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중국역사

중국의 전통 사상

영원한 울트라 2007. 9. 27. 15:56
중국의 전통 사상
 
사상 문화는 모든 민족 문화의 핵심이며, 그것은 다른 문화에 대해 지배적인 역할을 한다. 중국 전통문화는 역사가 유구하다. 전통문화의 핵심인 전통 사상은 대단히 풍부하여, 많은 사상가와 사상 유파가 출현하였다. 몇 천년 이래로, 중국의 전통 사상은 중국인들의 정신세계와 행동에 계속해서 깊은 영향을 끼쳤고, 인류의 사상 보고를 대단히 풍부하게 하였다. 중국의 전통 사상을 이해하면 중국과 중국 사상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고, 그 가운데에서 풍부한 사상 영양을 받아들일 수 있다.

제1절 유가사상
중국의 전통사상은 3대 유파가 있는데, 儒家思想, 道家思想, 法家思想이다. 그 이외 墨家, 農家, 兵家, 佛家 등 기타 학파의 사상이 있다. 그 중에 유가사상이 가장 영향력이 크다. 2천여 년에 이르는 중국 봉건사회에서 유가사상이 사상 통치의 지위를 차지하였으며, 거의 중국 사회 생활 전반에 걸쳐 침투하였고, 지금까지 중국의 몇몇 분야에 깊은 낙인을 남겨 놓았다. 유가사상은 중국전통사상의 대표이므로 중점을 두어 먼저 소개하겠다.
 
