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무(李德懋)와 유득공(柳得恭)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지만 서얼이란 이유로 출사길이 막혀 있었다. 유득공의 문집인 ‘고운당필기(古芸堂筆記)’에는 이덕무가 붓을 던지고 한숨을 쉬며 “서울에는 깨진 쟁반·솥뚜껑, 찢어진 망건 등을 말끔히 고쳐 생계를 꾸리는 온갖 수선공이 있는데 우리도 앉아서 굶어 죽기를 기다리지 말고, 필운대와 삼청동 사이를 오가며 잘못된 시(破詩)를 고치라고 하면 어찌 술과 안주를 얻을 수 없겠는가”라고 말해 크게 웃었다는 기록이 있다. 신분제 사회의 슬픈 일화인데, 정조가 즉위 초 개혁 문신 양성 기구인 규장각(奎章閣)을 설립하고 검서관(檢書官)에 이덕무, 유득공과 박제가(朴齊家), 서이수(徐理修)를 임명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 정조실록 3년(1779) 3월 27일자가 “내각(內閣:규장각)에 처음 검서관을 두었는데 서류(庶類) 가운데 문예(文藝)가 있는 사람으로 차출하여 4원(員)을 두었다”라고 전하는 것처럼 이들은 모두 서얼들이었다. 신분제의 벽이 한번 타파되자 이들은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라는 보통명사로 불리며 조선 후기의 학문과 사상계를 주도했다.
정조 아들 순조 때 인왕산 옥류천(玉流川) 가에 살던 천수경(千壽慶)은 중인이었지만 유명한 학자이자 시인이었기에 집 근처 석벽에 추사 김정희가 예서체로 ‘송석원(松石園)’이란 그의 호를 써 주었다. 이를 본 중인 시인 수헌(睡軒) 김태욱(金泰郁)은 술에 취해 칼로 자신의 팔을 그으면서, “이 팔을 잘라야 하리라. 이 글자를 쓸 사람이 없어 남의 손을 빌려 쓰게 한단 말이냐?”라고 통곡했다고 ‘이향견문록’은 전한다. ‘남의 손’이란 물론 양반을 뜻하는데, 이런 학문적 자부심을 가진 인물들을 신분제로 가로막은 사회가 발전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동국대 신정아씨와 유명 영어강사 이지영씨의 학력 파문은 실력보다 간판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폐쇄적 풍토를 갈아엎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학벌이 신분이 되어 있는 전(前)근대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조 아들 순조 때 인왕산 옥류천(玉流川) 가에 살던 천수경(千壽慶)은 중인이었지만 유명한 학자이자 시인이었기에 집 근처 석벽에 추사 김정희가 예서체로 ‘송석원(松石園)’이란 그의 호를 써 주었다. 이를 본 중인 시인 수헌(睡軒) 김태욱(金泰郁)은 술에 취해 칼로 자신의 팔을 그으면서, “이 팔을 잘라야 하리라. 이 글자를 쓸 사람이 없어 남의 손을 빌려 쓰게 한단 말이냐?”라고 통곡했다고 ‘이향견문록’은 전한다. ‘남의 손’이란 물론 양반을 뜻하는데, 이런 학문적 자부심을 가진 인물들을 신분제로 가로막은 사회가 발전할 수 없었음은 물론이었다.
동국대 신정아씨와 유명 영어강사 이지영씨의 학력 파문은 실력보다 간판을 중시하는 우리 사회의 폐쇄적 풍토를 갈아엎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우리 사회가 선진국에 진입하지 못하는 가장 큰 원인이 학벌이 신분이 되어 있는 전(前)근대성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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