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팔의 색을 가진 마녀, 설치미술가 강리나 돌아오다
화조도(花鳥圖)와 같은 수묵화 속 달 위에 반짝이를 갈아 붙였다. 오각형 액자를 손수 제작해 동양화를 걸었다. 고귀하고 고풍스러운 동양화에 무슨 짓을 한 것이냐고 손가락질을 받기도 했고, 한 동양화 교수에게 저질이라는 평을 들으며 액자를 내리기도 했다.
하지만 2007년, 미술계는 그녀에게 ‘한국 설치미술의 중심’이라는 뜻밖의 평가를 내려줬다. 그러고보면 세상도 참 재미있다.
“반짝반짝 빛나는 걸 워낙 좋아해요. 그런 느낌 있잖아요, 바다 위에 태양빛이 쏟아져 반짝반짝 빛나는. 맑고 파란 바다색도 물론 아름답지만 햇빛에 반사되며 옥색으로 변하는 그 묘한 색체의 아름다움을 좋아해요. 그건 마치 청롱한 울림과 같죠.”
모델에서 영화배우로, 이제는 설치미술가로
90년대 한국 영화의 한켠을 누비며 범상치 않은 매력을 발산했던 영화배우 강리나가 설치미술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지난 달 28일부터 정동 갤러리에서 ‘아사달의 정원’이라는 개인전을 열고 있는 강리나. 17번째 개인 전시회다. 그곳에서 만난 강리나는 영화배우 시절의 그 독특한 매력과 동양화를 전공한 설치미술가로서의 신비로운 느낌을 한꺼번에 품어내고 있었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반인들은 설치미술가 강리나보다 영화배우 강리나를 더 친숙해 한다.
강리나는 <거꾸로 가는 여자> <웨딩드레스> <알바트로스> <증발>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고 1989년 영화 <서울무지개>에서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이며 ‘연기파 배우 강리나’로 쇄기를 박았다.
“우리집만큼 가부장적인 집도 없을 거에요. 여자가 공부는 무슨 공부에요? 얼른 시집이나 가서 애 낳고 살아야지. 대학 합격하던 날, 남들은 축하한다고 다들 고기니 뷔페니 외식하느라고 난리였는데 어머니가 집에서 자장면 한그릇 달랑 하나 시켜주시더라고요.(웃음)”
강리나는 1983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시집도 안가고 대학이나 간 주제에’ 집에다 손까지 벌릴 수는 없었다.
집에서 보리차를 끓여다가 학교에서 보리차를 팔았다. 거의 강매이긴 했지만 용돈 벌이로는 제법 솔솔한 아르바이트였다. 그렇게 있는 별의 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를 하다보니 학비에 재료비에 힘들어 죽을 것 같던 4년도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강리나는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는다.
“대학교 4학년에 올라가면서 스타일화를 배웠어요. 수업때문에 한 패션쇼에 참가하게 됐는데 그 패션쇼에서 홍대 미대를 졸업한 선배를 만나게 됐어요.”
패션쇼가 있던 그 날 강리나는 난생처음 모델로서의 삶을 제의받았다.
“돈을 준다잖아요. 재료비가 없어서 쩔쩔매던 대학시절에 모델비 30만원은 말그대로 대박이었죠.(웃음) 그렇게 선배가 다니던 청바지 회사에서 모델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야말로 로또당첨금이었던 30만원의 모델료를 받던 날, 너무 갖고 싶었던 3만원짜리 화구 공구함을 샀다.
청바지 모델에 대한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당시 금성, 코카콜라, 톰보이 등 웬만한 대기업에서는 한번씩은 화보를 찍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유명세를 타자 마침내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의까지 받게 됐다.
“맨처음 제가 찍었던 영화가 뭔줄 아세요? <우뢰메> 3탄이에요. (하하) 물론 조연이었지만 그땐 정말 영화를 찍는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영화를 찍었죠.”
이후 강리나는 <서울무지개> <웨딩드레스> <알바트로스> <증발> 등에 주연급으로 출연하며 무수한 남성팬들을 설레게 했다.
그러고보면 <우뢰메> 3탄의 ‘ET엄마’가 강리나에게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다리놓아준 셈이다.
배신, 좌절 그리고 영화배우로서의 포기
어느덧 진짜 영화배우가 됐다. 그렇다고 단 한순간도 그림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지방 촬영이나 외국 촬영이 있을 때는 항상 화구를 챙겨갔고, 호텔에 들어오면 그림을 그리고, 현장에 나가면 촬영을 했다.
