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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를 읽다

영원한 울트라 2007. 9. 27. 13:12

                                 장자를 읽다



1. 살아있는 혼돈을 보존하라


현암사에서 나온 안동림 역주의 810페이지 '장자'를 훑어읽었다. 지하철의 짬짬독서로 근 한달에 걸쳐 듬성듬성 읽은 것이 실한 책읽기였을 리 없다. 다만 그 맛을 잠깐 봤을 뿐이다. 장자는 비유의 창고이며 생각의 오솔길이며 논리의 광장이다. 호쾌한 상상력이 펼쳐지다가 이죽거리는 변설이 이어지다가 담미(淡味)의 인생관이 담긴다. 내편을 지나 외편,잡편으로 가면서 장자가 지은 것이 아닌 후대의 가필과 첨화(添話)인 듯한 내용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이 불세출의 고전이 지니는 맛이나 격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그런 관점의 층위들과 역사적 목리(木理) 자국이 이 책을 빛나게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장자'를 꿰뚫는 무엇을 한 마디로 말하긴 어렵지만 그래도 말하라면, '살아있는 혼돈을 있는 그대로 보존하라'는 취지로 요약할 수 있을까. 살아있는 혼돈이라. 그 혼돈을 바로잡기 위한 인위가 세상을 악화시키고 어지럽혀 왔다고 그는 주장한다. 장자에게선 공자 컴플렉스같은 게 느껴진다. 책 곳곳에서 공자를 조롱하고 공자의 사상과 인생관을 비난한다. 공자가 예찬해온 요임금과 순임금은 장자에겐 백성을 불행에 빠뜨린 임금으로 지목된다. 왜 그런가? 어짐(仁)과 의리(義), 예절(禮)과 음악(樂)의 형식을 만들어 백성을 다스림으로써 욕망이 생기게 하고 다툼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한다. 원시 상태의 무욕과 자족을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장자가 철저하게 공자를 비난하는 태도를 견지한 것은, 춘추시대의 사상가들이 벌였던 이론투쟁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자신의 철학과 견해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당대의 중심적인 사유체계로 자리잡아가고 있던 인의예지의 철학을(장자는 공자보다 150년 뒤의 사람이며, 맹자와는 거의 동시대 사람이다. 장자의 생몰연대는 BC 370년-300년경)격렬하게 비판할 필요가 있었으리라. 일종의 선명성 경쟁이기도 하다.


장자의 철학은 노자에 빚진 바 많다. 이 책 곳곳에서는 도덕경의 귀절들이 변주를 이루며 나타난다. 그는 도가도 비상도(道可道 非常道)라는 개념을 언급한다. 도는 도일 수 있지만 언제나 '도'인 것은 아니다. 도라는 이름은 도라는 이름일 수는 있지만 언제나 같은 '도'라는 이름일 수는 없다. '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운 것은 잠정적이고 상황적인 약속이거나 명목일 뿐, 도의 실질은 아니다는 이 관점으로, 진정한 것은 언어로 표현되거나 설명될 수 없다는 점을 자주 강조한다.(예를 들면 제물론의 대도불칭(大道不稱):참된 도는 이름으로 나타낼 수가 없다.) 공자가 때로 그토록 언어에 대해 혐오감을 보였듯이, 장자 또한 말로써 시비를 일삼는 것이 인류 재앙의 시작이었다고까지 단언한다. 당대에 유행하던 소피스트적인 이론들을 그는 일일이 예거하며 비판한다.


장자는 출세를 권유하는 철학인 공자의 인의론을 문제 삼는다. 반복해서,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도망치고 자살해버리는 기이한 예화를 들려준다. 그건 그냥 무욕이 아니라, 어떤 강박관념에 가깝다. 가난한 야인의 자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저토록 격렬한 방법으로 권력과 부를 무용지물로 설명하려 했던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당대의 많은 지식세일즈맨들이 꿈꾸던 무엇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들은 황제나 제후에게 발탁이 되어 자신의 이론의 정치에 실현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다. 공자도 그것에 목말라하지 않았던가. 장자는 그런 지식인들의 속내에 묻어있는 욕망을 저런 방법으로 비웃고 비판하려 했던 건 아닐까. 천하를 물려주겠다고 말하는데, 에이 재수없어,라고 강물에 투신해버리는 과도한 염결성은, 출세와 발탁 만을 목표로 이론과 변설을 무장하고 다듬던 당시의 지식 풍토에 대해 일대 반격을 가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으리라.


