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삶/삶의등대▲

부자학

영원한 울트라 2007. 9. 27. 15:17
‘경주 최(崔)부자’가 우리 근세 역사의 최고 갑부 소리를 듣는 건 단지 400년 가까이 장수한 조선조 만석꾼 명문가인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대로 이어온 ‘육연(六然)’과 ‘가거십훈(家居十訓)’, 이 교훈에 녹아 든 ‘부자 철학’이 유장(悠長)하다. ‘재물을 모으되 만석 이상 쌓지 말라. 과객은 귀천 없이 융숭히 대접하라. 흉년에 땅 사지 말라. 새 며느리에게 3년은 무명옷을 입혀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이 없도록 살펴라.’ 절제와 나눔의 미덕이 돋보인다.

주로 현금을 주고받던 시절엔 은행 창구 직원들만의 부자 식별법이 있었다. 정기적금 만기 때 목돈을 찾아가는 행태를 보면 알았다. 돈봉투를 열자마자 10원, 100원짜리 동전부터 헤아리면 행색이 허름해도 수십억원대의 재산을 가진 알부자인 경우가 많았다. 반면 자기앞수표나 1만원권부터 허겁지겁 세기 시작하는 축은 형편이 넉넉지 못한 편이었다. 미 경제지 월스트리트 저널도 최근 한 기사에서 영민한 투자보다 우직한 절약과 저축을 부자 되기의 첫걸음으로 꼽았다.

최인호의 『상도(商道)』에 나오는 조선의 거상 임상옥은 “재물은 평등하기가 물과 같다(財上平如水)”고 했다. 하지만 현실 세계의 돈은 물처럼 골고루 흐르지 않는다. ‘부자 되세요’라는 노골적 광고 카피가 흘러 넘치고, ‘10억 만들기’ 재테크 광풍이 불어 닥칠수록 집 한 칸 없는 서민의 마음은 쓸쓸해진다. 이런 들뜬 구호는 오히려 편중된 부(富)에 대한 강박증을 부추긴다. 한 시민단체가 서울 강남의 초고층 아파트 단지 앞에서 빈민을 위한 굿판을 벌인 게 2004년의 일이다. 부촌의 문패 없는 단독주택을 지나칠 때면 왠지 부자들의 피해의식이 느껴진다.

‘부자학 연구학회’라는 학술모임이 이달 중순 출범한다는 소식이다. 이런 학회는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들다. 하긴 우리나라처럼 부자의 수가 순식간에 늘어난 나라가 있을까. 이 과정에서 파생된 사회갈등 요인 역시 한국적인 현상이다. 부유층의 의식도 개선의 여지가 많다. 개인 기부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부끄러울 정도다. 부자학회에는 경영·경제학자는 물론 심리·역사·사회·법·종교·국문·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해 ‘통섭(統攝)’의 큰 마당이 서게 됐다. ‘돈은 최선의 하인인 동시에 최악의 주인’이라는 베이컨의 경구를 새길 수 있는 건전한 ‘부자 철학’을 세우는 일이 급선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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