1. 孔子와 유가학설의 창립
중국의 유가사상은 孔子가 창립하였다. 孔子(기원전 551-479년)는 성은 孔, 이름은 丘, 자는 仲尼인 춘추전국 시대의 魯나라 사람으로서 중국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이다.
孔子가 생활하던 춘추전국시대는 노예제도가 이미 쇠퇴하고 봉건제도가 흥기하기 시작하는 중국사회가 큰 변동이 생기는 시기였다. 당시, 각종 사회 사조가 흥성했고, 많은 학파가 출현했다. 孔子가 성장한 고향 魯城(현재 山東曲阜)은 당시 魯나라의 수도였고, 西周 초년에 유명한 정치가 周公의 봉지였는데, 문화가 비교적 발달했고 孔子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孔子는 어려서부터 공부를 좋아하여 30세에 이미 학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사회. 국가 통치. 교육 등에 자기의 사상을 형성하여 유명한 학문가가 되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孔子는 그의 지식을 전수했고, 자기의 사상을 전달하기 위해, 개인적으로 학생을 모집하여, 처음으로 개인 학술 강연을 열었다. 후에 孔子의 명성이 점점 커져, 51세가 되어서 中都宰관직 (즉 中都縣縣長)으로 임명되었다. 52세에는 魯나라의 大司冠으로 임명되어 전국의 치안과 司法大權을 장악하였다. 그 뒤 재상을 대행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후에는 孔子가 정치에서 당시의 권력자인 李孫氏에게 배척되어 국왕의 신임을 잃었다. 孔子는 55세 때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魯나라를 떠나, 주위 여러 나라들을 유람하기 시작하였다. 孔子는 14년 동안 유람하면서 곳곳으로 유세하여, 자신의 사상과 정치 주장을 전하였고, 68세에 魯나라로 되돌아 왔다.
孔子는 귀국한 후에도, 여전히 자기의 정치 주장을 바꾸려 하지 않아서 중요한 자리에 임명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전심전력으로 교육과 고대 문헌 정리 작업에 심혈을 기울여 유가학설과 학파를 창립하였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孔子는 제자가 3000명이 있었고, 우수한 사람이 72명이 있었다. 그중 많은 사람들이 후에 쓸모 있는 인재가 되었다. 孔子가 정리한 유가 경전인 《書》, 《詩》, 《禮》, 《樂》, 《易》, 《春秋》는 후에 [六經]이라 불리었고, 중국 상고 역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孔子 사후에, 그의 제자들은 그의 언론을 한데 모아 한 권의 책으로 편집하여, 《論語》라고 이름 지었다. 《論語》 한 권에 孔子의 사상이 집중적으로 구현되었고 역사적으로 볼 때, 유가사상 체계의 초석이 되는 저작으로 보여진다. 중국에서 논어의 지위는 서방의 《성경》에 상당하며, 孔子는 중국고대의 가장 위대한 성인이며 우상이 되었고, 후에 대대손손 중국인들의 숭배를 받았다.
孔子의 유가학설이 포함하고 있는 중요한 내용은 무엇인가? 대략적으로 총괄해 볼 때, 이하 다섯 가지 방면이 있다.
첫째는 [禮]이다. 孔子는 전력을 다해 [禮]로써 치국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것이 [禮]사상의 핵심이다. 그가 말하는 [禮]는 [周禮]인데 좁은 의미에서 말하자면, 祭禮·婚禮·喪禮·外交禮·作戰禮 등 각종 예의를 포함한다. 넓은 범위로 말하자면, 周代의 典章制度와 도덕 규범 일체를 가리킨다. 周禮의 기본 원칙은 [君君臣臣父父子子]로서, 周代사회 각 계층의 친소·존비·장유종법 등급의 관계를 말한다. 孔子는 周禮가 규정한 등급 제도. 사회질서. 도덕 규범. 예의 요구는 가장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으로서, 개개인이 모두 엄격하게 준수하기만 한다면 사회는 곧 안정되어지고 천하는 곧 태평해 질 수 있다고 여겼다. 春秋시대에 신구세력의 투쟁이 격렬하고, 사회가 동요되어 불안한 [禮崩樂壞]의 국면에 겨냥하여 孔子는 [正名]을 주장하였는데, 사람마다 [非禮勿視, 非禮勿聽, 非禮勿言, 非禮勿動 ] 할 것을 요구했다. 즉 [君君臣臣父父子子] 등의 예의제도를 이용하여 어지러운 질서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孔子는 그의 유가학설에서 [禮]를 가장 많이 말하였는데, 실제로는 사람들에게 노예사회 종법 등급 관계의 합리성을 받아들이고 周代의 전통을 회복하고 계승하려 하였다.
둘째는 [仁]이다. 孔子는 [仁]도 힘껏 제창했다. [仁]이란 무엇인가? 그의 해석은 매우 많은데, 주요 내용은 [愛人]인즉, 사람과 사람사이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愛人]을 시행할 수 있겠는가? 그가 지적하기를 첫 번째는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으로 자기가 바로 서고 싶어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바로 서게 해야 하고, 자기가 만족하고 싶은 욕구를 다른 사람도 만족하게 해야 된다. 두 번째는 [己所不欲, 勿施於人]으로 자기가 바라지 않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도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사람마다 모두 이 두 가지 점을 해낼 수 있다면, 사람들과 관계는 곧 화목하고 사회도 안정될 것이다.
孔子는 무릇 [禮]의 사상, 행위, 도덕에 부합하는 것을 모두 [仁]이라고 여겼다. 그는 [克己復禮爲仁]이라고 말했는데, 자기를 자제하고 그것을 [禮] 의 요구와 부합하는 것이 바로 [仁]이라는 뜻이다. 孔子가 말하는 [仁]과 [禮]의 정신은 실제로 같은 것인데, [禮]는 외재하고 있는 행위규범을 강조하고 [仁]은 마음속의 도덕지각을 강조하는 것으로, 두 가지가 결합하는 것은 사회를 안정시키고 질서를 잡게 하며 사람들간의 우정과 사랑이 돈독해 진다는 것을 설명한다. 이것이 그의 이상이다.
세 번째는 [中庸]이다. [禮]와 [仁]은 孔子의 이상원칙이다. 孔子는 정치생활과 일상 사회생활에서 이 두 가지의 원칙을 실현하는 방법은 [中庸]이라고 여겼다. 소위 [中庸]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극단에 이르지 않고 중간을 취하는 것으로 양극단을 서로 제약하고 서로 보충하여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결합에 이르는 것이다. 만약 한 극단만 고려하고 다른 한 극단은 고려하지 않는다면 [極端主義]에 이르게 되고 그 결과는 [過猶不及]이다. 그는 [禮之用, 和爲貴]를 주장했다. 여기서 [和]라는 것은 알맞은 곳에 다다른다는 것이다. 당시 孔子가 지적하던 가장 큰 양극단이 바로 [禮]와 [仁]이다. [中庸]사상을 따르자면 오로지 [禮]를 행하고 [仁]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고, 단지 [仁]을 행하고 [禮]를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다. 두 가지는 마땅히 [中和] 해야 하고, [中正]에 도달해야 하며, [禮]에 합치되어야 하고, 또 [仁]에 부합되어야 한다. 孔子의 이러한 [中庸]의 도는 후에 중국 사람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중요한 사상 방법이 되었고, 영향력도 매우 컸다.
네 번째는 [天命觀]이다. 孔子 이전에도 천명관은 중국에서 성행하였다. 천명관 이란 인간의 일체가 모두 [天]이 준 것이며 [天]앞에서 인간은 무능하고 어떤 성과도 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孔子는 오래된 천명관을 타파하고, 새로운 天명관을 창조하였다. 한 면으로는 그는 천명이 있다는 것을 시인했다. [死生有命, 富貴在天]이라 하여 천명은 알 수 없고 항거 할 수 없으며 사람에게 해운과 불운을 가져다 줄 수 있다고 여겼다. 다른 한 면으로, 삶은 사람의 정신 도덕을 결정할 수 없다고 여겼다. 사람이 비록 실제 생활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없지만 도덕생활 중에는 학습과 수양을 통해서 매우 높은 경지에 도달 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러한 사상관점을 감안해 볼 때, 孔子는 귀신에 대해 [敬而遠之]의 태도를 취했는데, 그는 귀신을 부정하지도 않고 숭배하지도 않았다. 孔子의 이러한 태도는 오래된 천명 귀신관의 동요를 반영하였고, 인생의 중시에 대해서는 당시 중국인들의 인식상의 중요한 진보였다.
다섯 번째는 교육사상이다. 孔子는 위대한 사상가일 뿐만 아니라 위대한 교육가였다. 그는 처음으로 사상을 창조했고 관학의 독점을 타파하여, 중국교육 역사상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계통적인 교육사상에 있어서 그는 교육 대상에 관해서 [有敎無類]를 주장하였다. 즉 등급, 동족을 구분하지 않고, 단지 학문을 추구하려는 사람이면 모두 환영한다는 것이다. 학문을 가르치는 방법에 있어서 그는 [因材施敎]를 주장했다. 즉 학생들의 각기 다른 정도와 특징에 근거하여 다른 방법을 사용하여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계몽적인 가르침을 제창하였다. 학생에게 [擧一反三] 하게 하였다. 선생이란 학생이 혼자 연구하는 기초 위에서 계몽하고 지도하는 것이다. 학습태도에 있어서는, 겸손하고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을 주장했다. [知之爲知之, 不知爲不知]라 하여 학습방법에 있어서 반복학습을 강조하였다. [溫故而知新], [學而時習之不亦說乎]라 하여 그는 또 학습을 할 때 사고에 능숙하고 학습과 사고를 결합하는 것을 강조했다. [學而不思則망, 思而不學則殆]라 하여 그의 교육에 관한 깊고 예리한 논술은 지금까지도 여전히 깊은 계몽의 의의를 가진다.
孔子가 생존한 시대는 이미 2500년이 흘러갔건만 오늘날 왜 孔子를 평가하는가? 먼저 孔子가 정치상에서는 보수적이었다는 것을 주지해야 할 것이다. 그가 당시 힘껏 제창했던 노예사회의 西周 제도는 사실상 이미 몰락하여 봉건사회제도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가 보았던 [禮崩樂壞] 하던 사회의 혼란은 사실상 신구 사회제도의 과도기 때 발생하는 정상적인 현상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옛 제도를 제창하여 사회제도를 통일하고 안정시킬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제도를 진전.육성시켜 새로운 사회질서를 건립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孔子의 입장은 정 반대였다. 孔子는 정치적 보수성으로 이재 막 정권을 획득한 신흥지주계급의 중시를 받을 수 없었다. 이것이 孔子의 일생에 있어서 정치적 뜻을 펼 수 없었던 주요 원인이었다. 둘째로, 孔子는 완전한 사상체계를 창조했음을 봐야 한다. 현실을 중시하고, 인생을 중시하고, 도덕을 중시하고, 지식을 중시하여 교육시켰고, 사회정치와 개인 도덕수양을 결합시켰는데, 그 기본 정신은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 이다. 그 정신의 본질은 현존하는 사회제도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이것 때문에 孔子 사상의 기초 위에 형성되었던 유가학설과 유가학파는 후에 봉건지주계급이 정권을 공고하게 한 이후에 매우 빠르게 중히 쓰여졌다. 또한, 역대 유학파의 개조와 발휘를 통하여 중국 이 천년 봉건사회의 통치사상이 형성되었고,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영향은 깊고 넓었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孔子의 《論語》속에는 사회·인생·교육·학습 등에 대해 예리한 철저성 논술로 가득 차 있다. 이런 예리하고 철저한 논술은 비록 특정한 사회배경과 숨겨진 뜻이 있지만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보편의의를 지니고 있어서 영원히 후대인을 계몽시키고, 실제상으로 인류공통의 정신적 재산이 되었다. 孔子의 《論語》 속에 많은 말들은 이미 세상사람들에게 전해져 경구, 격언, 좌우명이 되었다. 이상은 모두 위대한 사상가이자 교육가로 불려졌던 孔子가 중국과 세계에서 중시되었던 원인이다.
2. 孟子, 荀子의 孔子학설에 대한 발전
孔子 사후, 제자들은 그의 사업을 계승하여, 계속해서 그의 사상을 전파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유가학파는 여덟 개의 파로 나뉘어졌는데, 孟子의 孟氏之儒와 筍子(성은 孫)의 孫氏之儒의 영향이 가장 컸다. 초기 유학에서 孟子와 筍子는 孔子 이후 가장 유명한 사상가였고, 그들은 유가학설에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다.
(1) 孟子
孟子 (약 기원전 372-289년) 의 이름은 軻이고, 전국시대 魯나라 鄒地(현재 山東鄒縣)인이다. 그의 일생도 孔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의 실현을 위해 사방을 유람하며 학설을 펼쳤다. 齊, 宋, 魯, 藤, 魏 나라들을 갔었고, 齊나라에서는 관직에 임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제후들의 신용을 얻지 못하였고, 할 수 없이 자기의 정치생활을 접고, 鄒國에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책을 쓰고 학설을 세웠다. 그의 저작인 《孟子》는 孔子의 《論語》와 마찬가지로 유가의 경전인 저작이다.
孟子 사상의 첫 번째 특징은 孔子의 [仁]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孔子의 [仁]사상을 정치에 사용하여 [仁政說]을 내세운 점이다. 그는 [民爲貴, 社稷次之, 君爲經.]이라 하여 군주는 백성들의 지지를 얻어야만 천자가 될 수 있다고 여겼다. 이로 인해서 나라의 임금은 반드시 백성에 대해서 [仁政]을 실행해야 하고 그들에게 땅을 주어 농사를 짓게 해서 배부르고 안락한 생활을 하게 해야 하며 그들에게 유가교육을 시켜 예의도덕을 이해하고 서로 화목하게 지내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만약에 군주가 [仁政]을 실행하지 않으면 백성의 불만을 사게 되므로 군주의 정치를 인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孟子는 [仁政]사상의 지도 아래서 평화로운 방식으로 천하를 통일하기를 주장했고, 제후들 간의 합병전쟁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仁政]사상은 孟子가 사상가로서 이미 민중의 중요성을 간파했다는데 그 중요한 의의가 있다.
孟子 사상의 두 번째 특징은 [性善論]을 주장한 것이다. 그것은 [仁政]사상의 기초이론이고, 유가학설에 대한 또 하나의 공헌이다. 유가에서 도덕성을 수양하는 데는 [愛人]해야 한다. 도덕적인 수양은 선하기 위함이지 악하기 위함이 아닌데 그 근거는 무엇인가? 孔子는 정면으로 답을 내지는 않았다. 孟子는 선과 인성의 관계를 함께 보았는데 인성은 원래 선한 것이라고 여겼다. 惻隱之心, 羞悟之心, 恭敬之心, 是非之心, 즉 [仁], [義], [禮], [智]네 가지의 도덕감정이 바로 [良心]인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면 반드시 배양하고 학습해야 하는 점이 금수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인간은 마땅히 이 네 가지 선의 감정을 닦아야만 비로소 일을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성, 즉 善性을 상실하고 심지어 짐승만도 못하게 된다. 孟子의 [仁政]설은 이러한 이론에 근거를 도출했다. 그는 사람이 모두 동정심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정치에까지 확장하고 응용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것이 바로 [仁政]이다. 孔子가 주장한 [性善論]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봉건시대의 정통적 관점이 되었다.
(2) 荀子
荀子(약 기원전 325-238년)의 이름은 況이고 자는 卿으로 孫卿이라고도 불렸으며 전국말기 趙나라 사람이다. 그는 일찍이 장기간에 걸쳐서 齊나라의 稷下교관으로 연구와 강연을 하여 齊나라에서 중요시되었던 사람이었다. 후에 모함을 받아 楚나라에 가서 楚나라의 蘭陵令(현재 山東 昌山縣 蘭陵鎭)을 지냈다. 말년에 거기에서 거처를 정해 별세하였다. 그의 저작에는 《荀子》 한 권이 있다.
荀子의 중요한 공헌은 유가의 [禮]에 대해 개조를 한 점이다. 荀子도 [禮]를 주시했지만 孔子와 비교해 볼 때,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다. 孔子가 가리키는 것은 周禮이고 荀子가 말하는 것은 전국시대의 禮이다. 게다가 荀子는 [禮]와 [法]을 결합했는데 그것의 내용은 도덕을 제외하고는 [禮]안에 [法]의 내용만이 있다는 것이다. 孟子의 [仁政]학설에 겨냥하여 荀子는 제후들이 서로 경쟁하는 상황에서 인정으로만은 부족하고 반드시 耕戰정책을 실행하여 국가의 실력을 강화시켜야 한다고 여겼다. 荀子의 이러한 관점은 실제에 있어서는 유가의[禮治]사상에서 법가의 [法治]사상의 과도기라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荀子가 배양한 제자였던 韓非, 李斯는 완전히 법가가 되었다.
孟子의 [性善論]과 반대로, 정치사상의 이론기초로서 荀子는 [性惡論]을 주장하였다. 荀子는 [人之性惡, 其善者僞也.]라고 말했다. 곧 인간의 선천적 성품은 [惡]이고 [善]은 후에 배양하고 교화한 것이다. 荀子는 사람으로 태어나면 이로운 것을 좋아하고, 색을 좋아하고, 안일함을 좋아하고, 노동을 싫어하는 등 생리상의 각종 욕망을 지닐 뿐이지 孟子가 말하는 [善端]은 없다고 여겼다. 만약 개인의 욕망이 발전하면 사람들 사이에는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의 혼란을 조성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禮儀]로서 [性惡]을 교정하여 사회의 혼란을 면해야 한다고 여겼다.
인간과 하늘의 관계에서 荀子는 이전의 천명관에 대항하여 매우 중요한 관점인 [人定勝天]을 주장하였다. 荀子는 하늘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객관적 규율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의 의지로서 바꿀 수 없지만, 사람은 하늘 앞에서 어떤 성과도 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자기의 주관적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고 자연규율을 이용하여 자연을 개조하는 목적에 각각 다를 수 있다고 여겼다. 荀子의 [人定勝天]사상은 객관적 규율을 인정하고 인간의 주관적 능동작용을 강조하여 孔子와 孟子의 [聽天由命]사상에 의해 큰 발전을 이룩했다.
荀子의 관점에서 荀子와 孔子.孟子를 비교해 볼 때, 그의 유가사상은 이미 큰 변화가 발생했고 실제로는 법가등 다른 학파의 사상을 흡수하여 전국시대 신흥지주계급의 요구를 대표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순자는 여전히 유가학파에 예속되어 있고 공자.맹자와 마찬가지로 춘추전국시대 사람이므로 그들은 후대 사람들에게 초기유가라고 불려 진다.
3. 漢代經學과 宋明理學
(1) 漢代經學
춘추전국 시기에 유가가 비록 매우 활발했으나 [백가쟁명]중의 하나로서 정치상의 보수성 때문에 천하를 쟁취하고 있는 봉건 권력자들의 중시를 받지 못했다. 秦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법가를 중시해 무력과 형벌로 건설한 봉건 집권을 공고히 할 것을 강조하고, [焚書坑儒]를 하여 여섯 나라의 유생을 잔인하게 진압하고 유가에게 무거운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西漢 중엽이 되어 통일된 중앙집권의 봉건국가는 이미 공고해졌고 漢 武帝는 통일된 중앙 집권의 사상통치를 위해 秦나라의 엄격한 형벌정책이 멸망을 초래한 교훈을 받아들여 [罷黜百家, 獨尊儒術]을 결정하고 유가사상으로 전국의 사상을 통일하였다. 당시에 董仲舒를 대표로 하는 유가학파는 통치자의 요구에 부합하여 孔孟학설을 주로 하고 기타 봉건통치에 유리한 사상을 받아들이고 봉건통치학설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한대유학이다. 이 학설은 유가경전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이 특징이기 때문에 한대 경학이라고도 부른다. 한대경학은 유가학설이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음을 나타내 준다. 이 이후부터 유가사상은 중국의 지위에서 근본적인 변화가 발생하여 다른 사상유파를 능가하는 관학이 되었고 천하독존의 지위를 획득했고 오랜 기간 중국 봉건사회의 정통사상이 되었다.
董仲舒(기원전179-104)는 廣川(현재 河北棗强縣廣川鎭)사람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유학경전을 열심히 공부하였고 성적이 뛰어나 후에 漢武帝의 눈에 들게 되었다. [罷黜百家, 獨尊儒術]은 바로 그가 제시해서 漢武帝가 채용한 것이다.  仲舒는 이전에 초기유학의 사상에 대해 처음으로 큰 발전과 개조를 시행하여 한대 신유가학파의 창조자이자 가장 대표성을 띤 사상이론가가 되었다.  仲舒의 사상이론은 그의 《春秋繁露》라는 책 중에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仲舒는 먼저 漢武帝에게 사상통일의 중요성을 힘껏 강조하였고 봉건의 [大一統]을 천지의 대의로서 반드시 따라야 하는 법칙으로 간주하고 유가사상으로 중국인의 사상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仲舒는 선진 초기유가의 [천명관]을 계승하고 발전시켰으며 신비주의의 [음양오행]학설을 받아들이고 임금의 권한은 신이 내려 준다는 [天人感應]의 시학이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天]이 자연계와 인간사회의 가장 높은 주재자이고 황제는 [天之兒子]로서 하늘의 뜻과 통치권력을 실현하므로 [天子]라고 칭하며 황제의 권력이 매우 높아 그 신성도 침범할 수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仲舒는 孔子의 [君君臣臣父父子子]의 도덕원칙과 [陽尊陰卑]의 신학이론을 근거로 [三綱五常]학설을 내세웠다. [三綱] 즉 [君爲臣綱, 父爲子綱, 夫爲婦綱]인데 그들간의 관계는 천지음양과 같아서, 신하, 자녀, 처자는 [음]에 속하고 군주, 부모, 장부는 [양]에 속하는데 [음]은 반드시 [양]에 복종해야 되는 것이다. [五常] 즉 [仁, 義, 禮, 智, 信]은 [三綱]의 기초 위에 있는 다섯 가지 도덕준칙이다.  仲舒는 [三綱五常]을 [天]의 의지로 보고 [天不變, 道亦不變]의 논단을 제시하였다. [天]이 영원히 불변하기 때문에 [三綱五常]을 핵심으로 하는 봉건 정치 원칙이자 논리도덕인 [道]도 영원히 불변하는 것이다. 이렇게  仲舒가 유가 경전에 대한 해석과 발전을 통해서 실제로는 유가학설을 일종의 신학으로 변화시킨 것이다. 그가 제시한 정치와 도덕신조인 [三綱五常]은 후에 오랜 기간 중국사람들의 정신적 속박이 되었다.
(2) 宋明理學
유가학설 발전의 세 번째 단계가 송명리학이다. 송명리학은 한대 경학을 계승한 기초아래 불교와 도가사상을 흡수하여 구성된 새로운 유학체계이다. 그것은 [理]를 본체로 하기 때문에 이학이라고 부른다. 송명리학의 중요 대표인물은 宋代의 程氏 두 형제, 朱熹와 明代의 王陽明이다.
[理]의 개념은 宋代 이전에도 있었다. 그러나 [理]가 철학의 가장 높은 범주로 강조 된 것은 북송의 程顧(서기1035-1085년), 程灝(서기1033-1107) 두 형제에서 시작된 것이다. [理] 즉 [天理]는 도대체 무엇인가? 그들은 [理]는 영원히 객관적으로 존재하는-생기지도 멸하지도 않는-것으로 그것은 언제 어느 때나 인간과 세계만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理]는 자연계의 가장 높은 법칙이자 사회의 가장 높은 원칙이다. [理]는 사회의 질서를 실현하는데 그것이 곧 [三綱五常]이다. [三綱五常]은 신성도 침범할 수 없는 [天理]이다.
理學은 南宋에까지 발전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대표 인물은 朱熹(서기1130-1200)로서 자는 元晦이고 호는 晦庵이다. 그는 중국 봉건사회 후기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상가로서 朱子로 불리었다. 그의 학설은 [朱子學]으로 불렸고 대표작으로는 《朱子文集》, 《朱子語類》, 《四書章句集注》가 있다.
朱熹는 [理]의 관념을 심도 있게 계승하였고 이전의 孔子, 孟子,  仲舒 그리고 불교의 관점까지 흡수하였다. 유가도덕을 [天理]에까지 상승시켰고 [天理]를 만물의 본질과 법칙으로 인정하여서 사람을 지도할 때에는 [存天理, 去人欲]이 필요하다고 여겼으며 도덕을 수양하면 성현이 된다고 여겼다. 朱熹는 만물세계에 [理]와 [氣]가 존재하는데 理와 氣가 결합하면 만물을 형성하고 [理]의 총체는 [太極]이고 [太極]의 理는 인간과 만물 중에 존재하며 [三綱五常]이 바로 [太極]의 理라고 여겼다.
朱熹는 [心性論]을 주장하였다. 그는 [心]은 [性]과 [情] 두 부분을 포함한다고 여겼다. 만약에 心이 情을 性으로부터 나오게 하면 心은 곧 道心이고 情은 곧 善이라고 여겼다. 만약에 心이 情을 形氣로부터 나오게 하면 心은 곧 人心이고 情은 善이 아니라고 하였다. 만약에 人心이 팽창하여 욕망이 늘어나면 道心이 사라지고 惡으로 변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은 善의 근거를 가지고 있는데 (人性은 理이자 善이다.) 惡의 가능성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신체를 가지고 있고 각종 물질적 욕구도 가지고 있다.) 人心은 능동적인 것이고 인간은 선하면서 악하므로 이러한 모두는 人心의 선택과 결단에 달려 있다. 만약에 인간을 선하게 완성시키고자 한다면 반드시 道心으로서 주재케 해야 하고 人心은 道心에 복종하게 해야 한다. 朱熹는 비록 天理가 人心에 있지만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바로 천리가 무엇인지 모르고 천리를 알고자 하면 반드시 유가경전 《大學》의 가르침인 [格物]과 [致知]를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格物]이라는 것은 하나의 사물에 포함된 천리를 명백히 하는 것이다. [致知]는 [格物]을 통하여 유가논리를 이해를 하는 것이다. [格物]과 [致知]를 일정한 정도까지 쌓아 올리면 자연히 사물을 환히 꿰뚫어 성현이 된다.
朱熹가 [四書]로 편집한 유가경전인 《大學》, 《中庸》, 《論語》, 《孟子》와 그의 저작인 《四書章句集注》는 후대 중국 과거제도의 필독서이자 표준답안이 되었다.
宋代 程朱理學은 明代에까지 발전되었고 주요 대표 인물은 王守仁이다. 王守仁(서기1472-1529년)의 자는 伯安이고 호는 陽明으로 陽明선생이라 불렸고, 그의 學說은 [王學]또는[陽明學]으로 불렸다.
王陽明이 젊었을 때 朱子學을 연구하였고 후에는 朱子學에 대해 회의가 생겨, 불교에 계몽되어 [心學]을 주장했다. 王陽明의 [心學]과 朱學은 완전히 다르다. 朱熹는 [心]에 대해 理는 외재하는 것이라고 여기고, 王陽明은 내재하는 것, 즉 心은 곧 天理라고 여겼다. 朱熹는 도덕 규범으로 사람을 속박하려 했고, 王陽明은 도덕자각(良心)으로 변형하여 사람을 구속하려 하였다. 朱熹의 [理]는 자연 규범이자 도덕 규범으로 [格物]을 통해 자연 규범에서 도덕 규범을 이끌어 내었고, 王陽明의 [心學]은 도덕관념에만 미쳤지 자연규율에 까지 미치지 않았다. 王陽明의 [心學]은 朱子學에 비해 사람의 주관 능동성을 크게 높여 사람들을 자존심을 가지고 두려움을 모르게 가르쳤으며 외재하는 권위에 대해 맹목적으로 복종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王陽明은 그의 기본사상을 전하기 위해 [知行合一說]과 [致良知說]을 주장했다. 그는 [知]해야 하고 [行]해야 하며, 天理의 [良知]를 현실의 [知]와 [行]으로 변화시키고, [知]방면에서 노력을 기울여 잘못된 생각을 [歸正]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王陽明과 朱熹는 방법상에서 다를 뿐이지, 사실상 근본 관점은 같은 것으로 두 사람 다 [存天理, 去人欲]을 말하고 모두 [三綱五常]을 天理라고 말했는데 그 목적은 봉건의 논리도덕을 보호하기 위함인데 이는 과거의 유가와 완전히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4. 淸代 이후의 儒學
중국이 淸代로 들어 선 이후 송명리학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일부 지식인들은 理學이 내용이 비고 쓸모 없다고 여겨 방치하였다. 그리고 經世致用의 학문을 주장하여 이것이 진정한 유학이라고 여겼다. 경학가인 顧炎武(서기 1613-1682)는 [經學卽理學]이라는 구호를 내세우고, 진정한 유학은 [六經]을 연구할 때 현실을 고려하여 修己治人의 실학을 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顧炎武와 같이 유명했던 사상가인 黃宗羲(서기 1610-1695년)는 陽明學의 自作主宰思想에 영향을 받아 유학의 민주적 정화를 발전시켰고 이전의 군주관을 비평했다. 그는 군주의 [一家之法]을 폐지하고 [天下之法]을 회복하여 [君主民客]에서 [民主君客]으로 바꾸어 국민을 군주의 봉사 대상이 되기를 요구했다. 또 다른 철학가인 王夫之(서기 1619-1692년)는 [道器說]을 주장하고 송명리학의 [存天理, 去人欲]에 대해 비평했다. 理가 欲을 벗어나지 못하고, 理는 欲을 조절하는 준칙이며, 欲이 없어져야 理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여겼다. 淸代의 이러한 사상가들의 관점은 분명히 송명리학과 비교해서 유가에 큰 변화를 일으켰으며 현실세계를 더 중시하고 근대 민주사상의 맹아를 발생시켰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중국은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로 전락하였다. 자본주의와 민주사상이 끊임없이 증가했다. 봉건통치 질서와 봉건논리도덕을 보호하는 공맹지도, 한대경학, 송명리학이 나날이 그들의 보수성과 반동성을 드러내어 사회의 진보를 방해하는 장애가 되었다. 그래서 태평천국 때부터 시작하여 신해혁명과 [오사]운동을 거쳐 신중국이 성립된 이후까지 유가사상의 봉건도덕관에 대하여 가차없이 비판을 가했다. 이런 식으로 유가사상을 비판하는 것이 중국 근현대 사상혁명의 주요 내용이 되었다. 거대한 혁명의 흐름 앞에서 중국을 이 천년이나 통치한 봉건사회의 정신지주-유가사상은 마침내 붕괴되었다. 이 기간에 비록 梁漱溟(서기 1893-1989년)과 熊十力(서기 1884-1968년)을 대표로 하는 현대 신유가학파가 출현하여 서방의 현대사상을 받아들이고 중국 전통 유가사상을 개조하려고 했다. 그러나 자산계급 혁명사상과 마르크스주의 毛澤東 사상이 중국에서 탄생하고 발전함에 따라 중국 전통 유가사상은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고 봉건정통 관념인 유가사상의 역사는 마침내 끝이 났다.
유가사상에 대한 비판 중이던 근현대 혁명사상에서 유가사상이 역사에서 이탈된 단계가 출현한 적도 있다. 분석하지 않고 찌꺼기와 정화를 구별하지 않고 전면적으로 부정해 버리는 극단적이 상황이 발생했으나 이후에 이런 극단적인 경향은 교정되었다. 현재 유가사상에 대한 중국인의 태도는 實事求是이자 一分爲二이다. 중국 역사에 적극적인 영향을 미쳤던 점은 긍정을 하고 보수적이고 소극적이며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던 점은 철저히 부정하였다. 사상의 정화는 계승하고 정신의 찌꺼기는 비판하였다. 어떻든 유가사상은 귀중한 중국문화의 유산이고 영원히 연구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제2절 도가, 법가 등
1. 도가사상
중국의 도가사상은 老子가 창설하였다. 후에 莊子등이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漢武帝가 [獨尊儒術]을 실행한 이후 다른 학파들은 계속 소멸되었지만 老子가 창설한 도가사상은 그림자처럼 유가의 뒤를 따랐다. 도가사상의 지위는 유가사상과 비교할 수도 없지만 중국 전통사상의 삼대 유파 중의 하나이다. 도가는 일종의 인생철학이다. 중국에서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뜻을 세우지 못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매우 유행하였다.
(1) 老子
老子의 생애에 대해 정확하지 않다. 《史記》의 기록에 따르면 老子의 성은 李, 이름은 耳, 자는 聃인 楚나라 苦縣(현재 南 邑縣)사람이다. 孔子와 동시대 사람으로 孔子보다 몇 십 살이 많다. 老子는 周代에 하급 관리로 지낸 적이 있었지만 후에 周왕조의 부패를 보고서 관직을 물러났다. 老子는 孔子와 같이 중국고대의 위대한 사상가이다. 그의 사상은 후인이 편집한 《老子》(《道德經》이라고도 칭함)에 잘 나타나 있다. 老子의 도덕사상의 주요 내용은 무엇인가?
첫 번째, [道]는 [萬物之宗]이다.
老子가 창설한 학파를 칭하는 도가라는 명칭은 [天道觀]에서 나왔다. 老子는 [道]가 [萬物之宗]의 근본관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道]가 세계만물의 본원이자 주재이며 그것은 천지가 생기기 전부터 존재한 것이라고 여겼다. [道]는 형상도 없고, 보이지도 않으며, 종잡을 수도 없고, 소리도 맛도 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또 혼돈 되고 흐리멍텅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여겼다. 세계만물은 모두 [道]에서 생겨난 것이고 모두 [道]를 따라야 한다고 여겼다. 이러한 도의 관념은 老子사상체계의 핵심이자 기초이다.
두 번째는 矛盾對立과 互相轉化이다.
老子는 [道]의 관념에서 출발하여, 세계만물이 변화하는 것이라고 보고 어떤 사물이라도 모두 모순대립과 운동변화 중에 놓여 있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 有無, 難易, 長短, 高低, 美醜, 前後, 剛柔, 强弱, 榮辱, 福禍, 大小, 生死, 智愚, 勝負 등 그들 중에 어떤 것도 모두 서로 대립하고 서로 변화한다. 만물은 모두 생존하고 강해지는 것을 추구하는데, 생존을 추구하는 자체가 실제로는 멸망을 향하는 길이다. 사람은 아는 것을 이용하여 위세를 부리고 싸움을 한다. 행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는가. 老子는 [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 ]이라 말했다. 재화 속에 행복이 들어 있고 행복 속에 재앙이 숨어 있다는 뜻이다. 변증사상은 老子사상의 정화이며 후대사람들에게 계몽적 의의를 지닌다.
세 번째는 無爲而治, 順其自然이다.
老子는 孔子등의 사상가와 달라서, [天道]에 대해서 연구할 때 자연사상을 중시했다. 그가 낸 결론은 天道自然이다. 그 뜻은 이러하다. 자연은 자연이지 다른 무엇인가를 위함이 아니요, 누구의 지배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만물이 발생하고 성장하는 것은 모두 자연스럽게 생기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서 은택이 떨어지면 누구의 명령이 없어도 자연히 균등하게 된다. 즉 만물의 생장변화는 누구의 명령 없이도 자연스럽게 행해진다. 천지만물이 이러하고 인간의 행위 또한 이러하다. 성인이 나라를 다스리면 대 원칙을 세워 작은 일에 간섭할 필요가 없다. 이렇게 하면 백성들도 자연히 진심으로 기뻐하고 탄복한다. 자연의 원칙대로 사물을 대하는 것이 바로 無爲이다. 無爲는 順其自然이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오히려 성공할 수 없고 無爲로 다스리면 천하를 잘 다스릴 수 있다. 이것을 감안하여 老子는 유가의 [禮治]를 반대하고, 법가의 [法治]도 반대했다.
네 번째는 於世無爭, 淸靜求安이다.
이것은 세상에 대처하는 老子의 철학이다. 사람은 마땅히 양보해야 하고 현재 상황에서 만족하며 적극적으로 나아가지 말고 승리하려고 싸우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모든 사물은 약소할 때 생동감 있고, 일단 크게 발전하기 시작하면 죽음으로 다가서는 것으로, 난폭한 사람은 결국 좋은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 천하에서 가장 연약한 것은 물이다. 하지만 물은 강인한 것 위에서 이리저리 다닐 수 있어서 큰 힘이 없어도 그것을 싸워 이길 수 있다. 결국, 약한 것은 강한 것을 이길 수 있고 연약한 것은 강한 것을 극복할 수 있으므로 물 같은 성품이 [道]에 가장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인간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도 이와 같아서 비록 무엇이 강인한 것인지 잘 알아도 부드러운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비록 무엇이 광채 나고 영예로운 것인지 잘 알아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비록 무엇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인지 잘 알아도 비천한 것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한 결과는 오히려 좋은 결과를 얻는다. 낮춘 것이 오히려 충만해 지고 완곡한 것이 오히려 보존하게 되며, 무리의 뒤에 서면 오히려 무리의 앞에 있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도리에 따라서 老子는 사람들에게 치욕을 찾고 만족할 줄 알며 추구하지 말라고 훈계했다. 결국 세상과 싸우지 않고 조용히 無爲하라는 것이다.
(2) 莊子
莊子의 이름은 莊周(약 기원전369-286년)이고 전국시대 宋나라 蒙地(현재 山東曹縣)사람으로 孔子와 동시대에 살았다. 莊子는 지방의 관리로 지낸 적이 있고 老子이후 도가의 대표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후대인은 莊子와 老子의 도가사상을 합쳐서 老庄哲學이라고 부른다. 莊子의 사상은 《莊子》라는 책 속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나 있다.
莊子의 사상은 근본적으로 老子의 사상과 일맥상통하지만 약간의 구별이 있다. 老子의 세상에는 대소, 고저의 차별이 있고, 미추, 선악의 대립이 있다고 여겼지만 莊子는 이러한 차별과 대립을 완전히 부인하고 세상에는 도리를 시비할 수 있는 말이 없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원숭이는 나무 위에서 지내면 매우 편하다고 느끼나 사람은 오히려 위험하다고 느낀다. 반대로 사람은 집안에서 지내면 매우 안전하다고 느끼나 원숭이는 반대로 방안에 갇혀 있으면 매우 견디기 어려워한다. 이와 같이 향기로운지 냄새나는지의 문제서도 알 수 있다. 개는 대변을 먹는 것을 향기롭다고 느끼나 사람은 나쁜 냄새가 난다고 느낀다. 그래서 각각의 물질은 모두 자기가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이 있고 자기에게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않은 것이 있으므로 시비를 변별하는 표준이 없다고 했다.
莊子는 [道]자체는 한계가 없는데 사람이 한계를 만들고 차별을 날조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차별과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시비와 미추, 귀천이 있고 대소, 다소, 성패가 있기 때문에 투쟁이 있다고 했다. 자기가 정확하고 다른 사람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각종의 투쟁이 발생한다. 사실상 사물은 모두 같은 것으로 분별하고 의식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런 애매한 경계에서 분발할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莊子는 세상을 인위적이고 투쟁으로 가득 찼으며 짐작하기 어려운 세계라고 보았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사격장 같다고 보았다. 어떻게 해야 화살이 맞는 것을 피할 수 있을까? 피하는 방법을 취할 수밖에 없다. 첫 번째는 쓸모 있는 사람을 쓰지 않고 부화뇌동해야 한다. 예를 들어 나무는 크면 클수록 사람에게 해를 당한다. 만약에 크기가 작으면 사용할 수가 없어서 자신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 두 번째는 [無己]인데 반드시 자기를 잊어버리고 모든 것을 벗어나야 한다. [無己]의 방법에 이르는 길은 외부의 간섭과 유혹의 영향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슨 일에 대해서 감정을 나타내지 않으며 반응이 둔하거나 관심이 없어서 자기의 존재까지도 망각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러한 경지에 이르게 되면 대자연과 일체가 되고 인생에 가장 큰 자유를 얻게 된다.
결과적으로 莊子와 老子의 기본사상과 생활철학은 같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자연에 순응하고 운명에 만족하며 현실을 도피하고 조용히 無爲하는 것이다. 이렇게 소극적으로 세상을 살라고 부추기는 도가사상은 적극적으로 세상에 나아가라고 주장하는 유가사상과 뚜렷이 다르다. 그것은 역경에 처하고 지위를 잃은 사람에게 매우 쉽게 받아들여지고 그들의 정신적 토대가 되었다. 그리하여 사회가 혼란한 시기, 정치적 암흑의 시기, 천하가 태평하지 않은 시대에 노장사상은 매우 유행했다. 노장사상은 유심적이고 보수적이며 소극적인 면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매우 가치 있는 철학관점으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예를 들어 세상은 움직이고 변하는 것이고, 사물의 차별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며, 대립되는 쌍방은 서로 전환되는 것으로 여기는 생각 등이 그렇다. 그래서 노장사상은 유가, 법가사상과 같이 중국에 귀중한 사상문화의 유산이 되었다.
(3) 도가학설의 운명
도가학파는 춘추시기의 老子가 원류이고 전국시기에 형성되었다. 그때 [백가쟁명]중의 하나로서 유가와 서로 대립하며 존재하는 것이었다. 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의지한 것은 법가였고 도가와 유가는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漢代 초기가 되어서 도가사상은 다시 흥기하기 시작했다. 그 주요 원인은 漢高祖 劉邦이 어떤 선비의 의견인 [無爲治國]사상을 받아들였다. 秦나라가 멸망한 이유는 황제의 욕망이 지나치게 크고 법령이 너무 많았으며 형법이 비참했기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無爲]가 나라를 다스리는데 가장 좋은 원칙이라고 여기고 도가사상을 중시하게 되었다. 劉邦이 죽은 후에 曹參은 재상이 되어 無爲로 다스리는 정책을 계속 사용하였다. 황제가 솔선 수범하여 근검절약하고 백성들의 세금을 감면해 주었으며 형법을 가볍게 해서 사회, 경제는 발전되었고 도가사상은 좋은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도 있었다. 예를 들어 상하존비의 질서를 중시하지 않아 제후국의 왕들이 자기의 세력을 확장시킨 문제가 있다. 이 때문에 漢武帝때 천하를 다스리기 위하여 유가사상의 [罷出百家, 獨尊儒術] 정책을 시행하였다. 이렇게 도가사상의 황금시대는 끝이 났다. 그러나 東漢이후 魏晋南北朝시대를 거쳐서 隋唐에 이르기까지 유가, 도가, 인도에서 전해져 온 불가가 합쳐져 점점 더 유·불·도가 합류하는 현상이 생겼다. 그 이후 도가사상은 성쇠의 기복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시종일관 독립적인 지위를 얻지 못하고 유가사상의 보충적 역할을 하며 존재할 뿐이었다.
東漢시기에 국가정치가 점점 더 나빠졌다. 어떤 사람들은 유가사상과 연관이 있다고 여겼다. 도가사상이 새로 흥기하여 사회위기를 구제하도록 기도하였다. 당시 사회는 [太平敎]라고 불리는 道敎조직이 출현했는데 《太平經》이라 불리는 책을 경전으로 삼았다. 《太平經》은 비록 [治國之道]를 연구, 토론하였으나 신비적인 종교적 미신으로 가득 찼다. 老子를 신화시켜서 [太上老君]라 칭하고 사람들에게 공양하고 숭배하도록 하였다. 東漢 말년에 張角이 지도한 농민봉기는 《太平經》을 선전하고 老子를 추종하고 도교를 신봉하는 깃발을 내세웠다. 그러나 새로 흥기한 도교는 東漢후기에 망해 가는 운명을 구하지 못했고 張角의 황건봉기도 실패하였다. 魏晋南北朝 시기에 [玄學]과 도교미신이 성행하였다. 사람들은 도교사상의 치국구세의 도를 장생불노의 신선이 되는 도로 바꾸었다. 이렇게 老子, 莊子 원래의 사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져 갔다. 이후 도교는 중국의 종교가 되어 많은 유파가 생겨났고 외국으로 전파되었다. 도교와 도가사상은 비록 연관이 있지만 두 가지는 다른 것이며 결코 그것들을 혼돈해서는 안된다.
2. 法家 思想
법가는 중국 전통 사상사상 중요한 학파 중의 하나로 전국시기에 형성되었다.춘추 후기에 노예의 계속적인 폭동과 봉건 지주 계급의 흥기로, 원래 노예를 부리던 귀족 통치 계급의 [禮治]가 붕괴하여 그 효력을 상실했다. 그리하여 유가의 [禮治]사상에 대립한 제후국에는 변법 개혁이 출현하여 법치국의 조류를 형성하였다. 전국 초년에 魏나라 재상인 李 (약 기원전 455-395년)가 저작한 《法經》은 魏나라에서 먼저 변법을 실시되었다. 전국 중기에 商 (약 기원전 390-338년)은 秦나라에서 변법을 시행하였다. 그리고 漢나라의 申不害, 秦나라의 愼到 등은 모두 자기 나라에서 변법을 실시하였다. 이들은 모두 다시 각 나라에서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정치가로서 잔여하던 노예주 귀족 계급을 제거하고 봉건적 정치, 경제제도를 건립하고 신흥하는 지주 경제를 발전시키고 강화하였다. 그들은 [변법]을 통해서 구귀족의 정치적 단점을 타파하고, 귀족정치 대신 관료정치로써 국가의 권력을 군주의 손안에 집중시켰다. 이러한 기초 아래에서 그들은 법령을 확실하게 제정하고 공포하여 전국의 사상을 통일하였다. [以法治國]을 적극 주장하고 실행했던 정치가들- 각종 사조로 격렬하게 경쟁하던 춘추전국 시대에-그들의 사상 이론은 큰 영향을 미쳤다. 그들은 [법치]를 핵심으로 주장하였기 때문에 [법가]라고 불린다. 법가의 대표 인물은 앞에서 거론한 李 , 吳起, 商 , 申不害, 愼到 이외에 좀 더 이른 시기에 활동했던 管仲, 子産 등이 있다. 그러나 법가는 하나의 사상학파로서 가장 특출한 대표인물로서 후에 활동한 韓非를 들 수 있다. 그는 선진 법가사상을 집대성한 자로서 중요한 법가 경전과 그의 저작인 《韓非子》가 있고 그것은 후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
韓非(약 기원전 280-233년)는 韓非子로 불린다. 그는 전국 말기의 漢나라 貴公子로서 荀子의 학생이었다. 荀子와 전기 법가사상의 영향을 받아 漢나라 국왕에게 여러 차례 변법을 건의했으나 계속 채용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책을 저술하고 자기의 법가 이론 사상을 정리하여 명백히 저술하였다. 이후에 韓非의 저작은 秦始皇의 눈에 띄어 그는 부름을 받아 秦나라로 갔다. 후에 秦나라 내부의 모순 때문에 韓非는 秦나라 대신인 李斯의 모함을 받았다. 그러나 秦始皇은 韓非의 학설을 운용하여 중국 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다. 이것은 韓非학설과 모든 법가사상의 위대한 승리라고 할 수 있다.
韓非의 학설은 하늘에 반대하는 荀子사상의 기초 위에서 老子사상중의 변증법 요소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천명 귀신을 부정하고 인간의 힘을 숭배하여 사물의 객관적인 규율에 따라 일을 처리할 것을 주장하였다. 韓非는 국가의 흥망이 힘의 강하고 약함의 결과이지 천명 귀신과는 무관하다고 여겼다. 그는 일찍이 趙나라가 燕나라를 물리쳐 낸 것을 예로 들어 말했다. 당시 점에 의하면 趙나라가 대길하고 대성한다고 했는데 결과는 趙나라가 오히려 패했다. 이것은 귀신은 영험한 것이 아니고, 귀신을 믿는 것은 멸망의 상징이라고 설명했다. 韓非는 만물은 모두 자기의 발전 규율을 가지고 있고, 객관 사물은 인식될 수 있는 것으로써 사람은 마땅히 사물의 발전 방향에 따라 인도되어야 하고 사물의 규율에 따라 일을 처리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韓非는 효험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인식된 진위와 언론은 해동된 실효로서 검증의 표준으로 삼아야 되고, 만약 예상된 결과에 이르지 못하면 비록 잘 말하고 매우 노력한다고 해도 소용이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실제를 중시하고 공담공론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 韓非학설도 역시 모든 법가사상의 특색 중의 하나이다.
韓非학설에 가장 뛰어난 내용은 申不害, 愼到, 商 등의 전기 법가사상을 종합하는 기초 위에서, [법치]를 중심으로 하는 法, 術, 勢가 서로 결합한 관점을 주장한 점이다. 韓非는 申不害가 [術]만 말하고 [法]을 중시하지 않고, 商 이 [法]만 논하고 [術]을 말하지 않는 것 모두 군주의 통치에 이익이 되지 못한다고 여기고, 정확한 방법은 法, 術, 勢 세 가지가 결합하는 것이라고 여겼다. 韓非는 먼저 천하를 통일하는 정권의 준칙에 유리한 것은 [法]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전 사회가 모두 [法]을 준수해야 하고 [法]을 위반하는 자에게는 형벌을 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법령을 [名]이라 부르고 법령에 근거해서 상벌을 주는 것을 [刑]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바로 유명한 [刑名之術]이다. 韓非는 중앙집권을 보호하기 위해 [法]뿐만 아니라 [術]도 필요하다고 여겼다. [術]은 군주가 [法]을 근거하여 관료의 수단을 저지하는 것인데 [法]은 공개적인 것이고 [術]은 숨겨진 것으로 [術]이 있으면 군주는 정권을 독점할 수 있다고 여겼다. [法]과 [術]이외에 韓非는 [勢]도 주장하였다. [勢]는 정권을 말하는데 [勝勢]는 곧 [정권을 장악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愼到의 [重勢]설을 받아들여 발전시켰다. [勢]를 [自然之勢]와 [人爲之勢]로 구분하고 [인위지세]를 더 중시했다. 다시 말해서 [勢]와 [法]을 결합하는 것이 정권을 장악하고 공고히 하는 것이다.
이외에 韓非는 중앙집권의 봉건 전제정권의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람들의 사상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오로지 법가만 존중하고 다른 학설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韓非의 주장에 근거하여 秦始皇이 중국을 통일한 후에 법가 정책을 강제로 실행하고 유가등 다른 학파의 문인에 대해 피비린내 나는 진압을 가했다.
결과적으로 韓非의 학설은 선진법가사상에 대한 전면적인 총결과 집대성이었고, 秦始皇을 통해서 법가사상을 정치상의 통치 수단의 최고봉으로 끌어 올렸다. 법가사상이 비록, 秦始皇이 중국을 최초의 통일된 중앙집권적 봉건국가로 건립하는데 도움을 주었으나 秦始皇이 장기간 통치하고 안정시키는 데는 역부족이었다. 秦始皇과 그 2세가 단순한 방법으로 법가정책을 추진하고 엄격한 법을 실행하고 다른 학설을 주장하는 세력과 백성에 대해서 잔인하게 압박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秦왕조는 빠른 멸망을 초래하였다. 漢왕조가 건립된 이후 漢武帝 시기에 는 秦나라의 법과 다른 [罷出百家, 獨尊儒術]의 신정책을 시행하여 유학사상이 관학의 정통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법가학파는 이때부터 사라져 후에 중국에서 다시는 새로운 법가학파가 출현하지 않았다. 법가학파가 비록 사라졌지만 법가사상은 사라지지 않고 봉건통치 정권을 강화하는데 여전히 유용했고 역대봉건통치 계급에 의해 계승되어 왔다. 유가사상과 도가사상은 강유관계, 표리관계로서 서로 보충되어, 봉건지주 계급이 중국을 통치하는 주요 사상이 되었다. 법가사상은 서로 다른 정치학설로서 그 기본 내용은 중국의 주요한 사상문화 유산으로서 여러 지방에게 계몽과 거울의 역할을 하였다.
3. 기타 학파
중국 전통사상은 유가, 도가, 법가 세 가지 주요 학파를 외에 여러 다른 학파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묵가와 병가를 소개하겠다.
(1) 묵가
묵가의 대표 인물은 墨子(약 기원전 480-420년)이다. 墨子의 성은 墨이고 이름은 翟인 전국시대 宋나라 사람이다. 墨子는 일찍이 유가학설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후에 유가를 배반하고 홀로 묵가학설을 세웠는데 그 주요 사상은 《墨子》라는 책 속에 나와 있다.
墨子는 그의 저작 중에서 열 가지를 주장하였다. 즉 兼愛, 非攻, 尙賢, 尙同, 天志, 明鬼, 非樂, 非命, 節用, 節葬이다. 이 열 가지 주장은 그의 정치, 논리, 철학 사상에 집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兼愛]는 墨子學說의 핵심이다. [兼愛]라는 것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동등하게 대우해야 한다는 것이다. 墨子는 사회가 혼란하고 서로 공격하고 해치는 원인이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만약에 사람들끼리 서로 사랑하고 위해 준다면 사회의 평등과 안정을 유지할 수 있다고 여겼다. 墨家의 이러한 [兼愛]사상은 표면상으로는 유가의 [愛人]사상과 동일하게 보이나 실제로는 같지 않다. 유가가 주장하는 [愛]는 등급이 있는 것으로 친분의 두터움을 강조하고 墨家의 [愛]는 평등한 것으로 구체적이고 서로간의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다.
[兼愛]를 주장하면 당연히 [非攻]을 주장하게 된다. 墨家는 춘추전국의 겸병전쟁이 의롭지 못한 것이고 [兼愛]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라고 여겼다. 墨子는 다른 나라를 무력으로 공격하는 전쟁을 반대하였지만 방어적인 전쟁은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 예로 그가 일찍이 宋나라를 도와 楚나라를 방어해 준 적이 있다.
[兼愛]사상에서 출발하여 墨子는 정치상에서 [尙賢], [尙同]을 주장하였다. 그는 [官無常貴, 民無終賤, 有能則擧之, 無能則下之.]라고 말했다. 재능만 있으면 보통사람도 관직에 있을 수 있고 만약 재능이 없다면 원래 지위가 높은 사람도 마땅히 계급을 낮춰야 한다는 뜻이다.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天子]도 현자가 담당해야 한다는 [尙同]을 주장하였다. 당시에 이것은 매우 대담한 평등사상이었다.
[天志]와 [命運]은 墨子의 [兼愛]설의 이론 근거이다. 그는 나라가 크든 작든 사람이 어리고 나이 들며 귀하고 천한 것에 상관없이 모두 하늘에 속해 있어서 마땅히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여겼다. 대국이 소국을 공격하는 것, 대가가 소가를 어지럽게 하는 것, 강자가 약자를 업신여기는 것, 부귀를 가진 자가 빈천한 자를 경시하는 것은 모두 하늘의 뜻에 위배된다고 여겼다. 하늘의 뜻을 따르면 하늘의 보상을 받을 수 있고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 받듯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을 [天志]라고 한다. [明鬼]는 귀신을 믿는다는 뜻이고 귀신은 하늘의 [賞善罰惡]을 도울 수 있다.
墨子의 [天志]논은 모든 것을 [命運]의 관점과 더불어 [非命]의 관점도 주장했다. 그는 빈부, 치란, 안위 등은 [力]이 결정한다고 여겼다. 만약에 [命]을 믿기만 하고 노력을 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고, [天]은 열심히 노력하는 자를 좋아하고 상을 준다고 여겼다.
이외에 墨子의 열 개의 주장 중에서 [非樂], [節用], [節葬]도 있다. 이 모두가 사람들에게 권계하는 구체적인 주장이다.
墨子는 몰락한 귀족집안의 출신으로 宋나라에서 관리로 지낸 적이 있다. 후에 지위가 비교적 낮아 수공업의 노동자로 지낸 적도 있다. 그의 학설은 전국 시기에 어지러운 사회 속의 소생산자들이 자기의 지위를 개선하고자 하는 평등 요구에 부응했다. 그래서 자연히 통치 계급의 바램에 부합하지 못했고 秦漢이후 묵가는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묵가학설 중의 평등사상과 예리한 철리적 관점은 연구 가치와 계몽 작용을 했다.
(2) 병가
병가는 춘추전국시대에 출현한 군사사상 학파로서 주요 대표 인물은 孫武, 吳起, 孫 이 있다. 그들의 뛰어난 군사사상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학습되어지고 사용되어졌다. 병가사상은 군사적 가치 이외에도 정치, 경제 등 방면에서 계몽적인 의의를 지닌다.
孫武의 자는 張卿이고 춘추 말기 齊나라 樂安(현재 山東惠民)사람이다. 신원이 정확하지 못하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齊나라의 장군을 지내 왔고 본인도 젊었을 때부터 군사 연구에 열중해 왔고 스스로 전쟁을 지휘한 적도 있었다. 그의 저작인 《孫子兵法》은 춘추 말기와 그 이전의 전쟁 경험을 총결한 것으로서 중국에서 최고로 오래된 우수한 군사 저작이다. 중국뿐만이 아니라 세계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孫子兵法》은 모두 5900자로 計篇, 作戰篇, 謀攻篇, 形篇, 勢篇, 虛實篇, 軍爭篇, 九變篇, 行軍篇, 地形篇, 九地篇, 火攻篇, 用間篇 등 모두 13편으로 나누어져 있다. 이 책은 전쟁의 작용으로부터 전쟁의 태도, 전쟁의 승부 결정의 요인, 총군 사상, 작전 원칙, 전략 전술 등 각 방면에 대해서 논술하였는데, 내용이 풍부하고 논술이 치밀하고 견해가 깊어서 연구할 가치가 있다. 《孫子兵法》중의 많은 관점, 예를 들어 [知彼知己, 百戰不殆], [攻其不備, 出其不意], [以逸待勞, 以飽待飢], [出奇制勝] 등은 이미 백성들이 모두 아는 지당한 이치와 명언이 되었다. 《孫子兵法》은 군사를 지휘하는 사람에게 필히 읽히는 교재가 되었다.
吳起(약 기원전 440-381년)는 앞에서 법가를 소개할 때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는 전국 초기 魏나라 사람으로 魏나라와 楚나라에서 대장군과 재상을 지낸 적이 있다. 그는 위대한 정치가일 뿐 아니라, 변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바 있는 유명한 우수한 군사가 이다. 그는 일생동안 병장들을 데리고 전쟁을 했고 군사 일을 연구했으며, 뛰어난 군사이론 저작인 《吳起兵法》을 썼다. 그 저작은 《孫子兵法》과 같이 중국 고대의 군사 사상사에 있어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孫武, 吳起를 제외하고 춘추전국 시기에 우수한 군사 사상가가 또 있었으니 그는 孫武의 후세 자손인 孫 이었다. 孫 은 전국 중기의 齊나라 사람으로 출생과 사망 연도가 확실하지 않다. 그리고 齊나라의 군사 지휘를 한 적이 있다. 그의 군사 저작인 《孫 兵法》은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전해 내려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장기간 동안 중국 사학계에서는 [孫子]가 孫武인지 孫 인지 또 《孫子兵法》이외에 《孫 兵法》이 따로 있는지 계속 불분명하다. 1972년 4월이 되어서야 山東臨沂縣의 한 무덤 중에서 《孫 兵法》과 《孫子兵法》 두 권이 동시에 출토되었는데, 그제야 이 의문을 풀 수 있었다. 그리고 1천 몇 백년 동안 전해 내려오지 않던 《孫 兵法》이 세상에 나타나게 되었다.
《漢書 藝文志》 기록에 의하면 본래의 《孫 兵法》은 모두 89편이었는데, 현재 사람들이 보고 있는 것은 이미 정리하고 해석하여 상하 두 편으로 나뉘었고, 모두 30편으로 11000자이다. 이 중요한 군사 저작은 전국 중기와 이전의 전쟁 경험을 총결하였고, 孫武, 吳起 등의 군사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다. 《孫子兵法》과 《吳起兵法》과 함께 중국 고대의 군사 이론을 공고히 했다.
춘추 전국 이후, 중국의 각계 역사 시기에서 모두 유명한 군사가가 나타났고 많은 군사 저작을 남겼다. 그들은 모두 다른 정도로 선진 병가의 군사사상을 운용하고 발전시켜 풍부하게 했다. 그러나 중국 군사사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가장 대표성을 띤 군사사상가는 역시 孫武, 吳起, 孫 이다. 그들의 군사사상은 유가, 도가, 법가 등 학파의 사상과 함께 중국 고대 사상의 일부분이 되었다. 이상 소개된 유가, 도가, 법가, 묵가, 병가 이외에 [백가쟁명]의 춘추 전국 시기에는 농가, 명가, 음양가, 종횡가 등의 사상학파도 출현했으나, 소개는 생략하겠다. 중국 전통사상 중 각종 학파의 상황을 꿰뚫어 보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기본 견해를 알아낼 수 있다. 첫 번째, 유가사상은 중국 전통사상의 주요 부분이고 그것은 중국 봉건사회의 정통 사상으로서 대표성을 띠고 중국과 중국인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둘째, 도가, 법가, 그리고 기타 학파 사상은 총체적으로 유가사상의 종속적인 지위에 처해 있었으나 중국 전통사상의 주요 구성 부분이었고 중국과 중국인에게 다른 정도로서 영향을 미쳤다. 셋째, 유가, 도가, 법가 등 학파는 주장이 달라서 서로 대립하고 서로 투쟁했다. 동시에 서로 영향을 끼쳤고 서로 받아들여 후에 점점 융합되어 갔다. 넷째, 중국의 전통사상은 학문이 넓고 깊고 상당히 복잡하기도 했다. 한 방면으로 많은 정화가 있어서 중국인의 지혜를 개발하고 중국인의 미덕을 배양하였으며 중화민족의 정신 문명을 창조하였다. 다른 방면으로는 적지 않은 찌꺼기가 있어서 중국인의 사상을 속박하고 통치 계급의 이익을 보호하였으며 사회의 진보를 막았다. 이런 연유로 중국의 전통사상을 연구할 때는 주의를 기울여 전체를 이해하고 종합 분석하며 찌꺼기를 버리고 정화를 취해야 한다.
제3절 국외에서의 유학
 