장자는 월든 숲에서 살아간 헨리 데이빗 소로나 스콧 니어링의 '소박한 삶'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장자는 산 속 깊이 숨어 도인처럼 살아가는 은둔의 삶에 대해선 삐딱한 시선을 지닌다. 거기엔 '무위'가 아니라 '무욕을 과장하는 행위'가 있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마을에서 살면서 유유자적하고 자연에 순응하는 삶을 꿈꾼다. 가난에 대한 장자의 아름다운 역설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노나라 사람 원헌의 이야기로 나오고, 하나는 장자 자신의 이야기로 나온다.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원헌을 만나러 갔다. 자공의 수레가 워낙 커서 원헌의 집 골목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말하자면 요즘의 세단이 달동네에 못올라가는 것과 같은 풍경이었으리라. 자공은 그 세단에서 나와서 달동네 계단을 올라서 원헌을 만나러 갔다. 다 찌그러져 가는 쪽방 하나에서 원헌이 나와 인사를 한다. 자공은 말한다. "허허, 선생께선 어찌 그렇게도 병들고 지쳤습니까?" 이 말에 원헌은 대답한다. "병들고 지쳤다는 건 지식인이 배운 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표현일세. 나는 다만 가난할 뿐이지 병들고 지친 게 아니네." 그러면서 자공에게 인의를 내걸고 온갖 나쁜 짓을 일삼으며 화려한 수레를 끌고 다니는 YOU야 말로 병들고 지친 자가 아니냐고 되묻는다. (제28편 양왕, 제9장) 다른 한 예화는 위왕과 장자의 이야기로 나온다. 장자가 위왕을 찾아갔는데, 장자의 행색을 보고는 위왕이 위의 자공과 똑같은 말을 한다. "선생께서는 어찌 그리도 지쳐 병든 꼴입니까?" 이 말에 장자는 대답한다. "옷이 해지고 신발에 구멍이 난 건 가난이지 지쳐 병든 게 아니오. 선비란 자가 자기 마음에 도덕을 지녔다고 하면서 그것을 실천하지 못하는 것을 지쳐 병들었다고 말하는 법이오." 이렇듯 비슷한 예화가 반복되어 나오는 걸 보면, 이 모티프가 장자 계열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마음에 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장자를 읽던 중에 후배와 대화를 나눴다. 사실 한번 읽을 만한 책이긴 하지만, 그것을 세상의 유일한 원칙으로 삼아 살기에는 좀 무리한 것들 아닐까요? 그것은 공맹의 사상에 대응하는 논리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지, 노장 만으로 세상이 굴러갈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후배의 말은 설득력이 있다. 장자는 쇠세(衰世)의 서(書)라고 부르기도 한다. 세상이 어지러워진 시대에, 무엇인가 깨달음을 주기 위한 충격 요법으로써 내놓은 책이란 뜻이다. 욕망으로 치닫는 세상, 헛된 명예욕에 사로잡힌 존재들을 향한 그의 메시지는, 소박함을 회복하고 자연스러운 첫 마음으로 돌아가란 얘기다.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자신의 '이름'이나 삶의 '명분'따위를 위해 귀한 몸을 해치지 말라고 충고한다. 물론 그렇게만 살 수야 있으랴. 구만리 창공을 나는 대붕의 뜻을 연작이 알 수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대붕만으로 구성될 순 없다. 제비와 참새까지도 함께 살아가는 세상이어야 한다면, 저 인의의 율(律)과 가치로 세상을 세우는 공맹 또한 효용이 있는 것이리라. 은둔과 소박 만이 아니라, 세상을 건설하고 질서를 회복하려는 노력 또한 필요한 것이리라. 후배의 말은 그런 점에서 울림이 있다.


제물론의 장주몽위호접(莊周夢爲胡蝶)은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다시 읽어도 아름답고 깊은 맛이 있다. 이 이야기는 시비를 일삼는 인간의 지혜에 대한 비판이 잔뜩 나온 뒤 마지막에 나오는 짧은 대목이다.


