “서양화가들이 행할 수 없었던 것을 한국의 김흥수 화백이 행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추상적인 작품과 구상적인 작품이 하나로 합일될 때 새로운 조형분야 예술의 조화로운 세계가 창조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또 90년 파리 뤽상부르 미술관에서 열린 김 화백의 조형주의 초대전에서 한 관람자가 남긴 방명록은 뜨금하다. “한국은 정말 운이 좋습니다. 20세기말의 그림의 천재가 있으니….”
하지만 정작 우리나라에서 하모니즘은 외로웠고 외국에서 추켜세우는 만큼 가치가 빛나지 못했다.
두 번의 결혼과 이혼. 누드화를 그리면서 43년이라는 나이 차이의 제자와 사랑에 빠진 노화백을 세상은 그의 작품보다 ‘여성 편력’의 대가로만 인식했다.
그러나 김 화백과 그의 ‘천사’ 젊은부인은 세상 앞에 당당했다. 김 화백은 “만약 내가 한사람만 아름답게 생각하고 사랑했다면 나는 화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예술과 도덕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당해도 나는 내 방식의 사랑에 충실했고 그럼으로써 더 깊이 있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 자신을 죽이고 사회적 기준에 맞춰 위장한다면 겉보기로는 성실한 사회인이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정한 예술가가 되기는 어렵다고 본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의 평생 작업 화두인 누드화와 미륵불은 전시 때마다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40년부터 그려온 시대를 앞선 누드화는 풍기풍란이라는 이유로 전시장에서 철거되기도 했지만 85년 대한적십자 창설 85주년 기념 벽화를 누드화로 제작해 또 한번 화제를 낳았다. 그의 누드화는 반항의 상징이자 평화의 표상이 됐다. 또 끊임없이 미륵부처님을 그려온 김 화백은 98년 코리안 평화미술전 오사카전 때 있었던 일화를 잊지 못했다. 눈이 거의 보이지 않는 중년 부인이 김 화백의 ‘미륵불’ 앞에서 “빛이 비치면서 미륵불이 보인다”고 말했던 것.
“베푸는 삶을 살겠다”는 노화백. 지난해엔 제주도에 작품 20여점을 기증했다. 무려 시가 100억원대다.
“새롭다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새로운 변화에 두려워 하지 말라.”
‘화단의 이단아’로 불리며 고난과 역경을 개척해온 노화백은 아직도 관람자들이 자신의 그림을 보고 “보면 볼수록 좋다”고 말할 때마다 가슴이 뛴다.
###장관장 이야기 “김화백님 그림지키기가 화두”
노화백에게 예술적 영감을 가져다 준 부인 장 관장은 ‘화백님’ 이야기에 여념이 없다. 결혼생활은 벌써 16년째다.
땅거미가 내린 뒤 손을 맞잡고 걷는 김 화백·장 관장 부부와 함께 기자는 미술관 근처 한정식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김 화백이 “그건 아니잖아”라며 면박을 줘도 연신 깔깔깔 웃는 장 관장은 “우리 화백님이 감기에 걸렸다”며 외투를 추켜세워 줬고 김 화백은 어린아이처럼 부인에게 몸을 맡겼다.
“김 화백은 나의 신이다. 그분의 그림을 지키는 게 화두”라고 말하는 장 관장. 현재 김흥수미술관 관장을 맡고 있는 부인은 그동안의 시련과 상처가 “오히려 나를 강하게 만들었다”고 전했다.
“우리는 기(氣)가 잘맞기 때문에 함께사는 거예요. 또 그림 때문에 희로애락을 극복하며 산다”는 장 관장의 모습은 무척 밝았다. 역경과 희생. 세상의 따가운 시선과 맘고생으로 우울증까지 앓았던 그늘진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힘들다, 힘들다’ 하면 나만 망가지잖아요. 내가 편해야 주변도 편해진다는 것을 알았어요. 인상이 밝아서 기분 좋아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어느새 식사를 먼저 마친 김 화백이 이야기를 하느라 음식을 못먹고 있는 부인의 앞접시에 이것 저것 올려주는 모습이 살갑다.)
“어렸을적 꿈이요? 신사임당이었어요. 얼마나 어려운지도 모르고. 앞으로는 그림도 다시 그릴거고요. 하모니즘 30주년이 되는 해인 내년 하반기엔 닫았던 미술관을 리모델링해 재개관할거고요. 9년째 운영하는 영재미술관에서 인재들도 계속 가르치고 싶어요.”
장 관장은 “김 화백님과의 만남과 역경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기자:김 화백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장 관장: 나랑 살아서 감사하게 생각 하냐고요.(귀가 어두운 김 화백에게 크게 말했다.)
김 화백:“아∼. 그러믄요. 고맙지요.
장 관장: 아이. 눈물나려고 해.
김 화백: 장수현은 오히려 학생때보다 더 이뻐졌어. 그런데. 난 몰랐는데 학생시절 처음 만났을 때 내가 그랬다는군. ‘자네는 늙어지면 더 이뻐질 얼굴’이라고. 허허∼.
맑고 정갈한 자태. 환환 미소가 감도는 장 관장의 모습은 김 화백의 작품 미륵불과 닮아 있었다.
hyun@fnnews.com박현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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