중국의 전통사상은 유가학설을 대표로 하고 중국에 대해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외국에서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쳤다. 본 절에서는 유학이 국외에서 발생한 상황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겠다.
1. 아시아의 유학
세계에서 중국유학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은 곳은 아시아다. 아시아에서는 한자문화권이 형성되어 있다. 그 중에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은 고대의 조선과 일본 그리고 베트남이다.
(1) 한반도
중국이 漢나라였을 때 유학이 한반도에 전해졌다. 당시 삼국시기(기원전 1세기-서기7세기)였는데 광범위하게 전달되었다. 그 중에서 고구려는 유학교육의 보급이 가장 빨라서 서기 372년에 태학을 건립하고 [五經], [三史](《史記》, 《漢書》, 《東觀漢記》)를 강의했다. 백제도 적극적으로 유학문화를 널리 보급하였다. 중국남조의 박사를 초청하여 《毛詩》, 《周禮》를 강의하도록 했다. 신라는 유학생을 당나라에 파견하여 유학을 공부시켰다.
신라시기(서기675-935년)와 고려시기(서기935-1392년)의 통치자는 모두 불교를 신앙하였으나 정치사상과 논리사상은 유가였다고 볼 수 있다. 유가를 시행하기 위해서 이 두 왕조는 태학을 설립하고 과를 세우고 문인을 데리고 왔다. 문사로 하여금 유가저작을 인쇄하거나 들여오게 했다. 孔子를 제사지내는 사당을 건립하여 孔子를 모시는 등 분명한 효과를 보았다.
조선(서기 1392-1910년)은 고려 이후에 불교를 버리고, 유학, 특히 주자학을 장려했다. 그리고 주자학을 유일한 정통사상으로 여겼다. 과거 시험 중에 한문과 유학을 시험 쳐야 할 뿐 아니라 무관도 유학을 시험 쳐야 했다. 각종 학교는 유가 경전을 전부 교과 내용으로 하였다. 충효사상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 유가경전을 인쇄하고 출판하는 일 외에 통속적인 책을 대량으로 편집하고 출판하였다. 장기간의 교화를 통해서 조선은 잔여 하던 무를 숭상하는 세태를 변화시켰다. 조선은 거의 유가왕조가 되었고 유가는 그 전성기를 맞았다. 조선역사상 유학, 주자학의 전래와 훈도로 높은 수준을 지닌 많은 한학가가 출현했다. 이차세계대전 이후가 되어서야 유가사상은 한반도에서 통치지위를 잃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통치문화로서 사람들에게 연구되고 이용된다.
(2) 일본
일본은 중국과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다. 1700여년 이전을 근거해서 《論語》는 한반도를 통해 일본으로 전해졌다. 그 당시 일본은 원시사회에서 노예사회로 넘어가던 시기였다. 가족제도는 있었으나 그것에 상응하는 종법등급사상과 윤리도덕관념이 없었고 문자도 없었다. 《論語》가 전해졌을 때 일본에게 매우 필요하였다. 그래서 유학과 한문은 함께 일본에서 뿌리를 내렸다.
서기 7세기의 일본은 황권과 대표씨족 제도의 구귀족의 모순이 나날이 깊어 갔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서 聖德太子는 서기 604년에 17조헌법을 제정했다. 이 헌법은 두 번째 조항을 제외한 나머지 조항은 모두 忠, 信, 仁, 禮등 儒家신조였다. 예를 들어 [君臣有禮, 位次不亂; 百姓有禮, 國家自治]등이 있다. 서기 646년 李德 天皇은 [大化革新]을 시행하고 중국 唐나라를 모방하여 중앙집권적 정권을 세웠다. 이로서 일본은 유가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통일된 봉건국가가 되었다. 중국 隋唐시대에 수많은 사학자들과 유학생을 파견하여 유가경전을 공부하고 유가서적을 수집하였다. 일본수도에서 대학을 하고 지방에서도 국학을 설립해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한문화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본의 奈良시기(서기 710-794년), 平安시대(서기 784-1192년)는 중국의 불교가 일본에서 성행하였다. 동시에 일본은 여전히 유가교육을 실시했고 특히 [三綱五常]의 忠, 孝, 禮 관념을 민간에게 보급시켰다. 孝謙天皇은 조서를 내려 집집마다 《孝經》이 있어야 한다고 요구했고 암송하고 그대로 따르도록 요구했다. 정부의 관직자들은 仁, 義, 禮, 智, 信을 수양한 사람을 뽑도록 요구했다. 서기 701년 日本은 孔子에게 제사지내기 시작했고 서기 768년 孔子를 文宣王으로 존칭했다. 모든 관리는 孔子의 제사에 참가하고 대학의 관료에게 유경을 강의하든지 황제가 박사를 초빙해 유경을 강의하도록 하였다.
서기 1192년 이후 일본은 막부시대로 도립해서 무사계급이 국가정권을 통제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요구에 따라 유가의 忠, 勇, 信, 禮, 義, 廉, 恥와 불교의 不念生死思想을 취해 무사도 정신을 형성하였다. 유가사상은 무사도 정신의 근원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이후에도 유학은 계속해서 중시되었다. 1603년 德川幕府가 성립되어 명치유신에 이르기까지가 일본 봉건사회의 고도로 발전된 시기이다. 이 시기에 중국 朱熹의 理學은 일본에서 통치지위를 차지하였고 일본의 유명한 사상가인 藤原惶窩와 그 제자 林羅山의 노력으로 朱子理學은 德川시대의 관학이 되었다. 명치유신 이후 유학은 여전히 정부에게 중시되었고 유가논리 도덕은 중학, 소학의 도덕교육의 주요내용으로 규정되었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유가사상은 일본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심지어 어떤 부분에서는 중국보다 더 많이 보존되었다. 예를 들어 남존여비, 충효의식, 등급관념, 예절례의의 중시 등이다.
(3) 베트남
베트남도 중국의 이웃으로 오래 전부터 중국문화를 받아들였다. 역사상 양한에서 隋唐 五代에 이르기까지 베트남은 중국의 군 현으로 천여 년을 지냈다. 그리하여 유가문화도 베트남의 전통문화가 되었다. 서기 939년 베트남은 吳나라를 건립하여 독립을 선포했고 이후 李나라, 陳나라를 거쳐 모두 유학을 제창하였으며 유학은 의식형태에서 통치지위를 차지하였다.
유학이 베트남에서의 전성시기는 后黎(서기1428-1789년)와 阮朝前期(서기 1802-1884년)이었다. 后黎시기에 베트남은 정치, 문화, 민속 등의 영역에서 유가를 전면적으로 실행하도록 주장하였다. 황제는 숭유법령을 제정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 집행하기도 했다. 조정에서 과거시험 중에 규정을 분명히 하였다. 시험을 치르는 자는 반드시 부모가 있어야 되고 그들에게 덕행을 했다는 보장이 있어야만 된다. 만약에 언행이 유가의 논리도덕에 부합하지 않으면 시험에 참가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유가의 綱常을 민간에 보급하기 위해서 조정은 〈敎化四十七條〉를 공포했는데 그 기본내용은 다음과 갔다. 臣盡忠, 子盡孝, 兄弟和睦, 夫婦相愛, 朋友守信, 父母敎子, 師生重道, 男尊女卑 등이 있다. 19세기 이후에 院朝는 계속해서 유가를 숭상했다. 먼저 황제에서 백성에 이르기까지의 유가교육을 강화했고 민간의 논리교화에 대해서도 더욱 강조하였다. 동시에 院朝는 孔子를 존중하는 면에서도 베트남 역사상 최고봉에 다다랐다. 孔子를 제사지내는 사당을 크게 수리하고 [至聖先師]라는 존호를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황제가 직접 그 곳에 가서 孔子에게 무릎을 꿇었다. 黎, 院朝는 수많은 유학 대가를 배출해 냈다.
1884년 프랑스가 베트남을 점령해서 식민통치를 실행하고 漢文,  文과 과거제도를 폐지하였으며 프랑스어와 로마자로 표기된 베트남 어를 보급했다. 이때부터 베트남의 유학과 한문화전통은 끊어져 버렸다. 그러나 2000년 역사전통의 영향으로 베트남의 일부 사람들은 여전히 유학과 한문화를 연구했다.
이상의 상황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유학을 대표로 하는 중국전통문화는 아시아의 국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고 문자와 선진적인 철학, 논리, 정치사상, 통치경험을 가져다주었다. 노예제에서 봉건제로 바뀌던 우매한 나라들에게 문명으로 하는 중요한 추진역할을 했으며 거대한 한 문화권이 형성되게 하였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후 유가의 작용은 근본적으로 변화되었으며 그를 보호하던 봉건과의 관계는 이미 시대가 흘러가 그것은 점점 더 보수적으로 변하게 되어 마침내 신흥하는 자본주의 의식형태와 사회주의 의식형태로 인해 역사의 뒷면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2. 유럽에서의 유학
중국의 유가사상은 아시아에게 큰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유럽에게도 전파되었다. 아시아와 달리 그것은 근대에 생긴 일이며 동방사상과 서방사상의 첫 번째 융합이라고 볼 수 있다.
중국과 유럽은 고대에 비단길을 통해 교류한 바가 있으나 진정으로 유가사상이 유럽에 전해져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은 明淸시기에 유럽에서 온 선교사들에 의해서이다. 16세기 말엽 처음 중국에 온 이탈리아의 선교사는 Mateo Ricci(서기 1552-1610)이다. 그는 서기 1582년에 중국에 와서 28년을 살았기 때문에 중국의 상황과 전통사상에 대해 깊이 이해했다. 그는 힘들게 유가경전을 공부한 바가 있어서 유가사상이 중국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알았고 유학과 천주교를 결합시켜 중국에게 선교했다. 그리하여 그는 유학논으로 천주교 교의를 증명해서 중국인들에게 전파시켰고 번역을 하여 유럽인들에게 중국과 유학을 소개시켰다. 그의 저작은 이탈리아와 유럽에서 강한 반응을 일으켰고 이것으로 [박학서유]의 칭호를 얻었다. Mateo Ricci이후 서방에서 많은 선교사가 왔는데 그들 대다수는 그와 같이 선경을 같이 하고 유경을 강의했다. 예를 들어 유럽의 선교사인 Julio Aleni(서기 1582-1649년)는 福建에서 몇 년 동안 선교를 했는데 그 지방 사람들에게 [서방에서 온 孔子]라고 불렸다. 1687년 선교사인 Prosper Int orcetta(서기 1624-1696)등의 사람들의 《中國之哲人孔子》가 파리에서 출판된 이후 유럽의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모두 孔子가 도덕과 정치철학의 최고의 대학자였다고 여기고 유학에 대한 찬미는 최고봉으로 올랐다.
유가 경전은 선교사와 유럽을 떠돌던 화교의 번역으로 소개되었고, 서유럽 각국에 끊임없이 출판되었다. 이로 인해서 유럽 사람들은 중국을 주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중국 붐이 일기도 했다. 18세기 프랑스의 선진 사상가들은 유학에서 지대한 고무와 계몽을 받았다. 프랑스의 유명한 계몽사상가인 Voltaire(서기 1694-1778년)는 孔子의 도덕 사상을 완전히 숭배하였다. 중국은 이천 년 동안 천자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도덕을 수양하는 것을 본체로 삼아 孔子가 말하던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따라서 국가와 백성을 안정시킬 수 있다고 여겼다. 孔子사상의 위대한 위력 때문에 일부 중국을 정복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중국의 전통 사상문화에 정복되었다. Voltaire는 자기의 저작 중에서 늘 孔子사상을 찬미하였고 그는 孔子의 초상화를 자기의 예배당에 걸어 두고 매일 절을 했다. 프랑스에서 백과 사전을 펴낸 대표적인 인물인 Holbach(서기 1646-1716년)는 孔子의 덕치사상에 대해 매우 숭배하였다. 그는 유럽 정부가 반드시 중국을 공부해야 하고 유럽의 기독교 도덕도 유가도덕으로 대신해야 한다고 여겼다.
18세기의 독일 사상계에서도 孔子의 붐과 유학의 붐이 일어난 적이 있다. 독일의 철학가이자 수학가인 Leibniz(서기 1646-1716년)는 중국의 고대 문화를 매우 좋아했다. 그는 유가경전을 읽고 중국의 정치와 논리를 모범으로 여겼다. 만약에 유럽이 중국의 유학을 도입하고 중국이 유럽의 자연과학을 받아들인다면 인류의 행복인 증진할 것이라고 여겼다.
당시 계몽 운동이 유행하던 서유럽에서 유가사상이 왜 그렇게 큰 반향을 일으켰겠는가? 봉건 종법 등급제였던 동방 사상 체계가 왜 서방 자산 계급의 계몽 운동에 도움을 줄 수 있었겠는가? 그 원인은 당시의 프랑스, 독일 계몽사상가들의 주요 투쟁목표가 기독교 문화였기 때문이다. 기독교 문화를 비판하기 위해서 중국유학을 크게 이상화시켰고 자기의 희망과 이해에 따라서 유학의 적극적인 작용에 대해 과대 해석하였다. 그래서 열렬히 사상계몽을 요구하던 사람일수록 더욱더 유학을 찬미하였다. 당시의 영국은 새로운 사회질서가 이미 자리가 잡혀서 프랑스 같이 강렬한 계몽적인 요구가 없었다. 그래서 중국유학을 보는 관점이 비교적 객관적이고 실제적이어서 열렬한 찬미는 없었다. 어떻든지 간에 18세기의 서유럽은 일종의 중국붐과 孔子붐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세계가 19세기에 들어선 이후 자본주의의 빠른 발전에 따라 중국 봉건사회의 급격한 쇠락 때문에 서유럽의 각국은 중국에 대한 태도가 근본적으로 변화하여 유가사상이 자리잡고 있던 그들 마음속의 위치가 점점 내려갔다. 그러나 중국을 연구하는 주요 방면에서는 지금까지 적지 않은 유럽학자들이 유학을 연구하고 있고 중국의 기타 전통사상 문화도 포함해서 연구하고 있다.
제10장 중국의 문학
 
문학은 한 국가, 한 민족 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이다. 중국은 수 천년에 걸친 문명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그 찬란한 문화는 문학 부분에서 두드러진다. 그래서 중국 문화를 이해하려고 한다면, 반드시 중국 문학을 이해해야 한다.
중국 문학은 고대문학, 근대문학, 현대문학, 당대문학 네 가지 시기로 나뉘는데, 고대문학은 선진에서 청대 중기의 문학을 가리키고, 근대문학은 1840년 아편전쟁에서 1919년 5·4운동 전야까지의 문학을 가리키고, 현대문학은 5·4문학혁명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시기의 문학을 가리키고, 당대문학은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의 문학을 가리킨다.