빠듯한 스케줄에 지칠 때면 함께 그림을 그리고, 그룹전을 했던 친구들을 위로삼아 견뎌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들 입에서 흘러나온 ‘속세’, ‘상업영화’라는 단어는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영화를 찍으면서도 종종 함께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과 그룹전을 했어요. 하지만 그룹전이 있을때마다 언론에서는 저를 집중적으로 조명했어요. 언론 특성상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배우가 전시회를 연다’ 뭐 그런 식의……”
이후 강리나는 그룹전을 함께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했고, 끝내 모임에서 배제됐다. 집에서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작업실마저 없애버렸다. 촬영 스케줄 때문에 자주 들리지도 못하는 작업실을 굳이 놔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외로움과 괴로움, 괴리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왔어요. 위로받을 곳이 사라졌기 때문이었고, 그림과의 소통이 끊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왔죠.”
그리고 영화배우 강리나로서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그녀는 영화배우로서의 길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상처를 입혔던 친구들의 소외감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때 삶의 위로였던 그들이 지적했던 ‘상업영화’의 강리나는 오직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이었음을 이해해주지 못한 이들은 아직도 아련한 아픔으로 남는다.
그렇게 강리나는 90년대 말 거대한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화려한 조명으로 비춰지는 스크린 속의 자신과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숨쉬고 있는 자아간의 충돌이 결국 미술로의 회귀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림 없이는 못살겠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후회하지 않아요. 어차피 처음부터 제 삶은 그림이었으니까.”
연예인 자살, 그들의 신음소리에 귀기울여줘야
돌아보면 참 화려했다. 흥미로웠고, 다이나믹했다. 내 길이 아니었을 뿐이지 영화배우로서의 삶은 꽤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강리나는 연예인의 본질 자체가 늘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고, 스크린에 비춰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연예인들은 기본적으로 숨기는 것이 많아요. 그것은 연예인들이 진실 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연예인이라는 직업 특성상 보여줘야 할 부분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에요. 알고 보면 팬들 역시 그것을 원하고 있죠.”
연예인 자살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연예인 자살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은 ‘외로움’이었음을 강리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좋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 프로로서의 모습, 개성 있는 모습이외의 것을 보여주면 팬들이 실망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그것이 외로움을 부추기는 거예요. 그렇다보니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죠. 거기서 오는 심적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힘들어도 힘들다고 내색할 수 없죠. 이런 내 모습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날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일반인들처럼 똑같은 인간적 실수를 하게 돼도 남들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조명돼 보도가 되니 무의식적으로 숨기는 일이 습관이 된다는 것이다.
강리나는 그 부질없는 외로움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진심으로서의 대화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사람을 벼랑으로 몰고 가는 지 전 겪어봐서 알잖아요. 하지만 숨기지 않으면 모두가 날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은 부질없는 생각이에요. 불안함의 허상일 뿐이죠. 연예인들은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주위사람들과 충분한 대화를 하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그들이 정작 외로움에 손을 뻗을 때 외면해서는 안돼요. 모든 직업은 그만의 특성이 있는 법이니까 그 부분까지도 이해해줄 필요가 있어요.”
그의 그림 ‘투영’은 바로 그런 대화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인간의 내면과 내면의 외면으로의 표출. 수많은 대화를 통해 숨겨진 내면을 끄집어내는 작업. 그것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계속해나가야만 하는 순환적 고리다.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던지세요. 오히려 숨기려는 그 선글라스와 모자가 타인의 시선을 더욱 불러일으키거든요. 스타로서의 신비감 보다는 자신의 존재감이 우선이 되어야 해요. 강박관념을 던져버리는 것이 스타우울증을 이겨내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거에요.”
“가장 한국적인 설치미술을 하겠다”
전복의 껍질 빛깔을 좋아한다.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합색인 보라도 아니다. 이리 보면 붉은 빛을 띠고, 저리 보면 푸른빛을 띤다. 결국엔 붉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고 묘한 혼합 색을 내뿜기도 한다.
반짝거리며 수많은 색깔을 뿜어내는 전복 껍질의 빛깔은 한국 전통의 것 ‘자개’와 그 특징이 유사하다.
경기도 포천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몸 담았던 강리나는 당시 학교를 오가며 어느 한 공방을 지나다 자개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마침 자개의 장인이었던 공방 주인을 귀찮게 굴면서 자개를 다루는 법부터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배운 후 강리나는 전통공예에 자주 등장하는 자개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자개를 통한 한국적인 이미지와 서양적 기법을 접목한 그의 17번째 개인전이다.