"언제인가 장주는 나비가 된 꿈을 꾸었다.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가 된 채 유쾌하게 즐기면서도 자기가 장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그러나 문득 깨어나보니 틀림없는 장주가 아닌가. 도대체 장주가 꿈에 나비가 되었던 건가. 아니면 나비의 꿈에 장주가 된 건가. 장주와 나비는 분명히 다르다. 이런 일을 일컬어 물화(物化)라 한다."


장주의 주(周)는 장자의 이름이다. 장자의 이 꿈에서 나를 매료시키는 것은, 현실에 대한 날렵한 각성이다. 지금 내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나비의 꿈 속에서 펼쳐지는 허상은 아닌가. 그게 아니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는가. 장자의 꿈 속에서 나비가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이 장자인 줄 몰랐다. 그는 자신이 나비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니 지금 내가 장자인 걸로만 아는 것은, 아직 꿈을 깨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통찰은 삶 전체에 대한 확고함을 뒤흔든다. 삶은 나비의 날개짓처럼 가볍고 부박하게 흔들리며 날아가버린다. 꿈과 현실은 넘나든다. 분명히 다른 두 몸인 장자와 나비는, 서로 거리낌없이 넘나든다. 장자는 왜 이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분명히 다른 껍질로 존재하는 나비와 장자가 결국 명쾌하게 구분지어지는 것이 아니고, 나비의 삶과 장자의 삶이 명료하게 나눠지는 것이 아닌 것을 보여줌으로써, 세상 만물에 대한 피상적인 분별과 차이에 대한 시시비비가 부질없고 쓸모없는 지식임을 일깨우려 한 것일까. 사실, 그런 의도를 굳이 달지 않더라도 이 예화는 오랜 생각과 잔상을 남긴다. 그리고 묻게 한다. 지금 나의 삶이 나의 삶인가, 누군가의 꿈 속에서 내가 되어 살고있는 삶인가.


그저께 술을 먹다가 한 동료와 우리의 일인 편집에 대해 얘기를 했다. 편집에도 고수가 있고, 진정한 고수는 어떤 상황, 어떤 기사와 지면을 만나도 자연스럽고 느낌있게 풀어내는 솜씨가 아닐까 하는 얘기가 나왔다. 이 얘기 끝에 나는 장자 양생주에 나오는 소잡는 백정, 포정을 말했다. 문혜군은 포정이 소잡는 모양을 보고 감탄한다. 당시엔 소를 잡는 기술이 중요한 것이었나 보다. 뼈와 살을 발라내는 것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그 소리와 동작이 음악과 춤처럼 감미로왔던 모양이다. 그래서 문혜군은 묻는다. 어떻게 그런 기술을 익혔습니까? 그 말에 포정은 대답한다. 처음에 소를 잡을 때는 소만 눈에 보였습니다. 3년이 지나자 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음으로 소를 대하니 눈의 작용이 멎고 정신의 작용만 남습니다. 자연스러움을 따라 소가죽과 고기, 살과 뼈 사이의 커다란 틈새로 칼을 댑니다. 그 틈새는 현실적으로는 아주 작지만 마음의 눈으로 보는 것은 크고 널찍하여 칼을 대는데 실수를 하지 않습니다. 일류 소잡이가 1년 만에 칼을 바꾸는 건 살을 가르기 때문이고 초보 소잡이가 한달 만에 칼을 바꾸는 건 뼈를 가르기 때문입니다. 제 칼은 19년이나 되었지만 칼날은 방금 숫돌에 간 것 같습니다. 뼈마디에는 틈새가 있고 칼날에는 두께가 없습니다. 두께 없는 것을 틈새에 넣으니 널찍하여 안에서도 칼날이 움직입니다. 하지만 근육과 뼈가 엉긴 곳에 이를 때면 어려움을 깨닫고 두려움을 지니며 신중하게 칼을 움직입니다. 이런 포정의 말을 듣고 문혜군은 양생(養生)의 도를 깨달았다고 말한다. 생을 기름. 포정의 칼이 19년 동안 조금도 무디어지지 않은 것은, 소를 잡은 게 아니라, 소의 틈새를 심안(心眼)으로 찾아내 그 사이로 다녔기 때문이었다. 편집 또한 포정의 칼처럼 거칠고 서투른 움직임을 지나, 유연하고 기민한 정신적인 행위로 나아가야 한다는 얘기다. 그게 편집 고수가 아니겠는가.