제1절 고대문학
풍부한 중국 고대문학의 유산은 중국 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이다. 중국 고대문학사는 일반적으로 여덟 개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상고시대에서 전국시기 문학인 선진문학 ; 진한문학; 위진남북조문학 ; 수당오대문학 ; 송대문학 ; 원대문학 ; 명대문학 ; 청 초에서 청 중엽사이의 문학.
중국 고대문학의 매 단계마다 대량의 작가와 작품이 출현했고, 각각 뛰어난 성과와 특징이 있었다. 일종의 습관적인 표현법이 있었다. 예를 들어 : 先秦散文, 楚辭, 漢賦, 唐詩, 宋詞, 元曲, 明淸小說 등이 있다. 이것은 고대 각 시기 문학의 성과와 특징을 가장 고도로 표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중에 한 가지를 제시하면 어느 시대의 뛰어난 작가와 작품인지 금방 연상케 한다. 우리는 아래에서 중국 고대문학의 가장 뛰어난 성과를 역사에 따라 차례대로 간단히 소개하고자 한다.
1. 《詩經》과 《離騷》
중국 최초의 문학은 신화에 관한 얘기이다. 이점은 유럽문학에서 발원한 신화와 같다. 그러나 그 시기에는 문자 기록이 없었던 관계로 전해 내려오던 것이 극히 적었다. 선진시대(즉 진대 이전의 하, 상, 주에서 춘추전국시대까지)가 되어서 중국문학 성과의 뛰어난 대표작은 《詩經》과 《離騷》이다.
《詩經》은 춘추시기에 편집한 시가의 문집인데, 중국 최초의 시가문집이다. 그 시가집은 서주 초기에서 춘추 중기에 이르기까지 약 500년 간 305편을 수집한 것이다. 그 중에 《國風》(주대 15개 제후국의 민가를 포함) 160편과 《大雅》, 《小雅》 105편,《頌》 40편 있다. [風], [雅], [頌]은 원래 음악의 분류로서, [風]은 각 지방의 향토 악곡이고, [雅]는 周왕조가 직접 통치한 지역의 악곡이며, [頌]은 불교 제사음악이다. 다시 말해서 《詩經》중의 수집된 시가는 모두 악곡의 가사이다. 《詩經》중의 시는 네 개의 글자를 한 구로 하는데 [사언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 [昔我往矣 , 楊柳依依; 今我來思, 風雪  . 行道遲遲, 載渴載飢; 我心傷悲, 莫知我哀.] (小雅《采薇》)
《詩經》의 정수는 《國風》과 《小雅》의 민요에서 당시 각양각색의 생활현실을 표현했다. 그 중에서 사회에 대한 불만, 애정과 행복, 남녀 애정에 대한 내용이 비교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런 시가는 내용이 순박하고 건전하며, 언어가 소박하고 아름다우며, 구체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표현을 썼다. 게다가 賦, 比, 興의 수법을 써서 예술의 가치를 더욱 높였다. 그리하여 《시경》은 중국문학 발전에 있어서 매우 이른 상징이 되었다. 유럽에서 가장 빠른 대표적 문학 작품인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보다 더 빠르다. 《시경》의 현실주의 창작방법과 예술 표현수법은 후대 중국문학에 대해서 특히 시가창작에 대해서 큰 영향을 미쳤다.
《離騷》는 중국 문화사上 위대한 시인 屈原이 창작한 장편시이다. 屈原(기원전340-278년)은 전국시대의 楚 나라사람으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깊은 문화수양을 갖추었고 큰 정치적 포부가 있었다. 그는 고관 左徒를 지낸적이 있었으나 후에 배척 당하여 楚懷王에게 추방당했다. 극도로 슬프고 분하여 湖南의 湄羅江에서 자살하였다. 그는 많은 시가를 썼다. 《九歌》, 《天問》, 《九章》, 《遠游》등이 있다. 그 중에 성과가 가장 크고 대표적인 것은 《離騷》이다. 전시는 모두 373구 2490자로 되어 있는 중국 고대에서 가장 긴 서정시이다.
《離騷》의 [離]는 [불행을 만난다], [멀리 떨어진다]는 뜻이고 [騷]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울분에 차 있다]는 뜻이다. 이 시는 강렬한 감정으로 屈原의 조국에 대한 열애를 표현하였고 이상의 추구, 어두운 면에 대한 비판, 나쁜 사람에 대한 미움에 대해서 시인의 인격과 진리를 추구하는 굴하지 않는 정신을 반영하였다. 예술 형태에서 《이소》는 《시경》이래 [사언체]의 한계를 극복하여 비교적 자유로운 장단구 형식을 취하였다. 상상이 풍부하고 특이하며 감정은 강렬하고 자유 분방했으며, 대비와 과장 등의 예술 수법을 사용했으며 그 영향력이 매우 컸다. 《이소》의 출현은 새로운 시체인 [騷體詩]를 창조하였고 시 중의 매 구마다 모두 [兮]자가 있다. 예를 들어 [民生各有所樂兮, 余獨好修以爲常. 雖體解吾猶未變兮, 豈余心之可懲!], [吾令羲和 節兮, 望  而勿迫. 路漫漫其修遠兮, 吾將上下而求索.(민생은 각각 즐기는 바가 있고, 나는 홀로 몸 닦는 것을 좋아해서 이것을 정상으로 삼네. 비록 몸의 수족이 베어진다 해도 나는 오히려 변치 않으니, 어찌 내 마음이 변하랴! 내 희화로써 시간의 깃대를 멈추게 하고, 엄자를 바라보며 재촉하지 못하게 하네. 길이 만만하여 그 갈 곳이 먼데, 내 장차 오르내리면서 어진 임금을 구하리)] 등을 낭독하면 일종의 독특한 리듬과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중국문학사에서 《詩經》은 현실주의 문학에 있어서 시의 경전이고 《離騷》는 낭만주의 문학의 근원으로 그것들은 모두 매우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2. 《史記》와 [建安文學]
중국의 한대에는 賦와 散文이 매우 발달하였고 漢樂府民歌도 발달했으며 동시에 [오언시]도 흥기하였다. 그 중에서 역사산문에 위대한 저작이 출현하였는데 바로 司馬遷의 《史記》이다.
司馬遷(기원전145-90년)은 중국 한대의 유명한 역사가이자 문학가이다. 그는 11년의 기간동안 거작인 《史記》를 완성했다. 《사기》는 《本紀》, 《表》, 《書》, 《世家》, 《列傳》을 포함하고 있으며 모두 130편으로 52만 6천 5백자이다. 《본기》는 역대 제왕의 정치적 기록을 서술하였다. 《표》는 각 역사 시기의 기록서이다. 《서》는 개별적 사건의 시말 문헌이다. 천문, 역법, 수리, 경제, 문화, 예술방면의 발전과 현황을 구분하여 서술하였다. 《세가》는 귀족, 제후, 왕의 역사를 중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열전》은 각종인물의 전기가 쓰여져 있다. 책 전체에는 중국 상고시대부터 한나라 초기까지 3천년에 이르는 역사를 서술했다. 중국의 紀傳體 사학과 기전체 문학을 창설하였다. 그것은 거대한 역사적 가치를 지나고 있을 뿐 만 아니라 중요한 문학적 가치도 지니고 있다. 특히 《본기》, 《세가》, 《열전》중에 쓰여진 각종 인물은 역사상의 인물을 기록한 것이지만 소설 속의 인물과 같이 매우 형상적이고 생동적이다. 후에 생겨난 산문, 소설, 희극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한대가 끝나고 위진 남북조 시기의 중국은 분열되어 있어 어지럽고 불안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문학에서는 [三曹(曹操, 曹丕, 曹植 부자)]를 대표로 하는 [建安文學]이 출현했는데 그들의 시가는 비분강개의 색채가 짙다. 예를 들어 조조의 《短歌行》이 있는데, [對酒當歌, 人生幾何? 譬如朝露, 去日苦多. 慨當以慷, 優思難忘. 何以解優, 唯有杜康. …… (술을 대하고 노래를 하니, 인생이 얼마던가? 인생은 아침이슬과 같아, 지난 날을 돌이켜보니 고통만 많았구나. 강개무량하고 근심은 잊기 어려우니, 어떻게 근심을 풀까? 오로지 술밖에 없구나.)] 이 시는 헤어짐을 슬퍼하고 세월이 유수처럼 빨리 흐르는 것을 탄식하며 정치적인 포부의 실현을 희망하였다. 비분강개의 정서가 충만하고 당시 문학의 시대적 특색을 대표한다.
晉代에 출현한 유명한 시인은 陶淵明이다. 그의 시는 주로 전원생활의 체험에 대해 표현했으며 평범한 자연, 멀리 떨어진 세속, 유유자적의 독특한 경지와 정서를 창조하였다. 그래서 도연명은 중국 제일의 [전원시인]으로 불린다. 陶淵明의 산문인 《桃花源記》는 [무릉도원]의 장면을 묘사하였고 풍격과 정서는 시가와 마찬가지로 매우 유명하다.
3. 唐詩
唐詩는 중국 봉건사회에 흥성하던 시기로서 문학에서도 전면적으로 번영하던 시기였다. 특히 [시가] 부분에서 찬란한 성과를 얻어 역사상으로 최고봉에 올랐다. 이 시기에 출현한 유명한 시인과 작품은 셀 수가 없고 현존하는 《全唐詩》에 기록된 시인의 이름이 2천2백여 사람에 이르고 시가는 5만수에 달한다. 당시 시가 창작 중에서 가장 유명한 시인 중에는 李白, 杜甫, 白居易가 있다.
李白(서기701-762년)의 자는 太白이다. 어려서부터 문학, 유람, 검술을 좋아해서 일생동안 수많은 명산대천을 유람하였고 거의 중국의 절반을 유람하였다. 이백의 성격은 호방하여 술을 좋아했으며 재능도 뛰어났다. 42세에 수도 長安(현재의 西安)에 추천되어 관직을 지낸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집권자를 비판하고 자유분방해서 높은 관직의 사람에게 배척 당해, 3년만 사직하고 또다시 유람하였다. 최후에 곤궁하여 별세했다.
李白은 굴원이후 중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이다. 그는 일생을 유람으로 지내면서 시를 지었다. 그의 시는 지금까지 9백여 수가 있다. 생활방면을 매우 광범위하게 반영하였는데 집권자에게 항거하고 정의를 지키는 것, 통치자의 부패와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는 것, 조국의 장려한 강산을 묘사하고 노래하는 것 등의 내용이 시에 나타나 있다. 그는 역경에 처하여 배척 당한 정서 때문에 어떤 시에는 극한 고독감과 소극적인 감정과 속세를 피해 은거하는 사상이 반영되어 있다. 이백은 명산대천을 유람하던 중에 자연 묘사와 서사, 서정을 서로 결합시킨 유명한 시편을 창작하였는데 예술성이 가장 높았고 영향도 컸다. 예를 들어 《촉도의 어려움(蜀道難)》,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早發白帝城)》, 《고요한 밤에(靜夜思)》,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등이 있다.
李白의 시가는 예술의 창조성에 있어서 굴원의 전통을 발산했고 민간언어에서 풍부한 영양을 받아들였다. 대담한 과장과 기묘한 환상, 아름다운 신화를 운용하는 것을 좋아했고 열렬히 솟구치는 사상성으로 자신을 남김없이 다 표현하여 독특한 낭만주의 시가 풍격을 창조하였다. 그의 시가 언어는 조예가 깊었고 생동적이며 아름다웠다. 소박하고 자연스러웠으며 음조가 유창하고 변화무쌍하였다. 《여산 폭포를 바라보며(望廬山瀑布)》의 [日照香爐生紫煙, 遙看瀑布掛前川. 飛流直下三千尺, 疑是銀河落九天.(해는 향로봉 비추어 보랏빛으로 물들고, 저 멀리 폭포는 긴 강을 걸어 놓은 듯 쏟아진다. 그 물줄기 곧추 3천자 밑으로 흘러 떨어지나니, 흡사 은하가 하늘에서 흘러내리는 듯 하구나 ]에서도 이러한 특징이 보여진다.
李白은 중국 고대 시인 중 가장 뛰어난 대표적 인물 중의 한사람이다. 그의 시가는 중국의 시가창작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도 매우 유명하다.
杜甫(서기 712-770년)는 이백과 동시대 사람이었으나 그 시기의 당나라는 번영에서 쇠락으로 치닫고 있던 시기였다. 당 나라를 쇠락으로 이끄는 [安史之亂]중에 두보는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반란군에게 잡혀 있었다. 후에 그는 임금에게 직간하는 직책에 오른 적이 있었으나 곧 배척 당했다. 전 가족이 유랑하는 신세가 되어 늙어서는 成都(현재 杜甫草堂)에 거처를 정했고 최후에는 외출 도중에 부서진 배 안에서 병들어 세상을 하직하였다. 두보의 일생은 재난으로 사방을 떠돌아다니는 일생이었다. 그는 직접 통치계급의 부패를 목격했으며 백성들의 어려움을 경험하였기에 그의 詩속에는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정서가 강렬하게 나타나 있다. 두보의 일생동안 창작된 대량의 시가는 대부분 앞에서 언급한 내용이 반영되어 있는데, 《미인의 노래(麗人行)》, 《북징(北徵)》, 《전출새(前出塞)》, 《관리에 대한 시 세 편(三吏)》, 《이별에 대한 시 세 편(三別)》등이 그러한 예이다.
杜甫 시가의 최대 성과와 특색은 현실주의이다. 그의 시는 직접 체험한 사회생활에서 제재를 취하고 있다.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는 정서는 객관적, 구체적 묘사로 나타났으며, 깊은 현실성과 정치성을 지니고 있다. 그의 예술 풍격은 이백의 낭만주의 시풍과는 달리 [沈鬱頓挫]이다. 예를 들어 [國破山河在, 城春草木深. 感時花千淚, 恨別鳥驚心.(나라는 망했으나 실천은 의연해 봄 깃든 생각에 초목이 무성해라. 시절이 서러워 이별이 한스러워 새소리에 놀라누나.)]이 있다. 《봄날에(春望)》는 개인의 불행과 사회의 동란이 잘 결합되어 있어 시인의 조국 산하에 대한 애정과 현실에 대한 걱정이 진실 되게 표현되어 있어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예를 들어, [朱門酒肉臭, 路有凍死骨.(부잣집엔 술, 고기 썩어 나는데, 길가에는 얼어죽은 시체 널렸네.)]는 부귀에 대한 증오를 선명하게 폭로하고 있으며, 어두운 사회현실에 대한 분노를 강렬하게 표현하여서 고금이래 찾아보기 힘든 유명한 문구가 되었다.
杜甫의 시가는 周代民歌와 漢樂府民歌의 전통을 계승하였다. 그의 시는 강렬하게 현실 사회를 반영하여 [詩史]로 불려진다. 그는 위대한 현실주의 시인으로 불린다.
白居易(서기 772-846년)는 두보 이후의 뛰어난 현실주의 시인이다. 그는 젊은 시절의 생활이 매우 어려워서 29세에 과거에 합격한 후 십여년 동안 조정에서 관직을 지냈고, 43세에 江州에서 지방관으로 지내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집에서 은둔 생활을 하였다. 唐代 시인 중에서 그가 창작한 시가의 수량이 가장 많았는데 모두 1400여 수가 있다. 백거이는 자기의 시가를 諷諭詩, 閑適詩, 感傷詩, 雜律詩 네 가지로 나누었다. 그 중에 가장 가치가 있고 현실주의 색채가 짙은 것은 풍유시로서 모두 170여 수가 있다. 내용은 통치자의 부패와 횡포를 분노하여 폭로하거나, 핍박받고 억압받는 백성에게 동정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숯파는 노인(賣炭翁)》, 《두릉의 늙은이(杜陵 )》, 《상양궁의 백발처녀(上陽白發人)》 등이 있다. 그의 감상시 중에는 장편 敍事詩 《장한가(長恨歌)》와 《비파행(琵琶行)》은 내용이 완곡하고 감정이 진실되며 예술성이 풍부해서 매우 유명하다. 백거이는 그의 시가이론과 창작 실천으로 새로운 시가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시가의 사회 작용을 강조하여 정치와 현실 생활을 밀접하게 결합시켰으며 내용을 위해 형식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영향은 매우 커서 문학사상 [新樂府運動]으로 불린다.
李白, 杜甫, 白居易 이외에 중국 唐代의 유명한 시인으로는 陣子昻, 盟浩然, 王維, 高適, 李賀, 孟郊, 杜牧, 李商隱, 司空圖 등이 있다.
4. 宋詞
당대문학의 기초에서 시, 사, 산문을 포함해서 송대문학은 새로운 발전을 이룩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이 사이다.
소위 [詞]라는 것은 고대시가의 일종이다. 그것은 원래 노래를 부르던 가사였다. 특징으로 句의 장단이 일정하지 않고 음의 위치와 성조가 악보에 따라 변화하는 점을 들 수 있다. 사는 당대에 시가 형식으로 형성되었고 송대에 이르러 고도로 발전하여 중국문학사상 독립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당시와 송사를 나란한 권위로 두고 있다.
柳永(서기 987-1053년)은 송대 제일의 전문적인 사 작가이다. 그의 사는 200수가 있고, 시민계층의 사상과 생활정서를 비교적 농후하게 표현하였다. 특히 남녀의 사랑과 이별의 정서를 표현하였고 멋들어지고 함축적인 품격을 지녀서 [婉約詞派]로 불린다. 후에 蘇軾과 辛棄疾에까지 발전되어 애국하는 삶과 호방한 정서를 표현하였고 [豪放詞派]를 창조하였다. 이 두 사람은 중국 송대의 유명한 시인이 되었다.
蘇軾(서기1037-1101년)은 북송시기에 살았는데 어려서부터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박식한 역사, 문화 지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방면의 예술재능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일생동안 정치에 뜻을 펴지 못했다. 조국의 웅대한 자연과 역사의 영웅적인 인물에 대해서 많은 사, 시가, 산문을 창작하였다. 유명한 작품으로 《赤壁賦》, 《后赤壁賦》, 《赤壁懷古》등이 있다. 그는 사부분에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첫 번째는 제재의 선택이 늘어난 것이다. 이전의 사인은 남녀의 애정과 이별 정서를 주로 노래했는데 그는 이점을 타파하고 옛일을 회고하고 옛정을 잊지 않으며 유람을 기록하고 이치를 말하였다. 그는 사로 모든 것을 표현하였는데 사가 가지던 악곡가사의 형식을 탈피하여 독창적인 신체시를 형성하였다. 두 번째는 이전 사인의 완곡하고 함축적인 시풍을 변화시켜 호방한 시풍으로 창조했다는 점이다. 그의 사는 기백이 웅대하고 시야가 넓으며 낭만주의 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 읽는 이는 유쾌해지고 호방한 감정이 솟구치게 된다. 예를 들어 《赤壁懷古》의 [大江東去, 浪淘盡千古風流人物. 故壘西邊, 人道是三國周郞赤壁. 亂石穿空, 驚濤拍岸, 卷起千堆雪. 江山如畵, 一時多少豪杰 ……]을 낭독하면 기세가 넘치고 정신이 트이며 호방하고 분방해진다.
辛棄疾(서기1140-1207년)은 송대 애국시인이다. 그는 金에 항거하여 투쟁한 적이 있고 지방관으로 지낸 적이 있다. 金에 항거하기를 적극적으로 주장했고 항복하는 것을 반대했다. 그의 사는 600여수가 현존한다. 대부분의 내용은 국가가 통일을 회복하고자 하는 정서를 토로했고 애국열정으로 충만해 있으나 원대한 포부가 실현되지 않아 울분에 차 있는 것이 많다. 조국의 자연을 노래하고 농촌생활을 반영하는 작품도 있다. 그의 사에 있어서 예술품격은 소식과 같이 호방한 특징이 있고, 강한 정서와 당당한 기백이 있으며 감정은 비분강개하여 계몽적인 작용을 한다. 그의 대표작은 《靑玉案·元夕》, 《摸魚兒·同官王正之置酒小山亭爲賦》, 《破陳子·爲陳同甫賦莊詞以寄之》, 《南鄕子·登京口北固亭有懷》등이 있다.
남송에 뛰어난 애국시인으로 陸游( 서기1125-1210년)가 있는데 호는 放翁이다. 그는 국가가 침략을 받은 상황에서 저항하느냐 항복하느냐 하는 위기에 처한 시기에 살았다. 그의 시 사상내용과 예술품격은 辛棄疾과 같아서 애국과 비분정서로 충만하고 낭만주의 색채가 농후하다. 대표작품으로 《관산의 달(關山月)》, 《농부의 탄식(農家嘆)》, 《분한을 적노라(書憤)》, 《소충정(訴衷情)》등이 있다.
5. 元曲
元代문학에서 가장 성과가 큰 것은 원곡이다. 그것은 가곡과 대사와 동작을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형식을 형성하였다. 작가와 극본, 음악반주와 연극인의 연기가 결합하여 전체의 이야기를 표현하였는데 현재의 연극에 해당한다.
元雜劇은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서 唐宋 傳記話本에서 諸宮調로 설창되었고, 무용의 기초 아래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元代는 민족모순과 사회모순이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었다. 과거제도가 불합리하여 중하급층에서는 출세할 길이 없어졌다. 그래서 그들은 민간예술과 결합하여 시민이 좋아하는 雜劇을 창작하기 시작하였다. 동시에 원대의 도시 경제가 발전하고 통치계급과 시민의 문화적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서 開封, 大都(현재의 北京), 杭州등 대도시에는 많은 예술인과 극장이 출현하였다. 이 외에 元나라의 영토가 넓어지고 교통이 발달하여 국내외 민족간의 관계가 비교적 친밀해진 점과 북방 민족이 악곡을 전파한 것도 雜劇의 흥기에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
元代는 중국의 戱曲 역사상 황금시대였다. 당시에 명성을 떨친 희곡 작가는 80여명으로 책에 기록된 작품만도 500여종에 이른다. 비교적 유명한 작가의 작품으로 關漢卿의 《두아의 원한(竇娥 )》, 王實甫의 《서상기(西廂記)》, 紀君 의 《조씨고아(趙氏獨兒)》, 尙仲賢의 《유의전서(柳毅傳書)》, 楊顯之의 《소상우(瀟湘雨)》, 白朴의 《오동나무에 내리는 비(梧桐雨)》, 馬致遠의 《한궁의 가을(漢宮秋)》등이 있다.
元雜劇의 가장 뛰어난 대표 작가는 關漢卿(대략 서기 1215-1290년)이 있다. 그는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극작가이다. 관한경은 일생동안 60여부의 雜劇을 썼으며 현존하는 것은 17부가 있다. 주요 내용은 세 가지 부분을 포함한다. 첫 번째는 백성의 반항투쟁을 노래하였고 사회의 어두운 면을 폭로하였으며 당시의 첨예한 계급 모순을 반영하였다. 두 번째는 하층 부인들의 생활과 항쟁을 묘사하여 그들의 용기와 기질을 잘 나타내었다. 세 번째는 역사상의 영웅들을 노래하였다. 유명한 작품으로 《두아의 원한(竇娥 )》, 《구풍진(救鳳塵)》, 《호접몽(蝴蝶夢)》, 《노재랑(魯齋郞)》, 《망강정(望江亭)》, 《단도회(單刀會)》, 《금선지(金線池)》 등이 있다.
《두아의 원한(竇娥 )》은 관한경의 대표작이다. 이 극은 젊은 부인의 일생 동안의 불행한 삶을 썼다. 3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7세에 빚을 갚기 위해 맏며느리로 들어가 17세에 남편을 잃고 시어머니와 생활하였다. 무뢰한인 張驢兒가 강제로 그녀를 처로 삼으려 했지만 竇娥는 결코 허락하지 않았다. 장려아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그의 아버지를 죽였다고 협박하여 그녀에게 그와 결혼해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두아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시어머니가 법정에서 형벌을 받으려 할 때 두아는 시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서 장려아의 아버지는 자기가 죽였다고 시인하고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녀의 반항정신은 결코 굴하지 않고 형장에서 어두운 세력과 자기가 받은 치욕에 대해 저주와 원망을 표현하였다. 극작가는 두아의 비극적인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어두운 면을 심도 있게 폭로하였고 젊은 여인의 강제 결혼에 대한 불만과 반항을 표현하여 강렬한 사회학적 의의를 지닌다.
關漢卿은 사상내용이 깊었고 예술성과도 높았다. 첫 번째는 잡극의 갈등이 긴장되고 격렬하게 표현되었다. 두 번째는 인물의 성격이 뚜렷하여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다. 세 번째는 잡극의 언어가 소박하고 아름다웠으며 풍부하게 표현하였고 작품이 훌륭하면서도 통속적이어서 누구나가 감상할 수 있게 표현되었다. 관한경은 그의 뛰어난 희극창작 성과로서 중국 희극예술의 창시자가 되었고 [중국의 세익스피어]라 불렸다. 1958년 세계의 어떤 국가들은 관한경을 세계문학의 거장 중 한 명으로 여기고 그의 희극창작 활동 700주년을 기념하였다. 원곡의 전대미문의 경향은 중국 문학.예술의 발전에 새로운 고조와 특징을 출현시켰고 후대 중국의 희극과 소설 및 각종 문학.예술에 대해 깊은 영향을 미쳤다.
6. 明淸小說
중국문학은 명청시대에 이르러 소설 창작이 번영하여 뛰어난 작품이 많이 출현하였다. 그래서 명청시대를 [소설의 시대]라 부른다.
중국 고대소설의 기원은 비교적 이르다. 진대와 남북조 시기에 志怪小說과  事小說이 있었고 당송시기에는 傳奇小說이 있었다. 그러나 정말로 명청소설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은 송원의 話本小說이다.
명대의 장편소설은 모두 100여종이 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羅貫中의 《三國演義》, 施耐庵의 《水滸傳》, 吳承恩의 《西游記》, 笑笑生의 《金甁梅》인데 그것들은 중국 고대소설의 [4대 기서]로 불린다.
《三國演義》는 歷史演義小說이다. 삼국시대의 魏, 蜀, 吳 세 나라의 복잡한 투쟁에 대해 쓰여져 있다. 책 전체 내용에 있어서 시간이 길고 등장 인물이 많으며, 사건이 복잡하고 두서의 변화가 심하고 마음을 동요시켜 사람을 황홀한 경지로 이끈다. 풍부한 역사인식과 군사,정치에 관한 지식이 풍부하다. 소설 속에 묘사된 인물은 400여명으로 대다수인물 성격이 선명히 그려져 있어 생동감이 넘친다. 예를 들어 張飛, 關羽, 劉備, 諸葛亮, 趙云, 曹操등은 중국인들이 모두 아는 이름이 되었다.
《水滸傳》은 중국 고대 농민 봉기를 반영한 장편소설이다. 이 소설은 梁山에서 봉기한 영웅108명의 인물을 줄거리로 생동감 있는 이야기를 묘사했고 林 , 武松, 李逵, 宋江, 魯知深 등 진실되고 믿음성 있는 인물을 그려내어 北宋말의 사회생활을 재현해 내었다. 소설은 어두운 사회에 대한 강렬한 반항정신으로 가득 차 있어 이후의 농민봉기에 영향을 미쳤다.
《西遊記》는 낭만주의 색채로 충만한 神魔小說이다. 그 주요 줄거리는 孫悟空이 당나라 스님을 모시고 西天에 가서 경을 구하는 이야기이다. 도중에 많은 요괴와 난관에 부딪히지만 우여곡절이 많은 투쟁을 이겨내고 마침내 그들은 모든 장애를 제거하여 최후에는 성공을 거둔다. 소설은 신기한 환상세계를 창조했고 심오한 사상과 아름답고 완전한 예술성을 갖추었으며, 정의의 승리를 간접적으로 반영하였고, 사악한 세력에 대항하는 용감한 투쟁정신을 반영하였다. 소설이 창조한 인물인 孫悟空,  八戒, 唐僧, 沙和尙등은 중국의 남녀노소 모두에게 알려졌다.
《金甁梅》는 가정생활을 소재로 한 중국의 장편소설이다. 그것은 《수호전》의 [武松殺嫂]를 진화, 확충시킨 것이다. 전반적으로는 西門慶을 중심으로 하여 봉건귀족 계층의 황음무도함을 묘사하였다. 일정한 인식가치와 예술가치를 지닌다.
중국 고전소설은 청대에 이르러 새로운 고봉이 출현하였다.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작품은 蒲松齡의 《聊齋志 》, 吳敬梓의 《儒林外史》, 曹雪芹의 《紅樓夢》이 있다.
《聊齋志 》는 청대 초기에 출현한 훌륭한 단편문헌 소설집으로 500개에 달하는 단편소설이 포함되어 있다. 쓰여진 내용은 모두 요상한 귀신이야기인데 이 소설은 사회 생활 다방면을 간접적으로 표현하였다. 정서가 특이하고 생동감이 있어서 독자를 끄는 매력을 지니고 있다.
《儒林外史》는 뛰어난 고전 풍자소설이다. 그 중심 내용은 중국의 부패한 봉건 과거제도를 비판하고 각종 추악한 지식인들의 영혼에 대해 구체적인 묘사와 날카로운 비판을 가했고, 사회의 세태에 대해서도 냉정하게 풍자하였다. 이러한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풍자]인데, 이것은 중국 풍자소설의 기초를 다졌다.
《紅樓夢》은 중국 고전소설중 사상성이 가장 강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賈寶玉과 林黛玉의 비극적인 애정을 주요 줄거리로 삼았고 賈, 王, 史,   네 가족의 흥쇠를 얘기했는데 특히 賈府의 흥쇠를 중심으로 봉건 사회에 대해 넓은 시각으로 날카롭게 비판하였고 봉건 사회 말기의 복잡한 관계와 내재한 모순을 반영하였으며 봉건 사회의 겉과 속이 다른 시대적 특징을 반영하였다. 《紅樓夢》은 일상적인 가정 생활을 소재로 했지만 사회생활의 단면을 폭넓게 표현하여, 중국 봉건사회의 백과전서로 통하고 중국 봉건사회가 붕괴로 치닫는 일면을 보여주는 거울이 되었다. 이 소설은 특히 세심한 일상 생활중의 인물의 심리와 용모, 인물의 성격을 만들어 내었다. 책 속에 쓰여진 인물은 100여명인데 대다수의 인물 성격은 선명하다. 그 주요 인물은 賈寶玉, 林黛玉, 鳳姐와 劉할머니 등으로, 작품은 상당히 높은 예술경지에 올랐다. 이 소설의 언어는 속어와 문언을 서로 결합해 사용하고 있어서 매우 정확하고 간결하며 생동감이 있다. 《홍루몽》은 중국 민족문화의 전통을 다방면으로 계승하였고, 동시에 발전을 거듭하며 창조되어서 중국 민족문화의 보배가 되었다.
명청소설은 중국의 문학과 문화의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후대의 문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고 세계문학과 역사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三國演義》, 《水滸傳》, 《西遊記》, 《紅樓夢》등 적지 않은 작품이 국외에 번역, 소개되어 세계의 명작이 되었다.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난 후에 중국은 근대시기로 들어섰다. 사회는 거대한 변화가 일어났고 문학도 새로운 변화가 있었다. 중국 근대문학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사상에 있어서 반제애국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정치성이 강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형식상의 혁신이었다. 낡은 형식과 오래된 품격을 타파하고 통속화를 추구한 것이다. 그러나 두 가지는 모두 주도면밀하지 못해서 봉건시대문학에서 현대 신문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불과했다. 이 시기에는 [譴責小說]인 《官場現形記》, 《20년 동안에 본 기괴한 현상들(二十年目睹之現狀)》, 黃遵憲의 시가와 외국에서 들어온 연극등 비교적 좋은 작품이 나왔지만 성과는 뛰어나지 못했다. 중국문학이 참신한 번영의 단계에 들어선 것은 1919년 5·4문학혁명 이후였다.

