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꽃들은 상처 속에서 피어난다. 소월의 ‘진달래’가 개인적인 서러움의 상징이었던 시절은 차라리 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4월의 진달래는 이영도의 한맺힌 역사 속 꽃사태가 되어 여울여울 붉다. 내가 진달래의 역사성을 만난 것은 스무 살 무렵이었다. 최루탄 연기 자욱한 수유리 4. 19탑까지 목이 터져라 외친 말들은 이제 꽃잎마다 맺혀있다. 대자보 가득 4. 19 벽시들을 쓰던 세월이 없었다면 나는 진달래의 어깨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게 진달래는 서로 깊게 뿌리를 맞대고 시간과 싸워나가는 눈물어린 사람들의 얼굴로 보인다. 모든 꽃은 절정에서 피어난다. 그런데 슬프게도 4월의 꽃들은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선연하게 피어나는 마지막 불꽃과 같다.
제주의 들녘을 샛노랗게 물들이는 유채꽃밭에서도 나는 숨이 막혔다. 이 무구하고 여린 꽃 역시 4.3제주항쟁이라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복판에 피어난 꽃이기에 볼수록 쓰라리고 죄스럽다. 검은 만장 같은 바닷바람에 이리저리 쓸리면서 피울음을 토하는 유채꽃은 죄 없이 죽어간 수많은 제주도민들의 원혼이다.
강요배는 제주를 기록하는 화가이다. 그 기록은 단순한 역사화를 뛰어넘어 상처의 밑바닥까지 샅샅이 드러낸다. 4.3 역사화인 <동백꽃 지다>는 무섭도록 생생한 학살의 기록이다. 그것은 항쟁의 시작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바라보는 화가의 타협하지 않는 양심의 진혼곡이다. 강요배는 제주의 역사를 한반도의 중심으로 이끌어낸다. 그리고 학살의 원흉에 대한 준엄한 심판을 요구한다. 이것은 예술의 사회적인 소명을 충실히 수행하는 화가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그래서 강요배는 제주의 화가를 뛰어넘어 한반도의 예술적 양심으로 평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의 풍경들은 이미 역사성과 서정성을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담보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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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귀바다 |
여기 분노로 소용돌이치는 제주의 바다가 있다. “차귀바다”는 바위처럼 굳어버리고 무뎌진 우리의 영혼을 뒤흔들어 깨운다. 시퍼런 물살이 휘몰아치는 바다. 이 바다도 처음부터 거칠고 노여운 음성을 갖지는 않았을 것이다. 잔혹한 외압에 더는 견딜 수 없어 모든 것을 걸고 일제히 분노로 일어선 항쟁의 바다. 바다는 살아있는 모든 물들의 광장이다. 순하고 부드러운 물살들이 학정과 탄압에 맞서 서슬 퍼런 파도로 일어서며 역사를 증언한다. 이 생명의 장엄한 외침은 유채꽃과 진달래의 기억처럼 늘 우리를 역사 앞에 세운다. 그리고 묻는다.
‘네가 외면하고 망각한 시간들이 여기 출렁이는데 너는 정말로 행복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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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나무와 까마귀 |
역사를 낡고 진부한 과거로 매장시키려는 자들의 얼굴을 후려치며 바다는 함성으로 들끓는다. “팽나무와 까마귀”는 4.3항쟁을 기억하는 제주의 처연한 자연이다. 찢겨진 깃발처럼 팽나무는 퍼덕이며 울부짖는다. 잿빛 몸뚱이는 수많은 목숨을 제 가지에 매달았을 무참한 죽음의 기억과 맞닿아있다. 사람의 그림자는 어디에도 없고 죽어간 넋들만 바람을 따라 떠돌고 있다. 이들의 억울한 죽음을 까마귀만이 낱낱이 지켜보았다. 하여 까마귀는 팽나무 곁을 결코 떠나지 못한다. 입산한 자식들을 대신해 죽어간 부모들과 핏빛으로 물든 제주 바다. 죽어가는 어미의 빈젖을 빨며 우는 아이. 그리고 그들에게 총을 겨눈 자들. 이 모든 기억이 팽나무와 함께 오늘도 오열한다. 그러나 그 처절한 울음을 듣는 이는 없다. 강요배는 이 그림을 그리면서 역사와 화해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화해는 진실의 규명과 책임자의 처벌이 선행된 뒤에야 가능하다. 그렇지 않을 경우 섣부른 화해는 또 다른 왜곡된 현실을 만들 뿐이다.
역사 속 지배논리는 정당한 명분을 갖기 위해 폭압적 선택을 해왔다. 이 때 역사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문제되지 않는다. 어쩌면 지배논리는 민중을 향한 억압을 공고히 하기 위한 희생양을 필연적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곧 4.3 제주를 만들어버렸다. 제주도 도민의 10분의 1을 학살하고 얻은 자유민주주의는 자유를 향유해야 할 권리를 지닌 사람들을 광란의 죽음으로 몰아넣은 뒤 챙긴 비열한 평화였다.
이제는 낡은 이념이 되어버린 냉전체제가 해방 직후 미군정 아래 한반도에서는 초법적 판단 근거가 돼 양민 학살의 합법성을 얻어낸다. 이념이라는 거대한 지배논리가 자기 삶의 권리를 항변하지 못한 채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줄 길은 불행히도 구체적이지 못하다. 단지 불우한 시대상황이라는 무책임한 변명 속에서 시간이 지날수록 묻혀지고 잊혀질 뿐이다.
수많은 오욕을 안으로 삼키며 살아온 세월은 단기적으로 보면 실패의 역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꽃이 인간의 의지와 제도를 넘어선 자연의 섭리로 개화의 시기를 알고 서서히 자기 행동을 이끌어가듯, 더 좋은 세상을 꿈꾸는 사람들의 피의 기록은 승리로 만개할 것이다. 그래서 4.3제주항쟁은 이데올로기의 허상을 무너뜨린 위대한 승리의 역사다.
- 정지원 / 시인
출처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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