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사랑/국내작가소개방

박생광4

영원한 울트라 2007. 10. 18. 21:43



 


 

 



<수춘, 수묵담채/210*165cm/1977년 작>

(고등학교 1학년 미술교과서 -p83에 실린 작품)

 

*특이한 모양으로 뒤틀리며 뻗어나간 나무 줄기가 화면에 가득 차 있어 매우 육감적이다. 가가이 있는 나무는 희고, 그 뒤에 겹쳐진 듯이 서 있는 나무는 그림자 탓인지 시커멓게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나무의 길감은 피폐하고 질박해 보인다. 고목에는 방긋 웃는 어린 아이같이 꽃들이 송송 피어 있다. 이 고목은 작가 자신의 절실한 내면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기도 하다.(지도서 설명)

 



<탁몽, 136*137 cm>
 

박생광의 작품과의 대면은 백상기념관에서의 전시회가 처음이었지만 그 강렬한 개성과 순박한 예술가적 경지에 깊은 감명을 받고 이 초면의 노화백과 잠시의 대화를 가져 보았다.

박생광은 화가로서의 교육을 일본에서 받고 밟았다 그리고 일본화단에서의 확고한 자리도 잡았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일본화가로 되지 않았고 고국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과 작가로서의 정신순화에 정진하며 새로운 양식의 한국화가로서 독특한 자리를 굳히고 있다




<가야금, 113*85 cm >

 

그의 그림은 양화에서도 대답한 필지와 세부으로 감정의 표현에 역점을 두고 있지만 그의 근작들은 정성요소의 해체와 원근법을 통해서 강한 추상주의를 보이고 있으며 그것이 한국적인 주제,색상,형태와 에그조틱성의 가미로써 새로운 신채화, 새 한국화를 성립시켰다고 하겠다. 이 새 양식의 바탕에는 고구려의 고분벽화, 이조의 단청 등 우리 전총예술의 철학이 깔리고 있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명성황후, 330*200 cm>


그러나 그의 그림이 한국화의 정적세계를 깨틀고 힘센 동감으로 넘치고 있는 것은 화면 전체를 누비며 끔틀거리는 녹색들과 진한 감청,황,주의 삼색이 만들어 내는 독특함, 그리고 섬뜩하게 까지 보이는 백색의 액센트 등의 효과도 작용하고 있겠지만 보다 바탕이 되는것은 작가의 굳센 구도자적 정신과 경지임이 틀림없다. 여체와 불상, 피리부는 비선 등에서 보듯이 노경에 들어선 정신적 안정위에 앉아 있으면서 에술창조를 향한 불타는 정렬과 주지가 이 노화가의 화면에 넘처 흐르고 있는 것이다. 




<토함산해돋이, 136*139 cm>


박생광은 확실히 하나의 새로운 회화를 만들어 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것을 새로운 민화등으로 부를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피상적관찰이며 그의 그림은 결코 미화등의 그림이 아니다. 주제는 때로 그 목표나 결과는 예술을 통한 고차원의 세계에의 지향인 것이다.
청담대종사의 작품등은 박생광 회화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라 하겠다. 주제, 구도, 배색 등이 만들어내는 이 회화세계는 정말로 독특하며 이 창작경지는 우리 회화사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았다고 하겠다. 동화적이면서 현실적이고 추상적이고 정적이면서 동적이고, 가슴에 호소하면서 시상적교태가 반짝인다. 고구려벽화에서는 불가상의 고찰미와 정신미를 풍기고 있다. 이 종래에 보지 못하던 새 작품은 이 노작가 자신의 세계를 몸으로 느끼고 표현하는 것이다. 외형만으로는 성립될수 없으며 그래서 고대로 올라갈수록 더욱 고고,청순한 것이다. 

 


<범과모란, 259*136 cm>


다시 말하자면 박생광 화백은 새로운 한국화를 수립하였다. 전통적인 한국화 세계에 구도자적 정신성과 이국적인 부분을 취합시켜 새롭고 개성있는 박생광양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고구려에서 출발하면서 당양식을 가미해, 새로운 국제화로 발전한경우이다. 이 박생광 회화의 경지를 우리는 보다 더 이해하고 음미하고 그의 우리 화단에서의 위치를 진지하게 평가하고 이식할 필요를 절감하는 것이다.