제2절 현대문학
1919년 5·4운동은 중국이 완전히 반제, 반봉건의 신민주주의혁명 단계에 들어섰다는 것을 나타낸다. 정치 운동과 사회 변혁에 의해서 이 기간에는 사상·문화 혁명인 5·4신문화운동과 문학혁명이 발생하였다. 반제·반봉건, 과학과 민주의 정치적 역량아래 구 도덕에 반대하고 신 도덕을 제창하였으며 문언을 반대하고 白話를 제창하였고 구문학을 반대하고 신문학을 창조하였다. 이리하여 신민주주의 문학의 발단이 되었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이 30년동안 중국문화의 발전사는 중국 현대문학사 단계로 불린다. 중국 현대문학의 특징은 첫째로 반제·반봉건을 문학의 주제로 삼은 것인데 이것은 과거의 문학과 다른 점이었다. 두 번째로 제재의 대부분은 소자산계급 지식인과 하층노동인의 생활을 묘사한 것이었고, 白話를 써서 인민대중과의 관계가 밀접해졌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현실사회의 각종 모순과 저항을 광범위하게 반영하여, 중국 인민해방 사업의 주요 부분이 되었다는 점이다. 네 번째는 문학단체와 문학잡지가 대량으로 출판되었고 문학창작과 문예이론 연구가 전대미문의 자각적 사회활동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다섯 번째는 중국 고대문학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였고, 서방 근대문학의 성과를 대량으로 흡수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독일의 괴테, 러시아의 톨스토이, 체호프, 고리끼, 프랑스의 모파상, 로망.롤랑, 노르웨이의 입생 등의 유명한 작가들은 모두 중국문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이 30년간의 중국 현대문학은 대략 네 단계로 나누어진다.
제1단계 : 1919-1927년. 5·4문학혁명과 북벌전쟁 시기이다. 이 단계의 뛰어난 작품의 주요 내용은 봉건제도와 봉건도덕을 격렬하게 공격하고 군벌통치의 어두운 측면을 폭로하여 구전통을 철저히 끊어버리는 정신을 표현한 것이다. 동시에 청년지식인들이 가정의 속박에서 벗어나 연애와 혼인의 자유를 쟁취하고 새로운 생활을 추구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하층인들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묘사했고 노동자에 대한 동정과, 러시아 [시월혁명]에 대한 찬양도 묘사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5·4 신문학이 과거의 진보적인 문학을 뛰어넘는 중요한 특징이 된다. 이 시기에 가장 영향력이 큰 작가와 작품은 魯迅의 소설이고 郭沫若과 그의 시이다. 이외에 胡適, 劉半農,  心, 朱自淸, 聞一多 등의 작가와 문학연구회, 창조사 동인의 창작이 있다.
제2단계 : 1927-1937년. 제1차 국공내전 시기이다. 이 단계의 특징은 무산계급 문학운동의 발전과 중국좌익작가연맹의 성립이다. 계급모순과 민족위기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작품의 현실성과 투쟁성은 더욱 강해졌다. 현실투쟁, 특히 피폐하는 농촌의 계급투쟁은 작품 안에서 비교적 진실하게 묘사되었다. 일본에 대항하여 나라를 구하는 것을 표현한 작품이 많이 출현하였다. 일부 작가는 직접 혁명투쟁을 경험하여서 창작에 혁명과 낙관주의 색채가 가미되었다. 이 시기의 성과는 매우 높다. 茅盾, 巴金, 老舍, 張天翼, 艾蕪의 소설과 魯迅의 수많은 雜文, 曹 의 연극이 있고 蔣光赤, 柔石,  紫, 田漢, 洪深, 蕭軍, 蕭紅, 臧克家 등 좌익 작가 작품이 있다.
제3단계 : 1937-1942년. 항일전쟁에서 시작하여 [延安문예좌담회]의 시기까지이다. 이 단계는 민족위기와 전쟁형세가 더욱 엄준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작가의 현실에 대한 보편적 관심이 일어나서 그들의 강렬한 애국과 창작의 열정을 불러일으켰다. 문학 창작의 주요 특징은 현실생활의 적극적인 반영과 외부침략에 대한 저항의 선전이었으며, 국민당 통치의 어두운 면을 폭로·풍자하는 것이었고 전·후방에서 활약하는 사람들과 사건을 담은 것이었다. 동시에 형식상에서는 통속적 경향으로 흘렀고 시가, 소설, 보고문학, 희극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으며 단편 작품들도 활발히 창작되었다. 성과가 비교적 뛰어난 것은 艾靑·田間의 시가, 茅盾·沙汀의 소설과 郭沫若·夏衍·田漢·陳白塵·洪深의 연극 등이 있다.
제4단계 : 1942-1952년. 항전후기와 제2차 국공전쟁시기이다. 1942년 5월 중국공산당은 항일 혁명 근거지인 延安에서 문예 창작인을 초청하여 좌담회를 열었다. 毛澤東은 여기에서 강연하였는데, 그는 중국의 문예문제에 대해 근본적인 방침과 정책을 제시했다. [연설]의 정신은 중국 현대문학을 참신한 발전단계로 밀고 나가 신중국 성립 이후에까지 계속 추진하였다. 40년대 후기 [연안문예좌담회]의 영향 아래에서 중국에서는 많은 [인민문예] 창작이 출현하였고, 공산당 통치구역 인민의 생활과 혁명투쟁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였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李季의 장시 《왕귀와 이향향(王貴 李香香)》, 丁玲의 장편소설 《태양은 상건하를 비추고(太陽照在桑干河上)》, 周立波의 장편소설 《폭풍취우(暴風驟雨)》, 趙樹理의 소설《소이흑의 결혼(小二黑結婚)》, 단체 창작의 신가극 《白毛女》등이 있다.
중국 현대문학의 역사는 30년에 지나지 않아 시간적으로 비교하자면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문학과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현대문학의 성과는 매우 높으며 작가와 작품도 매우 많았다. 그에 따라 문예 사조의 유파의 활동이 활발하였고 문예 이론 비평도 매우 발달하여,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소개할 가치가 있는 내용도 풍부하다. 여기에서는 가장 유명한 몇 명 작가만을 중점적으로 소개하겠다. 魯迅, 郭沫若, 茅盾, 巴金, 老舍는 중국 현대문학의 [5대 거장]으로 불린다.
魯迅(1881-1936)은 중국 현대문학의 창시자로서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이며 혁명가이다. 그는 浙江 照興 사람으로 성은 周이고 이름은 樹人이며 자는 豫才이다. 노신은 그의 첫 번째 소설인 《狂人日記》를 발표할 때 사용하기 시작한 필명이다.
魯迅은 몰락한 봉건 지식인 가정에서 성장하여, 어려서부터 글방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수많은 책을 읽었다. 1898년 南京, 江南의 陸師學堂에 들어가 공부하였고 후에 강남 육사학당의 부설인  路學堂으로 전학하였다. 1902년 노신은 일본으로 유학하여 동경 弘文學院에 갔다. 1904년 仙臺醫學專門學校에 들어가 의학을 공부하는 중에 나라를 구하고픈 소망을 가졌다. 그리하여 그는 국민의 정신을 개조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인식하여 1906년 의학을 포기하고 문학창작에 힘썼다.
1909년 魯迅은 중국에 돌아왔다. 1918년 첫 번째 白話소설인 《狂人日記》를 발표하여 강렬한 사회반향을 일으켜 유명해졌다. 연이어 그는 끊임없이 20여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후에 노신은 자기의 소설을 합해서 《외침( 喊)》, 《방황(彷徨)》두 권의 소설집을 출간하여 중국 현대소설의 기초를 확립했고 중국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그의 지위를 공고히 하였다. 《외침( 喊)》에 들어 있는 작품은 노신이 1918에서 1922년에 창작한 14편의 소설이다. 주로 농민에 대한 내용으로 독특하고 새로운 예술특색을 가지고 있다. 《방황(彷徨)》에 들어 있는 작품은 1924년에서1925년 사이에 창작된 11편의 小說이다. 지식인들에 대해 쓴 것이 많고 예술상 《외침( 喊)》보다 더욱 성숙했다. 노신이 창작한 소설은 모두 봉건에 반대하는 내용이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狂人日記〉, 〈阿Q正傳〉, 〈祝福〉, 〈孔乙己〉등이다.
〈狂人日記〉는 중국 현대문학의 첫 번째 소설이다. 그것은 [피해망상증]환자의 정신상태와 심리활동을 묘사하였다. [미친 사람]의 생각과 말을 통해 봉건제도 하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人吃人)] 현실을 폭로하였다. 이 소설의 사상은 매우 깊고 예술상에서는 매우 묘하다. 강렬한 비판적 힘을 구비하고 있어서 사회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阿Q正傳〉은 노신 소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다. 이 소설은 신해혁명 전후의 낙후된 농촌 마을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몸과 정신이 모두 심하게 손상된 농민의 전형을 그려내었다. 阿Q는 매우 가난하고 지위도 낮아 다른 사람에게 무시당하고 굴욕 당했지만 반항할 힘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자위하였는데 실제로는 스스로를 속이는 독특한 방법에 불과한 [정신승리]법을 썼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이 그를 때리면 그는 [애가 사람 치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결국 자기가 승리한 것과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노신은 이렇게 가련하고 우습고 슬프고 한탄할 만한 [약자]를 통해 반식민지 반봉건사회를 지향하였고, 중국 국민에게 존재하는 공통적인 약점을 국민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깨우쳐 주는 혁명에 돌입했다. 이 소설은 예술성이 상당히 높으며, 심도 있는 사회내용과 강렬한 풍자성을 지니고 있다. 1926년에 〈阿Q正傳〉은 프랑스 잡지인 《유럽》에 기재된 적이 있는데, 프랑스 작가인 로망 롤랑은 이 작품을 읽고 감동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 당시, 세상에서 노신을 아는 사람은 매우 적었다. 현재에는 노신의 소설이 50여종의 언어로 번역되어 30여개 국가에 소개되었다.
魯迅의 최후 10년은 주로 雜文을 썼고 《三閑集》, 《華盖集》, 《而已集》 등 9권의 잡문집을 썼다. 노신의 잡문에 포함된 사회 내용은 매우 광범위하였다. 봉건 사상, 문화와 도덕을 비판한 것, 국민당 통치의 어두운 면을 폭로한 것, 문화 논쟁을 벌인 것, 각종 사회 문제를 분석한 것 등 모두 700∼800편이 있다. 그의 잡문은 독특한 견해와 강렬한 이론으로 충만하며 그의 뛰어난 사상성을 표현해 내었다. 동시에 강렬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고 글쓰는 수법도 다양하였다. 언어는 간결하고 풍부했으며 풍격은 첨예하고 생기가 있었다. 瞿秋白은 예를 들어 단검과 투창을 형용하는데 전투성이 강하고 개성이 매우 선명하였다. 노신의 잡문은 그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중국에서 매우 귀중한 문화 유산이다.
魯迅은 박식하고 재능이 뛰어났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창작 연구 외에도 외국 문학작품을 많이 번역하였다. 노신이 일생동안 써 온 창작 성과는 20권의 《魯迅全集》에 수록되어 있어 현재 중국에서 거대한 사상 문화의 보고가 되었다.
오랜 기간 어려운 환경에서 힘들게 생활해 온 魯迅은 1936년 10월 19일 上海에서 병사했다. 그때 그의 나이는 56세였다. 그의 일생은 투쟁의 일생이었고 찬란한 일생이었다. 그는 중국문학에 큰 공헌을 하였고 그의 중국 현대문학사상 지위는 어떤 사람도 대신할 수 없다.
郭沫若(1892-1978)은 중국의 뛰어난 작가이자 시인이며 희극가이고 역사학자이자 고문사학자이며 중국 신시의 창시자이다. 그는 四川 樂山縣에서 출생하였다. 어려서부터 시가를 좋아했는데 특히 屈原과 唐代 詩人인 李白, 王維, 孟浩然의 작품을 좋아하였다. 소학과 중학 시절에는 대량의 중국 고전작품과 외국 번역소설을 읽었다.
1914년 1월 郭沫若은 일본에서 유학했는데, 東京 第一고등학교에 희망했으나 岡山 第六고등학교에서 공부하고 歐洲제국대학에서 공부하였다. 처음에는 의학을 공부했으나 외국문학을 광범위하게 접촉한 후에, 인도 시인 타고르, 독일시인 하이네, 미국시인 휘트만의 영향을 크게 받아 문학에 종사하기로 마음을 바꾸었다.
1919년의 [5·4] 운동은 해외에 있던 郭沫若에게 창작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같은 해 9월 그는 신시를 발표하였고 그 때부터 1920년 상반기까지는 그의 [시가창작의 고조기]가 되었다. 계속해서 많은 시가를 발표하였고 대부분은 그의 시집인 《女神》에 실려 있다. 이 시집의 중심 내용은 타협하지 않는 철저한 반봉건 정신이다. 시가는 예술 형식과 품격 상에서 구시대 시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 분방하였고 중국 시가의 신천지를 열어 중국 신시의 발전에 대해 큰 영향을 끼쳤다. 《女神》시집의 대표 작품은 《鳳凰涅槃》이고, 작가는 시 중에서 봉황이 향목을 채집한 후에 분신자살을 했지만 불 속에서 부활한다는 신화 전설을 빌어 와, [중국이 자유와 신생을 얻었다]는 것을 열렬히 노래하였다. 시 전체는 열정이 넘쳐흐른다. 상상으로 말을 내달리고 화산의 용암이 분출하여 강하를 세차게 흐르는 등 농후한 낭만주의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
1923년 郭沫若은 두 번째 시집인 《星空》을 출판하였다. 그 시에는 당시 답답한 그의 정서가 담겨 있다. 1928년 초에 郭沫若은 세 번째 시집인 《恢復》을 출판하였다. 거기에는 시인의 새로운 분발이 반영되어 있다.
1928년 2월 郭沫若은 정부의 지명수배를 받아 일본으로 도망가서 10년동안 해외에서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였다. 10년 동안 그는 자전적인 작품 《創造十年》, 《北伐途次》등을 썼고 중국 고대사와 금문과 갑골문을 연구하였다.
1937년 郭沫若은 일본에서 귀국하여 [항일통일전선]에 참가하여 다시 한번 창작의 열정을 불태웠다. 40년대에 그는 《棠 之花》, 《屈原》, 《虎符》, 《筑》 등 4부의 역사극을 창작하였다. 주요 내용은 외적의 침략에 대해 단합하여 항거하자는 것이었고, 강렬하다 사회적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이 외에 그는 《孔雀膽》, 《南冠草》 2부의 역사극을 썼고 《靑銅時代》, 《屈原硏究》, 《十批判書》등의 학술지도 발표했다.
신중국 성립이후 郭沫若은 역사극인 《蔡文姬》, 《武則天》과 기타 작품을 썼다.
1978년 6월 12일 郭沫若은 北京에서 병사했다. 그때 나이는 86세였다. 郭沫若은 일생동안 많은 작품을 남겨 놓았다. 《郭沫若全集》은 모두 17권이다. 그의 시집과 극작도 국외에 번역되어 소개되어 졌다.
茅盾(1896-1981)은 중국 현대문학의 선구자 중 한사람이다. 원래 이름은 沈雁氷이고 茅盾은 필명이다. 그는 浙江省 桐鄕縣사람으로 어려서부터 비교적 진보적인 가정 교육을 받았고, 1916년에 北京大學의 예과를 졸업하였다. 5·4운동이후 적극적으로 신문화운동에 참여한 그는 초창기에는 주로 이론 비평과 번역으로 외국 문학 작품을 소개하였다. 1921년 초 茅盾은 다른 작가들과 [문학연구회]를 조직하였다. [인생을 위한] 예술을 제창한 이 단체에서 그는 문예 잡지 《小說月報》의 편집을 맡아, 신문학 제창과 구문학 활동장소에 대해 반대했다.
1927년 茅盾은 소설 《蝕》을 창작하였다. 《幻滅》,《動搖》,《追求》 3개의 중편으로 나누어진 이 소설은, 소자산계급 지식인들의 혁명에 대한 동경, 환멸, 혼란, 추구를 표현했으며 당시의 어지러웠던 소자산계급 정신과 성격상의 모순을 진실 되게 반영하였다. 1929년에 그는 장편 소설 《虹》을 발표한 뒤에 중편 소설 《三人行》, 《路》와 단편 소설《임씨네 가게(林家鋪)》, 《봄누에(春 )》을 창작했다. 1932년에 그는 장편소설 《한밤중(子夜)》를 썼고, 1941년 장편소설 《腐蝕》을 창작하였다.
해방이후 茅盾은 주로 문학비평을 하였다. 그는 일생동안 장편소설 6부, 중편소설 6부, 단편소설 50여편, 산문집 10여 본, 극본 하나를 발표하였고 문예비평도 했으며 외국문학 번역과 중국 고전문학에 대한 주석도 달았다.
茅盾의 작품들은 성과가 매우 컸지만 그 중에서도 장편소설 《한밤중(子夜)》의 영향력이 가장 컸다. 이 소설은 上海의 한 민족자본가의 운명에 대한 묘사를 통해 30년대의 반식민지 반봉건적인 중국 사회를 반영하였고 당시의 각종 사회모순을 진실 되게 표현하였다. 사상 면과 예술 면에서 모두 성공한 이 작품은 작가의 관점을 대변했다고 할 수 있다. 茅盾의 《한밤중(子夜)》, 《봄누에(春 )》등 대표적인 작품은 영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아랍어 등으로 번역되어 국외로 전해졌다.
巴金(1904- )은 중국의 뛰어난 현대작가로서 四川 成都 사람이다. 그는 봉건적인 대가족 집안에서 자라나 프랑스로 유학 간 적이 있다. 파금은 5·4신문화운동의 영향 아래 신문학 창작의 길을 걸었다. 그는 주로 소설을 썼고 대표 작품으로 《滅亡》, 《激流三部曲》 (《家》·《春》·《秋》), 《寒夜》와 산문과 수필도 많다.
巴金의 장편소설의 분량은 비교적 크다. 작품에서 그는 구중국 소자산계급 지식인들의 답답함, 불만, 이상추구, 반항에 대해 묘사하였고 봉건적인 대가족 제도의 모순, 쇠퇴, 붕괴를 묘사하였다. 사실상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을 매우 자세하게 표현하였기 때문에 현실과 흡사하다. 고도의 지식적, 예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어 당시에 큰 영향을 끼쳤다.
巴金은 현재 [중국문학연맹]의 명예 회장으로 있다. 문화대혁명후에 그는 잡문집 《隨想錄》을 출판하였다. 이 작품은 문화대혁명 중에 그가 직접 겪은 경험과 감상을 진실 되게 기록한 것이다.
老舍(1899-1966)의 원래 이름은 舒慶春이고 자는 舍矛이다. 북경인이고 만주족이며 뛰어난 소설가이자 극작가이다. 그의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북경 시민의 생활에 대한 유머스런 언어 사용과 [북경의 맛]으로 가득 차 있다는 점이다. 그의 작품은 매우 많으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소설 《駱駝祥子》, 《四世同堂》과 연극 《茶館》이 있다. 노사는 중국인에게 사랑 받은 작가였으나 불행히도 문화대혁명 때 박해로 자살하였다.
이상으로 소개된 [5대 거장]은 중국 현대문학사상 가장 대표적인 작가이다. 이외에도 우수한 작가와 작품이 있다. 어떤 것은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으나 더욱 자세히 공부하고자 한다면 《중국현대문학사》를 읽으면 될 것이다.

