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중국역사

베이징의 역사

영원한 울트라 2008. 6. 22. 20:54

 역사

기원전 1000년 경 춘추전국시대의 나라 중 하나인 연(燕)의 수도인 계(薊)가 오늘날 베이징(北京)이 있는 곳에 건립되었다. 연의 멸망 이후 계속해서 진(秦), 한(漢) 그리고 진(晋)왕조가 이곳에 지방 현을 설립했다.

당(唐)대에는 현재 허베이(河北)의 북쪽 지역에 실직적인 군 통치자인 범양(范陽)절도사 본부를 설치하였다. 755년 이 곳에서 안사의 난(安史之乱)이 일어났기 때문에 보통 이 지역을 당 왕조가 중앙정부로써의 전 지역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전환점으로 여긴다.

936년 후진(后晋)은 현재 베이징을 포함한 북부의 넓은 영토를 거란의 요(遼)에게 대부분 빼앗겼다. 938년에 요(遼)는 지금의 북경에 두 번째 수도를 건립했고 그것을 남쪽의 수도라는 뜻인 남경(南京)으로 불렀다. 1125년 여진의 금(金)왕조는 요를 합병하고 1153년 수도를 요(遼)의 남경으로 이동하여 이곳을 중앙수도인 중도(中都)라고 불렀다.

1215년에 몽골이 중도를 불태우고 1267년에 금(金) 수도의 북쪽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중국의 전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준비로 원(元)왕조의 시조 쿠빌라이 칸은 이곳을 汗八里(Khanbaliq)(위대한 칸의 거주지라는 뜻) 혹은 대도(大都) 라는 이름으로 수도로 건립했고 이위치는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 속에 Cambuluc 로써 잘 나타나 있다. 확실히 이곳이 그의 힘의 근간인 몽골과 가까웠기 때문에 중국황제가 되기를 원했던 쿠빌라이 칸은 중원의 좀 더 전통적인 곳을 대신해 이곳에서 그의 수도를 설립했다. Khanbaliq는 현대 중앙 베이징의 북쪽에 위치해 있다.

1368년 원의 멸망 후 도시는 명(明)조에 의해 다시 재건되었고 순천(順天)지사 관저가 도시의 주위 지역에서 설립되었다. 1403년 3번째 명나라 황제였던 문황제 (文皇帝)는 수도를 남경(南京)에서 북쪽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북쪽 수도란 뜻으로 개명한 북경(北京)으로 옮겼다. 수도는 또한 경사(京師)라는 이름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 단순히 수도라는 뜻이다. 명(明조) 동안 베이징은 현재의 모양이 잡혔고 명나라의 성곽은 현대에 그것이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얼환루(二環路)가 세워질 때까지 베이징의 성곽 역할을 하였다.

베이징은 1425~1650년 그리고 1710~1825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것으로 보인다.

자금성은 천단(天壇)과 다른 많은 공사 계획들과 함께 1406~1420년 당시에 건설되었다. 천안문(天安门)은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의 상징이 되었고 이것은 명나라 왕조 동안에 두 번 불에 탔던 것이 1651년에 마지막으로 재건된 것이다.

만주족이 명나라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곳에서 청(清)왕조를 세운 뒤에도 베이징은 청의 통치기간 동안 중국의 수도로 남아 있었다.

청의 황제지배체제를 벗어난 공화국을 목표로 한 1911년의 신해혁명(辛亥革命)은 원래는 남경(南京)에 수도를 설립하려고 하였다. 베이징에서 일어난 청의 고위관리인 원세계(袁世凱)의 청 황제의 퇴위 강요 후 혁명의 성공을 확실히 한 뒤에 남경의 혁명가들은 원세계(袁世凱)가 새로운 중국공화국의 대표자이고 수도는 베이징으로 유지하기로 합의하였다.

원세계(袁世凱)의 점차 강화된 힘은 그 자신이 1915년 말 황제로써 행한 중국황국의 선언에서 절정에 달하고 그 뒤로 점차 그의 평판은 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원세계(袁世凱)가 한 해가 채 안 되어서 죽게 되자 짧았던 통치가 끝을 맺고 중국은 지방 군벌들의 통제 아래로 떨어지고 가장 세력 있는 무리들은 베이징에서 수도의 통제력을 갖추기 위해 빈번한 싸움을 일으켰다.

국민당(中國國民黨)의 북벌(北伐) 성공에 따라서 1928년에 남경이 공식적인 중국공화국의 수도가 되었고 북경은 북부의 평화 또는 북부의 평화를 회복시켰다는 뜻의 북평(北平)으로 이름을 바꿈으로써 베이징에서의 군벌 정치는 정당하지 않다는 것을 강조했다.

제 2차 중일전쟁(中日戰爭)당시 1937년 7월 29일에 북평이 일본에게 정복된 기간 동안 도시는 그 이전의 이름인 북경으로 돌아갔고 이 곳에 일본에게 점령된 화북의 일부 한인들이 설립한 괴뢰정부인 중화민국임시정부(中華民國臨時政府)가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화민국임시정부는 이후에 남경에 근간을 둔 남경국민정부(南京國民政府)로 흡수되었고 1945년 8월 15일 제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의 항복과 함께 북경의 이름은 다시 북평으로 바뀌었다.

1949년 1월 31일에 국공내전(國共内戰)동안 공산주의 세력은 싸움 없이 베이징에 들어갔고 같은 해의 10월 1일, 중국 공산당은 모택동(毛澤東)의 지휘아래 천안문에서 베이징에서의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 설립을 발표했다. 그 바로 며칠 전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에서 북평이 새로운 정부의 수도가 될 것이고 그 이름을 다시 북경으로 바꿀 것임을 결정했다.

인민공화국 설립 당시에 베이징 시당국은 단지 도시지역과 바로 인접한 교외로 이루어져 있었고 도시지역은 얼환루(二環路) 안에서 많은 작은 구역으로 나누어졌다. 그 뒤 주변의 몇몇 현(县) 들이 이 곳으로 편입되면서 베이징 시당국은 베이징의 경계를 여러 번 넓혔고 오늘날의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 베이징 성곽은 1965~1969에 얼환루(二環路)의 건설을 위해 허물었다.

등소평(邓小平)의 경제개혁 후에 베이징의 도시지역은 매우 넓어졌다. 이전에는 얼환루(二環路)와 싼환루(三環路)에 한정되어 있던 베이징의 도시지역은 이전에는 경작지였던 많은 지역들이 개발되어 거주지나 상업적인 곳으로 발전하면서 최근 건설된 우환루(五環路)와 리우환루(六環路)까지 그 영역을 넓혔다.

새로운 상업 지역이 국무(國貿)지역에서 발전하면서 왕푸징 (王府井大街)과 시단(西单)은 번성한 쇼핑구역으로 발전했고 쫑관춘(中关村)은 중국의 중요한 전자중심가가 되었다.

최근 몇 년 내에 베이징의 확장은 교통 혼잡, 공기오염 그리고 가난한 지역 특히 시골에서 온 이주자들의 유입 같은 몇몇 도시화의 문제를 가져왔다.

2005년 초, 정부는 베이징의 무질서한 발전을 멈추는 계획을 승인했다. 중국 수도의 개발은 원형도로 안쪽보다는 도심 외부(서쪽과 동쪽)쪽에서 진행될 것이다.

베이징은 중국의 국가적 자존심을 높여줄 행사로 2008년 하계 올림픽 개최를 선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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