 

박생광[朴生光]
 

 


첨부파일

박생광-전봉준1985.jpg (126kb) [ 파일받기 폰샷전송 ]

 
 


 

1904. 8. 4 경남 진주~1985. 7. 18 프랑스.

화가.

호는 내고(乃古)·그대로. 채색화로서 민족회화의 새로운 세계를 개척했다. 아버지 기준(基俊)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진주보통학교와 진주농업학교를 다녔다. 이때 뒤에 한국 불교계에 거목이 된 청담(靑潭) 스님 등과 사귀었다. 1920년 일본에 건너가 교토[京都] 시립회화전문학교(지금의 교토예술대학)에서 이른바 일본 화단의 근대 교토파라고 불려지는 다케우치[竹內炳鳳], 무리카미[村上華岳] 등에게 새로운 감각의 일본화를 배웠다. 1950년대 후반에는 백양회(白陽會) 등 동양화단체에 참여했으나 그다지 활발한 활동을 하지 못했다. 당시 화단에서는 식민잔재 청산문제, 일본화의 영향 등의 문제로 채색화가 푸대접을 받았다. 20여 년 동안 삶의 뿌리를내렸던 진주를 떠나 1967년 서울로 올라온 뒤부터 점차 새로운 예술세계의 진입을 시도했다. 일본화 영향이라는 불명예를 과감히 떨쳐버리고 민족회화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장엄한 예술적 절정을 보였다.

그의 예술세계는 무엇보다 채색화에 기초한 민족회화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뜻이깊다. 전통화단이 수목 문인화의 세계에 머물렀을 때 그는 채색으로 독특한 시각에 따른 조형어법을 구축했다. 대개 채색화는 섬약하거나 장식적 효과에 머무는 미인도(美人圖)·화조화(花鳥畵) 등 현실의식이나 시대정신이 빠진 경우가 대부분일 때였다. 그러나 그는 강렬한 원색의 대담한 화면구성 그리고 힘있는 필획과 면처리 등으로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했다.

그는 오랜 방황 끝에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에 이르러 주옥 같은 작품을 세상에 선보이기 시작해 1981년 백상기념관과 1984년 미술회관에서개인전을 열었다. 78세라는 노구를 이끌고 인도 불교유적지를 순례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한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세계로 몰입했다. 이 점은 그의 예술세계와 더불어 모범적 예술가상으로 후진에게 추앙받는 요소이다. 그의 작품세계가 총체적으로 조명되기 시작한 계기는 1986년 중앙일보사 호암미술관에서 있었던 회고전이었다.

대표적 작품으로 〈청담대종사 靑潭大宗師〉·〈혜초(慧超) 스님〉 같은 불교 소재가 있다. 〈청담대종사〉는 그의 고향 친구를 회상하면서 제작한 대작이고 〈혜초 스님〉은 인도여행 등을 단행한 일종의 구도기(求道記)와 같은 분위기를 띠고 있다. 조선말기의 시왕도(十王圖)나 감로탱화(甘露幀畵)와 같은 불교회화의 전통이 농축되어 재탄생된 불교 소재 그림은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측면에서도 주목받았다. 특히 대중으로부터 '미신과 같다'라는 이유로 무시당했던 무속세계에 끝없는 애정을 가지고서 자신만의 독특한 조형언어로 형상화했다. 국사당(國師堂) 같은 무당집이나 당대의 무녀를 모델로 하여 여러 점의 무당그림을 제작했다. 서구화 일변도의 풍토에서 민족미의 원형을 찾기 위해 힘썼던 것이다. 무속화 계통은 이어 조선시대의 민화와도 연결되어 재창조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통회화의 재해석에만 그치지 않고 말년에 이를수록 민족의 역사에 깊은 관심을 두고 새로운 시각으로 대작 〈명성왕후〉(1983) 등의 역사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또 그는 동학혁명을 소재로 한 역사화와 새로운 무속도를 그려 프랑스 파리의 그랑팔레에서 개최될 르 살롱의 특별초대작가로 참가하려 했으나 미완성으로 남았다. 채색화로서 시대정신을 더한 독특한 방식의 탐구는 그의 죽음으로 그쳤으나 독자적인 시각은 시간이 흐를수록 재조명의 대상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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