지난 28일 정동 경향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아사달의 정원(Gardens of ASADAL)’. 아사달은 단군의 정착지로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는 강리나의 소원이 담겨있다. 이번 전시는 가장 한국적인 우리 민족의 정서와 향기를 은은하게,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냈다.
강리나는 “동양화의 소재와 감성에 서양화의 원근법 원리를 혼합했어요. 이미 사람들은 서양화 구도와 화법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에 동양적 매력을 덧붙이면 한국적인 이미지를 보다 잘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전통자개기법과 디자인의 접목이라고나 할까요?”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동양화를 전공한 강리나가 동양화를 그린 건 대학 졸업 후 이번이 처음이다. 강리나는 대학 졸업 후 줄곧 설치미술에만 전념해왔다.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를 오가며, 포크레인으로 수십 미터의 작품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보니 어느덧 어시스트들 사이에서는 그의 별명이 ‘이사’가 됐다. 어지간히 집 옮기는 ‘이사’는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수십 년 만에 동양화를 액자에 걸었네요. 한동안은 조금 더 동양화를 그릴 거예요. 앞으로도 3년 정도는 자개에 대해 더 연구해서 자개를 통한 실용예술을 만들어 낼 생각이에요. 지켜봐주세요.(웃음)”
‘동양화를 통한 설치미술’.
다소 낯선 이 문구가 어쩐지 강리나에게는 너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단백석이라고 불리는 전복의 묘한 오팔의 느낌처럼…….
김혜영 (purephoto@dreamwiz.com) 기자if(document.getElementById("news_content") && txtSize){document.getElementById("news_content").style.fontSize=txtSi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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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반짝 빛나는 걸 워낙 좋아해요. 그런 느낌 있잖아요, 바다 위에 태양빛이 쏟아져 반짝반짝 빛나는. 맑고 파란 바다색도 물론 아름답지만 햇빛에 반사되며 옥색으로 변하는 그 묘한 색체의 아름다움을 좋아해요. 그건 마치 청롱한 울림과 같죠.”
모델에서 영화배우로, 이제는 설치미술가로
90년대 한국 영화의 한켠을 누비며 범상치 않은 매력을 발산했던 영화배우 강리나가 설치미술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지난 달 28일부터 정동 갤러리에서 ‘아사달의 정원’이라는 개인전을 열고 있는 강리나. 17번째 개인 전시회다. 그곳에서 만난 강리나는 영화배우 시절의 그 독특한 매력과 동양화를 전공한 설치미술가로서의 신비로운 느낌을 한꺼번에 품어내고 있었다.
본인이 원하든 원치 않든 일반인들은 설치미술가 강리나보다 영화배우 강리나를 더 친숙해 한다.
강리나는 <거꾸로 가는 여자> <웨딩드레스> <알바트로스> <증발> 등 다수의 영화에 출연했고 1989년 영화 <서울무지개>에서 인상깊은 연기를 선보이며 ‘연기파 배우 강리나’로 쇄기를 박았다.
“우리집만큼 가부장적인 집도 없을 거에요. 여자가 공부는 무슨 공부에요? 얼른 시집이나 가서 애 낳고 살아야지. 대학 합격하던 날, 남들은 축하한다고 다들 고기니 뷔페니 외식하느라고 난리였는데 어머니가 집에서 자장면 한그릇 달랑 하나 시켜주시더라고요.(웃음)”
강리나는 1983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에 합격했다. 하지만 ‘시집도 안가고 대학이나 간 주제에’ 집에다 손까지 벌릴 수는 없었다.
집에서 보리차를 끓여다가 학교에서 보리차를 팔았다. 거의 강매이긴 했지만 용돈 벌이로는 제법 솔솔한 아르바이트였다. 그렇게 있는 별의 별 아르바이트를 하며 용돈벌이를 하다보니 학비에 재료비에 힘들어 죽을 것 같던 4년도 후딱 지나갔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 강리나는 인생 최대의 전환점을 맞는다.
“대학교 4학년에 올라가면서 스타일화를 배웠어요. 수업때문에 한 패션쇼에 참가하게 됐는데 그 패션쇼에서 홍대 미대를 졸업한 선배를 만나게 됐어요.”
패션쇼가 있던 그 날 강리나는 난생처음 모델로서의 삶을 제의받았다.
“돈을 준다잖아요. 재료비가 없어서 쩔쩔매던 대학시절에 모델비 30만원은 말그대로 대박이었죠.(웃음) 그렇게 선배가 다니던 청바지 회사에서 모델을 시작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야말로 로또당첨금이었던 30만원의 모델료를 받던 날, 너무 갖고 싶었던 3만원짜리 화구 공구함을 샀다.
