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 섭
이중섭(李仲燮,1916.4.10 - 1956.9.6).
호는 대향(大鄕). 평남 평양(平壤) 출생. 오산고보(五山高普) 졸업. 일본 도쿄문화학원 미술과 재학 중이던
1937년 일본의 전위적 미술단체의 자유미협전(自由美協展:제7회)에 출품하여 태양상(太陽賞)을 받고,
1939년 자유미술협회의 회원이 되었다. 1945년 귀국, 원산(元山)에서 일본 여자
이남덕(李南德:본명 山本方子)과 결혼하고 원산사범학교 교원으로 있다가 6·25전쟁 때 월남하여
종군화가 단원으로 활동하였으며 신사실파(新寫實派) 동인으로 참여했다. 부산·제주·통영 등지를
전전하며 재료가 없어 담뱃갑 은박지를 화폭 대신 쓰기도 했다.
1952년 부인이 생활고로 두 아들과 함께 도일(渡日)하자, 부두노동을 하다가 정부의 환도(還都)와 함께
상경하여 1955년 미도파(美都波)화랑에서 단 한 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후 일본에 보낸 처자에 대한
그리움과, 생활고가 겹쳐 정신분열병증세를 나타내기 시작, 1956년 적십자병원에서 간염으로 사망했다.
작풍(作風)은 포비슴(야수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향토적이며 개성적인 것으로서 한국 서구근대화의 화풍을
도입하는 데 공헌했다. 담뱃갑 은박지에 송곳으로 긁어서 그린 선화(線畵)는 표현의 새로운 영역의
탐구로 평가된다. 작품으로 《소》(뉴욕현대미술관 소장), 《흰 소》(홍익대학교 소장) 등이 있다.
길 떠나는 가족 헤어져 있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가족을 소달구지에 태우고 자신은 황소를 끌고 따뜻하며 평화와 행복이 있을 남쪽 나라로 함께 가는 광경을 그렸다.
소와 어린이 그림이 될 순간만 포착하여 어떻게 할 것인지 계산 되어 그려졌다. 단붓질로 끝을 내 화면은 깔끔하고 경쾌한 리듬감 마저 느껴진다.
소와 새와 게 전체 화면에서 느껴지는 것은 어수선함과 괴로움이다. 지친소의 모습에서 당시 우리 상황이 그려진다.
닭과 가족 가족을 그린 그림은 헤어져 있는 가족이 다시 하나가 되기를 바라는 이중섭의 염원이 서린 것이다. 민족 대다수가 겪는 비극을 대변하고자 하는 심정을 지녔던 것으로 보인다.
물고기와 노는 아이들
해와 아이들 고려시대 청자나 조선 시대 초기 분청사기에 베풀어진 상감기법이나 같은 방법으로 금속 그릇에 적용된 입사기법을 연상하게 하는 기법으로 된 그림들이다.
물고기와 노는 두 아이
부부 부부 두마리의 봉황이 서로 닿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그렸다. 그러나 위의 새는 화면 너머의 무엇인가에 긴박한 듯 매달려 더 내려오기는 불가능하고, 아래의 새는 다리를 지면에서 떼기 힘든 듯하다.
아래 그림은 가로줄을 겹쳐 이러한 분위기를 더욱 강화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림은 제목과 달리 부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남북한에 관한 것이라고 이중섭이 직접 말했다는 증언이 있다.
춤추는 가족
환희 복숭아꽃이 수 놓여지듯한 네모 틀 안에 구름에 쌓인 해를 사이에 두고 봉황을 닮은 파란 숫새와 붉은 암새가 춤을 추는듯한 전례가 없었던 독특한 구성의 그림이다.
아버지와 두아들 즐겁게 노는듯하나 전체의 분위기가 암울함을 나타내어 준다.
과수원의 가족과 아이들
가족
가족과 비둘기 가족을 그린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경쾌함이다. 가족이란 화기애애함이 넘치는 인간관계임을 강조했다.
싸우는 소 서로 싸우는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오른쪽의 소가 패해서 완전히 넘어지려고 하고 있는 상황의 그림이다. 마치 삶의 허무성을 보여주는 것 같다.