2. 애유소망(愛有所亡), 사랑에는 끝이 있다



오늘 장자를 읽다가 출처가 늘 궁금했던 '애유소망'이란 글귀를 발견했다. 얼마나 반가웠던지...후후. 장자 제4편 인간세(人間世)에 나오는 귀절이었다.


말을 사랑하는 자는 광주리로 똥을 받고 대합조개 그릇으로 오줌을 받아 담는다. 어쩌다 모기나 등에가 말에 붙어 있다고 갑자기 말을 치면 말은 놀라서 재갈을 물어 뜯고 목이며 가슴을 치고받아 부숴버린다. 사랑하는 마음이 극진하다 하더라도 그 사랑은 끝이 나기 마련이다. 어찌 삼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장자 시절에 말이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낯선 동물이 아니고 삶의 동지같은 존재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말을 애지중지하는 사람이, 똥과 오줌을 광주리와 그릇으로 받아내는 모양은 요즘의 애견 풍속도와 닮아 있어 실소를 금치 못한다. 하지만 말이 사람의 깊은 애정을 알 리 있겠는가. 자기를 위해 모기와 등에를 잡아주려는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마구 내친다. 의유소지(意有所至)라도 애유소망(愛有所亡)이나니. 장자가 말한 애유소망은 말과 사람 사이의 몰이해로 예를 들었지만, 실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사랑이란 일방적인 짐작과 착각과 자기애와 집착같은 것에 다름 아닐지 모른다. 아무리 그 뜻이 지극하다 하여도 사랑은 끝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그걸 믿는가. 그러니 우린 삼가하고 삼가하지 않을 수 없다.


장자의 이 말은 난세를 살아가는 신중함과 삶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을 살핀 것이다. 말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듯 인간 또한 다른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니, 자기처럼 다른 사람의 사랑 또한 자기의 마음과 같은 것일 거라고 착각하는 어리석음을 짚었으리라. 특히 덕이 빈약한 어떤 사람을 모셔야 하는 상황에서, 그에 대해 갖춰야 할 마음자세는 태도의 진정함과 마음의 성실함을 다하되, 결코 그와 하나가 되려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까. 비정에 가까운 냉철함으로 난세에 보신을 꾀한 장자의 잔머리라고 읽어야 할 것인가. 거기엔 세상살이의 오래된 철학이 깃든 것이라 봐야 하는 것일까. 저 사당의 상수리 나무가 굽고 못쓰는 재질로 되어 있어 오랫 동안 살아남았고, 그것이 제사에 쓰이는 나무가 됨으로써 화목이 되는 것을 피했다. 무용(無用)으로 살아남았고, 그 무용이 세월의 부피를 얻음으로써 다시 유용이 되어 살아남는 지혜를 장자는 예찬한다. 애유소망은, 우리가 진정한 가치라고 믿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럽고 불안한 기반 위에 있는 것인지를 일깨운, 독설에 가까운 논증이다.


다시 생각한다. 장자의 사랑을. 말의 뒷발에 채여 절뚝거리는 사랑을.



3. 달기노심(達其怒心), 호랑이 사육자의 비유



장자의 애유소망 바로 앞에는 호랑이 사육자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육자는 호랑이의 야성을 일깨우지 않기 위해 면밀한 주의를 한다. 예를 들면 산 동물을 절대로 주지 않고 죽은 것이라도 결코 통째로 주지 않는다. 산 동물을 주면 호랑이는 그것을 물어 죽이려고 사나워진다. 통째로 주면 그것을 찢어 발기는 동안 야수의 성질을 기억해낸다. 그러면 호랑이를 어떻게 조련시키느냐. 시기기포 달기노심(時其飢飽 達其怒心). 굶주림과 배부름의 때를 잘 택해서 야수성을 알맞게 이끌어라. 달(達)이란, 상황을 고려하여 대해주는 일을 의미한다고 한다.