청바지 모델에 대한 반응은 성공적이었다. 덕분에 당시 금성, 코카콜라, 톰보이 등 웬만한 대기업에서는 한번씩은 화보를 찍자는 제의가 들어왔고, 유명세를 타자 마침내 영화를 만들어보자는 제의까지 받게 됐다.
“맨처음 제가 찍었던 영화가 뭔줄 아세요? <우뢰메> 3탄이에요. (하하) 물론 조연이었지만 그땐 정말 영화를 찍는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영화를 찍었죠.”
이후 강리나는 <서울무지개> <웨딩드레스> <알바트로스> <증발> 등에 주연급으로 출연하며 무수한 남성팬들을 설레게 했다.
그러고보면 <우뢰메> 3탄의 ‘ET엄마’가 강리나에게 영화배우로서의 삶을 다리놓아준 셈이다.
배신, 좌절 그리고 영화배우로서의 포기
어느덧 진짜 영화배우가 됐다. 그렇다고 단 한순간도 그림을 잊어본 적은 없었다. 지방 촬영이나 외국 촬영이 있을 때는 항상 화구를 챙겨갔고, 호텔에 들어오면 그림을 그리고, 현장에 나가면 촬영을 했다.
빠듯한 스케줄에 지칠 때면 함께 그림을 그리고, 그룹전을 했던 친구들을 위로삼아 견뎌냈다. 하지만 어느 날 문득 그들 입에서 흘러나온 ‘속세’, ‘상업영화’라는 단어는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혔다.
“영화를 찍으면서도 종종 함께 그림을 그리는 친구들과 그룹전을 했어요. 하지만 그룹전이 있을때마다 언론에서는 저를 집중적으로 조명했어요. 언론 특성상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배우가 전시회를 연다’ 뭐 그런 식의……”
이후 강리나는 그룹전을 함께하던 친구들 사이에서 이른바 ‘왕따’를 당했고, 끝내 모임에서 배제됐다. 집에서는 유일한 안식처였던 작업실마저 없애버렸다. 촬영 스케줄 때문에 자주 들리지도 못하는 작업실을 굳이 놔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었다.
“외로움과 괴로움, 괴리감이 거대한 파도처럼 몰려왔어요. 위로받을 곳이 사라졌기 때문이었고, 그림과의 소통이 끊어질 것이라는 두려움이 엄습해왔죠.”
그리고 영화배우 강리나로서의 인기가 절정에 이르렀을 무렵 그녀는 영화배우로서의 길을 과감하게 포기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당시 상처를 입혔던 친구들의 소외감도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한때 삶의 위로였던 그들이 지적했던 ‘상업영화’의 강리나는 오직 스크린 속에서만 존재했을 뿐이었음을 이해해주지 못한 이들은 아직도 아련한 아픔으로 남는다.
그렇게 강리나는 90년대 말 거대한 인생의 항로를 바꿨다. 화려한 조명으로 비춰지는 스크린 속의 자신과 그림에 대한 열정 하나로 숨쉬고 있는 자아간의 충돌이 결국 미술로의 회귀를 선택하게 한 것이다.
“그림 없이는 못살겠는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후회하지 않아요. 어차피 처음부터 제 삶은 그림이었으니까.”
연예인 자살, 그들의 신음소리에 귀기울여줘야
돌아보면 참 화려했다. 흥미로웠고, 다이나믹했다. 내 길이 아니었을 뿐이지 영화배우로서의 삶은 꽤 매력적인 직업이었다.
하지만 강리나는 연예인의 본질 자체가 늘 화려하고 매력적인 것은 아니라고, 스크린에 비춰지는 모습이 전부가 아니라고 재차 강조한다.
“연예인들은 기본적으로 숨기는 것이 많아요. 그것은 연예인들이 진실 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연예인이라는 직업 특성상 보여줘야 할 부분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에요. 알고 보면 팬들 역시 그것을 원하고 있죠.”
연예인 자살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연예인 자살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그들을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은 ‘외로움’이었음을 강리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좋은 모습, 아름다운 모습, 프로로서의 모습, 개성 있는 모습이외의 것을 보여주면 팬들이 실망하게 될 것이라는 불안감, 그것이 외로움을 부추기는 거예요. 그렇다보니 기대 이상의 무언가를 찾으려고 노력하게 되죠. 거기서 오는 심적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힘들어도 힘들다고 내색할 수 없죠. 이런 내 모습에 사람들이 실망하고 떠날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렇지 않거든요.”
