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한 생을 사는 동안 끝없이 변화를 거듭한다.
얼굴생김새도 달라지고, 행동거지도 달라지고,
직업도 바뀌고, 때로는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다.
나서 죽을 때까지 한 순간도 가만있지 않는 것 같다.
그렇게 변화의 연속이다.
그러나 그 사람의 기본적 정서구조는 잘 바뀌지 않는다.
이런 저런 모습으로 변화하고 바뀌는 것 같지만
실은 기본적 정서구조가
이런 저런 외피를 갈아입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역사적 인물들을 보아도 그렇다.
그들이 어린 시절에 남긴 시구들,
무심코 쓴 시구에는 그들의 정서구조가 압축되어 있고
그들의 삶은 이 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이 의식하지 못했지만
운명적 예감 같은 것이 거기에 담겨있다.
2.
‘월수소조천하(月雖小照天下)’라는 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 의미인즉 ‘달은 작으나 천하를 비춘다’는 것인데
이 짤막한 시구는
천하에 이름을 떨치겠다는
비록 삼일 천하로 끝났지만
갑신개혁에 생사를 건
어린 시절의 시구가 압축하는
정서구조의 발현이라고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3. 다산
‘소산폐대산 원근지부동(小山蔽大山 遠近之不同)’이라는 10자였다.
즉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니 땅의 원근이 다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 시를 직역하면 원근에 대한 관찰력을 말해주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그러나 비유적으로 보면, 다산의 험난한 앞길을 말해주고 있다.
즉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린다는 것’은
‘소인이 대인을 가리는 것’으로 이해해도 무리가 없겠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패하고 타락한 관리들에 의해서 가리워 지게 될 운명,
후일 18년 귀양살이를 하게 될 다산 자신의 운명을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4.
진시황을 죽이러 간 자객, 형가(荊軻)에 관한 시를 지었는데
‘가을바람 불 때 역수(易水)의 장수는 주먹으로
대낮에 함양 천자의 머리를 노린다’라고 썼다.
이를 본 훈장은 그의 반역적 기질에 놀라서
집으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12세 나이에
하필이면 자객에 관한 글을 쓴 것도 그렇고
주먹으로 천자의 머리를 노린다는 구절은
농민반란군의 지도로서 마감하게 될
5. 이퇴계는 14, 5세 시절에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고 그의 사람됨을 사모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5세에 처음 4행시를 지었는데
‘ ...평생을 살아도 한 웅쿰의 산샘(山泉) 속이니
강호(江湖)의 물이 그 얼마인지를 알지 못하네‘라고 썼다.
퇴계가 10대 소년시절에 도연명을 좋아했다는 것은,
도산으로 은거한 만년의 생애와 결코 무관한 것으로 보이지 않다.
그리고 벼슬길에 오늘 때는
언제나 물러날 것을 먼저 생각했다는 것과도 무관한 것 같지 않다.
어떤 이들은, 퇴계가 도연명의 영향을 받아서
그러한 삶의 방식을 택했다고도 말하지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시가 사람을 바꾸지는 못한다.
무수한 사람들이 도연명을 읽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귀거래사’의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퇴계가
도연명의 시에 심취해서 그 영향을 받아서 그렇게 살았다기보다는
차라리 그의 기본적 정서구조 자체가 그러했기에
도연명의 시를 좋아했고 자신의 정서구조에 따라서
삶의 궤적을 가져갔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6. 위에서 보다시피,
어린 시절에 무심코 쓴 시들은
자신의 기본적 정서구조를 압축하고 있다.
또 은연중 자신의 운명에 대한 예감을 담고 있기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기본적 정서구조라는 것은
불교적인 용어로는 ‘식(識)’이다.
달리 말하면 인식과 행동방식의 사이클이랄까 메카니즘을
내장하고 있는 식(識)이다.
유교적 용어로는 물격(物格), 인격(人格)이라고 할 때의 격(格)이다.
‘식(識)’이란 것은 그렇게 잘 바뀌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종자(種子)라는 개념을 쓴다.
우리가 운명(運命)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렇다.
그 기본적 구조가 불변적인 것이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기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밝힐 자료가 없는 것이 유감이지만,
한 사람의 기본적 정서구조가 결정되는 것,
보다 구체적으로 세상과 사람을 향한 관계방식의 결정구조,
삶의 방식에 대한 결단구조,
그것의 기원은 "한생각"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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