제3절 당대문학
중화인민공화국성립 이후의 문학은 중국 [當代文學]으로 불린다. 중국 당대문학은 중국 현대문학을 계승한 것이지만 주요 논조는 변하였다. 현대문학의 주요 논조는 반제·반봉건이었고 당대문학의 주요 논조는 사회주의에 대한 봉사와 인민대중들에 대한 봉사이다. 그러나 현대문학과 당대문학의 관계는 매우 깊어서 당대문학을 논할 때에는 현대문학을 떼어놓을 수 없다.
중국 당대문학은 지금까지 40여년의 역사를 삼등분 한다. 그 노정과 성과는 다음과 같다.
제 1 시기 : 1949년 신중국 성립에서 1966년 문화대혁명 전야까지 모두 17년간을 말한다. 이 시기는 중국 사회주의 사업의 건립과 발전과정의 시기로서, 국가가 장기간의 분열, 전쟁, 혼란된 상태를 매듭지어, 통일과 단결의 안정된 형세가 나타난 시기였다. 정부는 문예공작에 있어서 통일된 지도를 강화하여, 작가의 생활 조건과 공작 조건은 근본적으로 개선되었으며 전국적으로 문학예술가의 단체인 [문련](문학예술인 연합회), [작협](작가협회)등을 설립하였다. 과거 혹독했던 세월의 회고와 새로운 생활에 관해서 많은 문예 창작자들은 창작의 열정이 끊어 올랐다. 그리하여 새로운 여건 속에서 문학은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50년대 소설· 시가· 산문· 연극· 영화는 모두 풍작을 거두었고 영향력 있는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탄생하였다. 이 시기에 정부의 문예 방침과 정책은 확고한 것이어서 후에 약간의 차이가 발생했지만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키지는 않았다.
제 2 시기 : 1966년에서 1976년까지의 문화대혁명 기간 10년 동안을 말한다. 이 시기는 중국의 내란 시기였기 때문에 국가는 다방면에서 피해를 입었다. 유명 작가와 작품의 대부분은 비판받았고, 대다수 작가들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몇몇 사람들은 생명까지 잃었고 문학창작은 황폐해졌다. 문혁 후기에 비록 소수의 소설·시가·영화가 출현했지만, 그것들은 정치와 그릇된 문예이론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단편 일률적인 것들이 대부분 이어서 진실감과 예술성이 부족했다. 이 시기는 중국 당대문학의 쇠락과 위기의 시기였고 인민들의 문예 생활은 매우 단조롭고 무미건조했다.
제 3 시기 : 1976년 [4인방] 타도 이후의 근 십여 년 동안으로, 중국 당대문학의 회복과 더불어 새로운 흥성하는 시기이다. 문화대혁명 때 비판을 받았던 작가와 작품은 명예 회복을 하였고, 그릇된 문예이론과 문예정책은 교정 받았다. 문학 창작은 다시 한 번 해방과 자유의 물 결속에 급속히 발전하는 형세를 띄었다. 초기의 작품들은 문화대혁명 때의 고통에 대한 것이어서 [상흔문학]이라고 불렸는데, 이후에는 [되돌아보기문학], [개혁문학] 등으로 발전하였다. 초기에는 시가·단편소설·연극 부문에서 문학 성과를 이루었으나 곧 중편소설·장편소설·영화 등의 영역으로 발전되었다. 뛰어난 작품과 신인 작가가 끊임없이 배출되었으며, 문학잡지는 비온 후에 봄 죽순처럼 자라나서 중국문학은 전에 없었던 번영을 이룩했다.
중국 당대문학의 작가들은 기본적으로 4대로 구성된다. 1대는 5·4와 [좌련]시기의 작가로서 巴金·茅盾·老舍·田漢·夏衍·氷心·丁玲·曹  등이 있다. 그들은 모두 팔구십 세로 어떤 분은 이미 별세하였다. 제2대는 40년대 延安문예좌담회 이후에 명성을 떨친 작가들이다. 趙樹理·周立波·康濯·梁斌·孫 ·柳靑 등이 있다. 제3대는 5-60년대 유명해진 작가들로서 楊沫·吳强·曲波·馮德英·李英儒·陳登科·魯産周·王汶石· 志鵑·李準·浩然 등이 있다. 이 2-3대 작가들은 이미 6-70세이다. 그들 대부분은 혁명전쟁 시기의 생활에 대해서 썼고 해방 후의 새로운 생활에 대한 내용을 기술한 작가도 있었다. 제4대는 [4人幇]을 타도한 개혁·개방 시기에 출현한 중.청년작가로서 王蒙·高曉聲·劉紹棠·張潔·劉心武·諶容·蔣子龍·馮驥才·張一弓·賈平凹·張賢亮·張承志·張辛欣·古華·張抗抗·蘇童·劉恒·王安憶·王朔 등이 있다. 어떤 이들은 文革 기간 중에 시골에 내려가 군대에 입대했던 지식청년으로 그들은 주로 문화혁명 전후의 생활에 대해 중점적으로 썼다. 또 어떤 작가들은 80년대에 졸업한 대학생으로서 새로운 각도로 현실을 표현하기도 했다.
중국 당대문학에 반영된 생활 면은 매우 방대하다. 역사에서 현실까지, 도시에서 농촌까지, 국내에서 국외까지, 정치투쟁에서 일상생활까지, 혁명전쟁에서 남녀애정까지 …… . 그 중에서 적지 않은 문학유파가 출현하였다. 예를 들어 山西작가군· 河北작가군· 廣東작가군· 湖南작가군· 北京작가군이 있고, 鄕土派·黃土派·知靑派·軍事文學派가 있다. 문학유파가 다르면 예술풍격도 달라서, 문학과 예술의 백화제방을 가져 왔다.
중국 당대문학에는 어떤 유명 작가와 작품이 있을까? 여기에 몇 가지를 열거해 보겠다.
장편소설 방면 : 姚雪垠의 《李自成》, 毆陽山의 《三家巷》, 楊沫의 《靑春之歌》, 曲波의 《林海雪原》, 馮德英의 《苦菜花》, 羅廣斌과 楊益言의 《紅巖》, 李英儒의 《野火春風斗古城》, 梁斌의 《紅旗譜》, 柳靑의 《創業史》, 周而復의 《上海的早晨》, 瑪拉沁夫의 《茫茫的草原》, 古華의 《芙蓉鎭》, 戴厚英의 《人 , 人》, 周克芹의 《許茂和他的女兒們》, 葉辛의 《蹉 歲月》 등이 있다.
중편소설 방면 : 諶容의 《人到中年》, 魯彦周의 《天雲山傳記》, 王蒙의 《蝴 》, 路遙의 《人生》, 蔣子龍의 《喬廠長上任記》, 李存 의 《高山下的花環》 등이 있다.
단편소설 방면 : 趙樹理·馬烽·王汶石 등의 농촌소설, 高曉聲등의 문혁후의 農村소설, 劉心武·陳建功 등의 北京시민소설, 宗璞·張潔·王安憶의 女性소설, 梁曉聲·張抗抗·張承志등의 知靑소설, 賈平凹의 산문소설 등이 있다.
시가 방면에서 비교적 유명한 시인 : 郭小川, 賀敬之, 聞捷, 公劉, 白樺, 李季, 蔡其矯, 李瑛, 北島, 顧城, 楊煉, 舒  등이 있다.
산문 방면에서 유명한 작가 : 劉白羽, 秦牧, 楊朔, 碧野, 何爲, 袁鷹, 巴金, 葉文玲 등이 있다.
현재 중국 당대문학은 계속해서 발전하고 있다. 문학잡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신인과 신작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우리는 중국 당대문학사에서도 중국 고대문학과 현대문학에서처럼 영원히 전해질 위대한 작가와 작품이 출현할 것을 믿는다.
제11장 중국의 예술
 
예술은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서예, 회화, 음악, 무용, 연극, 영화, 곡예, 조각, 소조, 건축, 곡예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각 나라의 예술은 모두 자기 민족 특색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문명사는 수천 년에 이른다. 각 예술의 부분에서 뛰어난 성과를 거두었고, 강렬한 민족 특색이 형성되었다.

제1절 서예·회화
1. 서예
서예는 한자를 쓰는 예술로 한자의 출현과 더불어 나타났다. 처음에 서예는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었는데, 후에 한자를 따라 일본, 조선, 동남아등 기타 국가와 지역에 전래되었다. 중국의 서예 예술은 중국 사람뿐만 아니라, 세계의 많은 중국 문화 애호가들의 환영 또한 받고 있다. 세계의 문자는 그 종류가 대단히 많다. 그런데 왜 오직 한자를 쓰는 것만이 예술의 한 부분이 되었을까? 이것은 한자의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세계의 다른 문자, 즉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스페인어, 힌디어등은 모두 표음 문자로 정해진 수의 몇 몇 자모를 결합하여 글자가 되면서, 필획이 간단하고, 쓰는 법이 단순하며, 자형의 변화가 적어서 예술적 감상가치가 거의 없다. 그러나 한자는 모양이 네모나며, 필획이 많고, 구조가 복잡하며, 글자 수 또한 많아 자형의 변화가 커서 같은 한자라도 다른 서체로 쓰면, 모양이 다를 수 있어,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으므로, 다른 문자가 가지지 못한 심미적 가치를 구비하고 있다. 또한 어떠한 서법을 어떠한 서체로 쓰면, 그것이 가진 미적 감각을 느낄 수 있는데, 여기에는 많은 기교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기교를 배우고, 연구하고, 탐구하면 독특한 풍격과 사람들이 감상할 만한 글씨체를 써낼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서예 예술이다. 중국 서예는 감상적, 심미적 가치이외에도, 중요한 실용적 가치가 있다. 예를 들면, 기념으로 몇 자 글을 적는다든지 비문·편액·간행물 등의 이름을 쓴다든지, 거실에 둘 장식용 글을 쓰는 것 등은 서예와 떼어놓을 수 없다. 서예는 시문, 회화, 전각, 건축 등 다른 예술 형식과 접목시켜 종합적인 예술 효과를 볼 수 있다.
중국의 서예 예술은 어떻게 해서 생겨났고, 발전해 왔는가? 서예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가? 이 문제는 한자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봄으로써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한자의 역사는 또한 서예 예술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중국 한자의 발전은 대체로 이하의 몇 단계를 거쳐왔다. 갑골문, 금문, 전서, 예서, 초서, 해서, 행서가 그것이다. 중국 서예 예술의 기본 서체는 바로 이 몇 가지이다.
고고학에 근거하여 고증해 보면 중국의 문자는 일찍이 5000년 전에 생겨났고, 그때는 단지 간단한 형상 부호일 따름이었다. 중국의 가장 빠른, 비교적 성숙된 문자는 3400여년 전의 갑골문이다. 그 문자는 귀갑이나 짐승 뼈에 새겨져 있었으므로 甲骨文이라 부른다. 갑골문은 칼을 사용해 단단한 뼈 위에 새긴 것으로 필획이 가늘고, 강하며, 자형은 여위고 길다. 글자의 크기는 각기 달라 매우 강하면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이것이 바로 중국 최초의 서예인 것이다.
갑골문과 같은 시기에 특히 주대로 진입한 이후, 사회의 발전과 한자의 사용 조건이 달라짐에 따라 한자 글자체에 변화가 생겨났다. 이 시기의 문자는 대부분 청동기 위에 주조한 것이었는데, 당시에는 청동기를 [金]이라 불렀기에 [金文]이라 부른다. 청동기 술잔과 솥에 많이 새겨져 있어 [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금문의 글자체는 갑골문과 비슷하나, 필획은 갑골문보다 굵고 단단하며, 선은 갑골문보다 유연하며, 글자체의 구조와 크기도 고르면서 정연하게 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했고, 나타난 기풍은 장중하며 엄숙하고 돈후하여 상당히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준다. 오늘날, 고대부터 보존되어 내려온 가장 대표적인 금문은 서주시대의 [毛公鼎, 盂鼎, 散氏盤]등이다. 춘추시기 문자가 화폐, 죽간, 비단 칠기 위에 쓰여지기 시작했다. 한자의 글자체 또한 새로운 변화가 생겨났다. 전국시기, 제후국이 각각의 지방에 군림하여, 한자 글자체는 지역적 차이가 나타나게 되었다. 후에 제·노·연·한·조·위 등 나라의 문자를 육국고문이라 했고, 스스로 체계를 만들어 낸 진나라 문자를 [大篆]이라 불렀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육국 고문을 폐지하면서 대전을 기초로 하여 정리하고 간략화 하여 소전을 만들어 냈고, 전국의 문자를 소전으로 통일한다. 소전은 비교적 분별하기에, 쓰기에 용이했고, 규범화 정형화된 것이었다. 윤곽은 원래 크고 작고 길고 짧음이 가지런하지 않던 것이 기본적으로 정리되어 장방형으로 변했고, 필획은 굵고 가늘어 고르지 않던 것이 고르고 둥그스름한 선으로 변화되었다. 부분의 구조 또한 원래 자유로이 배치되던 것을 상대적으로 고정된 위치를 갖게 했다. 정형화된 소전은 한자가 비교적 성숙한 시기로 접어들었음을 상징한다. 오늘날에는 소전을 포함한 중국의 고문자는 이미 기본적으로 실용성을 상실했다. 그러나 서예 예술의 일부가 되어 중요한 미학적 가치를 지니고, 예술이라는 분야에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서예 예술 중에서 대전·소전은 篆書로 통칭하고 있으며, 도장을 새길 때에는 아직도 널리 유행하고 있다. 소전이 진보가 비록 빠르다고는 하지만, 쓰기에는 아직도 불편한 점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진대에는 형벌이 잔혹하여 죄인도 많았다. 범죄와 관련된 사무적 문서를 처리할 때 종종 매우 간단하고 거칠게 썼었는데, 이로부터 일종의 새로운 글씨체인 隸書가 생겨났다. 진조가 멸망한 후, 예서는 한층 더 발전했고, 점차 성숙해지기 시작했다. 서한 중기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소전의 지위에 올라서서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식문자가 되었다. 후에 규범화된 예서를 소전과 비교해 보면 이하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소전은 불규칙적인 곡선과 완만한 선이 평평하고 곧으며 단정한 필획으로 바뀌었다. 둘째, 필획은 가로획, 세로획, 점, 그 외에 오른쪽 삐침, 왼쪽 삐침이 생겨났고, 특히 가로획에도 잠두안미의 필력이 생겨났다. 셋째, 상하구조가 긴밀해지고 좌우로 펴지면서 붓끝이 둥글기도 하고 네모지기도 하며, 필획이 굵기도 하고, 가늘기도 하여 변화가 풍부해졌다. 예서 글자체의 완전한 테두리는 납작한 형태로 나타내어져 단정하고 안정된 느낌을 주었다. 예서를 쓰는 방법은 더욱 규범화되고, 편리해지고, 실용적이어 졌을 뿐 아니라 새로운 예술 감각을 불러 일으켰다.
예서의 발전과 동시에 또 다른 새로운 한자 서법도 나타났는데, 그것이 바로 草書이다. 초서는 예서를 거칠고, 조잡하게 쓰는 방법으로, 그 특징은 거칠고, 빠르며, 필획과 필획이 연결되어 있고, 글자와 글자도 연결되어 있으며, 글자의 형상을 고도로 간략화 하였는데, 심지어 대략적 윤곽만 남은 것도 있었다. 초서가 너무 거칠고 마음대로 쓰는 경향이 강하였기에, 판별에 어려움이 따랐고, 그래서 일반적으로 서예 예술에서 단지 감상할 수만 있을 뿐, 다른 글자체처럼 실용 가치가 크지 않다.
위진 남북조 시기, 예서의 기초 위에서 또 새로운 글자체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楷書였다. 글자 형체 구조면에서 해서와 예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그러나 해서는 예서에서 쓰이는 필획을 변화시킨 것이다. 대략적으로 나타난 것은 가로획의 끝을 다시 위로 향하게 하고, 붓을 거둔다. 점은 길게 찍다가 둥근 형태로 변화했다. 삐침의 방향은 비스듬히 아래로 튀어나왔다. 갈고리 획은 구부릴 필요 없이 곧은 갈고리 형태로 변했는데, 더욱 중요한 것은 전 글자체의 형태는 예서의 납작한 형태에서 네모난 형태로 바뀌었고, 따라서 처음으로 중국 한자의 글자는 네모나게 되었다. 수당시기에 이르면 해서의 글자체가 성숙하게 된다. 정형화된 후의 해서는 필획이 정교해지고, 구조가 엄밀하며 깔끔하고 분명하여 가장 중요한 글자체가 된다. 진대에는 또다른 서체가 출현하는데, 그것은 해서와 초서의 중간으로 行書라고 칭한다. 행서는 해서처럼 그렇게 깔끔하지도 않고, 초서처럼 거칠지도 않다. 행서의 장점은 해서보다 편리하면서도, 빠르게 쓸 수 있으나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거칠게 빨리 쓰진 않으며, 보기가 좋고 시원스러우면서도 편리하고 실용적이다. 이리하여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가장 즐겨 쓰는 글자체가 만들어진 것이다.
갑골문-금문-소전-예서-초서-해서-행서의 발전 과정은 중국의 한자 탄생과 변천 과정이기도 하면서 중국 서예의 각종 글씨체의 형성 과정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밝혀지듯이 중국 서예 예술은 다섯 가지 기본 서체가 있다. 전서, 예서, 초서, 해서, 행서로 수당 때에 이미 정형화했고, 이후 끊임없이 변화하고 부단히 새로이 창작된 서체가 나타났지만, 기본 글자체는 끝까지 상술한 다섯 종류를 벗어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새 글자체는 다시는 출현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전·예·초·해·행 다섯 서체는 중국 서예의 기본 글자체일 뿐이다. 실제로 비록 같은 글자체라도 다른 사람이 쓰면 글자는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게 되어 절대 똑같은 글자체는 있을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사람의 생김새와 같아서 비록 코, 입, 눈, 귀 대체적인 것은 같으나 이목구비와 그 생김새는 천차만별이니 완전히 똑같은 것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중국의 역사상 저명한 서예가들이 끊임없이 나타났고, 그 유파도 매우 많으나 풍격은 각기 달라 우수한 서예 예술품이 대단히 풍부하면서 각양각색인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중국 고대에서 가장 대표적인 걸출한 서예가들은 대략 晋대의 王羲之·王獻之 부자, 唐대의 張旭·懷素·顔眞卿·柳公權·歐陽詢, 宋대의 蘇東坡·黃庭堅, 元대의 趙孟 , 明대의 董其昌·張瑞圖, 淸대의 鄭板橋·吳昌碩 등이다. 이 서예 거장들은 후대인들에 지극히 큰 영향을 미쳤고, 그들의 작품도 이미 일찍이 진귀한 보물이 되었다. 만약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을 감상하려고 한다면, 유명한 서예들의 글씨본이나 명승 고적의 題字(기념으로 몇 자 적은 글)를 제외하고는 중국의 삼대 석림(孔廟비림·西安비림·昭陵비림)은 꼭 가 봐야 할 곳으로, 여기에는 여러 개의 거대한 석비가 집중되어 있는데, 돌에 새겨진 비문 서예는 정밀하고 깊은 조예를 보이고 있으며, 내용이 풍부하여 실로 중국 고대 서예 예술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서예는 역사가 깊은 예술의 한 부분으로, 고대 중국에서 오랫동안 성행하면서도 쇠퇴하지 않았고, 근대 중국에서도 여전히 인재가 배출되었고, 신중국 건국 이후 더욱 발전했다. 정부의 지지아래 전국 각지에서 서예 협회와 서화사가 생겨났고, 서예 전시, 서예 예술에 대한 검토와 토론 등을 행하여 서예를 익히는 것 및 서예 국제 교류 등의 활동도 개최하여 서예 예술의 지속적인 발전을 위한 좋은 조건을 마련하고 있어 노, 중, 청년 서예가들이 많은 활약을 하고 있다.
현재 전국 서예 협회에는 3800여명의 회원이 있고, 저명한 서예가로는 趙朴初, 劉海粟, 陳叔亮, 啓功, 沈鵬, 沙孟海, 周而復, 尹瘦石, 王學仲, 方去疾, 黃苗子, 張旭등이 있다.
2. 회화
중국의 회화 예술 또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일찍이 5,6천년 이번 중국의 선조들은 도기에 꽃무늬나 간단한 동물, 식물 도안을 그렷는데, 그것이 중국 최초의 원시 회화 예술이라고 말할 수 있다. 노예 사회 시기에 이르면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회화 예술에도 중대한 변화가 생겨났는데, 전국 시대 초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백화 《龍鳳人物圖》, 《御龍人物圖》는 선이 유연하며, 그림의 형상이 생동감이 있어, 중국 초기 회화 예술이 어느 정도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상징한다. 진한 시기, 회화 예술이 한층 더 발전했는데, 그중 한대의 백화와 벽화가 매우 뛰어났다. 예를 들면, 長沙 馬王堆에서 출토된 서한 채색 백화와 벽화 속의 신화 전설은 무덤 주인의 생전의 사치스러운 생활 및 사후에 승천하고 싶어하는 희망이 주제로 표 표현되어 있는데, 형상이 매우 생동감 있고, 훌륭하여 감동적이다.
위진 남북조 시기 불교가 흥성하여 종교 예술에 커다란 발전이 있었다. 암벽 위에 석굴을 뚫어 불상을 조각하고, 벽화를 제작하는 것이 시대의 풍조였다 . 그중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유명한 것은 敦煌 벽화이다. 敦煌 莫高窟은 서기 366년에 시작하여 천년이 넘도록 조각하여 현존하는 석굴은 492개로, 벽화는 4.5만여 평방미터에 이른다. 이 벽화는 중국 전통적 화풍을 반영하고 있고, 외래 예술을 흡수·융합한 기초 위에서 새로운 발전과 고양으로 생겨난 것이다.
불사와 석굴 벽화 이외에도 위진 남북조 시기에는 지식을 쌓은 많은 우수한 선비 화가가 나타났다. 顧愷之, 曹不興, 載逵, 陸探微, 衛協 등이 바로 그 예이다. 그리고 최초의 화론인 謝赫의 古畵品錄이 나타나서 중국 회화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수당에서 송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회화 예술은 절정에 이른다. 당화는 비록 벽화가 주요 위치를 차지하고 있긴 하지만 불교 제재 회화가 풍속화로 발전해 가는 경향이 명확히 나타난다. 선녀, 보살 등이 인간 미녀와 똑같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인물화가 고도로 번영하는 것과 동시에 산수화조화 또한 많은 걸작이 나왔다. 예를 들면, 수대 展子虔의 《游春圖》가 있는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산수화 작품이다. 五代兩宋시기, 인물화는 여전히 발전했고, 산수화조화는 더욱더 훌륭해져서 張擇端 《淸明上河圖》와 같은 걸출한 족자로 된 사회 풍속화가 탄생했다. 형상과 세밀함이 흡사 진짜와 같아 생생하게 북송의 수도 개봉의 번화하고 시끌벅적한 광경을 묘사해 내고 있다. 수에서 송에 이르기까지 가장 유명한 화가로는 展子虔, 閻立本, 尉遲乙僧, 吳道子, 李思訓, 王維, 張萱, 周昉, 張擇端, 董源, 范寬, 劉松年, 馬遠, 趙昌 등이 있다. 원대시기에는 산수화조화의 성취가 뛰어났다. 黃公望, 王蒙, 倪瓚, 吳眞 등 네 명은 대표적인 산수화가로서 사람들은 [元四家]라 불렀다. 그들이 그린 산수화는 수묵만을 사용하여 어떠한 색도 넣지 안아, 묵화만의 정취를 추구하였고, 시 한 수를 한 폭의 그림 속에 배치하는 것을 중히 여겨 담백하고, 자연스러우면서도 사의가 서정적이어서 산수화의 새로운 풍격을 만들어 냈으며, 후대 중국 산수화의 발전에 매우 큰 역할을 했다.
명청시대에 이르자 중국의 회화는 기본적으로 원대 산수화조화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영향을 받아 대중적 풍격의 유파가 나타났다. 예를 들면 명대 載進으로 대표되는 [浙派], 沈周·文徵明·唐寅·仇英으로 대표되는 소주 [吳門畵派], 徐渭로 대표되는 [寫意花鳥畵派], 邊景昭·呂紀로 대표되는 [工筆花鳥畵派]가 있다. 청대에는 弘仁· 殘·石淘·朱  같은 [4대 화승]이 있으며, 鄭板橋·金衣등으로 대표되는 [揚州 八怪], 任伯年·吳昌碩으로 대표되는 [上海畵派]등등이 있었다. 근대로 접어들면서 부터 신중국 건국 이후까지 중국의 전통 회화는 새로운 발전이 있었다. 동시에 서양의 유화, 판화, 만화 및 이야기 그림책, 세화 또한 발전하기 시작하여 백화 제방의 국면을 출현시켰다. 유명한 화가로는 齊白石, 徐悲鴻, 潘天壽, 黃賓虹, 李苦禪, 李可染, 王雪濤, 劉海粟, 關山月,  淺予, 石魯 등이 있다.
중국 회화사를 돌이켜보면, 우리는 중국 전통화의 종류를 이렇게 구분할 수 있다. 제재상 인물화, 산수화, 화조화 기법 상으로 밀화 사회화로 나눌 수 있다. 밀화는 세밀하고 정교하게 색깔을 입혀 묘사한 그림을 가리키며 사의화는 간결하고 세련된 묵화로 물체의 형상을 윤곽만 묘사해 내어 거기에 작가의 정서를 토로한 그림을 가리킨다. 만약 전체적으로 중국 전통화와 서양전통화를 비교해 본다면 중국 전통화는 아래의 몇 가지 분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첫째, 선이 뛰어나다. 중국 전통화는 처음부터 선에 의해 형상을 묘사해 내었다. 후에 이르러서도 선에 의하지 않고 묘사한 그림은 매우 적다. 다시 말하면 중국 전통화는 기본적으로 선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의 전통적 유화와 수채화는 형상을 색의 단계적 명암에 따라 표현했고, 심지어 거의 선을 찾아볼 수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서양화는 특히 색을 칠하고, 배합하는 것을 강조했고, 중국화는 [필묵기법]으로 필묵의 운용을 중시했다.
둘째, 실제와 같게 그리는데 중점을 두었다. 남조때, 중국 제일의 회화이론가 사혁은 [회화 육법]을 제시했다. 그 중 제 1항은 사물의 영상의 기운과 생명을 표현해 내는 것이고, 제 2항은 운필시에 내재된 웅건한 필세가 있어야 함을 요구했고, 제 3항에서야 비로소 대상을 묘사함에 정확함을 들었다. 즉, 그는 실제와 같은 것을 1위로 두고, 닮은 것을 2위에 두었다. 사람을 그린다고 하면, 결코 단순히 인물의 겉모습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한 것은 외모를 통하여 인물의 성격, 표정을 묘사해 내는 것으로, 인물에 내재되어 있는 것을 더욱 풍부하고 생생하게 묘사해 내는 것이다. 서양의 전통회화는 추구하는 것이 인물 혹 경물의 구도상의 빛과 색의 변화, 밤과 낮 및 실내와 바깥 등의 시공 효과로, 입체감, 사실성을 더욱 풍부하게 한다.
셋째, 시·서·화의 결합이다. 서방에서 시화 화는 비록 자매예술이긴 하나 그림 그 자체에 시의가 매우 풍부하다 하더라도 그림 위에 시를 쓰는 것은 매우 드물다. 그 이유는 서양에는 시와 그림의 사이에 서예와 같은 일종의 조화 작용을 일으키는 매개물이 없다. 중국의 서예는 그 자체로 예술적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지만 늘 그림 속에 시를 써넣을 때 사용하여 시·서·화가 결합되도록 하여 그림 속에 시가 있고, 시 속에 그림이 있는 효과를 가져와 그냥 그림에 비해 더 높은 경지에 있고, 한층 더 많은 감동을 준다. 회화 예술이 비록 동·서양에 모두 있지만 풍격, 화법은 확실히 다르다. 중국 회화 예술과 서양 회화의 특징의 이해를 통하여 중국 회화, 즉 이 문화 부분의 인식을 더욱 깊게 알 수 있고, 예술 감상 능력을 높일 수 있다.

