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삶의등대▲

말(言)은 다 말인가

영원한 울트라 2007. 9. 27. 14:08
말 많은 노 대통령의 말들로 최근 말들이 많다. 말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며 내 머리에 먼저 떠오른 말은 격(格)과 품위였다. 노 대통령의 문제가 되는 말들에 어떤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인간에게 있어서 ‘말’이란 말의 철학적 의미에 대해 잠깐 철학적으로 말해보자.

말은 우리 의식 밖의 모든 현상이나 우리 내부에 있는 생각이나 감정을 표상하거나 표현하는 도구적 매체라는 생각이 자명한 것으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라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유명한 시적 은유가 말해주듯이, 전통적 생각과는 전혀 달리 언어 밖, 언어 이전에는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다. 산과 강, 동물과 인간을 비롯한 그 어떤 것도 그것이 ‘산’ ‘동물’ 등의 낱말로 표시되는 존재의 범주, 혹은 “산은 높다” “강은 아름답다” 등의 명제로 진술되기 이전에는 인식할 수 없고, 그러한 주장의 진위를 판단할 수 없다.

우리가 보는 세계와 우리가 의식하는 우리의 마음은 처음부터 그냥 그대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곧 내가, 혹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나 혹은 우리의 세상과 우리의 마음을 결정하고 표현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동일한 지각 대상이나 생각을 표현하는 낱말에는 개인, 작고 큰 집단, 문화권, 민족, 언어권에 따라 수없이 다양한 종류의 낱말과 진술구조 차이가 있다. 그것들 간의 품위 즉 높고/낮음, 귀/천, 세련/조야의 평가적 차이를 격(格)이라 부른다.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말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각기 그들의 지적, 정서적, 도덕적 높고/낮은 품위의 격을 측정하고 인식할 수 있다. 높은 격에 속하며, 높은 품위를 갖춘 삶과 인간됨이 바람직한 것이 자명하다면, 격 높은 언어사용에의 노력은 누구에게 그리고 어떤 집단에나 바람직한 필수 조건이다.

격에 맞고 품위 있는 언어를 사용하라는 말은 미사여구, 유식한 말만을 쓰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특정한 장소에서는 ‘점잖은 신사’나 고급 공무원도 오히려 막말, 쌍말을 쓰는 것이 더 재미있고 적절한지도 모른다. 거친 말을 쓰더라도 상황과 경우에 따라 적절하게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자가 말하는 ‘정명(正名)’의 뜻이 아닌가 싶다. 말은 할 말이 있고 할 때와 장소가 있다. 아무 말이고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언제부터인가 대학생들이나 젊은 교수까지 학제적 구별을 뜻하는 과(科)가 ‘꽈’로 듣기 싫게 발음되고, 인터넷의 보급화와 더불어 전혀 생소한 낱말이 마구 사용되고 있다. 또한 정부의 차관급 공무원이 “조진다”라는 말을, 국가의 원수가 “대통령 못해먹겠다”, “그 놈의 헌법”, “깽판친다”, “쪽팔린다” 등과 같은 종류의 말을 사적이 아니라 공적 장소에서 거침없이 사용하게 되었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런 종류의 말을 신문지상에 읽고 TV에서 들었을 때, 우리는 한국말이 거칠어지고 품위를 잃고 있다는 차원을 넘어 우리 자신이, 우리의 나라가 격과 품위를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닌가 돌아보게 된다.

로마의 위대한 정치가인 키케로는 역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문학자이자 웅변가였고, 드골 장군은 위대한 애국적 군인이었으며, 웅변가이자 문필가였다. 그러나 그들이 두고두고 존경 받는 이유는 그들의 권력, 애국심, 웅변술, 필력보다도 그들의 높은 품격이다. 우리 한국인이 ‘쪽팔리지’ 않으려면 가까운 시기에 우리도 위와 같은 국가지도자를 갖는 국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박이문 연대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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