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完璧)’이라는 성어가 나온 공간 배경은 전국시대 조(趙)나라다. 명신 인상여가 강국인 진(秦)나라의 압력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진귀한 보물인 화씨벽(和氏璧)을 원래 상태 그대로 보존해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문제는 공을 세운 인상여가 미천한 관직에서 일약 재상 급의 벼슬로 승진한 다음에 이어졌다. 조나라 명장인 염파가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앉은 인상여를 고깝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전장에서 수도 없는 공을 세운 내 체면은 뭐냐”라는 생각에서다.
타고난 무골(武骨)인 염파는 생각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회만 닿으면 인상여에게 굴욕감을 주고자 했다. 생각이 깊은 인상여는 이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염파를 만나면 골목으로 숨고, 웬만하면 함께 있는 경우를 적극 피했다.
인상여의 부하들은 “지위가 더 높으신데 왜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느냐”며 불만을 표했다. 인상여의 생각은 분명했다. “나와 염파 장군이 다투면 위급한 나라의 사정은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였다.
염파는 후에 인상여의 이 생각을 알게 된다. 대국(大局)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자제한 그의 생각에 염파는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어 그는 가시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등에 묶고 인상여를 찾는다. 좁은 생각으로 제 감정만을 좇았던 자신에게 벌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다. 둘은 이로써 서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는다.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업고 죄를 청한다(負荊請罪)’라는 성어는 여기서 나왔다. 사마천의『사기(史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겪게 되는 사회적 지위의 부침, 개개인의 감정적인 굴곡이 관용과 화합으로 귀결한다. 막대기를 등에 업고 염파가 죄를 청하는 대목의 작은 반전은 자기 잘못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사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준다.
인질 사태가 잘 마무리돼 다행이다. 탈레반에 잡혔던 인질들보다는 이들을 가혹한 현장으로 내몬 선교 제일주의의 기독교 관계자들은 이즈음에 통렬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의 부적절한 발언과 납치자 어머니라는 여성의 신앙 간증 등은 교회의 태도가 아직 철저한 자기반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 사회가 맞이할지도 모를 극심한 종교적 반목을 피하기 위해서는 회초리를 스스로 등에 지는 기독교계의 낮은 자세가 필요하다.
문제는 공을 세운 인상여가 미천한 관직에서 일약 재상 급의 벼슬로 승진한 다음에 이어졌다. 조나라 명장인 염파가 느닷없이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앉은 인상여를 고깝게 보기 시작한 것이다. “전장에서 수도 없는 공을 세운 내 체면은 뭐냐”라는 생각에서다.
타고난 무골(武骨)인 염파는 생각에서 멈추지 않았다. 기회만 닿으면 인상여에게 굴욕감을 주고자 했다. 생각이 깊은 인상여는 이를 재빨리 알아차렸다. 왕궁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염파를 만나면 골목으로 숨고, 웬만하면 함께 있는 경우를 적극 피했다.
인상여의 부하들은 “지위가 더 높으신데 왜 이런 약한 모습을 보이느냐”며 불만을 표했다. 인상여의 생각은 분명했다. “나와 염파 장군이 다투면 위급한 나라의 사정은 더 어려워진다”는 얘기였다.
염파는 후에 인상여의 이 생각을 알게 된다. 대국(大局)을 위해 사사로운 감정을 자제한 그의 생각에 염파는 깊은 감동을 받는다. 이어 그는 가시나무로 만든 회초리를 등에 묶고 인상여를 찾는다. 좁은 생각으로 제 감정만을 좇았던 자신에게 벌을 내려 달라는 것이었다. 둘은 이로써 서로 목숨을 내놓을 수 있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맺는다.
‘가시나무 회초리를 등에 업고 죄를 청한다(負荊請罪)’라는 성어는 여기서 나왔다. 사마천의『사기(史記)』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사람이 겪게 되는 사회적 지위의 부침, 개개인의 감정적인 굴곡이 관용과 화합으로 귀결한다. 막대기를 등에 업고 염파가 죄를 청하는 대목의 작은 반전은 자기 잘못에 대한 진지한 반성과 사과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 준다.
인질 사태가 잘 마무리돼 다행이다. 탈레반에 잡혔던 인질들보다는 이들을 가혹한 현장으로 내몬 선교 제일주의의 기독교 관계자들은 이즈음에 통렬한 자기반성을 해야 한다.
그러나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의 부적절한 발언과 납치자 어머니라는 여성의 신앙 간증 등은 교회의 태도가 아직 철저한 자기반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우리 사회가 맞이할지도 모를 극심한 종교적 반목을 피하기 위해서는 회초리를 스스로 등에 지는 기독교계의 낮은 자세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