제2절 음악·무용
1.음악
중국의 전통 음악은 크게 민가, 가곡, 설창, 희곡, 기악 다섯 가지로 나뉜다. 오랜 역사의 발전 중, 중국 음악도 마찬가지로 독특한 민족 풍격을 형성했다. 출토된 문화재 고증을 근거로 해 보면, 중국은 대략 5천년 이전의 원시 씨족 사회에서 가무와 가곡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상주시대에 이르러서는 비교적 발달된 음악 문화가 생겨났고, 서주시기에는 악기가 70여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1978년 5월, 호북성 수현에서 전국 초기의 고분을 발굴했는데, 그 묘 속에는 완전한 악단이 있었는데, 진귀한 악기만도 124개에 이른다. 특히 그 중에 청동으로 주조한 편종 한 벌은 6악종 65매, 종을 매단 선반의 길이가 10.79미터, 높이가 267미터에 이르는 것이었다. 편종은 크기가 달라 12개의 음을 낼 수 있고, 음역은 5옥타브 8에 이른다. 연주되는 음악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이 한 벌의 편종은 고대 중국의 악기 제조가 이미 매우 높은 수준에 도달했음을 설명한다. 그 밖에도 《詩經》중의 風·雅·頌은 실은 모두 주대의 노래 가사로, 그 배음은 궁정에서나 제사용으로 쓰였고, 민간 음악도 있어 당시 중국의 음악이 이미 상당히 널리 퍼져 있음을 설명한다. 주대에서 한대에까지 중앙에서 지방까지 모두 전문적으로 민간 음악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책임을 맡은 기구를 설치하여 음악의 보존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국시대, 중국엔 최초로 음악을 체계적으로 논술한 저작-公孫尼子의 《樂記》가 출현한다.
당대는 중국 가무 예술이 가장 번영한 시기였다. 그 때 국내 각 민족 음악의 교류가 매우 빈번하여 일본, 인도, 조선, 동남아 등지의 음악이 끊임없이 중국으로 유입되어 중국 음악 문화가 대단히 풍부해졌다. 민간 음악이건 궁중음악이건 할 것 없이, 모두 매우 번영하였으나 문헌에 기재된 악곡의 명칭은 수백 여가지 중의 몇 개만이 극히 드물게 보인다. 예를 들어 유명한 대곡 《霓裳羽衣曲》(악보는 이미 소실되고, 부분적으로 전해지고 있다.)은 곡 내용이 방대하고, 구성은 복잡하다. 노래, 음악, 춤이 결합하여 당시 궁중 음악의 매우 높은 예술적인 성과를 대표하고 있다. 송원시기에 이르자, 도시 무역의 중심인 [瓦舍]·[勾欄]은 민간 각종 음악 예능인들이 집중되는 장소로 시민 계층의 통속 음악 예술의 발전을 위한 비교적 좋은 환경과 조건을 제공했다. 이리하여 이 시기는 예술 가곡과 인물·고사를 강창한 것이 특징인 공연 예술이 급속한 발전을 했고, 예능인들은 시민들이 좋아하는 설창곡 종류를 많이 만들어 내었다. 동싱에 전문 예능인들과 예술 단체들이 더욱더 많이 생겨나게 되었고, 수당 산악 잡기 전통을 발양하여 고사·인물의 공연과 설창·가무·악기 등이 결합하기 시작하여, 새로운 종류의 잡극의 번영을 촉진시켰고, 따라서 희곡 음악의 발전이 촉진되었다. 이 시기 사를 짓고, 곡을 노래하는 것이 당대를 풍미했고, 희곡 공연 예술 발전을 촉진시켰다. 남송 婉約派 姜夔는 사인이면서 음악가이기도 하여 사·곡 음악을 창작하던 중, 후인들을 위해 송사 음악의 기본적 특색을 대표하는 희귀한 작품을 남겼다. 설창음악과 희곡음악의 궐기는 악기 예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중국 전통 악기가 호금, 피리, 거문고, 생황, 퉁소, 비파, 징북 등으로 구성되어 불고, 켜고, 뜯고, 치는 4가지 구성을 형성하게 했고, 이와 더불어 소규모 음악 합주의 흥성과 독주 예술의 고양을 촉진시켰다.
명청시기에는 이전의 기초 위에서 갖가지 민간 음악이 흥기하였는데, 특히 예술가곡, 설창음악과 희곡 음악의 발전이 두드러졌고, 민간(소수 민족을 포함한) 가무와 악기 합주의 번영을 촉진했다. 근대 사회 이후로 접어들자, 전통악기는 지속적으로 발달했으나 새로운 시대의 특색이 나타나게 되었다. 민가, 설창, 희곡, 악기, 가무 등 음악 형식이 명청 시기에 비해 더욱 대중화되었다는 점이다. 수많은 새로운 음악의 종류, 새로운 곡의 종류, 새 극의 종류가 잇달아 생겨났고, 예전에는 볼 수 없던 규모로 전국 각지에 널리 퍼지고 발전하여 중국 음악계는 매우 활기를 띤 양상이 나타났다. 이와 같이 서양 악기와 음악은 또한 중국으로 대량 유입되었는데, 예를 들어, 금관 악기, 피아노, 현악기, 트럼펫, 교향악, 화성악 등이 중국의 이호, 피리, 거문고, 생황, 퉁소, 비파, 징북 등의 악기 및 음악과 서로 호응하여 중국 음악 영역과 중국인의 시야를 넓혔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이후, 정부의 강력한 지지 하에서 음악 예술 사업은 왕성한 발전이 있었다. 음악 창작방면으로 제재의 범위가 확대되고, 형식이 다양해져서 우수한 작품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음악 공연 방면으로 일반적으로 합창단, 관현악단, 민족 악단이 창설되었고, 많은 우수한 작곡가, 성악가, 연주가, 지휘자가 배출되었다. 전문 음악 단체외에도 대중적인 음악 활동도 활기를 띠고 있다. 음악 이론 연구와 음악 교육 방면에서 과거 거의 백지 상태였던 것이 지금은 도리어 이것 외에도 끊임없이 세계 음악계와의 교류를 통해 확대해 가고 있다. 위의 몇 가지는 신중국 음악 예술 사업의 번창과 발달을 보여주었고, 중국 음악 예술 수준의 고양을 촉진시켰다.
2. 무용
무용은 음악 반주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무용은 음악과 마찬가지로 인류의 노동에서 기원하고 있다. 시초에는 인간이 노동할 때의 모습과 동물의 모양을 간단히 모방하는 것에서 후에 일종의 의식적인 예술 활동으로 발전했다.
중국의 무용예술은 노예 사회로 들어서자 기본적으로 두 가지로 나뉘게 된다. 하나는 민간 무용으로 노동하는 사람들이 창작하고 공연하여 오락적인 것이 주가 된 것으로, 풍격은 소박하고, 강건하며, 해학적이었다. 다른 한 종류는 직업적인 무용으로 전문적인 사람들이 창작하고 공연하여 풍격이 정연하고 섬세하며, 우아하여 예술의 감상가치를 한층 더 높였고, 오로지 귀족 제사와 향락용으로 제공되었다. 하상시기, 귀족 제사용으로 제공되는 무용을 일컬어 [巫舞]라 했고, 귀족에게 향략을 위해 제공하던 무용을 일컬어 [樂舞]라 했다.
서주 원년, 통치 계급은 전대에 남아 있는 악무에 수집과 정리를 하여, 명확한 궁정 아악 체계를 세웠다. 한 방면으로 음악 무용 예술 수준을 고양시켰고, 다른 한 방면으로 음악 무용의 교화 기능을 강화시켰다. 당시의 궁정 아악은 文舞와 武舞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문무는 군왕이 덕으로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중시하여 표현했고, 무무는 국가의 무력이 강성함을 과시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 목적은 통치 계급의 향략을 제공하기 위한 것 이외에도, 대개 당시의 예법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통치 계급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춘추 전국 시대, 구 예악제도가 점차 신흥 세력에 대한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동시에 아악의 내용과 형식 또한 날로 정체되어 귀족들의 향락 요구를 만족시켜 줄 수가 없어 [禮崩樂壞]라 하는 국면이 나타났다. 궁정 아악은 쇠락하였으나 당신의 민간 가무는 도리어 백성들의 생활과 밀접하게 얽혀 있어 그 왕성한 생명력을 지켜 나갔고, 결국 궁정과 귀족 생활 속으로 흘러 들어가, 아악의 자리를 대신하여 중국 무용 예술의 주류가 되었다.
진한이후, 중국 고대 무용 예술의 발전은 기본적으로 송대를 경계로 하여, 전후 양대 시기로 나뉜다. 송대 이전, 무용은 공연 예술의 주요 형식이었다. 무용을 감상하는 것이 통치 계급의 정신적 향락의 중요한 면이었을 뿐 아니라, 또한 전체 사회 문화와 사회 생활의 중요한 내용이 되었다. 따라서 가무 예술은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고, 연이어 한대 당대에 양대 산맥을 나타나게 했다. 한대 때, 정부가 전문 음악 무용 기구인 악부를 설치했을 뿐 아니라 귀족 호족 또한 대량으로 전문적인 악무 예능인을 양성했다. 위로는 황제와 관료에 이르기까지 아래로는 평민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무를 매우 좋아했고, 가무의 풍속이 전국에 널리 퍼졌다. 당시 비교적 널리 알려졌던 무용은 대략 袖舞, 巾舞, 鼓舞, 劍舞, 扇舞 등을 들 수 있다. 그 공연은 훌륭했고, 종류가 대단히 많아 중국 무용 예술의 내용 형식과 표현력이 지극히 풍부해졌다. 말하자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온 중국 무용의 민족적 특색은 한대에 이미 초보적으로 형성되어 현재 중국 전통 무용의 각종 양식, 제재 모두 직·간접적으로 한대로부터 그 기원을 찾아볼 수 있다. 한대 무용의 절정이 나타난 것은 중국 고대 무용 예술이 성숙기로 나아가고 있었고, 후대 중국 무용 예술의 발전을 위해 단단한 기초를 다진 것이었다.
위진남북조시기, 중국 각 민족 문화는 대융합을 일으켜 황하 유역을 이어 장강 유역의 경제·문화 또한 발달하기 시작하여, 따라서 악무 문화의 확대를 거쳐왔다. 남방 지역은 대개 한·위때의 악무를 계승하여 민간 악무를 채집하고 받아들여 발전을 하였고, 雅舞와 雜舞가 출현했다. 아무는 제사용으로, 잡무는 연회용으로 이용되었다. 예를 들자면 유명한 궁중 악무로 《春江花月夜》, 《玉樹後庭花》등이 있는데, 이것은 민간 무용에서 발전해온 것이다. 북방지역은 각 소수 민족 및 인도 악무의 유입으로 인하여 중국 전통 무용악과 외래 무용의 대교류·대화합이 일어나, 무용의 기교와 예술성, 형식미를 추구를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 이 몇 가지는 모두 후에 수당시기 중국 무용 예술이 새로운 절정이 나타날 수 있게 한 중요한 토대를 마련했다.
당대 무용은 중국 무용 사상의 절정이었다. 중요한 것을 들라면, 첫째 예의 악무가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는데, 이것은 궁정 예의 악무《十部樂》의 출현으로 대표된다. 《십부악》은 《燕樂》, 《淸樂》, 《西凉樂》, 《天竺樂》, 《高麗樂》, 《龜玆樂》, 《安國樂》, 《疎勒樂》, 《康國樂》, 《高昌樂》이 포함되어 있다. 수나라때 《七部樂》 《九部樂》의 기초 위에서 완성된 것으로, 위진남북조 이래로 각 민족 및 국외의 악무를 모아서 각종 악무의 명칭, 분장, 곡명, 악곡 등을 규범화한 것이다. 《십부악》의 공연은 반주가 웅대하고 분위기가 장대하고, 장려하여 다민족적 색채가 충만하고, 예의성을 선명하게 띠고 있다. 대개 외교, 축전 연회 등의 장소에서 공연되었다. 《십부악》은 당대 예의 악무의 최고 수준을 보여줄 뿐 아니라 동시에 중국 각 민족 악무의 교류와 융합이 새로운 단계에 진입했음을 상징한다. 둘째, 공연성을 띤 무용에 조예가 깊으며, 정밀하고 다채롭다. 당조의 《십부악》은 비록 수준은 높다하나 결국 예의 악무여서 다소 생동감이 결여되어 있다. 이리하여 오로지 감상`오락의 요구만을 만족시키기 위해 궁중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민간에서도 않은 기예의 높은 수준과 다양한 풍격이 출현하여 대단히 예술적 감동력을 가진 공연성을 띤 무용이 되었다. 이러한 무용은 풍격 특색에 따라 [健舞]와 [軟舞]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건무는 동작이 힘차고 씩씩하며, 리듬이 명쾌하다. 연무는 부드럽고 우아하며 리듬이 완만하다. 건무에서 가장 유명한 것으로는 서역에서 전래된 《胡旋舞》, 《胡騰舞》, 《拓枝舞》 그리고 《劍器舞》등이 있다. 예를 들어 호선무는 춤추기 시작하면서 회오리바람같이 좌우로 빙빙 돌아 자유 분방하고, 강건하며 아름다워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일찍이 황제와 조정의 상하 관료가 이 춤에 매료되어 모든 사람들이 호선무를 추었다. 연무 중 영향력이 가장 큰 것은 《綠腰》, 《春鶯轉》으로 공연하는 사람은 모두 여자로 춤추는 자태가 나긋나긋하며, 유미하여 느릿하여 사방으로 흩날리듯 하여 사람들에게 또다른 풍격의 예술 감각을 일깨운다. 세 번째, 대곡-악곡, 가창, 무용 세 가지가 종합된 대형 악무의 창작이다. 대곡은 [散序], [中序], [舞遍](또는 破라고 부른다.)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이 풍부하고, 규모가 웅대하며 곡·창·무 서로 번갈아 가며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있어 대단한 예술적 역량을 가지고 있어, 당시 궁정 악무에서 매우 성행했다. 당대 대전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은 《霓裳羽衣舞》로, 가락은 당 명황때, 창작되었고, 그 중 독무는 양귀비가 춤을 추었었다. 무용은 전통적인 優美舞法을 채택하였고, 동시에 서역 무용의 훌륭한 회전 기교를 융합시켰다. 아름답고 즐거운 음악을 더하여 생생하게 어렴풋한 하늘과 신선의 경계를 재현했고, 너무나 아름다운 선녀의 모습을 형상화하여 매우 높은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하여 중국 무용 예술 사상의 걸작이 만들어진 것이다. 요컨대, 당대 무용은 동서고금의 걸작을 모아서 양식이 다양하고 예술적으로도 우수하여 미증유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송대는 중국 무용 예술 사상의 전환기였다. 송대 이전 가무는 중국 공연 예술의 수위를 차지했다. 송대 때부터, 희곡, 설서 등에서 다양한 종류의 예술 형식이 흥기했고, 특히 원대 희곡의 번영으로 가무의 지위는 도전을 받게 되었다. 그리하여 무용은 독립적인 예술이 되어 쇠락의 길을 걸었고, 새로운 창작은 비교적 드물게 나타났다. 그러나 예술이라는 뜰 속의 한 종류로, 무용 예술은 여전히 독특한 감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끊임없이 널리 퍼져 나가고 발전하여 근대 그리고 오늘날에까지 이르렀다. 그 중 특히 한족의 민간 무용과 소수 민족 무용은 시민들의 삶에서 직접적으로 기원하여 만들어졌고, 시종 엄청난 활약을 하고 풍부하고 다채로움을 띠어 생기가 충만했다.
20세기 30년대, 서방 무용 예술이 중국에 유입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발레이다. 신중국 건국 이후, 무용 예술 사업을 국가에서 중요시하기 시작하여 많은 무용 예술 단체 및 연구 기관이 생겨났고, 무용 예술 학교가 세워져 무용 예술 인재를 대량으로 배양·육성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무용 예술가나 기타 무용 관계 종사자들은 중국의 고전 무용, 민간 무용, 소수 민족 무용을 발굴하고, 연구·정리·개편을 통하여 풍부하고 다채로우면서 선명한 민족 특색을 갖춘 중국 무용을 창작하고 공연했다. 동시에 적지 않은 세계 다른 민족 무용을 공연했다. 예를 들어 중앙 민족 가무단은 전문적으로 중국 소수 민족 무용을 공연했고, 중국 발레단은 서방 발레무를 전문으로 공연하며, 동방 가무단은 아시아 기타 국가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민족 가무를 전문적으로 공연한다. 이 밖에, 중국은 초청과 파견의 방법을 채택하여 끊임없이 세계 무용계의 교류를 보강하고 있다.
신중국의 무용 예술을 과거와 비교해 보면, 사업 대오를 확대했고, 시야, 제재, 내용이 한층 더 넓어졌고, 풍격, 양식, 기교는 더욱 풍부해졌다. 현재 중국에서 정식으로 무용가 협회에 가입한 회원은 이천여명에 이르고 이외에도 무용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는 많은 아마추어 무용가가 있다. 많은 무용 관계 종사자들의 노력하에서 중국의 무용 예술은 지속적으로 탐색하고 창작하고, 고양되고 있다.