투계(鬪鷄) 두 마리의 닭이 서로 싸우고자 하는 듯 덤벼드는 설정이다. 고구려 무덤벽화에 나타나는 사신도의 유현한 색채, 대상이 서로 조응하는 조형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손 왼손과 오른손의 앞뒤를 출렁이듯 휘감은 연기 같은 흰선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그림이다. 진주에서 박생광과 어울리던 시절 그 친구 청담스님을 만나 느낀 바를 그린 것으로 보이며 불교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서귀포의 환상 아이가 새를 타는 것으로 설정해서 환상적이기도 하지만 사실적인 필치가 있으므로 월남하기 전에 북한에서 유행하던 사실주의적인 화풍이 엿보인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이 그림은 전쟁시 월남해 서귀포에서 주민의 도움으로 살던 집에서 그린 것으로 지붕과 그 아래로 펼쳐지는 섬이 있는 바다의 고요하고 깨끗한 느낌을 그린 것이다.
달과 까마귀 보름달이 뜬 맑고 푸르른 하늘을 배경으로 검게 세가닥으로 그어진 전깃줄에 앉아 친구를 찾아 모여드는 까마귀를 검은 물감을 묻힌 붓으로 간단히 그렸다. 몸 전체가 까맣다는 점 때문에 먹만으로 그리는 문인화의 소재로 어울리는 소재여서 자주 그려지기도 했다.
돌아오지 않는 강 왼쪽 위에는 머리에 물건을 인 여자가 눈이 내리는 속에서 화면 앞으로 걸어 나오는 듯 하다. 오른쪽 거의 절반을 차지한 집의 창가에는 한 남자가 팔을 괴고 얼굴을 옆으로 두고 있다. 이 그림은 이중섭이 보고싶은 아내를 그리는 마음인 것 같다.
도원 물이 있고 크고 작은 봉오리들이 있는 곳에 서 있는 천도복숭아를 중심으로 네 명의 남자아이가 노는 광경을 통하여 낙원의 느낌을 나타냈다. 통영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최재덕과 8,15 직후 서울에서 그렸던 벽화도 이런 소재였다고 한다.
노는 아이 은지화와 비슷한 설정과 느낌의 그림으로 이중섭이 그림 그리는 재료를 가리지 않고 그렸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길 지붕과 나무가지가 화면의 아래와 위에 걸쳐 있는 사이로 꼬불꼬불한 길을 배치했다. 통영에 있는 남망산으로 오르는 길이다. 화면은 엷고 빠른 붓질로 되어 있어 독특한 운치를 자아낸다. 분청사기 표면에 베풀어진 귀얄 무늬가 연상되는 느낌이다. 속필의 서예미 탓이라 여겨진다.
봄의 어린이 제목처럼 화사한 느낌의 그림으로 아이들이 강가에서 부유하면서 노는 듯한 설정이다.
구상네 가족 자전거를 타는 남자아이를 남자가 잘 탄다고 칭찬하는 듯한 광경을 중심으로 여자와 여자아이가 이를 부러워 하는 듯 하다. 이 설정은 친구인 故 구상詩人의 집에 그의 아이들에게 자전거를 사주어서 모두 즐거워하는 모습을 부러워해 이를 그린것으로 보인다.
물고기와 노는 세 아이
두터운 바탕칠 위에 선으로만 이미지가 묘사되어 있고 색 또한 칠해져 있지 않다. 물고기와 아이들의 동작을 한 화면에 담아 놓았다. 마치 꿈 속을 돌아다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기도 한다.
나무와 달과 하얀 새 이 그림들은 병원을 오가던 그가 안정을 찾아 정릉에 머물던 시기에 그려졌다. 잎이 져버린 나무와 눈이 겨울임을 제시하고 나무위의 새들을 서로 긴밀하게 연관시켜 춥고 배고픈 겨울을 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복사꽃이 핀 마을 통영에서 친구인 미술가 유강열의 호의로 그런대로 안정을 취하게 된 이중섭은 이 곳에서 그려진 일련의 풍경화중의 하나이다. 서귀포에서 그린 풍경화와 달리 통영에서 그려진 그림들은 굵고 빠른 필치가 특징인데, 통영에서 그려졌다는 소 그림들에도 엿보인다.
황소 왼쪽으로 향한 얼굴과 오른쪽으로 향한 눈이 화면의 양쪽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 코와 입에 가해진 선연한 붉은 색과 넓은 배경의 붉은 노을을 층지게 하여 이런 느낌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소 소는 중등 과정부터 줄곧 즐겨 그리던 그림의 소재였다. 소를 통하여 자신의 감정은 물론 소로 상징되는 민족과 현실 에 대한 느낌을 그렸던 것으로 보인다. 자신을 돌봐준 의사에게 선물한 이 그림은 그의 배려로 건강하게 되었다는 감사의 마음을 그림에 보이는 평정한 모십의 소로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뒷면에는 비둘기가 있는 <가족과 비둘기>가 그려져 있다.