인간이 인간에 대해 야수일 때, 그를 대하는 노하우는 이렇듯 신중과 조심의 극치였지 않나 싶다. 장자는 바로 이런 난세를 배경으로 태어난 사유의 궤적들이다. 힘이 있고 성난 사람. 그 살기등등한 권세가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사람은 과연 어떤 처신을 하여야 하는가.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어 그 사람의 마음에 들게 할 것인가. 장자는 그것을 도시락 사들고 다니며 뜯어말린다. 절대로 능력을 드러내지 말고, 일한 티도 내지 말라고 한다. 호랑이에게 산 동물을 던져주는 일과 같다고 말한다. 그는 금방 특유의 이빨을 드러내어 그를 물어 죽일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우선 호랑이의 상태를 잘 살펴야 한다. 호랑이에게 필요한 것을 채워줌으로써 그의 심기를 우선 다스려야 한다. 기포야 말로 사나운 동물을 다루는 요체다. 왜 장자는 이런 얘기를 강조하고 있을까. 권력자의 마음을 잡는 것은, 권력자의 본능적인 호오(好惡)를 살펴 그것의 리듬을 타야한다고 말한다.


이런 태도에서 지나치게 방어적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불신과 냉소적 시선을 읽을 수 있지만 쓸모없는 얘기는 아니다. 특히 조직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능력을 한껏 알리고 싶은 무모하고 절실한 욕망에 시달린다. 남들보다 나아지고 남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만이 중요한 가치인 것처럼 생각하기 쉽다. 그런 사람에게 장자는 말한다. 너를 드러내지 말고, 있는 듯 없는 듯 다만 내적인 충실 만을 기하며 살라고. 별로 화끈한 제안은 아니지만, 그 제안에는 시대를 초월한 약발이 있다. 권력자는 변하기 쉬운 존재이다. 언제 물어뜯을지 모르는 맹수와 같다. 그는 권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권력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까지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존재에게 자신을 지나치게 드러내거나 자신감의 도를 넘는 것은 늘 위험하다. 장자는 달기노심을 가리킨다. 조심하고 조심하라. 과연 나를 살피니, 나 또한 노심을 자극하는 행위들을 일삼아왔다 싶다.


4. 못난 대로 놔둬라


장자 '외편'으로 들어갔습니다. 변무와 마제와 거협은 '무위자연'에 대한 역설들입니다. 변무는 네발가락이고 지지는 여섯손가락인데 원래 타고나기를 그렇게 타고난 것입니다. 요즘의 의학은, 변무를 정상사람 만든다고 붙은 발가락의 갈퀴를 자르고, 지지를 고친다고 손가락을 잘라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장자는 이 모자라고 더 있는 것을 공자의 인의를 공격하는데 쓰고 있습니다. 시비를 가리는 것이 세상 비극의 첫단추라고 스스로 역설했으면서 공자의 학설은 변무나 지지와 같으며 자신의 다섯손발가락처럼 자연스럽지 않다는 주장입니다. 쉽게 말하면 "병신, 육갑하고 있네" 하는 방식입니다. 이런 맹렬한 시비쪼 때문에 이 장은 후대 사람들이 넣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합니다. 변무나 지지의 그 못남을 못난 대로 놔둬라. 그렇게 말했다면 그 훤칠한 생각이 장자스러울 텐데 말입니다. 마제는 말발굽인데 말 얘기를 꺼낸 것은 야생마를 길들이는 것에 대해 비판하기 위해서입니다. 백락이란 사람은 말을 사람의 생리에 맞도록 순치시키는 솜씨가 뛰어났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말이 지닌 자연스러움을 위반한 것입니다. 아무 구속없이 자연에 방목하는 것은 천방(天放)이라 합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놔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냥 놔두면 저절로 될 것은 굳이 인의나 성인을 내세워 인간을 옥죄고 욕망을 부추겨 오히려 세상을 혼란스럽고 삭막하게 만들었다고 개탄합니다. 거협은 금고를 여는 것인데, 도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도둑 이야기를 하는 것은 난세의 한 풍경을 얘기하는 것일 겁니다. 육손이같은 기형이 생겨나고 말이 흔하고 도둑이 흔했던 그 시대를 짐작할 수 있기도 합니다. 도둑이 생겨난 것은 성인이 지나치게 인의를 세우고 옳고 그름을 따졌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작은 도둑은 성인이 더 나아져야 한다는 희망을 불어넣고 그래서 자기 밖의 영역을 넘보는 데서 생겨났고 큰 도둑은 성인이란 존재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말합니다. 나라를 찬탈하는 큰 도둑은 그 나라의 인의와 성인까지도 훔친다고 말합니다. 그러니, 도둑의 비극은 바로 시비를 가리는 작은 지혜에서 생겨났다고 주장합니다. 그냥 놔둬라. 자연을 자연 속에 간직하는 그 소박하고 활달한 낙원으로 돌아가자. 루소의 목소리를 여기서 듣습니다. 어찌 이게 그리 쉬운 일이겠습니까. 잠깐씩 생각을 되돌리며 각박해져가는 호흡을 고르는 일에, 이 경전의 힘을 빌리는 수 밖에요.