제3절 연극과 영화
1. 연극
중국의 연극 예술은 기본적으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한 종류는 전통 연극이고, 다른 한 종류는 현대극이다. 전통 연극은 주로 각종 고대 분장을 하는 지방극이다. 현대극은 연극, 오페라, 무용극 등이 포함된다. 중국의 연극 예술은 진한 시기의 광대에서부터 비롯되었다. 당대에 이르면 參軍戱가 형성된다. 송대에 이르면 삼군희를 잡극이라 부르게 된다. 13세기의 원대는 이미 상당한 성숙기로 關漢卿의 작품으로 대표되는 많은 걸작이 나타난다. 후에, 끊임없이 발전하고 풍부해져서 종류가 갈수록 다양해진다. 오늘날에 이르면 전국 각지의 전통 연극은 300여종에 달한다. 예를 들면 京劇, 評劇, 豫劇, 河北 子, 越劇, 秦腔, 昆曲, 川劇, 徽劇,  劇이 있다.
중국의 전통 연극은 일종의 종합 예술이다. 그것은 서양의 연극, 오페라, 무용극과 같이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는 것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고, 음악, 대화, 노래, 무용, 잡기, 무술 등이 함께 결합되어 있다. 따라서 한 명의 연극 배우가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렵고, 다방면의 재능이 필요하며, 선발도 매우 엄격하여 어릴 때부터 자질을 기르기 시작해야 한다. 공연 방법에서 중국 전통 연극의 중요한 특징은 허구성이다. 바꾸어 말하면 무릇 무대 위에서 표현하기 어려운 일상 생활 사물은 전통 연극 중 모두 허구 방법을 이용하여 표현해 내었다. 예를 들면, 손시늉, 몸 동작, 걸음걸이 등을 이용하여 문을 나서도 들어서고, 계단을 오르고 내리는 것 및 산을 오르고, 물 속으로 들어가는 동작까지도 그럴듯하게 꾸며낸다. 아름답게 장식된 말채찍으로 말 타는 것을 상징하고, 양면 그림의 수레 바퀴의 깃발은 마차를 오르는 것을 상징한다. 배우가 무대 위를 한바퀴 도는 것은 매우 먼 거리를 간다는 것 등등이다. 허구성을 띤 연기를 통하여 관중은 연극의 줄거리와 극중 인물의 행동 및 그중 자연 환경 및 사소한 부분까지 이해할 수 있어 관중들은 배우의 허구적인 연기에서 생겨난 연상을 통해 보충해야 한다. 공연 방법상의 허구성을 이해하는 것은 중국 전통 연극을 이해하기 위해 갖추어야만 하는 상식인 것이다.
중국 전통 연극의 종류는 매우 많아 사람의 눈을 어지럽게 할 정도이다. 실제 공연 방법부터 의상, 분장, 도구에 이르기까지는 비슷비슷하다. 그렇다면 각종 전통 연극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다. 첫째, 대사와 노래하는 구어음 어조는 각기 다른데, 각 연극은 자기 지방 음조를 사용한다. 둘째 노래 곡조와 음악 반주가 달라, 그 연극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지방 연극에는 지방적 특색과 가기 다른 예술 풍격이 농후하여 감상해 보면 가기 저마다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중국 전통 연극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경극이다. 사실 경극 또한 지방극의 일종으로, 그 지방극을 받아들인 기초 위에서 생겨난 것이다. 경극이라 하는 이유는 중국 전통극의 가장 대표적인 종류이기도 하면서 18세기 말 청대의 경성인 북경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몇 대 희곡가의 200년에 가까운 노력을 거쳐 경극은 노래 곡조, 무용, 무술 등의 부분에서 매우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사, 노래 등은 표준어에 근접하도록 하여 비교적 알아듣기가 쉬워 다른 지방극에 비해 많은 수의 관객을 확보하고 있으며, 알려진 지역도 넓어 전국적으로 영향력이 가장 크다.
경극의 음악 반주는 주로 관현악과 타악으로 강렬한 리듬감이 있다. 타악으로 징북, 홍목, 박자판이 있고, 관현악으로는 주로 경호, 이호가 있고, 여기에 현악기 월금, 비파, 삼편극 및 취주악기인 수르나이, 피리 등이 더해진다. 고수는 악단을 지휘하는데, 대나무로 만든 작은북을 가지고 배우의 노래, 동작을 배합하고 북소리의 고저기복과 휴지, 곡절, 빠르고 느림, 가볍고 무거운 고판 반주를 하여 전체 악단의 리듬과 분위기를 조정한다. 경극의 반주는 소리가 높고, 커서 노래 곡조가 우렁차 고조되거나 혹은 구성지고 은은하여 격투에서의 긴장감이 뛰어나고 일종의 분방하고도 섬세한 독특한 예술 풍격을 형성한다. 경극은 세심하게 배역이 분담된다. 여자배우는 [旦]이라 통칭하고, 세분하여 [靑衣], [花旦], [老旦], [武旦]등이 있다. 남자 배우는 [生]이라 통칭하고 세분하여 [小生], [老生], [武生] 등이 있다.
익살스러운 인물은 얼굴에 온통 흰색 그림을 그리고, [小丑]라 부른다. 호탕하거나 사악하고 간사한 인물은 얼굴에 갖가지 색깔 그림을 그리는데, [ 譜]라 부르며 세분해 보면 [淨], [花 ]이 있다. 극중 인물의 신분·나이의 차이에 따라 세세하게 더 분류할 수 있다. 가기 다른 유형의 배역은 의상, 분장, 공연시 각기 다른 규정이 있고, 과정과 규격화가 뚜렷하게 나타난다.
경극의 의상은 대개 명대 의상의 형식을 따른다. 색깔은 울긋불긋하며, 황색, 백색, 검은 색, 남색으로 빛깔과 광택이 선명하고 대비가 강렬하다. 의상의 도안은 금은 및 색깔 있는 실을 이용하여 정교하게 수를 놓은 것으로, 화려하고 웅장하여 눈비시게 아름답다. 남녀 배역의 모자와 머리 장식품 특히 단역의 머리관은 한층 더 휘황찬란하며 번쩍거린다. 동시에 상대적으로 균형을 맞추기위해 다른 극중 인물은 비교적 소박하고 단아하게 입는다. 경극의 도구는 모두 실제 생활 도구에 다듬고, 장식하여 미화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무기, 테이블과 의자, 침대휘장, 등잔, 술잔, 쟁반, 그릇, 젓가락 등 크고 작은 도구 모두 세련된 공예품들이다. 따라서 관중들의 눈앞에 펼쳐진 경극 무대는 그야말로 색깔이 곱고 아름다운 물건이 가득한 동화세계로,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
경극의 전통적 극목 천여 개가 전해 내려오고 있는데, 널리 알려진 2·3백여 종이 계속해서 무대에 올려지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극목으로 《空城計》, 《群英會》, 《打漁殺家》, 《三 口》, 등이 있다. 신중국 건국 이후, [옛 것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받아들인다]는 방침에 입각하여 희곡의 개혁 작업을 강화하고 있으며 많은 전통 연극을 개편·정리하는 동시에 적지 않은 새로운 역사극과 현대경극을 만들어 내고 있다. 우수한 극목으로 《白蛇傳》, 《秦香蓮》, 《海瑞罷官》, 《海瑞上書》, 《謝瑤環》등이 있다. 현재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경극 공연 예술 단체로 中國 京劇院, 北京 京劇院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경극 배우로 梅蘭芳, 程硯秋, 荀慧生, 尙小云이 [4大 名旦]들이었고, 周信芳, 馬蓮良, 譚 培, 盖叫天등이 있다. 경극이외에도 기타 지방극 또한 많이 보존되고 개편되거나 새로이 창작된 우수한 극목이 있고, 유명한 극단과 배우들 또한 많다.
20세기에 접어든 이래, 중국은 외국 문화의 영향을 받아 대연극, 오페라, 무용극 등이 발전했고, 그 중 연극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30년대 몇 명의 진보 문예 창작가들은 일찍이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킨 많은 연극을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上海屋 下》, 《雷雨》, 《日出》, 《屈原》, 《棠 之花》, 《虎符》, 《麗人行》, 《名優之死》, 《法西斯細菌》등이 있다.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의 연극엔 새로운 발전이 있었는데, 문혁 역사를 소재나 사회주의 현실 제재 및 역사 제재를 반영한 우수한 연극이 많아 창작되고 공연되었다. 예를 들면, 《紅色暴風》, 《龍須溝》, 《西安事變》, 《關漢卿》, 《茶館》, 《武則天》등이 있다. 몇 개의 우수한 대연극은 국내 공연뿐 아니라 초청을 받아 세계 무대에도 올려졌다. 현재 중국 고등 연극 학교는 세 곳이 있다. [中央戱劇學院], [上海戱劇學院], [中央戱曲學院] 그 외에도 희곡 연구소, 연극 연구소 등의 연구기관도 있다.
2. 영화
영화는 근대 과학 기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하기 시작한 일종의 종합 예술이다. 영화의 역사는 백년이 채 되지 않고, 중국에서의 역사는 더더욱 짧다. 그러나 영화 예술이 가진 영향력은 가장 성장력이 빠른 예술로, 중국에서 또한 마찬가지로, 오늘날 중국 영화는 십여억 관중을 확보하고 있고, 이미 국제 시장에 나가 세계 영화계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최초의 영화필름은 1905년 북경 豊泰 사진관(현 유리창부근)에서 촬영한 고대 희곡편《定軍山》이었다. 중국 최초 이야기극은 1913년 鄭正秋가 감독한 무성영화 《難夫難妻》였다. 중국 최초의 영화사는 1918년에 세워진 商務 인쇄관의 활동영화부였다.
이후 각종 영화 회사가 잇달아 생겨났고, 중국의 영화 사업은 발전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20대 초기 영화는 예술 면에서 미숙했고, 기술도 낙후되어 주로 교육용과 애정용, 무협, 귀신영화, 탐정·모험영화, 희극영화가 있었다. 이외에도 풍경영화, 시대영화, 시사영화, 내막영화등이 있다. 대다수 영화는 식민지적·봉건적 문화 색채가 뚜렷하다. 당시, 몇 명의 진보된 영화 관계자들은 적은 수의 비교적 좋은 영화를 촬영했다. 그것은 정정추가 감독한 《難夫難妻》, 《孤兒救祖記》, 《上海一婦人》, 洪深이 감독한 《馮大少爺》, 《愛情 黃金》, 田漢이 감독한 《到民間去》등이 있다.
30년대에 이르러 좌익 문예 운동에 힘입어 중국 영화는 갖가지 고난을 경험하긴 하지만 결국은 방향을 바로잡아 한 걸음씩 성숙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 시기, 몇 차례의 영화 창작 고조기가 나타나서 우수한 영화와 우수한 영화 시나리오 작가, 감독, 배우가 대량으로 출현한다. 당시에 비교적 유명한 영화로는 夏衍의 《春蠶》, 田漢의 《三 摩登女性)》, 《麗人行》, 蔡楚生의 《漁光曲》, 홍심의 《劫後桃花》, 袁牧之의 《都市風光》, 《馬路天使》, 沈西 의 《船家女》, 《十字街頭》, 史東山의 《八千里路云和月》, 陽翰笙의 《三毛流浪記》 陳白塵의 《烏鴉 麻雀》 등이 있다. 이 영화들은 사상 면에서뿐만 아니라 예술적 면에서도 모두 비교적 높은 성취를 거두었고, 강렬한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신중국 건국 이후, 정부는 영화 사업을 이끌어 나가는 것에 심혈을 기울여 영화의 생산 조건을 대대적으로 개선하였다. 문화 혁명 전 17년간 이야기 영화는 650편이 만들어져서 우수한 또는 비교적 우수한 영화가 대량 출현하게 되었다. 예를 들자면 《白毛女》, 《南征北戰》, 《渡江偵察記》, 《董存瑞》, 《靑春之歌》, 《林則徐》, 《五朶金花》, 《李雙雙》, 《舞臺姐妹》, 《甲午風雲》 등이 있다. 10년 동안의 문화 대혁명 기간 중 중국의 영화 사업도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아 거의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10년의 정치 동란이 끝나고, 개혁·개방 정책이 시행된 이후, 중국 영화는 매우 빠르게 소생하여, 새 발전 단계로 진입하여 비교적 번영된 국면을 맞이했다. 대표적으로 나타난 것은 첫째, 창작에서의 사상해방이 나타났다. 중국 영화 발전상의 우수한 전통을 계승하였을 뿐 아니라, 내용은 범위가 확대되어, 많은 금기를 무너뜨리면서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다. 셋째, 노감독, 노배우 외에 빛나는 재주를 가진 젊은 감독, 배우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넷째, 우수한 영화를 대량 창작해 중국 영화는 이미 세계 영화계에 올라 있다. 예를 들면 서안영화제작소의 감독 張藝謀는 40여세로, 젊은 배우   와 함께 일하며 잇달아 촬영한 영화 《紅高梁》, 《菊豆》, 《大紅燈籠高高掛》, 《秋菊打官司》는 모두 국내외의 영화제에서 상을 탄 매우 영향력 있는 영화들이다. 이 외에도 이 몇 년간의 영화로는 《牧馬人》, 《城南舊事》, 《天雲山傳奇》, 《人到中年》, 《芙蓉鎭》, 《高山下的花環》, 《開國大典》, 《大決戰》, 《周恩來》, 《毛澤東和他的兒子》등이 있다.
근래 10년은 중국 경제의 발전과 더불어 국민 생활 수준의 향상으로 텔레비전이 빠르게 보급되어,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 그리하여 방송극은 빠르게 예술의 한 분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92년 전국에 방송된 텔레비전 방송극은 500여편에 이른다. 비교적 호응이 컸던 우수한 텔레비전 연속극으로는 《西游記》, 《紅樓夢》, 《楊家將》, 《四世同堂》, 《圍城》, 《新生》, 《渴望》, 《編輯部的故事》, 《宋慶齡和 的 妹們》, 《外來妹》, 《北京人在紐約》등이 있다. 텔레비전 방송극과 영화는 같은 종류의 예술로, 텔레비전 방송극은 영화의 연장과 방영 장소의 변경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텔레비전 방송극은 줄거리의 크기나 방영 시간에 있어서 영화에 비해 비교적 융통성이 크다. 1·2편에서 십여 편, 몇 십 편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백 편까지 이를 수도 있다.
게다가 가정에서도 볼 수 있어, 영화관에 가지 않아도 되니, 매우 편리하다. 텔레비전 방송극의 번영은 영화 예술의 세계를 확대했고, 사람들의 문화 생활을 윤택하게 했다. 동시에 영화의 강력한 라이벌로 등장하여 영화 사업의 위기를 가져왔다. 냉엄한 현실 속에서 중국 영화는 한층 더 큰 진보와 거듭남을 통하여 비교적 많은 관중을 끌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각종 영화 제작소가 20여 개가 있으며, 텔레비전 방송극 제작 센터는 각 성에 모두 있어 관련 부문에서 우수한 영화와 텔레비전 방속극을 심사하여 표창하는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 중국에서 전문적으로 영화 인재를 배양하는 고등 학부는 북경 영화 학원이 있다. 그 학교는 설립된 지 40년이 되어 이미 영화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했기에, [중국 영화의 요람]이라 불린다. 중국은 국산 영화 외에도, 문화 교류를 통하여 계획적으로 많은 외국 영화와 텔레비전 방송극을 도입하여 더빙하고 있다.
제4절 曲藝·雜技
1. 曲藝
曲藝는 중국 설창 예술의 총칭으로 종류가 매우 많다. 전국 각지의 曲藝를 모으면 300여종에 이른다. 종류가 매우 많은 曲藝는 전체적으로 크게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상성, 고곡, 쾌반, 평서,가 그것이며, 그중 특히 고곡의 종류가 가장 많다.
曲藝는 중국에서 예술의 오래된 한 분야이다. 듣건대, 일찍이 이 천년 이전에 중국에는 설창을 직업으로 삼아 공연하는 예능인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을 일컬어 [伶人]이라 한다. 그러나 당대 이전의 중국 설창 예술의 정황에 대해서는 근거로 삼을 만한 자료가 극히 적다. 가장 오래된 자료로 고증이 가능한 문화재는 [伶人傭]이 있는데, 그것은 사천성 성도 부근의 동한 시대의 묘에서 출토된 것이다. 그 [영인]은 겨드랑이 아래에 북을 끼고, 손에는 북채를 휘두르고 있으며, 다리 하나를 높이 들고 있어 동작과 표정을 볼 때, 마치 북을 치면서 노래하고 있는 듯 하여 오늘날 [說書]의 모습과 비슷하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說書傭]이라 부른다. 비록 중국 曲藝 연구를 하는 사람이 많은 역사 자료를 통하여 당대 이전 중국 설창 예술의 정황을 설명할 순 없다 하더라도 이 설서용은 중국 동한 때에 이미 설창 예술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당대에 이르면, 설창 예술이 문자로 쓰여지기 시작했을 뿐 아니라, 설창에 사용되는 각본도 생겨났는데, 그것의 자료는 바로 돈황에서 출토된 변문이다. 변문은 원래 불교를 강창하기 위해 쓴 해설서로, 그 중에 몇 개의 민간고사를 삽입하였는데, 후에 점차 불교와 무관한 설창 예술로 발전했다. 송대에 이르면, 도시의 상업·수공업의 발달에 따라 勾欄·瓦舍등이 무대가 된 시민문화가 왕성하게 발달하여 설창 예술의 빠른 번영을 가져오게 되었다. 한편으로 많은 曲藝 예능인이 나타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설창 예술의 종류가 증가하였다. 말을 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말과 노래를 다하거나 하여서 사회의 문화 생활은 크게 풍부해졌고, 중국의 曲藝의 기초가 닦여지기 시작했다. 원, 명, 청대 중국의 설창 예술은 송대의 기초 위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여 전국 각지에 널리 퍼져나가 종류가 갈수록 다양해졌다.
신중국 건국 이후, 중국의 각종 설창 예술은 [曲藝]라 통칭하게 되었다. 정부는 전통 曲藝의 수집·정리·혁신 작업을 중시하여 전국 각지에 전문 曲藝단을 세웠다. 나이 많은 예능인은 자신이 예술적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되었고, 젊은 예능인들은 튼튼하고 좋은 환경에서 배출되어 새로운 曲藝 작품이 끊임없이 나타났다. 구중국에서 曲藝는 [소시민의 예술], [저급 예술]로 보아 고상한 자리에 오르기가 어려웠다. 해방 후, 曲藝는 그 건실한 예술적 재미로 많은 대중들의 환영을 받는 예술 형식의 하나가 되었다. 지금, 범종합적 문예 공연으로는 반드시 曲藝 프로그램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뭔가 빠진 것 같다는 느낌을 시민들은 가질 것이다.
曲藝가 어떻게 이처럼 많은 중국 국민들의 환영을 받게 되었는가? 여기에는 아래의 몇 가지 특징 때문이다. 첫째, 짧고 세련되었으며 신축성이 있어 편리하다. 다른 예술 형식과 비교해 볼 때, 曲藝는 필요한 배우가 적어 보통 한 두 사람이면 공연을 할 수 있다. 악기, 의상, 장소가 간단하고 반주는 악기 한두 개면 거뜬히 할 수가 있다. 또 악기가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다. 의상과 장소 또한 특수하게 요구되는 것도 없다. 그리고 공연 시간이 짧다. 일반적으로 십여 분이고, 평성의 시간은 비록 길지만 몇 차례 나누어 공연하는 방식을 이용하여 매 회는 그렇게 길지 않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曲藝가 손쉽게 일반 대중 속에서 공연되고 보급되고 있는 것이다.
둘째, 설창이 주가 되어 해학적이며 생기가 왕성하다. 曲藝가 비록 움직이며 공연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동작은 비교적 적고, 간단하며 대개 설창을 두드러지게 하는 작용을 한다. 曲藝의 주요 공연 수단은 주로 말이나 노래 혹은 설창이 결합된 것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 나가고, 인물을 묘사하며, 줄거리를 전개시킨다.
셋째, 통속적이어서 이해가 쉽다. 훌륭하면서도 통속적이어서 누구나 다 감상할 수 있다. 曲藝의 언어는 표준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사투리를 사용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든 언어는 모두 고도로 정련되고, 다듬어지는 과정을 통하여 매우 대중화되고 생활화된 것이다. 말을 하든 노래를 하든 모두 분명하게 알아들을 수 있다. 경극의 언어가 고도로 시화되고 공연화되어 듣고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과는 다르다. 이렇게 해서 曲藝 배우는 설창을 통해 공연하고, 직접적으로 대중과 함께 호흡하여, 대중을 휘어잡기가 쉽다. 보통 사람들에 따라서는 나이가 많든 적든, 지식 수준이 높든 낮든 간에 보편적으로 曲藝에 재미를 많이 느낀다. 아래에는 曲藝 중의 상성, 고곡, 쾌반, 평성 4종류로 나누어 소개하고 있다.
(1) 相聲
相聲 예술은 송대 이전에 생겨났다. 최초로 정확하게 相聲이란 말이 사용된, 일종의 성숙된 예술 형식이 된 때는 대략 청대 중기이다. 중국의 相聲에는 세 종류가 있다. 單口相聲, 對口相聲, 群口相聲이 그것이다. 단구 相聲은 한 사람이 말하는 것이고, 대구 相聲은 두 사람이, 군구 相聲은 두 사람 이상이 말한다. 그중 대구 相聲이 가장 보편적이다. 相聲은 웃음이 담긴 예술로, 희극성, 풍자성, 과장성이 그 주요 특징이다. 相聲은 통상 생활 속에서 전형적인 몇 인물, 사건을 골라 유머러스한 말에 과장을 더하고, 풍자가 주가 되도록 하며, 동시에 또한 노래도 해 사람들이 가볍게 유쾌하게 웃는 중에 일종의 계몽적이고 교육적인 효과를 거두도록 한다. 相聲의 공연 수단으로 說이 주가 되고, 學, 逗, 唱을 겸하여 사용한다. [설]은 사건을 풀어 나가고, 인물을 묘사한다. [학]은 각종 동작과 소리를 모방하는 것이다. [두]는 우스개 소리로 웃기는 것이며, [창]은 각종 곡조로 창하는 법을 모방하는 것이다. 이 네 가지 종류의 공연 수단은 相聲 배우의 기초적인 기술이다. 相聲 공연중 어떻게 해야 사람들을 웃길 수 있는가. 말하고, 모방하고, 우스개 소리하고 창하는 것 외에도 특이한 방법이 있는데, 그것이 [包褓]의 운용이다. 소위 포보라 하는 것은 相聲의 전문 기술 용어로, 일종의 비유 화법이다. 의미는 각종 수단을 써서, 먼저 웃길 수 있는 어떤 것을 [싸 두었다가] 시기가 무르익기를 기다려 갑자기 보자기를 풀어헤치며 관중들을 웃기게 하는데, 매우 뜻밖이다 하고 느끼게 하는 동시에 사리에 맞다고 하는 것이라 이것을 [ 包褓]라 부른다. [포보]는 꼭 필요하다. 왜냐하면 相聲은 사람들을 매우 웃길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을 가장 즐겁게 할 수 있고, 따라서 相聲은 曲藝중에서 관중의 환영을 가장 많이 받는 것이다. 당대 중국의 유명한 배우로는 侯寶林, 常寶 , 馬三立, 郭全寶, 唐杰忠, 馬季, 馮功, 笑林, 李金斗, 姜昆, 石富寬, 侯躍文등이 있다.
(2) 鼓曲
曲藝중 鼓曲의 종류가 가장 많아 전 曲藝 종류 중 80%를 차지하고 있다. 鼓曲은 기본적으로 大鼓, 漁鼓, 彈詞, 琴書, 牌子曲, 雜曲, 走唱 크게 일곱 종류로 귀납할 수 있다. 각 하나의 큰 종류에는 많은 곡의 종류가 있는데, 대고의 종류를 예로 들면, 東北大鼓, 京韻大鼓, 西河大鼓, 山東大鼓가 포함된다. 鼓曲은 비록 곡의 종류가 많기는 하나 각기 차이가 존재하며 공통적으로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창이 주가 되고, 음악반주가 있으며, 상용되는 악기로는 삼현, 비파, 대고, 간판, 양금 등이 있다. 둘째, [唱段]은 비교적 짧아 하나의 창단이 일이백 구로 한 번 공연에 하나의 창단이 있어 불과 일 이십 분을 넘지 않는다. 셋째, 지방색이 농후하여, 평균적으로 쓰이는 것이 지방 곡조와 가락으로 일반적으로 그 지방에만 유행했다. 예를 들면 경운 대곡에 사용된 것은 북경 가락이라 주로 북경, 천진 일대에서 유행했다. 동북 대곡에 쓰인 것은 동북 가락으로, 주로 동북 지방에서 유행했다.
(3) 快板
快板은 [數來寶], 小快板, 快板群, 天津快板, 快板書, 山東快書등이 포함된다. [수래보]는 일반적으로 두 사람이 공연하며 練板을 치면서 서로 말을 한다. 초기에는 농촌에서 널리 퍼지다 후에 도시로 유입되었다. [수]는 빠르고 규칙적이라는 말이며, [래보]는 돈을 번다는 의미로, [수래보]는 돈을 번다는 말이 된다. 이 이름은 실제 구사회에서 팔려 다니는 예능인의 희망을 반영한 것이다. [수래보]의 장단은 빠르며, 입에 익은 것이고, [花轍]운으로 압운을 하여 간단하고 빠르다. 소쾌판의 특징은 특히 더 짧지만 힘이 있고, 생동감이 있으며 적은 단락은 몇 구, 많은 단락은 몇 십구로 보통 대중들이 자신들의 오락용으로 공연을 했다. 쾌판군은 두 사람 이상의 사람이 쾌판을 치면서 말을 한다. 천진쾌판은 천진 사투리를 이용한 것이다. 쾌판서는 단지 한 사람이 공연하면서도 편폭이 비교적 길어, 인물 형상과 이야기 줄거리의 곡절이 연결되고, 완전하며 생동감 있는 부분에서 평서와 비슷하나 평서와 비교해 보면 압운과 리듬감을 중시한다. 산동쾌판은 산동 지반에서 생겨나 유행하여 공연시 손에 한 벌의 원앙판을 두드리며, 산동 가락을 쓰고, 사건, 인물, 줄거리가 모두 있고 지방 색채가 짙어 매우 유머러스하면서 재미있다.
(4) 評書
고대에는 설화라 불렀고, 송대에 가장 흥성하여 줄곧 지금까지 유행하고 있다. 소위 評書라 하는 것은 이야기를 강술하고, 이야기 구조는 비교적 길며, 크기에서 단일하게 조성되어 서로 연결되어 연속성을 가지고 있어 여러 번 나누어 강술해야 한다. 강술할 때에, 어떠한 도구, 분장, 음악도 필요하지 않고, 완전히 한 사람이 입으로 말을 하는 것이다. 평서의 제재 내용은 이야기의 생생한 곡절을 중요시하고, 인물이 살아 있는 것 같이 생생하고 광경이 선하게 드러나 강술하는 것은 흥미진진하고 생생하여 귀가 솔깃한다. 평서 대부분은 소설에서 개편한 것으로 역사 제재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요 몇 년간 중국에 출현한 영향력이 비교적 컸던 평서로는 [楊家將], [岳飛傳], [康熙私訪], [三國演義], [朱元璋], [西楚覇王]등이 있다.
2. 雜技
雜技는 세계적인 공연 예술로, 중국에서의 역사 또한 매우 길고 중국 민족적 특색을 지니고 있다. 일찍이 신석기 시대 중국에는 잡기 예술의 싹이 트고 있었다. 예를 들면, 현대 잡기는 무대 위에서 늘 공연되는 기술인 [飛技板]은 현재 알려진 가장 오래된 잡기 프로그램이다. 그것의 기원은 신석기 시대이다. 그때, 원시 부락의 사람은 늘 일종의 사냥 도구로 짐승을 잡았는데, 이러한 종류의 도구를 고문학자들은 [飛去來器]라 부른다. 사냥꾼이 새나 짐승을 발견한 후, 그것을 던지는데, [비거래기]를 표적을 향해 회전시켜 날린다. 만약 맞추지 못했을 경우, 저절로 사냥꾼의 손으로 돌아온다. 이러한 [비거래기]는 현재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인도 등지의 부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후에 [비거래기]를 던지는 공연은 오로지 잡기 프로그램의 하나가 되었고, 곧 그것이 오늘날의 부메랑이라는 것이다. 이외에 [갈퀴 날리기(飛叉)], [활 당기기(拉弓)], [유성이 춤추다(舞流星)], [야수 조련시키기(馴獸)]등이, 모두 고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그때의 잡기 예술의 싹은 원시 인류의 노동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잡기는 중국에서 생겨난 독립된 공연 예술의 한 분야로, 춘추시대에 시작되었다. 그때 각지에서 잡기의 성격을 띤 공연 프로그램이 출현했다. 예를 들어 [장사가 세 발 달린 무쇠솥(鼎)을 들다], [난쟁이가 장대를 기어오르다], [작은 닭이 개를 쫓다] [공 위에 공을 쌓다] [성대 묘사하기]등이 있었다.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한 이후 육국의 잡기, 무가 등의 예능인을 함양으로 모이게 하여 [角抵俳優之戱]라 통칭했다. 한대에 이르러 경제, 문화의 번영에 따라 잡기 예술 또한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 때, 악무, 잡기를 그 속에 포함시켜 [百戱]라 통칭했다. 위로는 궁정 귀족에 이르고, 아래로는 보통 시민에 이르기까지 백희 공연을 관람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기원전 108년 봄, 한무제는 서역 각국의 사신을 초청하여 일찍이 장안에서 [백희]를 공연하는 연회를 베풀었다. 공연된 프로그램은 [씨름], [장대 오르기], [줄위를 걷기], [쇠빗장 던지기], [공 다루기], [불구멍 통과하기], [물구나무서기], [수레묘기], [말 묘기], [최면술]등으로 종류가 비길 데 없이 다양했다. 1954년 산동 기남에서 동한 묘의 발굴 중, 돌에 새겨진 [百戱圖]를 발견했는데, 그림에는 매우 생생하게 한대 잡기 공연의 멋있고, 떠들썩한 장면을 재현하고 있었다. 이것은 한대 중국의 잡기가 이미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설명해 주며 이미 일종의 성숙된 공연 예술이 역사 무대에 등장했고, 번영 단계에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수당때 중국 잡기 예술은 또 한 번의 번영 시기를 맞이했다. 수양제는 매년 음력 설에 잡기 예능인들을 모이게 하여 경성에서 공연하게 했고, 각국 귀빈을 초청했다.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서기 610년, 돌궐족을 초대하여 손에 땀을 쥐게 하는 [백희]를 최대 3만여 명이 참가하는 규모가 매우 큰 공연하여 음악 소리가 몇 리에 걸쳐 울려 퍼지고, 반개월이나 성황리에 공연을 계속했다. 성당때, 궁정 예인의 수는 백에 이르고 그 중에 잡기 예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당현종 李隆基는 연악활동을 거행하여 늘 대규모의 잡기, [武馬], [코뿔소·코끼리 길들이기]가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공연되어 그는 친히 길들인 무마인 100필의 준마를 동시에 춤추게도 할 수 있었다.
중국의 잡기는 민간에서 생겨나 후에 궁정에 유입되어 흥성하기 시작했다. 송대에서 시작된 희극의 흥기로 말미암아 잡기의 궁정에서의 위치는 쇠락하기 시작하여 예능인들은 점차 자기의 생계를 도모하는 민간 예능인으로 변하여 일반적으로 [勾欄瓦舍] 혹은 마을 어귀나 항구에서 공연을 했다. 새로운 상황하에서 잡기는 작고 깜찍한 형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잡기는 기본적으로 작고 다양한 방향으로 발전했다. 잡기 예인의 위치는 특히 근대에서는 갈수록 낮아져 절대 다수가 재주를 팔며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 아주 어려운 환경 속에서 잡기 예능인들은 많은 새로운 것을 창조했지만 고대의 많은 우수한 프로그램은 소실되어 버렸다.
신중국 건국이후, 중국의 잡기는 다시 새로이 부흥하였다. 1950년 최초의 국가 잡기단인 중국 잡기단이 설립되었다. 오래지 않아 중국 잡기단은 신중국의 잡기 예술을 대표하여 유럽 각국을 순방했고, 외국 관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후 중국 각 성의 시에서는 잡기단이 잇달아 생겨났다. 그 중 비교적 일찍이 생겨나 오늘날에 널리 알려진 잡기단으로는 [上海雜技團], [廣州雜技團], [武漢雜技團], [重慶雜技團], [沈陽雜技團], [西安雜技團]등이 있다. 현재 중국은 현급이상에 전문 잡기단이 100여 개가 있고, 잡기 관계종사자는 만여 명에 이른다. 전문 잡기단을 제외하고 많은 지방에서 아마추어 잡기단 혹은 민간 예능인들이 조직한 잡기 단체가 생겨났다. 예를 들어 하북성에 있는 吳橋縣은 중국 잡기의 고향이라고 불린다. 거기 사람들은 잡기를 연습하고 공연하는 전통이 있어 지금 매년 잡기 공연을 갖는다. 적지 않은 가정이 잡기 명문이고, 몇 대에 걸쳐 전 가족이 모두 잡기를 공연할 수 있는 가정도 있다. 이 [잡기의 고향]은 중국 잡기계를 위해 많은 인재를 공급하고 배양하고 있다. 요컨대 신중국 건국이후, 정부의 지지 하에 중국의 잡기 물결은 거세게 일기 시작했고, 중국의 잡기 예술은 새 생명을 얻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번영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다.
신중국의 잡기 예술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먼저 과거의 몇 가지 잔인하고 공포스러운 프로그램을 없앴는데, 예를 들면 [칼을 삼키기], [가는 변발로 매달리기], [못판 위를 구르기], [기름 바른 쇠망치를 머리에 얹어 뚫기] 등이다. 동시에 전통적인 프로그램을 발굴, 정리하여 새롭게 바꾸어 나가 새로운 종류의 기교가 늘어났다. 예를 들면 원래의 [줄 위를 걷기]는 이미 더욱 교묘해져, 어려워지고, 위험한 것을 가능하게 한 [철사 위를 걷기]로, 배우의 기술 또한 50년대의 줄 위에서 앞구르기가 오늘날 연속 앞구르기, 뒤구르기, 공중 회전, 연속 회전 등 고난이도 동작을 보여 줄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원래의 [五案]은 5층으로 쌓아올린 탁자 위에서 각종 동작을 공연하였으나 지금은 7층 혹은 10층으로 비스듬히 쌓아올린 의자 위에서 난이도가 매우 높은 동작을 할 정도이다. 원래 접시돌리기는 두 손으로 네 개에서 여섯 개의 접시를 돌렸는데, 현재 이미 열 두개에서 열 네 개까지 접시를 돌리고 있고, 동시에 공중 회전을 하는 등의 매우 어려운 동작도 한다. 성대 묘사 공연도 원래 단지 30여종이 있었는데, 지금에는 100여종에 이른다. [굴렁쇠 사이 빠져나가기], [접시를 머리에 얹기] [쉴새없이 조잘대기] [속임수] [광대놀음] [자전거 곡예] [장대 머리에 얹기] [발로 물건 돌리기]등 공연 기교는 전통을 계승한 기초 위에서, 새로운 변화와 발전이 있었다. 이외에도 많은 새로운 프로그램이 생겨났는데, 예를 들면 [공중 곡예] [높이 뛰기] [침대위에서 뛰어 날기] [높은 자전거로 공기 차기] [단체 자전거 묘기] [두 손으로 잔 돌리기] [공중에서 장대 들고 자전거 타기] [궁자형 인간 탑 오르기] 등등이다. 현재 중국의 잡기 프로그램은 그 수가 백여 가지에 이르고 무대 미술, 의상, 음악 반주 부분에서도 또한 한층 발전되고 새로운 것이 많이 생겨났다

'중국이야기 > 중국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진나라의 몰락  (0) 2017.08.20
중국사 연표  (0) 2011.03.08
베이징의 역사  (0) 2008.06.22
중국  (0) 2007.1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