소 소의 머리에서 피가 나는데도 불구하고 쳐든 앞다리 한쪽과 넓게 벌린 뒷다리의 분위기로 보아 투혼이 사라지지 않은 소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흰 소 검은 배경 앞에 소가 화면 너머에 있으리라 여겨지는 상대를 향해 뿔을 세우고 막 나가려 하고 있다.
흰 소 회색조의 배경에 검고 흰 붓질로 된 득의의 작품이다. 여기에서 검은 빛과 흰빛을 아울러 추사체와 같은 붓질로 여겨진다. 특히 머리와 꼬리 부분의 표현이 강하다.
이중섭 박물관(제주 서귀포 정방동)
은박지 그림 |
종이에 연필
41.3×25.8cm
1942년
개인소장
이중섭이 마사코와 매우 가까워진 시기에 그녀를 그린 그림이 <여인>이다. 오른쪽 젖가슴과 등을 보인 채 서 있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두 갈래 머리카락의 한 가닥을 오른쪽 팔에 걸치고 그 일부분을 손가락으로 쥐게 함으로써 화면에 생기를 부여했다. 또한 전체적으로 곡선이 부드러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상체는 벗고, 허리 부분에서 치마를 걸쳤는데 고갱의 타히티 시절 그림에 등장하는 멜라네시아 열도 문화권에서 입는 사롱과 흡사하여 그 영향을 짐작하게 한다. 마사코는 손과 발이 다소 큰 것이 특징이었다고 한다.
종이에 먹지로 그리고 수채
9×14cm
1941년 6월로 추정
긴 뿔을 가진 야수의 등 위에 올라탔다가 성난 야수들에 의해 떨어진 사람들 속에서 유유히 공중을 날아오르는 여성을 그린 것이다.
그녀가 바라보는 방향에는, 야수가 무는 데도 아랑곳 않고 그 등 위에 서 있는 아이 같은 존재가 있다.
야수 위에 있는 사람은 사랑의 싸움에서 결국 승리한 또는 승리하고자 꿈꾸는 이중섭 자신을 나타낸 것이라 여겨진다.
바닷가
9×14cm
1941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바닷가
9×14cm
1941년 6월 14일
6월 14일에 그린 두번째 그림은 앞 그림과 이야기가 이어지듯 아이가 앞에서 오라고 손짓하고 있고 여자는 커다란 물고기를 옆구리에 끼고 바닷가를 걷고 있다.
세번째 그림은 제각기 한 마리씩의 물고기를 들고 공중을 떠다니듯 하는 세 여자를 그린 것으로, 그중 한 여자는 화면 아래에 달아나는 남자에게 물고기를 빼앗긴 듯 내려다보고 있다.
머리 모양으로 보아 화면 중앙의 여자가 마사코로 보인다.
종이에 수채와 잉크 누워있는 여자
9×14cm
1941년 6월 3일
6월 3일자 엽서 그림에는 옆으로 누워 있는 여인이 등장하는데, 선 긋기나 색채 구사가 더 능숙해 보인다.
주위의 잎과 나무에만 채색을 했고, 여인의 몸에는 전혀 채색을 하지 않았다.
종이에 먹지로 베껴 그리고 수채 야수를 탄 여자
9×14cm
1941년 6월 2일
이 그림은 기묘한 도상을 하고 있는데, 여자는 맨 안쪽 동물의 등에 탄 채 한 손으로 그 목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맨 바깥쪽 동물의 꼬리를 손목에 걸치고 있다.
서툰 선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기실 매우 교묘한 눈속임을 하고 있는데,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의 논의대로 특이한 것에서 발생하는 미를 포착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종이에 수채와 잉크 발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여자
14×9cm 1941년 중반 무렵으로 추정 알몸의 여자가 걸터앉아 있는 그림은 초기작으로 보이는데, 꼬아 올린 왼쪽 다리를 오른손으로 잡고 그 오른손을 왼손으로 가리키는 듯한 다소 어색한 자세이다. 화면의 나머지 공간에는 듬성듬성 옅게 칠한 커다란 나뭇잎을 여기저기 그려 넣어 보완했다. 갈색의 굵은 펜으로 그려진 이 그림은, 그 무렵 같이 길을 가다가 발을 삐어 발가락을 다친 마사코를 정성 들여 간호했던 이중섭이 이를 기억하기 위해 그려 보낸 것이라고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