5. 외물불가필(外物不可必)


아직도 장자를 읽고 있다. 니체의 말을 따르자면 이미 내 손안에서 죽은 책을 들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 관뚜껑을 열고 의미의 시신들이 벌떡벌떡 살아난다. 너무 음산한가.


장자는 에두르지 않는다. 누구나 그럴 거란 짐작은 하고 그렇지 뭐,라고 고개 끄덕일 수 있는 사안이지만 감히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걸, 장자는 서슴없이 말해버린다. 사랑은 끝이 있는 법이란 말도 그렇지만, 저 외물불가필이란 말도 그에 못잖게 매섭다.


내 안에 있는 마음 말고, 내 밖의 모든 사물들은 이치에 꼭 들어맞는 건 아니다. 사필귀정, 권선징악, 선천자흥 역천자망의 이데올로기에 똥침을 놓는 소리다. 공자 말씀에 염장 지르는 소리다. 세상 일이란 건 인과율에 딱 맞는 것도 아니고, 좋은 인간 봐줘가며 결정되는 것도 아니다. 복불복이다.


장자는 이천몇년 전에 그걸 다 파악했다. 그리곤 말한다. 공자야. 시끄럽다. 복을 니 맘대로 주냐? 네 밖의 것이 네 뜻대로 움직여질 수 있다는 건 사기다. 그게 뜻대로 안되었을 때의 괴로움과 원망은 어떻게 책임질래? 그리곤 말한다. 제발 그런 공수표 발행하지 말고, 정직하게 아는 것만 말하자. 외물은 되어야 한다는 필연으로 잴 수 없는 것이다. 볼까?


장자는 '포 이그잼플'을 열나게 제시한다. 착했던 어떤 놈은 재수없이 죽었고 못된 놈도 죽었고 충신도 개박살이 났고 효자도 제명에 못죽었다. 왜 그런가? 몰라. 어쨌거나 장자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거다. 충미필신 효미필애(忠未必信 孝未必愛). 충성과 효도는 당시에 권장되던 가치의 톱브랜드다. 지금 생각해도, 우리가 그토록 예찬하는 사랑의 '공개념'같은 것이다. 크고 깊고 넓고 우아하고 빛나는 사랑이다. 자기 아닌 타자를 위한 원초적인 사랑이다. 그 충효가 반드시 공자가 기대하는 효과를 낳지 않는다는 게 장자의 말씀이다. 내가 아무리 충성스러워도 군주가 나를 다 신뢰하는 것은 아니며 아무리 효성스러워도 부모가 내 마음을 백프로 다 알아주는 건 아니다.


왜 그런가. 군주와 부모는 자기가 아니라 외물이기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으며, 또 어떤 정해진 원칙대로도 되지 않는 것이다. 그걸 당위 어쩌구저쩌구로 자꾸 묶지 말란 얘기다. 외물불가필. 이걸 인정하면 뭐가 달라지나. 달라진다. 세상에 대해 겸허해지고 허욕이 줄어든다. 남에 의해 좌우되고 외물에 의해 이뤄지는 것들을 함부로 소망하고 기대하는 일이 줄어든다. 속 덜 썩고 살 수 있는 것이다.


외물불가필. 그래, 삶의 유일한 방도로 이걸 제안한다면 미친 놈이겠지만 '원 오브 뎀'으로 이걸 늘 생각한다면 기막힌 보약이다. 음, 외물불가필.