일반인들처럼 똑같은 인간적 실수를 하게 돼도 남들보다 수십 배 수백 배 조명돼 보도가 되니 무의식적으로 숨기는 일이 습관이 된다는 것이다.
강리나는 그 부질없는 외로움이 죽음으로까지 몰고 가지 않기 위해서는 사람과 사람사이에 진심으로서의 대화가 가장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그 외로움이 얼마나 사람을 벼랑으로 몰고 가는 지 전 겪어봐서 알잖아요. 하지만 숨기지 않으면 모두가 날 떠날 것이라는 두려움은 부질없는 생각이에요. 불안함의 허상일 뿐이죠. 연예인들은 스스로 그것을 깨닫고 주위사람들과 충분한 대화를 하는 것이 좋아요. 그리고 그들이 정작 외로움에 손을 뻗을 때 외면해서는 안돼요. 모든 직업은 그만의 특성이 있는 법이니까 그 부분까지도 이해해줄 필요가 있어요.”
그의 그림 ‘투영’은 바로 그런 대화의 의미를 생각하면서 그린 그림이다. 인간의 내면과 내면의 외면으로의 표출. 수많은 대화를 통해 숨겨진 내면을 끄집어내는 작업. 그것이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까지 계속해나가야만 하는 순환적 고리다.
“선글라스와 모자를 벗어던지세요. 오히려 숨기려는 그 선글라스와 모자가 타인의 시선을 더욱 불러일으키거든요. 스타로서의 신비감 보다는 자신의 존재감이 우선이 되어야 해요. 강박관념을 던져버리는 것이 스타우울증을 이겨내고, 연예인이라는 직업을 즐길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거에요.”
“가장 한국적인 설치미술을 하겠다”
전복의 껍질 빛깔을 좋아한다. 빨강도 아니고 파랑도 아니고 그렇다고 혼합색인 보라도 아니다. 이리 보면 붉은 빛을 띠고, 저리 보면 푸른빛을 띤다. 결국엔 붉기도 하고 푸르기도 하고 묘한 혼합 색을 내뿜기도 한다.
반짝거리며 수많은 색깔을 뿜어내는 전복 껍질의 빛깔은 한국 전통의 것 ‘자개’와 그 특징이 유사하다.
경기도 포천의 한 대학에서 교수로 몸 담았던 강리나는 당시 학교를 오가며 어느 한 공방을 지나다 자개의 아름다움에 매료됐다.
마침 자개의 장인이었던 공방 주인을 귀찮게 굴면서 자개를 다루는 법부터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꼬박 3년을 배운 후 강리나는 전통공예에 자주 등장하는 자개를 소재로 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자개를 통한 한국적인 이미지와 서양적 기법을 접목한 그의 17번째 개인전이다.
지난 28일 정동 경향갤러리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아사달의 정원(Gardens of ASADAL)’. 아사달은 단군의 정착지로 이제는 정착하고 싶다는 강리나의 소원이 담겨있다. 이번 전시는 가장 한국적인 우리 민족의 정서와 향기를 은은하게, 그러면서도 강렬하게 그려냈다.
강리나는 “동양화의 소재와 감성에 서양화의 원근법 원리를 혼합했어요. 이미 사람들은 서양화 구도와 화법에 익숙해져 있고, 그것에 동양적 매력을 덧붙이면 한국적인 이미지를 보다 잘 전달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전통자개기법과 디자인의 접목이라고나 할까요?”라고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동양화를 전공한 강리나가 동양화를 그린 건 대학 졸업 후 이번이 처음이다. 강리나는 대학 졸업 후 줄곧 설치미술에만 전념해왔다. 전국 각지는 물론 해외를 오가며, 포크레인으로 수십 미터의 작품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보니 어느덧 어시스트들 사이에서는 그의 별명이 ‘이사’가 됐다. 어지간히 집 옮기는 ‘이사’는 일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 수십 년 만에 동양화를 액자에 걸었네요. 한동안은 조금 더 동양화를 그릴 거예요. 앞으로도 3년 정도는 자개에 대해 더 연구해서 자개를 통한 실용예술을 만들어 낼 생각이에요. 지켜봐주세요.(웃음)”
‘동양화를 통한 설치미술’.
다소 낯선 이 문구가 어쩐지 강리나에게는 너무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든다. 단백석이라고 불리는 전복의 묘한 오팔의 느낌처럼…….
김혜영 (purephoto@dreamwiz.com)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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