6. 심재(心齋)



장자에서 읽은 매력적인 생각 하나. 심재란 말이 마음에 돈다. 심재란 '마음의 목욕재계'이다. 목욕재계란 옛날 성스러운 일을 치르기 전에 몸을 깨끗이 닦는 행위이다. 그것처럼 심재를 해야만 난세의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은 공자가 안회에게 해주는 말로 되어 있다. 안회가, 포악한 위나라 임금에게 충언을 해주러 가겠다고 말하자, 공자는 심재 이야기를 해준다. 저 예측불허의 임금 밑에서 어떻게 일할 수 있겠는가. 너는 심재를 해야 하느니라. 그건 어떻게 하는 것인가. 심재는 마음 속의 텅빔이다. 아무도 없는 빈방에 빛이 들어온 것을 상상해보라. 그것이 허실생백(虛室生白)이다. 이 텅빈 마음이라야 귀로 듣고 이름에 집착하는 병폐가 사라진다. 마음에 출입문도 세우지 말고 보루도 쌓지 말아라. 위군이 네 말을 들어주면 하고 안들어주면 그만 두어라.


이 심재 이야기를, 공자는 섭공자고란 사람에게도 한다. 자고는 제나라에 사신으로 가는데 임무가 막중하여 불안해 하고 있다. 공자의 말은 이렇다. 세상에는 경계할 일이 두 가지 있는데 하나는 운명이고 하나는 의리입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일은 운명이여, 군주를 섬기는 일은 의리입니다. 그러나 이것에 앞서 자기 마음을 섬기는 자는 운명과 의리를 편히 따를 수 있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가지고 가서 죽음과 삶에 초연하게 행동하시기 바랍니다. 군주의 명령을 고치지 말고, 승물이유심(乘物而遊心:사물의 움직임에 따라 마음이 놀도록 풀어놓음)하시기 바랍니다.


장자는 거백옥의 말로 다시 이 모티프를 반복한다. 난세에 처신하는 지혜를 구하는 사람이 많았던 모양이다. 지식인은 이런 니즈에 부응해야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누가 더 설득력있게 말하느냐가 이론가들끼리의 싸움이었을 지도 모른다.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에게 해주는 장자의 말은 한결같다. 말을 너무 좋아해서 발굽에 다이아몬드를 박아주는 사랑을 보여준다 하더라도 말은 놀라면 주인을 못알아보고 뒷발을 차댄다. 뜻이 지극하더라도 사랑은 늘 끝이 나는 법이다.(意有所至 愛有所亡) 그러니 마음을 비우고 무엇에 집착하지 말라.


공자의 가르침을 받은 안회는 마침내 마음의 텅빔을 깨달았다. 손발이나 몸을 잊고 귀와 눈의 작용을 물리쳐서 형체에 흔들리지 않고 지식을 버리고 도와 하나가 되었다. 안회는 자신의 이런 경지를 좌망(坐忘)이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듣고 공자는 말한다. "내가 너를 따르겠다. " 물론 이 모든 이야기는 장자가 만들어낸 에피소드일 뿐이다. 그 형식에 좌우되지 말고, 일관하는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할 일이다.



7. 허선촉주(虛船觸舟), 마음의 비밀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컴플렉스인지 몰라도 난 아침 출근은 칼이다. 전날 아무리 술을 마셔도 늦는 법이 없다.오히려 다른 날보다 더 일찍 와 멀쩡히 앉아 있어 다른 동료들의 놀라움을 사기 일쑤다. 내가 이렇게 이른 출근을 고집하는 것은, 그것이야 말로 성실하게 하루를 출발하는 하나의 상징적 의미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 동의하는 동료들은 나의 이런 부지런을 높이 사기도 한다. 그러나 좀 느슨하게 살고 싶은 많은 사람들에겐 괜한 부담이 되기도 하리라.어쩔 수 없다.모든 사람의 기분에 다 맞춰 살기란 어차피 안되는 일인지도 모른다.그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대로 사는 수 밖에 없다.


아침에 일찍 출근하면 시간여유가 많아 좋다.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고도 편안히 조간신문을 다 들춰볼 수 있고 비슷하게 일찍 나오는 동료와 편안히 휴게실에 앉아 커피를 나눌 마음 여유도 생긴다.그리고 무엇보다 누구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니 좋다. 지각 출근을 하면 누가 뭐라하지 않아도 괜히 미안하고 주눅드는 마음이 생기기 십상이다.그렇게 마음이 옹색해지면 하루 종일 뭔가 쫓기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정말 싫다. 그런데 일찍 출근하는 것이 반드시 즐거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 내가 근무하는 곳은 신문사라 걸려오는 전화가 많다. 독자도 있고 출입처 쪽도 있고 아는 사람의 전화도 있을 테고 생판 모르는 사람이 전화해서 그냥 횡설수설하는 전화도 많다.이런 저런 전화를 받다보면 평온하던 마음이 일순간 깨지는 경우가 허다하다. 특히 억지섞인 항의나 까닭없는 욕설을 들을 때는 더욱 그렇다.그런 경험이 누구나 몇번씩은 있는 탓에 전화받는 것을 그리 즐겁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더구나 나는 얼마 전 전화 한통을 잘못 받아 호되게 혼이 난 탓에 사실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마음이 섬뜩하다. 높은 사람의 전화를 잘못 처리해 시말서까지 쓴 것이다.


아침에 일찍 와 앉아 있노라면 유난히 그런 전화들이 많이 온다.여기저기서 걸려오는 전화를 받다보면 공연히 부아가 난다. 어? 그런데 저쪽에 보니 들어온지 몇년 안되는 새까만 후배가 앉아있다.그런데 열심히 쓰잘데기 없는(?) 인터넷만 하고 앉아 전화를 통 받지 않는 것이다.낄낄거리며 메신저 채팅을 하고 있다. 뭐, 저런 녀석이 다 있누?하는 기분에 한 마디 하고 싶지만 공연히 그의 아침기분을 망치게 하기 싫어 그냥 전화벨이 한참 울리도록 둔다. 그래도 녀석은 아랑곳 하지 않고 채팅에 여념이 없다.


어이,팽영균씨 전화 좀 받을래?

네.....네에?....아아...예에.

녀석은 그제서야 전화를 당겨받는다. 전화를 귀와 턱 사이에 걸고 통신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 사람 없어요."

녀석이 전화를 탁 끊는다.또 벨이 울린다. 녀석은 받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내 마음 속에는 은근히 화가 치민다.정말 저 녀석 저거 형편없는 녀석 아냐? 팽영균씨....다시 부르려다가,그냥 내가 받는다.그러면서 곰곰히 생각한다. 내가 왜 아침 일찍 나와 쓸데없는 일로 이렇게 마음을 긁고 있는 것일까? 녀석도 부지런한 죄로 일찍 나온 것일 뿐인데... 내가 왜 그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일까? 그도 일찍 나와 여유를 즐기고 싶은 건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만약에 이 사무실에 나 혼자 밖에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화낼 이유가 없었으리라. 그가 거기 있기 때문에 화가 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에게 무엇인가를 기대하고 의지하기 때문에 마음의 수상한 기류가 생긴 것이다.


이것이 바로 허선촉주(虛船觸舟)가 아닌가? 장자가 통찰한 마음의 비밀 말이다.어느 사공이 다른 배와 부딪쳐 배가 뒤집힐 뻔 했다.그는 몹시 놀라고 화난 마음에 부딪친 배를 바라보니 그 배에는 아무도 타지 않았다. 그걸 보고 사공은,내가 빈배와 부딪치다니 참으로 어리석었군,하고 아무 일 없었던 듯이 배를 다시 저어간다. 그런데 만약 그것이 빈배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사공은 갑자기 와서 부딪친 배에 탄 사람의 멱살을 쥐고 흔들 것이다.도대체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당신 땜에 죽을 뻔 했잖아? 배를 몰 실력이 안되면 아예 면허증을 반납하고 집에 가 쉬는 게 어때?하며 험한 말들을 있는 대로 퍼붓지 않았을까? 거기 개가 타고 있었더라도 화를 냈을 것이다.이놈의 개가 재수없이 사람을 죽일 뻔 했잖아? 하고 말이다.그 개가 배를 몰고 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이렇듯 분노란 그 분노가 흘러갈 수 있는 상대를 발견하는 즉시 증폭되기 시작한다. 그럴 만한 상대가 아무도 없다면 분노는 스스로에게 돌아와 겸허한 반성이 된다.


아침마다 전화를 받으며 나는 이 마음의 비밀을 만난다. 내가 분노할 때 상대를 빈배로 생각하라. 빈배를 향해 화를 낼 셈인가. 당연히 내가 받아야 할 전화가 아니었던가. 마음이 가벼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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